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바람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이나 공기,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 들뜬 상태, 등등으로 씌어있다.
일반적으로 바람은 불륜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미혼이라도 일단 이성에 마음이 끌리면 바람이 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학창시절에 공부에 등한시하고 무엇인가 빠져 있어도 어른들은
“너 바람 들었냐. 공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바람은 어쩌면 꼭 이성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샛길이 궁금해지거나 어떤 다른 관심분야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 할 만큼의 큰 변화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산비탈 지나가는 바람인양 차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봄볕에 골짜기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나 가슴에 항상 무언가를 담아내는 사람은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삭혀야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꺼내다 보니 꼭 바람연구가가 된 느낌이라 혼자 피식 웃어본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남편이 안다면 된서리 맞을지도 모르지만 들키기 전의 스릴감은 어렸을 적 엄마 몰래 다락방에서 곶감을 훔쳐 먹는 기분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위기의 남자”는 아줌마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있었다. 나도 놓치지 않고 다본 편이지만 남자주인공 신성우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많은 아줌마들의 우상이었다. 우리 남편이나 다른 남자들은 여자들이 한심하다며 질투의 화살을 날렸지만 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애인인양 대리만족에 푹 빠졌다. 그러나 일상적인 주부들은 드라마가 끝나면 신성우를 잊는다. 일주일에 한 두 번 하는 드라마에 자기를 꿰어 맞췄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정말 그쪽에 관심이 많은 여자라면 드라마 정도로 대리만족할 리는 없을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남편 이동주는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내와 세 자식을 버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끝내 가버리고 그 곳에서 다른 가정을 꾸민다. 아내 이금희는 유부남을 사랑했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여자 주인공인 금희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하는 아픔은 정말 컸으리라 본다. 드라마는 여자가 자식을 맡아서 잘 키우는 것으로 끝났지만, 요즘 현실은 이혼한 부부가 서로 자식을 떠맡지 않으려 한단다.
“위기의 남자”처럼 요즘이나 예전에나 바람(불륜)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참 많다. 한 문학기행에서 어떤 노 시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나?”라고 했다. 그 시인의 답은 ‘불륜’ 이었다. 이유를 묻자,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동동주를 드시고 거나해져서 한 마디 하신 말씀인 것 같았지만 우리는 의아해하면서도 어떤 말도 응수할 수 없었다.
세계문학에서 살펴보면 ‘안나 카레니라’가 대표적일 것이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에게 염증을 느끼던 중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진 안나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륜의 종말은 참혹했다. 그녀는 달리는 기차 레일에 몸을 던져 자기행동에 형벌을 가했고, 자기가 선택한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시켰다. 일본 열도를 강타했던 ‘실락원’도 불륜소설이다. 그들도 마지막 밤을 보내며 극약을 먹고 죽음으로 사랑의 종말을 맞이한다.
죽음으로 세상에 용서를 구하거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 소설들에서의 바람은 봄바람이 울타리를 지나가듯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배우자나 자녀가 있는 경우 그 가족이 받을 상처나 배신감은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사랑 못지않게 클 것이다. ‘실락원’에서 남자 주인공은 전 재산을 부인에게 양도한다. 그러나 물질적 보상이 아무리 크더라도 정신적 피해의 보상을 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들은 가끔 깜찍하게도 소설도 일상생활에 허탈해진 주부들에게 대리만족으로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스쳐가는 바람을 애써 기억해 내려는 사람은 없다. 바닥에 흩날리는 꽃잎 같은 바람인지 강렬하고 세찬 바람인지... 다만 또 다른 바람이 찾아오면 그 바람은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만을 우리는 안다.
내게도 가끔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잠재우려 다른 어떤 것에 몹시 매달려 본다. 대기 흐름의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면 바람은 서서히 흘러간다. 아니 억지로 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삶... 도덕적인 삶의 지표는 어떤 것이지. 행복지수를 어디다 포커스 해야 할지 방황해보기도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말에 이른다. 하지만 어떠한 행동과 판단을 했더라도 혹시 후회하지 않게 된다면 괜찮을지도 모를 텐데 라는 엉뚱한 생각을 늘어놓아 본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훼손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 가엾다.
얼마 전 우리 문협에서 개최한 시화전에서, 작품 중에 노부부의 뒷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린 작품에 매료되어 장미를 선물한 분이 계셨다. 그 분 말씀이 자기도 노후에 그런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분 말씀이 꽤 인상적이다. 나도 가끔 다정스레 걷거나 앉아 계시는 노부부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부부들이 평생 동안 웃는 낯으로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동안의 고초와 비바람을 모두 견뎌내 초연해진 모습의 노부부가 존경스럽다. 드라마 얘기를 계속해서 좀 그렇지만 “위기의 남자”에서 변정수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에 남편을 지킬 수 있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할 텐데...그런 사랑으로 살고 있는지는 자신이 없다.
요즘 주부들 사이에 유머가 떠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애인이 있으면 금메달이고, 자기와 동갑내기 애인이 있으면 은메달이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애인이 있으면 동메달이고, 애인이 아예 없으면 목매달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유머이기는 하지만 세태를 반영한 얘기 같아서 조금은 떨떠름하다. 나는 그런 얘기를 남편에게 하면서 남편이 아닌 애인이 되어보라고 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라며 꾸지람을 들었지만, 식상한 부부들의 권태기 탈출법으로는 그 방법도 좋으리라 본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다잡은 고기에 미끼 주는 것 봤냐고 하겠지만 후회할 날이 오기 전에 한 눈 팔지 말고 서로 서로 잘 해줘야겠다.
앞에서 횡설수설한 감도 없지 않지만 사람은 태어나 끊임없이 이성을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대상을 찾고 싶은 욕구가 발생 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가장 행복했을 때를 떠올려보고 책이나 드라마로 대리 만족만 할 뿐 더 이상의 행동으로는 발전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혹시 내게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그 때가서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 내게는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란다.
첫댓글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홀애비바람꽃.....참 많은 바람꽃을 보았습니다. 가녀리고 순수하고 앳되더라구요.
선생님 꽃이름인가요. 바람이름인가요. 헷갈려서리.
문협에 실린 글이라는데 어째처음 읽는 맛이 나네요. 블루의 쥴리엣 비노쉬가 나오는 데미지를 보셨나요?... 바람의 극치입디다...
줄리엣 비로쉬가 잉글리쉬페이전트에서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구요. 저 그녀의 오래 된 팬입니다.
블루 꼭 보고싶네요. 제가 잉글리쉬페이션트를 참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 여주인공 이름이 줄리엣 비로쉬였군요. 흰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 차림의 줄리엣 넘 예뻤는데.
우리는 사랑을 바람이라 하고 바람을 사랑이라 간혹 오해하지요. 사랑과 바람은 보모가 같은 자매였을까요. 아님 아비가 다른 남매인가요. 우린 幻 속에 산다 하더군요. 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