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구성된 줄거리를 되짚어가기
어떤 잔치. 20년 전, 옛 공장 동료들이 모인 곳이다. 주인공인 영호는 이 야유회가 열리던 철길 위에서 자살한다. 자살하면서 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기차를 맞는다.
물음: 왜 영호는 자살하는가?, 영호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은 어디인가?
영호가 죽기 삼일 전, 그는 가진 돈 모두를 털어 권총 한 자루를 구입한다. 그는 그 총으로 자기의 인생을 망쳐놓은 누군가, 단 한사람을 죽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죽이기로 작심한 사람은, 이혼당한 그의 전처도, 동업을 빙자하여 사기를 친 그의 친구도 아니었다. 그는 바로 스스로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런 결심이 정해졌을 때,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영호의 첫사랑 순임의 남편이었다. 남편은 영호에게 마지막으로 순임을 만나볼 것을 부탁하였다.
물음: 왜 순임은 죽기 전에 영호를 보고싶어 하는가?
영호는 순임의 남편을 따라 순임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다. 영호는 순임에게 박하사탕 한 봉지를 선물한다. 순임이 의식불명에 빠져있을때, 영호는 그 박하사탕을 순임에게 건네며 말한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네가 편지 보낼 때마다 모아온 사탕이야. 이것때매 고참들에게 얼마나 혼났는 줄 알어? 어때? 옛날이랑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미안해, 순임아." 눈물을 흘렸고, 순임 역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클로우즈업된다.
물음: 왜 이들은 눈물을 흘리는가? 박하사탕은 무엇인가?
다시 조금 거슬러올라가 영호가 경찰관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그의 아내의 외도를 감시할때, 사업상의 관계로 누군가와 얘기할 때, 회사 여직원과 성관계를 가질 때 등등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은(순간적인 컷으로 처리되었는데)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음 : 이런 영호의 자아분열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다시 몇년 전, 영호는 노련한 고문 형사로 돌변해 있다.
물음 : 영호는 고문 형사라는 직업에 죄책감은 없었는가?
영호는 형사가 된 이후 최초로 고문을 해보게 되었다. 그때 영호는 온몸을 묶인 구타당한 노동자의 머리를 껴안고 말했다. "제발 불어. 제발 불란 말야. 이 새꺄. 니들이 그렇게 잘났냐? 흑흑" 그날 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만났다. 순임은 영호의 손이 참 착한 손이라고 했다. 영호는 이날 최초의 고문을 하였고, 고문당한 사람의 변을 손에 묻혔었다. 영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되는 '공단집' 처자에게 손을 뻗어 엉덩이와 허벅지를 더듬는다. 그리고 말한다. "참 착한 손이지요? 이 손."
물음 : 그는 왜 고문을 하면서 심한 자책을 느끼게 되었는가?, 이런 자기 부정의 근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영호는 광주에 있었다. 1980년 5월에 진압군으로서. 그는 그때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며, 어린 여고생을 실수로 살해하고 만다.
이게 시작이었다.
1979년 영호는 공장 근로자로써 일했다. 그때 그의 첫사랑 순임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파란 하늘을 완상하며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영호가 들꽃 옆으로 천천히 누우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클로우즈업되면서 영화는 맺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이제 완전한 열쇠를 얻은 셈이다.
2. 기막힌 구성력
우선 큼직하게 들어오는 구성 형식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찻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법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거슬러올라간다는 형식을 띤 것으로 일종의 추리적 수법이라 할 수 있다. 단지 보통의 추리 수법과 다른 것은 여러 가지 단서들이 복잡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파괴의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만 다르다. 말하자면 '저 사람이 왜 저럴까? 혹은 왜 저렇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첫 장면과 끝 장면이 동일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장면에 입혀놓은 색깔은 전혀 다르다. 첫장면과 끝장면은 모두 공단의 근로자들이 야유회에 갔을 때 벌어졌던 이야기들이다. 젊었을 때의 영호가 그 잔치에 끼었을때는 꿈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살을 결심한 이후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옛동료들이 모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이후 참석하게 된 잔치에서는, 이미 영호는 옛 순수함이란 모두 상실해 버린 뒤였다.
이 밖에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대목이 더 있다.
절뚝거림 - 그는 1980년 이후 절뚝거림이 병처럼 그에게 남아있게 되는 데, 그가 순수한 무엇과 조우할 때마다 그가 그 순수한 무엇을 잃어간다고 판단될때마다 절뚝거림은 나타난다. 이 신체적 절뚝거림은 바로 정신적 절뚝거림, 순수와 더럽혀진 자아 사이의 그것이다. 영호가 죽어가는 순임을 위해 박하사탕을 주고 잠시 병원 복도에 앉아 있다가 일어설 때, 영호가 순임이 임종직전 남편을 통해 건네준 그 오래된 카메라를 4만원에 팔아치울때, 학생운동하던 친구를 잡으러 군산에 갔을 때 잠시 순임을 만나기로 했다가 그러지 못했을 때, 등등 이러할 때 영호의 자아는 심한 분열을 겪는다.
기차 - 우리는 기차가 시간의 화살과 같이 직진의 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건 실제 물리학 이론과도 다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물리학이란 도대체 필요없다.) 그러므로 기차가 지나갔던 장면의 필름을 거꾸로 돌림으로써(실제로 자동차와 인물들이 거꾸로 가는 데 이건 일부러 작위된 것이다. 만일 기차의 선로만 보여줬다면 앞으로 가는 지, 아님 지나간 풍경을 거꾸로 돌린 것인지를 관객들이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은 그것이 미래가 아니라 회상과 관련되는 것임을 암시하여준다. 기차는 영화에서 추리적 수법으로 궁금증을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영호의 자아분열에 깊은 관계를 가지는 상징체이다. 단적으로, 영호가 80년 광주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그 부상을 입은 장소는 바로 기차가 정차해 있던 곳이었다. 이 기차가 정차해 있던 장소는 영호의 순수가 '군화발에 짓이겨진 박하사탕'처럼 부서진 것을 의미하는 최초의 장소다. 따라서 이 장소는 영호에게는 멈춰버린 시간, 순수의 정지라는 상징을 뜻한다.
3. 우리는 어떤 주제를 읽어낼 수 있는가?
전체적인 구성은 한 사내의 순수함을 찾아떠나는 여행으로 되어있고, 그 사내의 순수함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우연적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봐야할까? 불가항력의 시대적 흐름이 어떤 한 개인의 순수를 파괴하였다는 것일까? 그를 통해 감독을 무엇을 보여주려하는 것일까?
이 부분은 아직 생각중이다. 한번 더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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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질문.
.. 이 영화를 본건 재수를 시작 하기전 수능을 마친 고3의 신분으로 였다...평소에도 온갖 심각한 척을 다하는 나에게는 딱 맞는 영화라며 친구놈이 끌고 가서 였다.
알수 없는 슬픔과 분노.
그랬다. 그 두가지 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뻑쩍찌근한 무언가...다시 보고싶지 않다.영화가 별로라는것이 아니라 그때의 우울함이 다시 떠오르는것이 두렵다...
질문..맨마지막장면에서 설경구가 우는까닭은?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눈물을 흘렸
던 것같습니다. 아직도 잘 이해할수가 없네요..
끝에서 설경구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눈물은 사진기, 박하사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 최초의 눈물은 사진기, 박하사탕과 동일한 상징의 내포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79년의 야유회에서 우리는 설경구가 그의 첫사랑에게 '이름없는 들꽃을 사진에 담고 싶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설경구는 곧이어 손가락으로 카메라 앵글을 잡고서는 그의 첫사랑을 그 앵글 속에 담아보입니다. 이런 설경구의 소망은 순임이 아주 오랜동안 돈을 모아 그에게 사진기를 선물함으로써 실현됩니다.
순임은 '첫사랑의 순수'로 설정된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설경구의 앵글 속에 잡혀있는 '이름없는 들꽃'인 셈이지요. 그녀가 '이름없는 들꽃', 즉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나름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존재' 중의 한 사람인 이유는 순임의 얘기를 통해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영호에게 박하사탕을 건넸을 때 영호는 박하사탕을 좋아하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순임은 "좋아하려고 해요. 하루에 천 개 이상을 포장해야 하거든요."라고 대답해 줍니다.
순임의 이런 얘기는 영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후 여직원이 그에게 박하사탕을 건네주며 하던 말과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그 여직원은 영호에게 "자기 아까 할때 입냄새나더라."라며 박하사탕을 건네주게 되죠. 이는 박하사탕이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순수의 이미지가 이미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이때의 박하사탕은 이미 순수라는 공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영호의 중요한 부분이 이미 변질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순임이 박하사탕에 대해 "사랑하려고 해요"라고 한 것은, 감독이 설정한 '순수', 혹은 '이름없는 들꽃'은 성적 행위의 불편함이라는 사소한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인들의 삶의 방식, 생존과 관련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던 것 같습니다.
생존과 평범이 사랑과 조우함으로써 순수라는 색채가 입혀졌고, 그것은 박하사탕이라는 상징체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영호가 '이름없는 들꽃'을 사진 속에 담아두려고 하였던 것은 영호가 자신의 순수를 지켜내려는 일종의 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순임의 남편에게 건네받은 카메라를 4만원에 팔아치울 때 받게 된 필름(이 필름 속엔 아마도 영호가 지켜내고자 했던 '이름없는 들꽃'이 촬영되어 있었을 터인데)을 영호가 눈물을 흘리며 태워버리는 장면은, 영호의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79년의 야유회에서 설정된 중요한 이미지들이 해석될 것 같습니다.
영호의 순수는 이름없는 들꽃들을 담아내려는 '사진기'로, 순임의 순수는 일상적인 생존이 녹아내려있는(순임이 영호에게 사진기를 선물하였던 것도 그녀의 순수성을 보장합니다.) '박하사탕'으로 각각 은유되어 있으며, 이러한 둘의 은유들이 첫사랑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79년의 야유회)에 영호가 흘린 그 눈물은 어떠한 색깔도 띠지 않는, 즉 어떠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순수한 그것, 투명한 그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확하게 그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가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다만 억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을까요?
"아직 내가 지켜내고픈 어떤 무엇이 있고, 그런 의지가 있을 때, 그것이 자신의 판단으로 정직하며 순수한 무엇이라고 느껴질 때, 이러한 내 감정과 공명할 수 있는 이성을 만나게 되어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였을 때, 한번쯤은 그저 이유없는 눈물이 흐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