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鼓子),고자화(鼓子花)메꽃, 고자(庫子)
일부 국어사전을 보면 고자라는 올림말에 鼓子라는 한자가 달려 있다. 고자와 鼓子 - 이 북의 아들로 해석되는 한자에는 사내 구실을 못하는 뜻이 전혀 없다 싶어진다. 그또한 한자 갖다붙이기 좋아했던 시절의 취음 버릇이었다고 해야겠다.
`메꽃`을 한자로 쓸 때는 `고자화(鼓子花)`라 한다. `나팔꽃`을 한자로 쓸 때는 `견우화(牽牛花)`라 하는데 `메꽃`은 그 `나팔꽃`보다 작고 열매는 잘 맺지 않는다고 하는 데서 `고자화(鼓子花)`의 `고자`와 `사람 고자`를 함께 생각했던 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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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꽃과(Convolvulaceae) 식물이다.
● 한의학에서 메꽃과 애기메꽃을 구구앙(狗狗秧) 또는 선화(旋花)라고 부른다.
● 들이나 풀밭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덩굴성 여러해살이풀이다. 흰색의 땅속줄기가 사방으로 길게 뻗고, 군데군데에서 순이 나와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잎자루가 길다. 초여름께부터 한여름에 걸쳐 연분홍 예쁜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한 송이씩 달려 핀다. 메꽃은 열매를 거의 맺지 않고, 땅속줄기에서 새로운 순이 나와 자라므로 열매 맺을 필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하지만 많이 먹으면 설사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예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이른 봄에 땅속줄기를 캐서 굽거나 밥에 넣어 쪄먹기도 했다. 밀양지역에서는 모메라 부른다. |
<훈몽자회>에는 `고쟈宦` 따위 글자가 나와 중세어로 `고쟈`였던 것을 보여 주는데 광대라든지 풍류하는 사람을 이르면서도 `고자`라했음을 <계림유사>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고자`에는 세 가지 다른 어원설이 있다.
하나는 진나라 때 호해를 내세워서 시화의 대를 잇게 한 다음, 저 유명한 지록위마라는 고사까지 낳게 한 바 있던 환관 출신 전횐자인 조고(趙高)의 자식[高子]이라는 뜻으로 훼폄하여 쓰기 시작하다가, 그것이 그 대목의 불구자 일반에게 통용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 환관에 무슨 자식이 있었을까마는, 그 조고의 자식놈이라는 뜻을 곁들여서 은근히 욕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리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부회(牽强附會)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다른 하나는 고자(庫子)에서 온 말일 거라는 생각이 있다.
庫子는 지난날 군아 같은 데서 물건을 맡아 지키는 거이 그 소임이었다. 그런데 궁중에서의 고자는 곧 환관이었고 그 환관은 또 불알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그만 庫子가 `고자`로 되어 버렸던 것일 거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런 해석을 따를 때, `고자질`의 `고자`도 환관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환관들이 상감마마에게 곧잘 있는 말 없는 말 꾸며내는 고자질도 했기 때문이다. 즉, `고자질`은 `고자가 하는 짓`이란 뜻이었다는 주장이다.
목수들이 기둥을 깎기 전에 먹줄의 금을 치게 되는데, 그때의 먹통 말이다. 중세어에서 `고즈(/ㅡ/는 아래아)` 또는 `먹고즈`라 했는데 옛날의 목수들이 갖고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먹통이 8자와 같이 생겨있는 꼴에서 남성의 불알을 연상할 수 있었음직하다.
그렇다면 고자란 말은 이 먹고자란 말과 관계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 겉모습이야 비록 불알 같다고 해도 `먹통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먹통인 `먹고자`가 자식을 낳을 리 있겠는가.
고주망태
중국의 백낙천이라는 사람은 자기 집을 취호(醉戶)라 했고, 도연명은 그가 자던 바위를 취석(醉石)이라 했으며, 사연은 한 섬의 술을 마셨기에 취호(醉虎)라고 했다. 또, 체옹이라는 사람은 한 섬의 술을 마시고 길가에 쓰러져 있어 취룡(醉龍)이라 했고, 이백은 취해서 글을 써도 착오가 없어 취성(醉聖)이라 했다고 한다. 화가 김홍도는 한 끼 양식이 없는데도 그림으로 모은 돈 800냥을 술값으로 썼다 하며, 진나라 주의라는 사람은 두 섬의 술을 마시고 보니, 같이 마시던 친구는 갈비뼈가 썩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많이 마시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취한 상태를 고주망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고주와 망태의 합성어다. 옛말 "고조"였던 "고주"는 "술을 거르거나 짜는 틀" 인데 오늘날에는 "술주자"라고 한다. "망태"는 "망태기"의 준말로 "가는 새끼나 노로 엮어 만든 그릇"을 이르는 말이다다. 술주자 위에 술을 짜기 위해 올려 놓은 망태이기에 언제나 술에 저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술을 많이 마시어 취한 상태인 고주망태란 말은 이에서 연유된 말이다.
아무튼 술은 넘치기 쉬운 음료이기에 선대의 조상들은 이른바 관(冠) 혼(婚) 상(喪) 제(祭)에, 상견례(相見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덧붙여 예절의 기본을 육례(六禮)로 규정했던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가 있다.
향음주례란 성균관이나 전국의 향교에서 행하던 일종의 주도(酒道)예절 행사로, 여기서 빈주백배(賓主百拜)의 공경지심(恭敬之心), 손을 씻고 잔을 씻어 상대방에게 권하는 청결지심(淸潔之心), 일미동심(一味同心)의 공동체 의식, 적절한 양으로 끝낼 줄 아는 절제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을 가르쳤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척동
안양천을 끼고 구로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양천구 신정동과 인접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개봉동과 경계를 이루며 최근 몇년사이 신흥주택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동명의 유래는 두가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하나는 동네의 한 자연마을 고좌리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동네는 경기도 부천, 안양, 강화사람들이 서울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생필품과 농산물을 교환하던 곳으로, 당시 계량기가 없어 교환측정이 곤란하자 긴 자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이 고척이라 칭한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고척동의 어원이 됐다는 고좌리 또는 고잘마을은 현재 고척1동 고척초등학교와 신안아파트 아래쪽 일대를 일컬었는데 고척동 전체지형중 지대가 가장 높다.
고잘마을 앞의 길은 개봉4거리에서 강서로와 연결되며, 80년대 초 이곳 주민들이 야금회사라고 불렀던 한국합금철회사와 우일화학 등의 군소공장이 이전하고 풍원여립, 한효아파트, 현대아파트, 우성아파트, 서울 가든아파트 등이 들어서 대단위 주거지역이 형성되고 있다.
고추
조선 중기에 들어온 고추의 본래 이름은 고초(苦草)였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쓴 풀`이라고 하겠는데, 옛날 사람들은 고추의 매운맛을 `쓰다`고 표현했다. 반면에 `맵다`는 말은 고되고 독한 것을 나타낼 때 썼다.
`고초`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소리의 변화를 일으켜 `고추`가 되었다. 고추의 특성인 매운맛이 다른 사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고되고 독한 일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로 널리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고추 같이 매운 시집 살이` `고추바람`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길쭉하고 뾰족한 그 모양에 착안하여 그와 비슷한 모양을 한 사물에도 고추라는 이름이나 별명을 지어 불렀다. 아들을 가리키는 `고추`, 끝이 뾰족한 `고추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