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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홉 번 째 학교 : 사천 서포 초등학교( 1995. 3. 1∼2000. 2. 29)
◎ 다시 찾은 서녘포구
9년만에 다시 찾은 서포, 참으로 감회 어린 곳이었다. 근무를 할 때에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쐐기로 사실 그리 즐겁지 않은 나날을 보낸 적도 있는 학교였지만, 이후 학습지도 보다는 업무 추진 면에서 참으로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정확히 만기 제대를 했던 곳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교는 참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삼층 교실은 없던 것이고, 최신 수세식 화장실도 그랬으며, 본관 뒷 편에 산재했던 교실들이 모두 철거되고 교실 집중도를 많이 높인 점이 모두 외양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1000명이 넘었던 당시의 일들이 흡사 꿈 인양 250명 남짓한 학생들의 모임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또, 당시 친하게들 지냈던 학부모들은 대개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고, 학교 밖의 거리들도 참으로 알아보기 어렵게 많이 변해 있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학교 일에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하려는 일부 학부모들의 사고방식과 정기 인사 시기가 되어도 별다른 희망자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나도 함께 어울리고 말일이었지만 서포 근무 교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보에 몹시 어둡다는 점이었다.
◎ 서포에 살고 있는 옛 제자들 이야기
서포에 다시 와서는 추억을 더듬듯 옛 제자들의 일이 몹시 궁금했다. 전에 근무하던 5년 중 6학년 담임이 3년이었기 때문에 근황이 궁금할 제자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걸 일일이 알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알게된 제자들의 근황은 이러했다.
<정대용 군>
정군은 처음 서포에 와서 6학년을 맡았을 때 담임을 했었다. 당시 전교 회장에 출마하여 당당히 당선되었던 제자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성격이 밝고 명랑하여 급우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그간 학교를 마치고 경찰계에 투신하여 완사 지서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곤양 파출소(이름이 이렇게 바뀌었음)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전정미 양>
정미는 온순한 여학생으로 행동도 얌전했었다. 전기한 정 군보다는 한 해 뒤에 공부한 후배로 전문대학을 마치고 금융계에 발을 들여놓아서 학교 바로 앞의 농협 창구에 근무하고 있었다.
가끔 농협에 볼일이 있어서 들리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극진히 함으로써 그와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이나 일보러 왔던 손님들조차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가정을 꾸미고 인근 곤양에서 보금자리를 알뜰히 가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정석환 군과 김미애 양 부부>
전기한 정대용 군과 같은 동기들로 특이한 것은 둘이 부부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졸업 앨범 학급 단체 사진 페이지를 꺼내 놓고 보면 둘 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욱 순수한 모습들이라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둘 다 구랑이라는 학교에서 다소 먼 곳이라 초등, 중학교를 함께 통학하며 어린 나이에 사랑을 싹틔웠음을 짐작하게 함으로써 혼자 미소 짓게 하는 쌍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면 소재지인 구평리에서 『미도 낚시』 점을 경영하고 있었고, 남편인 석환군은 그의 형과 함께 『평화 자동차』라는 카센타를 운영하는 등 참으로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이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꼭 선물을 마련하여 보냄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미안감에 사로잡히게 할 때도 있었다. 특히 내가 사천초등으로 학교를 옮기고 나서는 스승의 날 축하 전문을 보내주어 더욱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다.
<이영숙 양>
서포로 전근되고 1년이 지나서야 우체국이 들를 기회가 있었다.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이 어딘지 모르게 면이 익었다 싶어 쳐다보니 가슴에 달고 있는 명찰에 이영숙이라고 적혀 있어 1986년에 3학년을 담임했던 시절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영숙이도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체구가 작아서 늘 앞자리에 앉았던 귀여운 꼬마였고, 애교 만점이던 그런 아이였었다.
<신현간 군>
신군은 1987년 4학년을 담임했던 시기의 아이였다. 4학년이던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고아가 되었던 신군은 몹시 안쓰러운 아이였었다. 좀 장성한 형이 양육을 하였기에 다소 안심은 되었지만 성격이아 행동이 워낙 얌전하고, 내성적이라 걱정을 했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리고, 신군이 6학년이고 내가 사천 동성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스승의 날 많은 아이들의 편지 중에서 신군의 편지가 끼어 있었고, 나의 답신에 이어 또 편지를 보내 주었던 그런 아이였다.
다시 만난 것은 학교 TV 공청 수리작업을 하러 학교에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단히 미안하게도 신군은 그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해 있어서 내가 먼저 알아보지 못했고, 그가 먼저 알아보았다.
너무 유순한 그의 성격이 맘에 걸렸던지 그의 형이 아이를 체육관에 보내서 무도를 익히게 함으로써 성격도 활발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을 갖도록 해 주었다는 것을 그의 얘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군은 공고를 졸업하고 형과 함께 유선방송 사업을 꾸려가면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고 있는 젊은이였다.
◎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1996년도에 전국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그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그 배경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의 잔재라고 했던가? '황국신민'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교육개혁의 도도한 물결 속에 이 나라 교육사의 한 페이지를 초등학교라는 이름이 새롭게 차지하게된 것이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일선 학교가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내용은 교명의 변경과 더불어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외형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달라졌음이 사실이다.
우선, 교문에 붙어 있는 학교 명패가 달라지게 되었다. 서포 국민학교의 동판 명패는 거액을 들여 서포 초등학교라는 동판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양 분교장에서도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학교 안에 있는 교기와 우승기가 모두 교체되어야 했다. 덕분에 도회지에 있는 국기사들이 밀려드는 수요에 즐거운 비명을 올렸었다.
또,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따르는 학교 직인, 병설유치원 직인, 고무인, 육성회, 동창회 직인을 모두 다시 새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장을 새기는 업자들은 살 판이 났다. 그 시기는 가뜩이나 나라 경제가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아 IMF가 오고 있는 시기였으니 죽어나는 것은 국고가 아니었겠는가?
어디 그뿐이랴? 학교가 보유한 천막들에 새겨진 서포 국민학교는 아까운 천막을 차마 버릴 수는 없었고 하여 보기 흉하게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검정 페인트로 다시 쓰는 법석을 떨어야 했다.
학교 강당에 마련된 커텐의 학교이름도 바꾸지 않고는 걸어 놓을 강심장이 없으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바꾸어야 했던 것도 바쁜 교육의 일선에서는 참으로 성가신 일의 하나였다.
학교에서 해마다 신학기에 쓰기 위해 다량 인쇄해 두었던 업무 추진카드, 상장, 졸업장, 임명장 등을 비롯한 모든 인쇄물들, 장부, 각종 서식 등 경상도 방언으로 깔깔한 새것들이 모두 이면지로 쓰이거나 폐기처분 되어야 했다.
또, 미처 입에 익지 않아 자꾸만 국민학교로 나오는 실수들을 두고, 3000번 이상을 써야 익숙하게 고쳐지는 것이라는 둥 그럴듯한 이론적 배경까지 들이대며 학설을 펴는 교육 관계자도 볼 수 있었으니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의 연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그리 큰 학문이라고, 지를 돋보이게 할 이론이라고.
이런 일련의 일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는 예산이 얼마나 소요되었겠으며, 혼란스런 일은 또 얼마나 연출이 되었겠는가 생각하면 자꾸만 그렇게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는지가 반문이 되는 것이다. '국민생활에 필요한 초등 보통교육'을 하는 곳이라면 국민학교가 그렇게 심각하게 맞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강원도에 있는 속초 초등학교, 서울에 있는 서초 초등학교, 가까운 산청에 있는 생초 초등학교는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초'자의 연속으로 아마 영원히 성가심을 겪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게 교직 말단인 내가 생각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님은 나도 잘 알지만…….-
◎ 카풀 팀 이야기
<그 하나>
진주와 서포는 32㎞로 꽤 먼 거리에 속한다. 차량 통행이 많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면서 느꼈던 일인데 한사람이 한 대씩 몰고 다니는 비경제적인 사안을 과감히 바꿀 요량으로 카풀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첫 카풀 팀은 내 차로, 차를 갖지 않은 주로 여선생님들과 팀을 이루었다. 강혜정, 유순자, 박명월, 장미숙 네 사람과 함께 하던 중 강혜정 선생님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중도 탈락을 했고, 이어 해가 바뀌면서 박명월 선생님이 곤양 전출로, 장미숙 선생은 차를 구입 독립을 함으로써 빠지고 하여 안보선, 이경진 등 새 멤버가 보강되어 오가는 동안에 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지루함을 떨칠 수 있었다.
<그 두울>
1999년에는 많은 직원들이 이동을 함으로써 각기 차량을 갖고 있는 직원들과 카풀 팀을 구성해야 했다. 1학기 동안은 이정희, 전제헌 선생님, 그리고, 강성희 영양사를 포함한 넷이서 팀을 구성했다. 구성원들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어서 차량이 출발하여 모두 내릴 때까지는 웃음이 그치지 않는 참으로 좋은 팀을 이루었었다.
오죽하면 스스로들 붙인 카풀 팀의 이름 앞에다가 '환상의' 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이제 하도 좋은 일로 기억된 일이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정희 선생님은 나와 사천중학교 동기 겸 교대 한 해 선배였다. 가끔 아침에 창원까지 출근하시는 남편을 위해 마련하는 맛 좋고 영양가 높은 쥬스성 음료들을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어서는 갖고 와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눠 마시면서 담소하곤 했던 일이며, 이 선생님 스스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극진했다.
전제헌 선생님은 교육대학교 후배이고, 타고난 미남에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단체를 생각하는 여유롭고 넉넉한 품성의 소유자로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함께 했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함께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실천하는 참으로 만인이 본받을 그런 사람이었다.
강성희 영양사는 가장 젊은 여성으로 신세대적 유모어가 있고, 밝은 미소와 행동거지로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일종의 마력을 지닌 그런 멤버였다. 젖먹이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도 그런 일에 쫓김을 전혀 내색하지 않을 만큼 일종의 발랄함을 마음껏 발산하는 태도에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나를 포함한 일행 4명은 가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여유는 물론, 진주 반성 식물원으로, 진성의 백숙 집으로, 그리고, 진주 장재동의 백송 가든으로 회식을 다니곤 했었다. 그야말로 환상의 카풀 팀임을 자랑도 하고, 입증도 하는 자신 있는 '우리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럽던 환상의 카풀 팀이 한 학기를 끝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전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깨어졌지만 우리는 참으로 아쉬웠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별식을 하기까지 했을까?
강성희 영양사는 갑작스레 합천 야영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정희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하게 됨으로써 정녕 아쉽게도 그만 환상의 카풀 팀이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셋>
1999학년도 2학기가 되어 김명선, 안판숙 두 여 선생님들이 전근되어 왔다. 깨어졌던 환상의 카풀 팀 재건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둘 다 찬성을 하고 여건을 조정하여 합류를 하는데는 조금의 기간이 필요했었다.
어쨋든 재건된 『뉴 환상의 카풀 팀』은 새로운 탄생답게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전의 팀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그런 멤버였다.
김명선 선생님은 진주 동진 초등학교에서 전입해 왔는데 나의 교대 후배로 성격도 밝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인물로서 함께 하는 이들 모두를 늘 마음 편하게 해 주는 마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안판숙 선생님은 관내 근무가 오래된 관계로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던 터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교대의 한참 후배이고 나와는 띠 동갑(소띠)으로 12년 차의 세대 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인물로 역시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함께 지내다가 내가 사천초등으로 발령을 받은 후 안판숙 선생님도 진주로 발령이 나서 네 사람이 함께 모여 송별연을 거창하게 한 것도 기억에 새롭다.
◎ 백일장에 얽힌 사연
서포에 와서도 시조 쓰기 지도는 멈추지 않았다. 1995년에는 내가 맡은 5학년 1반은 물론, 클럽활동 부서의 문예부에서도 시조 쓰기 지도를 했다. 지도 경험은 이제 어느 정도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해마다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한 지도 프로그램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가을이 되어 진주교대 주최 경남 아동 백일장에 출전을 했다.
4학년 이정언 어린이가 장원을 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차상, 참방에 몇 어린이가 더 입상을 했고, 시조부를 제외한 산문부와 동시부에서도 입상자를 냄으로써 나는 지도교사 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장원을 차지한 이정언 어린이의 아버지는 젊은 사람으로서 열린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학교로 찾아와서는,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학교 급식소에다 난로 한 대를 설치해 주었다.
◎ 정년단축 회오리와 교육 공황
몇 년 전부터 치열한 공방으로 오리무중의 사건처럼 세인들의 화제가 되고, 당사자인 우리들 교육가족들의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어쩌면 우리들의 사활이 걸린 일이기도 했던 교원 정년단축문제가 1998년 말 경에 그 윤곽이 잡혀가는 듯 했다. 아니, 미리 짜여진 각본은 전편을 서서히 연출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가며 약간의 수정공연이 실행되었을 뿐이다.
여기서의 전편이란 촌지 문제니 교사 체벌 문제 따위를 들먹이고, 지극히 일부인 일을 마치 온 교육계가 촌지의 힘으로 살고 있고, 촌지 안 받는 교사는 없는 것으로 매도하던 일을 말함인데 이는 분위기 조성 작업치고는, 국가 「백년 지 대계」를 제 마음대로 흔들어 보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에 속했다.
정년 단축의 갑작스런 시행은 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서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몰고 왔다. 대학교원과의 차이를 둠으로써 반발을 막았겠지만 그로 인한 초·중등교원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야 했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들이 사기가 떨어지면 효과적인 교육의 수행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는가. 교육이 국가 「백년 지 대계」임을 내세우는데는 이미 설득력을 잃고 만 것이다.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교직에 종사해온 내 선배님들, 특히 그들은 전날 교사 부족으로 교육계가 크게 위기에 처해졌을 때 국가는 그들을 향해 교직은 천직이요, 성직임을 강조하면서 훗날을 기대하자고 했었다.
우선 교직을 대량으로 떠나는 사태를 막아보자는 뜻이었겠지만 이제 그때 참고 타 직종으로 진출하지 못해 어렵게 살아오며 노후 대책도 세우지 못한 그들을 향해 나가라고 호통치는 결과가 의도적으로 초래된 그런 상황이었다.
인생이란 거창한 철학의 배경이 들춰지지 않더라도 인간 최대의 과업이 아니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일생을 함께 해온 직업에 대하여 마무리할 게획을 세워두고 있는 그들에게 마무리하지도 말고 나가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안의 앞에 무력한 교육자들은 정녕 수모와 어려움을 항변 한마디 못하고 물러나게 하고 말았다.
◎ 학교 통·폐합 추진의 문제
대량으로 쫓아내다 보니, 교원의 부족사태는 참으로 심각했다. 이의 해결 방안이라고 추진한 일들이 또 한 번 교육을 공황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 시골 학교의 아동 수가 적은 것은 어쩌면 교육 선진국으로 접근하는 일이라고도 보았는데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과감하다 못해 무섭게 강행한 통·폐합은 참으로 맹랑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없는 듯한 가운데의 아주 조금씩의 변화가 교직을 안정되게 하고, 교육을 살찌우게 하는 법인데 마구잡이 식 학교 통·폐합으로 급기야 애초 목적이던 경제논리를 비웃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시골을 좀은 풍요롭게 지켜주던 문화의 센터들이 폐허가 되고 말았고, 흉물로, 청소년의 탈선장(脫線場)으로 변해버렸다. 거액의 국고가 낭비된 곳을 보고 경제논리에 입각한 잘된 행위였다고 누가 평가할까? 시골학교가 무더기로 통·폐합 되면서 수많은 학교 앞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병이 있어 힘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근근이 꾸려 나가던 구멍 가게적인 문방구, 어쩌면 그들의 호구지책을 막아버린 결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런 그들은 실직자 통계 수치에도 함께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시골에도 스쿨버스란 것이 생겨나고, 한적한 시골길에도 노란 스쿨버스가 다니게 되었다. 가뜩이나 신세대 젊은 부모들의 과잉보호로 나약해진 어린이들이 이제는 1Km도 걷지 않으려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옛날에는 10-20Km를 예사로 걷던 학생들이 부모님들에게 든든함을 안겨드렸다면 요즘 아이들은 참으로 노심초사하는 심정만을 안겨주고 있지 않을는지?
자주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내세워 국민을 향해 내핍생활(耐乏生活)을 주문했었는데 이제 없어도 괜찮았을 전국의 스쿨버스 기름은 경제논리와 어떻게 관련 지울 수 있을까? 인건비 지출은 우리 안의 문제고, 고용창출이지만 기름은 아니지 않는가? 위정자들이 필요할 때 내세웠던 대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 나라임을 안다면…….
없어진 학교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나름대로 학교를 돕고 후배들을 돕다 보니 싹이 터서 자라던 동창회원들의 애향심이 뿌리째 뽑혀버렸다. 혹 통합된 학교에다 그 정열과 사랑을 변함없이 쏟는 곳이 있다고 쳐도 그건 극히 일부일 것이고, 전국적인 시골 황폐화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으니 행여 더 추진시킬 생각이나 접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 존경스런 교장선생님
1998년 9월, 모시고 있던 이자현 교장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시고 새로 남상배 교장선생님이 초빙교장으로 부임을 하셨다.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학교장 초빙제를 실시하는 학교가 된 셈이었다. 초빙의 절차는 상당히 복잡했다. 교무부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그 일을 다른 선생님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교장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이었다.
학교장 초빙제에 관해서는 그 당시 말도 많고, 문제도 많은 제도였다. 교장 임기제를 다 채우지 못하는 교장들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시행되는 제도라는 낙인이 찍힌 그런 사안이 되고 말았다. 하교가 주체가 되어 필요한 유능한 교장을 모셔와야 진정한 의미의, 그리고 참된 취지의 학교장 초빙제가 되는데 미리 정해진 교장을 두고 요식을 갖추는 그런 운용은 좋은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고, 오직 지탄받을 요소만으로 운영이 된 것이었다.
아무튼 초빙에 의해 모신 남상배 교장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뚜렷한 교육철학을 가진 분으로서 간섭과 지시 위주의 경영이 아닌 직원들의 개성과 능력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가운데 아동교육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런 분이었다.
초빙제가 아니면 서포에 오실 가능성이 0%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분으로 존경받을 요소들이 수 없이 많으나 간략하게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째, 직원들을 위해 사비를 너무 많이 쓰는 분이었다. 혼자 객지에 나와 계시는 교장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즐겁게 지내시라고 동료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인근의 관광지로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려고 하거나, 학교 행사 끝에 회식 모임을 마련하면 어느 누구도 돈을 지불하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오직 자신만이 지불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그 방법이 너무나 철저하여 몰래 지불했더라도 성공할 수 없는 사안이 되고 말았다.
둘째, 직원들의 신상을 너무도 철저하게 챙겨 주시는 분이셨다.
직원들의 이동을 뜻대로 성사시키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윗분들과의 의논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철저하게 챙겨서 절대로 차질이 없도록 주선을 해 주셨다.
나를 위한 일들을 예로 들어보면, 1998년 말 경, 교육청의 어느 장학사가 자기 측근의 한 인물을 위해 서포에 교무 자리와 근평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상식 이하의 부탁임은 틀림없는데 솔직히 여느 교장 같았으면 타협을 하거나, 얼버무렸을 것이라고 보는데 오직 나를 위하여 고성이 오가는 사태까지 몰고 가면서도 끝내 명확하게 거절을 했다.
또, 나의 표창을 상신하고 주선하여 과분하게도 국무총리표창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도 업무 추진이나 사람 대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배울 점인 분이셨다.
정부의 갑작스런 정년 단축 강행으로 교육이 일종의 공황 사태를 몰고 오는 바람에 억울하게도 교직수행의 철학과 소신을 뜻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신 점이 늘 안타까웠고, 거기에 입은 은혜가 태산 같으면서도 전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이다.
◎ 필요한 근평을 받고, 교감연수 대상자의 대열에 끼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지 28년이 된 시점에 처음으로 자신의 근무평정(勤務評定)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이 내게 필요도 없는 가운데 불만도 많이 가졌었다. 이름만 근무평정이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심히 좋은 일, 궂은 일 다 하고도 실속은 전혀 차릴 수 없었고, 실제로는 나이 많고, 승진에 가까운 사람에게 거의 무조건에 가깝게 좋은 성적이 돌아감을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나름대로는 합당한 사고라고 여긴 것이었다.
세태에 의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불만은 늘 가지고 있었다. 좋은 근무평정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학교의 중책을 맡아서 일을 하고,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한 후에 받는다면 누가 감히 불만을 갖겠는가?
왕왕 젊은 교사들에게 산더미 같은 일을 맡겨 전전긍긍하게 해 놓고, 여름이면 선풍기 앞에서, 겨울이면 난로 가에서 매우 한가롭게 신문이나 보는 그런 고참들 때문에 갖는 생각들인 것이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 대가로 당당하게 근무평정을 잘 받는 고참들도 많이 보았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존경스러웠고, 다음에 나도 기회가 되면 저런 선배님들을 본받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드디어 내게도 그런 시기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1998년에는 교무, 연구, 체육, 특수교육의 업무를 맡아 교내 어느 누구보다도 과중한 짐을 졌다고 자부했다. 특히 그 해에는 특별활동 도 우수학교 업무까지 겹침으로써 정말로 바쁘고 고달픈 한 해를 보내고 근무성적 '수'를 당당하게 받았다.
1999년에는 교사 초빙의 덕으로 교무, 특수교육, 교육개혁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짐으로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혜분교, 비토분교가 본교로 통합됨으로써 결코 수월하지 않은데다가, 9월에는 인근의 금진 초등학교마저 통합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태산으로 믿고 모시던 남상배 교장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하셨고, 많은 조언과 지도를 주셨던 강의조 교감 선생님마저 교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전출을 하시는 바람에 엄청난 정신적 부담을 이겨내야 했다.
새로 오신 신홍철 교장선생님의 지극한 배려로 연말에는 당당히 근무성적 '수'를 받았다. 그래서 좀 넉넉한 점수로 속 안 끓이고 교감 연수 대상자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 낸 일은 아니었다. 그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는 없는 가운데 나도 앞으로는 다른 이들의 승진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주어야 한다는 업보를 졌음을 자인하고, 꼭 갚는다는 실천적 의지로 살아갈 것이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95.03.01/이자현(교장선생님), 김남민(교감선생님), 안문웅, 구용기, 최한업, 김진태, 박명월, 이금옥, 임경희, 강혜정, 이영균, 노운행(보건교사), 이은주(유치원), 박종식(서무), 송은경(영양사), 유순자(조리사), 이윤규(기능), 강점성(기능), 강충실(기능), 김지은(산대강사) 자혜분교 한일선(분교장 주임), 이승현, 박용숙, 최포석(기능)
1995.07.01/정미윤(서무) 1996.03.01/최세권, 박옥자, 한숙재, 안보선(유치원), 장미숙(양호교사) 비토분교 황인수(분교장 주임), 하문헌, 박주갑, 강신분(유치원), 강종선(기능) 1996.09.01/최포석(기능), 양은주(산대강사) 1997.03.01/강의조(교감선생님), 박남수 1997.04.01/이경진(서무) 1997.09.01/남상배(초빙교장선생님), 정영이(영양사)
1998.03.01/강대백, 정임근, 자혜분교 정경화(분교장 주임), 박남수, 전제헌, 강점성(기능) 1998.09.01/박종화, 진미령, 송은영, 이인구(기능) 1999.01.01/이진화(서무), 김정숙(조리사), 강점성(기능), 강성희(영양사) 1999.03.01/전제헌, 박남수, 박신규, 이정희, 강신분(유치원), 강점성(기능), 강종선(기능) 1999.07.01/마금란(서무), 양갑수(양수정으로 개명) 1999.09.01/신홍철(교장선생님), 이철근(교감선생님), 김광수, 김명선, 배순애, 안판숙, 이은주(유치원), 김성춘(기능), 이윤규(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