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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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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0-1500년 사이의 중세 말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대단한 시련의 시기였다. 교황들이 70년간(1305-1376)을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압력을 피하여 프랑스 아비뇽에서 살았던 것이다. 스웨덴의 성녀 브리지트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개혁을 촉구했고 교황의 로마 복귀를 종용했다.
그러나 더 커다란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378-1417년 사이에, 처음에는 두 사람이다가 나중에는 세 사람까지 서로 자기가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대분열의 시대가 온 것이다.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다 영국 사람 존 위클리프와 체고의 존 허스는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영성적인 각서의 표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톨릭 신비주의가 네덜란드, 독일, 영국에서 번창하였고, “준주 성법” 같은 영성의 고전 작품들이 쓰여지게 되었다. 또한 잔다르크의 환상이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동방에서는 마음의 기도(hesychasm)가 새로운 영성 생활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16세기 동안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원인 요소가 수없이 잠재하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형편이었다. 교회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성직을 부자나 세속 통치자들에게 팔아먹는 일이 생겨났고, 자연히 이들 부자나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제 일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독신 서약도 지키지 않았다 성직 매매 해위가 도처에 횡행하였다. 교황들은 돈을 모아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문예 부흥 운동의 선두에 나서려 하였고, 성직 매매 행위와 정치적인 간여들에 정신이 팔려 교회가 직면한 영성적인 위기를 돌볼 여지가 없었다. 1512년에 교황 율리오 2세가 제 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거기서 결정된 개혁 칙령들은 이행된 것이 거의 없었다. 세속 통지자들이나 그 뒤의 교황들은 개혁에 대한 열성이 전혀 없었다.
이런 중대한 문제들 때문에,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성서를 강의하고 있던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면죄부에 대한 95개조를 내다 건 것을 효시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떠날 생각은 없었으나, 독일의 귀족과 평민들이 일제히 루터를 지지하여 그들의 “루터 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성서만이 자기들을 인도하는 교리임을 인정하고, 신앙만이 정당화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많은 분야에서 가톨릭 신앙과 관습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나온 스위스 제네바의 칼빈, 취리히의 츠빙글리나 재세례론자들은 더 급진적으로 가톨릭 전통과 유산을 거부하게 되었다.
16세기에 가톨릭 교회는 이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스스로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루터가 나타나기 전에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같은 가톨릭 인문주의 학자들이 개혁을 호소하고 있었다. 가톨릭 개혁의 선봉은 단연 스페인 사람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였다. 새로운 수도원이나 수녀원이 나타났고 기존의 수도원들도 개혁의 길을 걸었다. 가톨릭 정체성은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강화되었다. 여기서 가톨릭 교리를 정리하고 기강을 강화하였으며 훌륭한 사제들을 양성할 신학교 제도를 확립시켰다. 교황이나 주교들은 예외 없이 개혁의 선두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성인들이 배출되었다. 예수회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극동 지방),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북아메리카 대륙), 스페인 신비중의자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가르멜회), 예수회 신학자인 성 베드로 가니시오와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성 가롤로 보로메오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그리고 가난한 자의 수호자 성 빈첸시오 드 폴이 그들이다. 15세기 말부터 불어닥친 수많은 문제점의 심연에서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바른 기강, 봉헌 그리고 명확한 교리로 무장한 강력하고 덕성스러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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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부터 현재까지를 우리는 현대라 부른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이 출현하고 근본적으로 이성에 입각한 새로운 철학이 대두된 시기이다. (나중에는 인간 경험의 폭넓은 범위를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이 통치하기 위하여 신권에 의존하는 사상은 이제 철폐되고, 종교는 사회에서 점점 더 따돌림을 당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 현대를 초기 단계를, 과학과 이성에만 의존하는 철학의 대두로 종종 계몽주의 시대라 한다. 종교는 인류에게 분열을 가져오고, 이성은 단합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스의 수학자 파스칼, 영국 성공회 주교 조셉 버틀러, 기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재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가톨릭 교회가 갈릴레이를 단죄한 것이 현대 과학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가톨릭 신앙은 과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는 1650-1800년 사이에 유럽의 가톨릭 교회 위기의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같은 절대주의 통치자나 일반 대중의 감정은 교회를 일상에서 분리시키려 했고 심지어는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가 교회의 설립을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가톨릭의 가르침이나 영성은 혼돈을 일으켜 엄격한 얀센주의 운동이나 피동적이고 정신적인 정적주의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사람들이 예수회 수도자들이었다. 그러자 교황은 이 예수회를 억압하라는 정치적인 압력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플아스에서 그리고 1773년에는 전세계에 걸쳐(러시아만 제외) 억압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허약한 상태는 프랑스 혁명(1789)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혁명은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그 대신 이성의 종교를 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때 생긴 “지고의 존재 흠숭교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방 사회는 이런 사태의 진전에 충격을 받았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19세기는 프랑스 혁명의 과잉 열기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각국의 의한 언론, 출판, 양심 및 종교의 자유 운동은 꾸준히 성장하여 갔다. 정치적인 자유주의 물결에 편승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역사적 문화적 비평 기법을 성서에 적용하고 가톨릭 신학 전반에 대한 새로운 정검을 해 보려는 욕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논거는, 다만 진정한 신앙만이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며 성서와 교회의 권위가 일반 생활에서 손상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런 현대적인 경향을 “오류에 대한 교서 요목(Syllabus of Errors)"(1864)으로 단죄하였고, 뒤이어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면서 어떤 정의된 사례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의 무류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비오 9세는 또한 1854년에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를 확립하였다. 비록 교황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19세기 중 교황의 영성적인 권위는 크게 높아졌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계속 발휘해 갔지만 한편으로 현대 사회와의 대화도 증대시켜 나갔다. 그는 위대한 최초의 가톨릭 경제 사회 교서인 ”Renum Novarum(새로운 사태)“(1891)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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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격변하는 시대이고 특히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준 변화의 시대이다. 이 방면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분명히 지혜와 도덕성에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이 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세계는 핵의 대재앙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신의를 시샘하고 세계를 갈라놓았다. 파시즘과 나치즘 대 민주주의,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가난한 나라 대 부자 나라, 이렇게 세계는 어지럽게 분열되었다. 서방에서는 세속적인 인도주의와 물질주의가 그리스도교의 힘을 삼켜 버렸고 동방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신앙을 억압하는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로마 5,20).
교황 성 비오 10세는 1903년에서 1913년 사이에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예배와 가르침을 강화하였고 교회를 현대적인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교회 법전의 정비를 시작하여 1917년에 완성하였다. 그의 근대주의(현대적인 역사 및 성서 연구 기법을 사용하여 신앙의 어떤 부분을 부정)에 대한 단죄는 대단히 가혹한 것이었으나, 프로테스탄트를 진보와 근본주의자로 양분시킨 것과 똑같은 분열이 가톨릭 교회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교황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와 전세계는 여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절대적인 중립을 유지하면서, 전쟁 당사자간의 화해를 이끌어 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통치가 시작되고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이썽■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회개와 기도를, 특히 러시아의 개종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는 1937년에 공산주의를 격렬히 단죄했으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전체주의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하여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비오 11세는 가톨릭 신자들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하여 이들 정권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였으나, 1937년에 이르러서는 이들 파시즘과 나치즘을 단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25년에 그가 설정한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전세계를 향한 그리스도 왕권을 선언하였으며, 나아가 1931년에는 이와 관련한 사회 경제적 의미를 천명한 교서 “Quadragesimo Anno(사십 주년)”를 발표하였다. 또 가톨릭 액션 운동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는 또다른 세계 대전을 겪게 되자 막후에서 수십 만의 유대인들을 살려내는 활동을 지치지 않고 전개했다. 교황은 또한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성서 비평과 연구 방법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교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도입하도록 개방했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이라 하였고, 현대 사회를 반대하는 철옹성 같은 가톨릭 교회라는 이미지를 부수어 버렸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만인 공통성을 강조하면서 비 이탈리아인 추기경 수를 늘렸다. 또 공산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가톨릭 진자들에게는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다. 1950년 그는 성모 승쳔에 대한 교리를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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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 교회 역사에 또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여기서 교회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정의하고 현대 사회와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과거의 계승과 영원한 진리를 유지하면서도 교회를 쇄신하고 첨단화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의 역할을 강조한 것인 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 신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역할을 정의함으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성시칸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이 그 기조 문서가 되며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회복하는데 있어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으로 가톨릭의 참여를 개방하였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는 가톨릭과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정상화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모든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에서 확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른 주요 문서들은 “계시 헌장”과 공의회 문서 중 가장 분량이 큰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이 있다. 이 교서에서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가톨릭의 일반적인 태도를 천명하고 오늘날 특정 부문별로 접근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전례 헌장은 가톨릭 신자들의 일상 생활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준 문서이다. 여러 가지 전례 상의 개혁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미사를 자국어로 드리게 한 것이 두드러진 조치이다. 전체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엄청난 긍정적 충격을 가져왔으며, 가톨릭 교회에서 “새로운 성령 강림”을 기도한 교황 요한 23세의 기도가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 그는 누구인가? 그는 자애스러운 일은 여섯 살의 추기경으로서, 타협의 결과로 선출된 과도기적인 교황으로 생각된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고으이회를 소집한 것을 성령의 격려 덕으로 돌린다. 또 그는 오래된 형식의 교리 반복을 허용하지 않고 현대 세계를 위한 새로운 가톨릭 전통을 정의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사회 질서에 관한 교서 “Mater et Magistra(어머니와 스승)”와 세계 평화에 관한 교서 “Pacem in Terris(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여 현대의 신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세계의 사랑을 받은 이 교황은 첫 번째 회기를 마치고 갑자기 서거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종료시키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 가톨릭 교회를 가르치는 지극히 어려운 작업을 떠맡은 분이 바로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놓은 혁명적인 작업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점진적인 실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중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가장 불안한 시대를 지나가게 되었다. 진정한 쇄신의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그에 수반되어 무책임한 실험도 여기저기서 자행되었다. 어떤 가톨릭 신자는 공의회를 왜곡된 방향으로 이해하였으며, 많은 신부와 수도자들은 기강이 느슨해지고 세속과 접촉을 재촉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그들의 직분을 떠나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룩한 긍정적인 측면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교회가 현대 세계에 개방되지 않았더라면 전체적인 교회의 모습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인도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지 33일 만에 서거 했다. 그 뒤를 이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번째 폴란드인 교황이자, 17세기 이후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실천에 헌신하였다. 그는 교서들은 그리스도의 수위권(Redemptor Hominis)과 하느님의 자비(Dives in Misericordia)그리고 노동자의 권위와 권리(Laborem Excens)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인간 개인의 권위와 정통 가톨릭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이 그의 교황 직분의 주제를 이루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탁월한 존재이며 아울러 교회 일치 관계를 이룩하는 데 있어 능력을 발휘한 분이다. 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많은 국가를 방문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노린 암살 기도까지 이겨낸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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