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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놀과 정수 원문보기 글쓴이: 민들레처럼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하면 /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 / 언제나 내게 / 언제나 내게 /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 /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 머물지 못해 / 떠나가버린 / 너를 못잊어 / 오늘도 바보처럼 / 미련 때문에 / 다시 또 찾아왔지만 /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 쓸쓸한 너의 아파트” (가수 윤수일이 1983년 발표한 노래 ‘아파트’)
노래방이나 야구장에서 ‘아파트’라는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수 윤수일이 1983년에 발표한 이 노래에 대한 기억은 세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20~30대를 보낸 사람들은 잠시 동안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은 ‘가요무대’류의 흘러간 노래에 대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윤수일의 ‘아파트’가 유행한 1980년대 중반은 우리 사회의 주거문화가 급격하게 바뀌어가던 시기였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뒤로 하여 목동 신시가지 개발(1983), 상계동 신시가지 개발(1985), 주택 2백만호 건설대책에 따른 평촌・산본・분당・일산・중동 신도시 개발(1989) 등 엄청난 개발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개발의 결과 전국토가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1949년에 서울의 주택비율은 1) 한옥 10만2천3백여호, 2) 양옥 2천1백여호, 3) 일본식 가옥 3만2백50여호, 4) 토막촌 2천3백여호였다. 당시 양옥의 비율이 1.53%였으니 아파트에 사는 서울시민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2004년 6월 7일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말 기준 전국의 주택 수는 1236만가구였다. 그 중에서 아파트・연립주택 등 공동주택은 642만가구로 전체 주택의 절반이 넘는 52%였다. 서울과 수도권만을 놓고 본다면 60~70% 가량의 사람들이 아파트나 연립주택 등 공동주택에 살고 있을 것 같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너는 어디에서 태어났니?”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이 “00산부인과병원”이라고 대답하듯이, “너는 어디에 사니?”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00아파트”라고 답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으로 이루어지는 1세대용의 독립된 주호(住戶)가 한 건물 안에 입구계단 또는 복도 등을 공용하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 그 하나하나의 주거를 아파트먼트라 하고, 그 건물을 아파트먼트 하우스라고 한다. 주택건설촉진법에서는 5층 이상의 공동주택을 아파트라 규정하여 4층 이하의 연립주택과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파트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산물로 발생한 주거 양식이다. 산업혁명 이후, 아니 위생개혁을 위한 법과 운동이 주택개량과 결부되어 발전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이후 노동자나 서민주택은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기획되고 만들어졌다.(참고 : 박태호(필명 이진경),「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 근대적 주체의 생산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일반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는 1850년 영국의 알버트(Albert) 왕자가 런던 수정궁 박람회의 전시용으로 '집세가 싼 노동자용 아파트'를 계획한 것이 기원이라고 말한다. 산업혁명으로 공장과 새로운 건축을 지어야 할 필요성이 늘자 노동력은 한 곳에 모여들게 되었고, 이 도시 노동자를 위한 아파트는 이제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아파트는 노동자용 주거에서 시작되었다.(참고 : 김정동,『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2』, 푸른역사, 2005)
그러나 ‘기원에 관한 역사’는 항상 신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이미 1849년 초에 프랑스의 파리 노동자 주택단지 협회(La Société des Cité Ouvrières de Paris)가 파리의 구마다 노동자 아파트 단지의 블록을 세울 목적으로 로슈슈아르 가(Rue Rochechouart)에 시테 나폴레옹(La Cité Napoléon)이라는 대규모 노동자 주택단지가 만들었다. 이 사업은 실제로는 로슈슈아르 가에서만 실행되었는데, 194개의 아파트를 만들어 약 500여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했다.(참고 : 박태호(필명 이진경),「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 근대적 주체의 생산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과 프랑스 중에서 어디에서 먼저 아파트가 탄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아파트의 기원’을 밝히기보다는 ‘왜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이 탄생했는지’를 역사사회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국에서는 아파트를 플랫(flat)이라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19세기 중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아파르트망'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아파트를 아파트먼트(apartment)라고 했다. 미국의 아파트는 1869년 리차드 헌트(Richard Morris Hunt, 1827~1895)가 설계한 뉴욕의 '스터이브산트(Stuyvesant) 아파트'를 그 효시로 본다.
일본의 아파트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집합주택'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어 처음에는 산업노동자용 숙사(宿舍)로 지어졌다. 1910년 도쿄에 세워진 '미쓰이 동족(同族) 구라부(클럽)'가 그것이다. 미쓰이 재벌이 사원용으로 지은 6층 콘리리트조 건물이었다. 그 후 우에노(上野)에 지은 목조 5층의 '우에노 구라부'도 같은 해의 것인데 아직 아파트란 명칭은 쓰지 않고 있다. 대부분 목조였고 설비면에서도 불충분해 본격적인 아파트라 볼 수 없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 2년 후인 1925년부터 피해 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대단위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아파트는 1925년 도쿄 한복판 오차노미즈에 세워진 '문화아파트'가 효시라 할 수 있다. 건축주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홋카이도 제대의 교단에 선 모리모토(森本厚吉)였다. 미국인 선교사 건축가 보리스와 건축구조학자 사노(佐野利器, 1880~1956), 사토(佐藤功一, 1878~1941)가 미국의 아파트먼트 하우스를 본떠 설계했다. 그러나 문화아파트는 당시 인텔리-샐러리맨의 실제 생활감과 접점을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난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다다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참고 : 김정동,『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2』, 푸른역사, 2005)
일본에서 아파트가 건설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아파트가 건설되었던 것 같다. 1927년의「愛國團員 鄭喜童 사건」재판기록을 보면 그의 범죄(실제는 독립운동) 사실을 기록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범죄사실 : 피의자 鄭喜童은 대정 원(元)년 一○월 二五일 江原道金化郡(이하 미상)에서 鄭春日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곧 京畿道仁川府龍里로 이주하였고, 一○세 때부터 一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대정 一五년 여름 무렵 仁川공립보통학교 제四학년을 가정 사정으로 부득이 중도 퇴학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 후 모친 趙昌善과 함께 平北鐵山郡(이하 미상)의 南市로 이주하고, 동지에서 어물행상으로 약 二년간 종사한 후 仁川府龍里一七六번지로 돌아온 후 소화 四년 一○월 상순경 上海寗路順天房七호에 거주하는 지인 李聖昌을 의지해서 上海로 건너가서 동인 집에 입주하여 심부름꾼으로서 약 二년간 일하고, 소화 六년 一一월 경 영국인 경영의 버스 자동차 감독이 되어 종사 중 上海佛租界豊照路愛仁里一호 거주의 雲 南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독립운동자 訴外 李民達의 감화를 받아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사상을 포지하기에 이르렀고, …(중략)… 6. 소화 一○년 九월경 南京孔子廟(이하 미상)의 아마추어 하숙집(아파트)에서 피의자 鄭喜童은 愛國團員 梁東五로부터 上海에 있어서의 (一) 일본제국의 군사정황, (二) 일본당국 스파이의 활동상황 등의 정세를 내탐하여 보고하도록 지령을 받자 이를 수락하여 그 사명을 다할 수단으로서 上海에 이르러 헤로인의 밀매에 종사하고, …(하략)… 소화 一二년(1927년) 一○월 二六일 京城鍾路경찰서 사법경찰관 京畿道경부 井上數人 京城지방법원 검사국 검사정 福田甚二郞 귀하”
독립운동을 하던 정희동이 중국 상해에서 아마추어 하숙집(아파트)에서 애국단원 양동오를 만난 사실이 재판기록에 남아 있는 이 자료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실제 아파트가 건설되기 전부터 중국이나 일본 등의 외국에서 ‘아파트’라는 주거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식민지 조선에 ‘아파트’가 건설되기 전부터 ‘아파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아마 서울 회현동(당시는 旭町)의 미쿠니(三國)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서대문의 풍전 아파트(충정로의 유림 아파트) 또는 적선동 근처의 내자 아파트(미구니 석탄상회의 직원 아파트)가 최초의 아파트라고 주장하기고 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기원의 역사’는 항상 ‘신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최초’라는 단어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1. 미쿠니(三國) 아파트
어쨌든 미쿠니 아파트는 남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 세워졌는데, 1930년 10월 착공하여 2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미쿠니 상회가 오다공무점(多田工務店)에 설계와 시공을 맡겼는데, 연건평 106평에 건평 35평짜리 3층 벽돌 조적조였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한 층에 18평짜리 2호씩, 전체가 6호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당시 아파트 내부에는 다다미를 깔고 스팀 난방을 했으며, 집집마다 수도・전기 시설을 설치했고 옥탑을 만들어 옥상에 공동세탁장을 두었다고 한다. (참고 :『조선과 건축』 1930.11)
유림(儒林) 아파트는 1930년 일본인 도요다(豊田種雄)가 충정로(일제시대 당시는 죽첨정) 3가 250-6번지에 건립했다. 연면적 1050평으로 4층(5층은 가건물)으로 건축했는데, 건축주의 이름을 따서 도요다(豊田) 아파트라고 불렀다. 해방 직후에는 만주나 일본 등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무단점유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에 의해 접수되어 '트레머 호텔'이라고 이름을 바꿔 유엔군 전용 호텔로 사용되기도 했다.
5.16 쿠테타 직후에는 한국전쟁 때 다섯 아들을 모두 국가에 바쳤다는 김병조라는 사람이 나타나 풍전 아파트의 주인노릇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반공의 아버지'라며 건국공로훈장을 주고 당시 시가 5천만원에 달하던 이 건물을 그에게 넘겨줬다. 김병조는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보수공사를 한 후 '코리아 호텔'로 간판을 바꾸어 영업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섯 아들을 국가에 바친 ‘반공의 아버지’라는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 김병조는 구속되고 건물은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미쿠니(三國) 아파트와 도요다(豊田) 아파트를 통하여 1930년 경부터 ‘아파트’라는 간판을 단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31년 6월에는 합자회사인 ‘中央아파트먼트’가 佐佐木淸一郞을 사장으로 경성부 고시정 43-52에 설립되었다는 기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3년판)이 있다.
그리고『동아일보』1933년 4월 22일자에는 ‘海外消息-寫眞 :「스톡호름」의 모던아파트’라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동아일보』1936년 4월 18일자에는 ‘藝術家優遇, 소련에서 學者와 藝術家를 위해 大「아파트」를 建築’이라는 기사를 통하여 ‘사회주의 모국 - 소련’을 선전하는 기사도 나타난다. 『동아일보』1939년 6월 20일자에는 ‘住宅難의 大京城에 府營 「家族아파트」建設 今秋九月부터 着工決定’이라는 기사가 나타난다. 요즘의 ‘시민아파트’를 일제시대에는 ‘가족아파트’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명칭만 놓고 본다면 일제 식민지 시대나 해방 후 대한민국 시대나 ‘권력자’들은 항상 집 없는 서민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여 ‘가족’이나 ‘시민’이라고 대우(?)를 해주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동아일보』1938년 1월 3일자 기사에는 ‘까스 피우고 자다가 女子 二名 窒息, 아파트에서 생긴 初慘事’라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1930년대 당시 아파트는 상당히 주거조건이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질식사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아파트를 무대로 한 소설도 등장한다. 김남천(1911~1953)의「경영」(『문장』, 1940. 10),「맥」(『춘추』, 1941.2)이라는 2부 연작 소설이 그것이다. 이 소설들은 대략 1938년부터 194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쓰고 있다. 주무대는 당시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서울 충정로의 한 아파트다. 주인공 최무경은 '야마도(大和) 아파트'의 여 사무원이었다. 그녀에게는 오시형이라는 약혼자가 있는데, 평양의 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나약한 청년이었다. 그는 좌익, 사회주의 사상서를 주로 내던 일본의 이와나미(岩波)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책에 빠져 있었다.
오시형은 어떤 사건으로 법망에 걸려들어 취조를 받고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현저동 101번지 형무소 구치감에 영어의 몸이 된다. 무경은 2년 동안 시형을 위해 지성으로 사식을 넣어주며 옥바라지를 한다. 또한 변호사를 통해 예심판사를 움직여 사건을 종결시키고 그를 보석으로 빼내주기까지 한다.
그녀는 출감하는 시형과 함께 살 목적으로 서대문 밖 다케조에죠(竹添町)에 있는 야마도(大和) 아파트에 세를 얻는다. 다케조에죠(竹添町)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1~1917)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는 현재의 충정로 일대를 개발하면서 그의 이름을 갖다 붙였다. 다케조에는 1882년 조선에 변리공사로 들어와서 1884년 12울 4일 갑신정변 후에 일본으로 도망쳐 188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다케조에죠 3가 8번지에는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 게이죠야마도주쿠)'이란 아파트가 있었다.(<<경성 전화번호부>>, 1944. 9.1)
소설 속의 야마도 아파트는 1940년에 세워진 3층짜리 임대 아파트였다. 원래는 식산은행 독신자 아파트로 지은 것이었다. 세대는 독신용과 가족용으로 구분되어, 독신용은 36세대, 가족용은 두 칸씩 맞붙어 25세대이다. 경성대화숙 323호실은 김남천이 1947년 북한으로 갈 때까지 살던 곳이었다. 경성대화숙 자리에는 '미동아파트'란 이름의 8층짜리 아파트가 도로변에 바짝 붙어 세워져 있다. (참고 : 김정동,『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2』, 푸른역사, 2005)
일제시대의 이러한 아파트들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연립주택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또한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은 1950년대까지 건축된 아파트들도 일제시대의 아파트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1956년 서울 중구 주교동에 12가구가 들어갈 수 있는 3층짜리 중앙아파트가 건축되었고, 1958년에는 성북구 고려대 근처에 종암아파트, 1959년에는 충정로에 개명아파트가 들어섰다. 이들 아파트는 층이 낮고 규모가 작아 현재의 연립주택 수준이었다.
사진 2. 마포 아파트
1960년대부터는 단지 개념의 새로운 아파트들이 나타났다. 1962년에는 마포구 도화동에 마포아파트가 건축되었고, 1964년에는 마포2차아파트가 계단식 아파트로 지어졌다.(마포아파트는 94년 삼성아파트로 재건축됐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아파트 건설붐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아파트의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파트는 주거목적뿐만 아니라 투기목적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사진 3. 붕괴된 와우 아파트
“빨리 빨리! 대충 대충!”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건축’은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붕괴라는 엄청난 참변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에 위치한 와우 지구 시민아파트 15동 5층짜리 건물 한 채가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이 사고로 입주자와 인부 70여명 중 33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러한 끔찍한 참사에도 아파트 건설붐은 그칠 줄 몰랐다. 서울시는 와우 아파트 붕괴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명망있는 건축계 인사들을 참여시켜 여의도에 1583가구 대규모 고층단지의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건설했다. ‘최초’나 ‘최고’ ‘최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의도 시범 아파트를 ‘최초의 고층 아파트’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1967년에 현대세운(1967,13층), 신성상가(1967,10층), 청계상가(1967,8층) 등 ‘세운상가’에 세워진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세워졌으므로 ‘기원의 역사에 대한 신화’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게다가 1968년 10월에는 용산구 한남동에 외국인을 위해 ‘힐탑 아파트’가 고층으로 준공되기도 했다.
사진 4. 힐탑 아파트
박정희 정권과 서울시는 1972년에는 남산의 남동쪽 자락에 외국인을 위한 고층 아파트(외인 아파트)를 짓기도 했다. 시민들은 도시경관을 해치는 ‘고압적인 지배자’같은 외인 아파트를 보면서 일제의 식민지 시절 총독 통치를 떠올렸다. 마침내 외인 아파트는 1994년에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폭파해체되었다.
사진 5. 폭파되는 남산 외인 아파트
하지만 서울시의 외인 아파트 폭파해체는 그동안의 무차별적인 개발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앞으로 친환경적인 건축을 하겠다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쇼’처럼 단순한 ‘이벤트 행사’에 불과했다. 남산 외인 아파트를 폭파해체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서울시는 산꼭대기와 산기슭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계속하여 승인하고 있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남산의 맞은편 인왕산의 산기슭에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강남 개발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집주름, 가쾌, 공인중개사’에 관한 앞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강남의 부동산 투기 바람’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조장한 측면이 크다. 손정목은『중앙일보』2003년 10월 12일자 「정치자금용 땅 투기」라는 기고를 통하여 “1970년 김현옥 서울시장의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제일은행 자금 3억 4천만원과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 및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자금 2억5천만원 등으로 24만8천여평의 땅을 평당 매입가 4천5백-6천5백원씩으로 12억8천만원어치를 사들였다. 그 후 이 사실을 안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의 지시로 71년 1월 정치자금 확보용 땅 가운데 18만여평을 평당 1만6천원에 매각해 18억원의 이익을 남겼다.”고 증언했다.
1978년에는 강남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중 일부가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특혜 분양된 것이 밝혀져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고 할 수 있는 4000만∼5000만원이 웃돈(프리미엄)이 붙었다. 이러한 특혜 분양을 받은 특권층은 유신세력인 공화당뿐만 아니라 야당과 건설 허가를 내준 건설부 공무원까지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지만 사건의 진상규명은 흐지부지돼 버렸다. 이러한 사건을 겪고 나서 비로소 국민들도 아파트 투기에 눈을 뜨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투기는 더 이상 범죄가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부동산 투기는 ‘부동산 투자’와 ‘재테크’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부동산 투기의 주범은 정치권력과 더불어 삼성・현대・LG 등의 독점재벌이었다. 1989년 한 해 동안 30대 재벌은 3조 8천억원어치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이에 따라 30대 재벌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규모는 장부가액으로 13조 1,391억원으로 1988년 말보다 30.6%나 증가했다. 법인 가운데 50만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업체가 4백3개나 되는데 이들 업체의 보유 토지 9억 1천8백18만평의 내역을 보면 임야가 69%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토지를 대규모로 보유한 업체가 실제로는 비업무용인 토지를 투기목적으로 과다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높은 지가와 지가앙등에 따른 자본이득은 1987년 한해에만 34조 8천억원에 달했는데 이것은 그해 GNP의 36%, 봉급생활자 보수총액의 85%, 제조업총생산의 45%에 달하는 규모이다. 지가가 27.5%나 폭등한 88년에는 땅값 상승으로 인한 자본이득이 68조원으로 봉급자 급여총액의 1.35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7년의 IMF 사태도 부동산 투기 바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에 따른 경기침체 극복을 위하여 건설경기 활성화정책을 취하면서 투기적 수요까지 촉진하는 정책을 취했고, 1999년 경기가 회복된 후에도 2001년까지 이것을 지속한 것이 부동산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참고 : 장상환,「해방 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부동산 투기」,『역사비평』2004년 봄)
사진 6. 타워팰리스(Tower Palace)
2002년 10월에는 강남구 도곡동(道谷洞)에 ‘타워팰리스(Tower Palace)’라는 초고층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다. 대지면적 1만 193평, 연면적 13만 8478평, 4개의 주거동에 총1,361세대의 ‘특권층을 위한 궁전’이 탄생한 것이다. 주거동의 높이는 A동은 지하 5층 지상 59층, B동은 지하 5층 지상 66층, C동은 지하 5층 지상 59층, D동은 지하 5층 지상 42층이다. 명예박사학위까지도 돈을 주고 사는 국내 최대의 재벌그룹 삼성에서 시공과 시행을 맡았다. 타워팰리스는 환경문제, 교통문제, 주변 지역의 주택가격 상승 문제, 강남지역의 부동산 투기 문제,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주거 문화 형성, 특혜분양과 권력과의 유착문제 등 우리 사회의 ‘부동산’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보여주는 백화점이다.
부동산 투기는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다수 국민의 주거문제를 악화시키고, 물가 상승과 부유층의 과소비를 심화시키며, 토지에 대한 투자 수익은 생산적 자본에 대한 투자수익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특징인 생산적 투자 증대를 저해하고 있다. (참고 : 장상환,「해방 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부동산 투기」,『역사비평』2004년 봄)
그러나 2005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직도 ‘부동산 불패 신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정치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식민지 잔재와 독재의 잔재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와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는 목동신시가지 개발,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분당-일산 등 신도시 개발, 수서개발, 행담도개발 등 끊임없이 부동산 개발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틈만 나면 엄청난 부동산 안정대책을 쏟아내며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항상 지가 상승률은 일반물가 상승률 보다 2배 이상 높았고, 부동산 불패신화는 계속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수서비리사건, 한보비리사건, 행담도비리사건, 청계천비리사건이 터지면서 시민들은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재벌 건설사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하여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고, 청와대-국회 등 정치권은 재벌 건설사에 온갖 특혜를 주면서 은혜(?)를 갚았다. 재벌 건설사는 회계장부 조작, 원가 부풀리기, 부실시공, 세금포탈 등으로 잇속을 챙겼고, 부패한 관료들은 룸살롱 접대를 받고 뇌물을 챙겨서 부동산 투기에 나섰다.
이러한 부동산 투기 체험담(?)은 순식간에 국민들에게 전파되었다. 철거촌 딱지 모으기-분양권 전매-알박기-떴다방 등 불법적 범죄행위가 이젠 부동산 투자라는 합법적 재테크 수단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2005년 판교발 부동산 광풍은 60년대 이후 40여 년간의 개발독재와 정경유착, 건설비리, 부자열풍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