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 로타리에 있는 어느 투자 증권의 회식 날, 1994년 일이다.
1차는 회사 부근 식당에서 치렀다. 2차는 지산동 술집으로 잡고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지점장은 술기운이 이미 거나했다. 지점장이 손수 운전을 하려하자 직원들이 말렸다. 당시에는 대리 운전 제도가 없었고, 음주 단속이 느슨해 음주 운전이 흔했다.
... 지점장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한 젊은 직원이 차 열쇠를 낚아채 운전대를 잡고, 다른 직원들이 지점장을 밀다시피 뒷자리에 태웠다. 그때는 자가용이 흔치 않아 나머지 직원들은 택시를 타고 뒤 따라 갔다.
지점장을 태운 차가 우회전하여 500m 정도 가다가 범어 우방 아파트 앞 건널목에서 여대생을 치었다. 운전한 직원은 겁에 질려 지점장에게 애걸했다.
“지점장님! 사실 저는 무면허입니다. 좀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내가 수습하지.”
지점장은 조수석 뒷자리에서 내려 차 앞쪽으로 가 중앙선 쪽에 절명한 여대생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운전석에서 내려 차 뒤쪽으로 돌아가서 지점장 뒤를 따라갔다. 지점장이 앞서고 직원이 뒤따라가는 순간의 모습을 본 목격자가 있었다. 이 장면만 보면 지점장이 운전하고 직원이 조수석에 탄 모양새가 된다. 택시를 탄 직원들은 사고 5분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시신은 경대병원으로 옮겨졌고 응급실로 형사와 여대생 아버지가 달려왔다.
형사가 조서를 꾸미기 위해 누가 운전했냐고 묻자 지점장이 자신이라고 했다. 그 순간 숨진 여대생 아버지의 주먹이 고함과 함께 날아왔다.
“이렇게 술 쳐 먹은 놈이 운전을 해!”
새벽에 술 깬 지점장은 아차 싶었다. 꽤 힘있는 동기에게 새벽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우선 빨리 경찰 조서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담당 형사에게 찾아 직원이 운전했다고 알렸다. 비록 술김이지만 한번 꾸민 조서 내용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여대생 아버지는 그런 지점장을 책임 회피하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고 더욱 분노를 일으켰다. 또한 사건 후 목격자의 증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운전한 직원이 그때부터 운전한 사실을 부인하고는 종적을 감췄다.
이제 회사의 전 직원들이 나섰다. 분명 젊은 직원이 운전했고, 불과 5분도 채 안 돼 뒤 따라 갔는데 어떻게 그동안 운전대를 바꿀 수 있냐는 증언을 했다. 그리고 전 직원들의 한달치 봉급을 모아 운전한 젊은 직원에게 줄 위로금을 5천만원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운전한 직원은 사실을 계속 부인하며 버텼다. 젊은 직원은 자신의 전 재산이 2천만원에 불과하고, 과실 치사로 6개월 이상 실형을 살면 젊은 나이에 자기 인생이 끝날게 분명하니 두려움에서 계속 부인했다. 그렇게 한 달을 끌었다.
20여명이 넘는 직원들의 일관된 증언에 피해자 아버지도 수긍하자, 운전한 직원은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형사 책임은 젊은 직원이, 도의적 책임은 지점장이 지기로 했다. 지점장이 피해자 가족에게 보상해야할 금액은 1억으로 합의했다. 그 돈은 부부가 10년 동안 맞벌이해서 모은 전액이었다.
그랜드 호텔에서 지점장 부부, 운전한 직원, 피해자 아버지가 마지막 합의를 위해 만났다. 직원은 커피숍 바닥에 꿇어 앉아 지점장과 피해자 아버지에게 한 달간 애를 먹인 점에 눈물을 쏟으면서 잘못을 빌었다. 진실 공방은 그렇게 끝났다.
지점장은 내 고교 1년 선배였고 그 증권회사는 내 치과 건물 옆 건물에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몇 달 뒤에 들었다. 그 날 형수가 커피숍을 나서면서 선배에게 했다는 위로의 말은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한 사람은 소중한 딸을 잃었고, 한 사람은 인생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러나 여보, 우리는 돈만 잃었을 뿐 이예요.“
첫댓글 정말 감동적인 말입니다. 송원장 선배님은 멋진 부인을 두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