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1)
감독 : 블레이크 에드워즈
출연 : 오드리 헵번, 조지 페파드
음악 : 핸리 맨시니
새벽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
쓰레기 봉투 옆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쉿~!
녀석과 나는 마주보며 대치를 시작했다.
1. 기억
군대 상병 시절 한 달여의 동계훈련과 100Km 행군을 마치고
막 부대에 복귀를 했을 때였다.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잠자리에 막 들려는데 , 행정반에서 호출이 왔다. 면회가 왔다는 거다.
피곤한 몸에도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기쁜 마음에 위병소 면회실로 달려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멸~공!"
든든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려 멋지게 인사를 했는데, 아버님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할머님이 돌아가셨다."
2. 그녀
스크린에서 처음 만났던 그녀는 사뭇 기존의 여배우들과는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다.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다거나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는 글래머 스타들과는 달리,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로마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던,
갸냘퍼서 보호본능마저 일으키게 했던 말라깽이 여배우.
그런 그녀가 이른 아침 택시에서 내려 보석상 티파니 근처를 거니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이른바 지방시의 <햅번 스타일>을 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이긴 했지만,
<샤레이드>나 <사브리나>, <로마의 휴일> 이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다른,
그녀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무슨 어려운 영화는 아니고
줄거리도 사뭇 단순하다.
할리 고라이틀리 (오드리 햅번)라는 미혼 여성이, 새로 이사온 폴 바잭이라는
젊은 작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얘기인데, 쉽게 말하자면 로맨틱 코메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지만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좀 다른 부분이다.
첫째는 이 영화의 주제곡이다.
가끔 라디오에서 맨시니(Henry Mancini) 의 Moon River 가 흐를 때면
창가에 앉아 먼 허공을 응시한 채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오드리의 얼굴이
생각이 난다. 낭만적인 장면이긴 했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공허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었다.
둘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틈 사이를 떠도는 '이름없는' 고양이였다.
여주인공 할리가 키우는 고양이임에도 그냥 cat (고양이) 이라고
불리우는 보통명사 고양이...
왜 고양이의 이름이 'cat' 이었는지는 영화를 본 한참 후에야 알게되었는데,
그 의미를 알게된 다음에야 이 영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 재회
특별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서는, 마석의 모란공원으로 할머니를 만나뵈러 갔다.
그러나 막상 할머니 묘지 앞에 서니, 딱히 어떤 감정이나 느낌이 생기질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해서인지,
부모님께서는 내가 상처받을까봐 조심스러워 하신 듯한 표정이었는데,
난, 그분들의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표정으로 묘지 근처를 거닐었다.
철없이 야외에 소풍 나온 어린아이 마냥, 아직 철거되지 않은 수많은 조화들 속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짖꿎은 표정으로 그렇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저녁에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데, 아버님이 한 말씀 하셨다.
"넌, 어찌 된 아이가 눈물 한방울 없냐?"
내가 뭐라고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 대답을 해 주셨다.
"아직 실감이 안나는가 보지요......"
목욕을 하고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할머님의 생각이 나질 않는지, 그렇게 뵙고 싶다고 생각했던
할머님의 얼굴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지, 도무지 내 자신이 알 수 없었다.
4. 이름이 주는 얘기
이 영화에는 몇가지 의미있는 이름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이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티파니.
티파니는 그녀가 꿈꾸는 사회, 신분상승, 富를 의미한다.
끊임없이 사람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티파니는 자신의 힘든 삶을
포장하는 근사한 곳이며 자신이 희망하는 富의 세계를 상징한다.
둘째는, 할리 고라이틀리(오드리 햅번)의 과거를 의미하는 루라매.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비유한다. " 배가 고파 칠면조
알을 훔치던 14살 소녀의 이름 루라매, 이젠 더 이상 내가 아니에요.
이젠 인간 생쥐나 훔치고 있지만..."
세 번째는 이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 '이름없는 고양이(nameless cat)'다.
남미 부호(호세)와의 결혼으로 편안한 삶과 신분상승을 꿈꾸던 그녀.
그러나 마약 조직과의 연루 스캔들로 자신의 가문과 '이름'을 지키기 위해 헤어진다는
호세의 결별 메시지에 그녀의 꿈은 깨어지게 되고,
그를 쫓아 공항으로 향하던 그녀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빗속에 내던지고 만다.
왜 그녀는 고양이를 빗속에 내던졌을까?
5. 회냉면
군대를 제대하고 몇 년이 흘렀을까?
그동안 공부를 마치고 사회 초년병으로 바쁘게 살면서 나름대로의 보람과 성취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장동 근처에 갈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단골집 냉면을 먹게 되었다.
난, 육수와 면발의 절묘한 맛에 취해 연신 '역시~' 를 외치며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들려는데 갑자기...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회냉면.
할머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던 회냉면이 생각난 것이다.
난, 군 복무 시절 할머님께 편지를 쓰게되면 매번 회냉면 얘기를 했다.
'할머니, 제가 이번 휴가 나가게 되면 회냉면 사드릴께요.'
그러나, 막상 휴가를 나오게 되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에 바빴고
부대 복귀하는 날이나 집에 들려서는 짧은 시간, 할머님께 인사만 드렸다.
"할머니, 담에 꼭 회냉면 사드릴께요..."
그때마다 할머님께서는 고운 미소로 말없이 웃어주셨는데,
이제 다시는 할머님에게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니,
갑자기 할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젠장...
같은 단어를 머릿속에 수없이 되뇌이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침까지 눈물을 흘렸다.
6. 고양이
영화의 마지막은 할리가 고양이를 차에서 내어쫓자, 동행하던 폴리가 고양이를
찾으려고 차에서 내리게 되고, 그 순간에서야 그녀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의
의미를 깨닫고 둘이 함께 비를 맞으며 고양이를 찾는다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왜 자신의 고양이를 빗속에 내어 던졌을까?
그녀는 자신이 속한 현실의 삶보다는, 자신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미래의
환상 속에 두었기에, 자신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들을 자꾸만 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먹이를 주며 기르던 고양이마저도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고, 빗속에 내던진 고양이란, 이미 길들여진 고양이의
모습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대변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는 폴의 얘기처럼, 그녀는 평범한 삶을 거부한 채 자유를 외치며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삶을 희망했지만 결국 스스로가 만든 우리에 갇히게 되고,
그 우리는 끝이 없어 결국은 자기 자신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얘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할리가 고양이를 애타게 부르며 찾는 모습은 그녀가 비로소
현실의 삶 속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으로, 결국은 자신에게 이르는 진실한
길이란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하나씩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얘기다.
결국, '고양이를 부탁해'의 고양이가 20살, 그들의 불안한 미래와 호기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소품의 역할을 한다면, '티파니~'의 고양이는 세상에 뿌리내
리지 못하고 이름없이 떠도는 주인공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7. 티파니에서 아침을...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지 때문이지.' - 어린왕자 중
나는 매일매일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살고 있다.
핸드폰이 울리면 보게되는 발신자의 이름과 혹은 의미없는 숫자들, 수많은
친구들의 이름과 거래처 이름, 내가 보는 신문의 이름, 지난 여름 갔다왔던
피서지와 강원도의 지명들...
그들은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워지며 내 곁에서 나를 구성하며 현실의
경계와 의미들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게되면 수많은 이름없는 고양이들과 생쥐들을
만나게 된다. 주류사회의 밑바닥에서 빵 부스러기를 줏어먹기에 여념이 없는 생쥐들과
스스로 길거리를 떠도는 들고양이로 전락시키는 얼치기 정치인들,
그들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도둑 고양이들...
그들은 할리가 고양이를 되찾는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비록 많은 교육을 받고 머리는 좋아서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 하지 못한다.
본디 스스로 이름을 붙여 본 일도, 그 이름의 의미에 대한 책임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양이를 찾으러 갈 시간.
우리 스스로 녀석을 찾아내어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내쫓은 고양이를 찾으러 나가는 수밖에 없다.
현실의 장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불리워짐들' 속에서
'보통명사' 고양이가 '고유명사' 고양이의 의미로 되돌아 올 때까지는...
- 쉿~
대치한지 1분, 녀석은 지루한 척 하품을 하더니 느릿느릿 자리를 벗어났다.
첫댓글 예전에 썼던 글이라 정치관련 부분은 삭제하고 몇 군데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담배 끊었습니다.
고양이에 관한 진실! 민중교회다닐때 여자목사님의 아우라에 반해서 자그마치 5년이나 다녔다. 그녀와 만나면 삶의 힘이 솟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의 여유, 그리고 나와 그녀가 제일 멋들어지게 잘 맞는 어리숙한 유머들. 그분이 10년이 넘게 키우던 고양이가 있었다. 절름발이 고양이! 다리를 다쳐서 내쫓긴 걸 목사님이
데려다 키우셨는데 밥을 하면 제일 먼저 고양이밥부터 뜨고 어디를 가면 고양이를 두고갈 걱정부터해서 여러 교인들은 목사님의 애인이 아니냐는 둥 너무 과한 사랑 아니냐는 둥 투덜거렸다. 그런데 송현동 달동네가 철거되고 교회도 철거되었고 운이 좋아서 송림동 건물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는 동안 고양이가 없어져
버렸다. 애타게 찾고 기다려도 안돌아오는 고양이를 모든 교인들은 걱정했다. 1년이 지났을까?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플랫폼저쪽 숲속에서 절뚝거리는 고양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 고양이였다. 우리는 고양이를 잡아야한다는 생각보다 목사님께 고양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해줘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전화
를 했다. 우리가 잡아서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목사님은 그러지말라고 하고는 지금 바빠서 전화를 오래받을수 없다고 하고는 끊었다. 우린 그만 맥이 딱 풀렸다. 마치 우리가 고양이가 된듯한 서러움, 배신감, 실망감이 섞여서 "고양이 어떻하지?" 그러면서 우린 전철을 탔다. 절뚝거리는 고양이가 전철에 치이지나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우린 그냥 전철을 탔다. 그리고는 그때서야 어렴풋이 깨달은것 같다. 인간들중에 그다지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또 헌신이란것도 자신의 이기심의 또다른 샴쌍둥이가 아닐까하는 그런 인간에 대한 회의.나이가 드니 흐르는 물과 같은게 시간이요 사람 마음인것을 내 마음속에 내 이상속에 묶
어두려다 빗나가면 상처받고 후회하고 다시 또 기대를 품는 악순환속에 살았던 시기였던거 같다. 수면제 10알을 놓고 땅거미가 진 어두운 할머니 묘지앞에서 엉엉 울고난 뒤 밝은 보름달아래 할머니 묘지앞에서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산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걷던 달빛에 젖은 그 산길! 시간이 약이지. 약이야!
펑키님/ 목사가 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해 갖었던 생각은 헌신이나 뭐 이런 것 하고 상관없는 것 아닐??까 ㅡ 자신만이 구축한 세계가 있는 고양이가 과거의 고양이일까? 그 고양이를 데려다 자신의 영역속에 넣어두고 싶어하는 것이 오히려 고양이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그렇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함....그래서 본문에 나온 것처럼 언젠가 받을 상처만큼의 양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덜어내 대상을 사랑하는 것 아닐까? 그 덜어낸 양이 적을수록 사람이든 대상이든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