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가 이런 법칙들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배울 수 있죠?
그건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다.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나요?
고요히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외부 세계를 가라앉혀라. 그러면 내면세계가
네게 시야(Sight)를 줄 것이다. 너희가 찾아야 하는 게 이 통찰력(In-sight :
내면 시야 - 옮긴이)이다. 하지만 너희가 외부 현실에 지나치게 깊숙이 빠
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자주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을 때는,
바깥 세계를 다룰 때처럼 내면에서 나오게 된다. 다음 공리를 명심하라.
너희가 내면으로 가지 않는다면 너희는 바깥으로 가게 되리라.
이 공리를 외울 때는 좀 더 실감나도록 주어를 일인칭으로 바꾸어라.
내가
내면으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바깥으로
가게 되리라
너희는 평생 동안 바깥으로만 가왔다. 하지만 너희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봤자 뭔가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가 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가질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씀은 그림의 떡을 약속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너는 신이 어떤 다른 약속을 하도록 만들고 싶은가? 이보다 못한 것을 약
속한다면 너희는 내 말을 믿을 것인가?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참으로 괴이한 이유로, 즉 그 약속들이 너무 근사해
서 진짜일 리 없다는 이유로, 신의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희는
이보다 못한 약속, 즉 이보다 못한 사랑을 선택해왔다. 신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가장 고귀한 사랑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그러나 너희는 완벽한 사
랑을 상상하지 못하며, 따라서 완벽한 약속 역시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완벽한 사람 또한 상상하지 못하기에, 너희는 자신조차 믿지 못 한다.
이 모든 수단들을 믿지 않는 건 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을 믿으면
신의 가장 큰 선물인 조건 없는 사랑과, 신의 가장 큰 약속인 무한한 잠
재력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어도 될까요? 신이 말씀하시는데 중간에 가로채기는 싫지만....
하지만 전에도 무한한 잠재력에 관해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건 인간의 체험과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들은 둘째치고라도, 정신이나
육체에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 겪는 고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잠재능력도 무한합니까?
너희는 너희 경전에 그렇다고 적어놓았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군데서.
한 가지 예를 들어주십시오.
너희의 성서 창세기 11장6절에 너희가 써놓은 것을 찾아보라.
이렇게 나와 있군요. "야훼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그렇다. 이제 너는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내용은 정신박약자와 허약자, 신체장애자 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제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닌데요.
너는 그 사람들이 네 말처럼 장애를 가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들 스스로 선
택한 것이 아니고? 너는 한 인간의 영혼이,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히
삶의 도전들과 마주친다고 상상하느냐? 이게 네가 상상하는 것이냐?
그럼 한 영혼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체험할지 미리 선택한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그렇게 한다면 마주침의 목적이 무산될 것이다. 마주침의 목적은 지
금이라는 거룩한 순간에 너희 체험을 창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너희 자신
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이 체험할 삶을 미리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의 체험을 창조하는 데 함께 할 사람과 장소와 사건들,
즉 조건과 상황들과, 도전과 장애들, 그리고 기회와 선택사항들을 선택할
수는 있다. 너희는 자신의 팔레트에 짜놓을 색깔들, 자신의 궤짝을 짜는 데
필요한 연장들, 자신의 작업장에 필요한 기계들을 선택할 수는 있다. 이런
것들을 써서 뭔가를 창조하는 것이 너희의 일거리이다. 그것이 인생의 일
거리이다.
너희가 하기로 선택한 그 모든 일들에서 너희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소위
장애 있는 신체를 지닌 한 영혼은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
아니라고 억측하지 마라. 너희는 그 영혼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른다. 너희
는 그것의 진행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조건을 축복하고 그것들에 감사하라. 신이 창
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신의 세계
에서는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구잡이식 선택이나 너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 세계를 희롱할 수도 없다.
눈 한 송이가 그 도안에서 더없이 완벽하다면, 너희의 삶만큼 장대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지만 예수조차도 병자를 치료했습니다. 만일 그들의 상태가 그토록 '완벽'했다
면 예수는 왜 그들을 치료했을까요?
예수는 그들의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영혼들이 자기 과정의 일부로서 치료를 요청한다고 보았기 때문
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그 과정의 완벽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영
혼이 뜻하는 바를 인정하고 이해했다. 만일 예수가 정신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모든 질병이 불완전을 나타낸다고 느꼈다면,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그냥 한꺼번에 치료하지 않았을까? 너는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하느냐?
아뇨,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좋다. 그런데 네 정신은 여전히, 왜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고통받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치료해주었을까,
몹시 알고 싶어하는군. 그렇다면 왜 신은 그것이 어떤 고통이든 항상 고통
을 묵인하는가? 과거에도 줄곧 제기되어온 이 질문의 대답은 항상 똑 같다.
그 과정 속에 완벽함이 존재한다는 것. 게다가 무릇 삶이란 선택에서 비롯
된다. 선택에 간섭하거나 선택을 문제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선택을 비난
하는 건 특히나 더 적절하지 못하다.
적절한 쪽은 그 선택을 관찰하고, 그런 다음 그 영혼이 좀 더 고상한 선택
을 추구하고 더 고상한 선택을 내리고자 할 때, 그것을 도와줄 뭔가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의 선택을 주의 깊게 지켜보되 판단하지는 마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완벽하다는 걸 그들이 깨닫게 해주라. 그러나 그들
이 더 새로운 선택, 또 다른 선택, 즉 더 고상한 선택을 하려는 때가 오면
기꺼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게 옆에 서 있도록 하라.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 그러면 너는 그 영혼들의 목적,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들과, 자신이 그
삶에 접촉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자기에게
온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내 치료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 모두를
치료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했다면 그건
우주의 성스러운 법칙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즉 모든 영혼이 제 갈 길을 가게 하라는 법칙을.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돕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분명히 그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인도의
굶주리는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고통당하는 민중들, 혹은 그 외 다른 곳의 가난
한 사람들이나 학대 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겁니다. 모든 인도적인 노력은
없어질 것이고, 모든 자선이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명백히 옳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개인이 절망에 빠져 우리에게 절규하거나 어떤 나라의 국민들
이 도움을 간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보다시피 그 질문은 스스로 답하고 있다. 만일 어떤 일이 명백히 옳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네가 '옳다'와 '그르다'에서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모든 건 오로지 너희가 그렇다고 보기 때문에 옳거나 그를 뿐이다. 어떤
것이 그 본질에서부터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요?
'옳음'이나 '그름'은 본래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체계 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너희의 주관적인 판단들로 너희는 자신의 자아를
창조한다. 너희는 너희 개인의 가치들로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증명
한다.
세계는 너희가 이런 주관적인 판단들을 내릴 수 있도록 하려고 지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만일 세계가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다면 자기창조라는
너희 삶의 과정은 종막을 고할 것이다. 그것은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소송이
없다면 변호사가 할 일은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 병이 없다면 의사
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의문이 없다면 철학자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문제거리가 없다면 신의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나구요!
맞다. 네가 아주 완벽하게 표현했다. 더 이상 창조할 게 없다면, 우리, 즉
우리 모두는 창조하기를 끝낼 것이다. 우리, 즉 우리 모두가 그 게임을 지속
시키는 것에 기득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만큼이나 우리는 감히 그 문제들을 몽땅 해결하려
고 나서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는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세계 도처에서 더 이상 전쟁하지 않는 정부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강력하게 막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의 의료기관들 역시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 기관들이 기적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모든 기적의 약이나 치료법
에 완강히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의 종교단체들 역시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런 단체들이 한결같이
두려움과 심판과 응보가 들어 있지 않은 신에 대한 모든 정의(定義)들과,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과 관련하여 자기네 이념이 들어 있지 않은 모든
자아 규정들을 공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내가 너희가 신이라고 말한다면 종교가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너희의 병이 나으리라고 말한다면 과학과 의학이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너희가 평화롭게 살리라고 말한다면 중재인들이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세상이 고쳐지리라고 말한다면 세상이 설 곳이 어디겠는가?
그럼 배관공들은 어찌 될까?
본질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들
을 너희에게 주는 사람들과, 사태를 고정시키는(Fix)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육점 주인과 빵집 주인, 촛대제조공들처럼 단순히 너희가 원하는 것
들을 제공해주는 사람들 역시 고정시키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에 욕구를
갖는다는 건 흔히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약중독자
들이 필요로 하는 마약주사를 Fix라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구가 중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세상에는 항상 문제거리가 존재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상이 그런 식인
걸 당신이 참으로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거냐구요?
나는 눈송이가 지금 존재하는 방식 꼭 그대로 존재하듯이, 세상도 지금 존재
하는 방식대로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중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창조한 건
너희다. 너희가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삶을 창조했듯이.
나는 너희가 원하는 걸 원한다. 너희가 진실로 굶주림의 종식을 원하는 바로
그 날, 더 이상 굶주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주었다. 너희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모든 도구
들을 갖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인류는 내일이면 이 세상의 굶주림을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날마다 사만명이 굶어죽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고 주장
한다. 충분한 이유란 건 없다. 그럼에도 너희가 날마다 사만명씩이 굶어
죽어가는 걸 막을 아무 방도도 없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너희는 날마다
오만명씩을 세상에 데려와 새 삶을 시작하게 한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너희는 이것을 신의 계획이라 부른다. 따뜻한 연민은 말할
것도 없고, 논리나 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계획을.
나는 너희가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지금 식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적나라
한 용어들로 설명하는 중이다. 너희는 너희의 환경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면서,
이른바 자연재해들을 신의 잔혹한 장난이나 자연의 냉혹한 법칙을 보여주는
증거로 들이대고 있다. 장난을 쳐온 쪽은 너희이고, 잔혹한 쪽은 바로 너희
의 법칙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도 자연보다 더 온화하지는 않다. 그리고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도 인간보다 더 자연에게 잔혹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기에 절대 말려들지 않으려고 옆으로 비켜선다. 모든 책임을 부정
한다. 너희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서는 너희가
옳다.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너희는 내일이라도 열대우림의 파괴를 끝내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 행성 위를 떠도는 오존층의 고갈을 그만두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 지구의 정교한 생태계에 대한 쉼없는 공격을 멈추는 쪽을 선택
할 수 있다.
너희는 눈송이를 다시 엉기게 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이 가차 없이 녹는
걸 중단시키려고 애쓸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너희가 그렇게 할까?
마찬가지로 너희는 내일 당장 모든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쉽고도 간단하게.
필요한 것, 지금까지 항상 필요했던 것은 너희 모두가 동의한 것뿐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죽이는 짓을 끝내는 것처럼 극히 간단한 일에도
함께 합의를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늘에다 대고 종주먹을 치면서 너희의
삶을 질서 잡히게 해달라고 외쳐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 스스로 하지 않는 어떤 것도 내가 너희를 위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법칙이고 예언이다.
세상이 지금 상태대로 존재하는 것은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하는 것이다)
지구가 지금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의 삶이 지금 방식대로인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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