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회자의 영성개발]

       (디모데전서 4:1~16)

 

박 찬 섭 목 사

 

서 론

  

저는 영성훈련을 하면 할수록 영성의 맨 밑바닥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목회자로서의 영성을 개발하겠습니까?”하고 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소에 잘못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절정으로 올라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평소 1년에 두세 번씩 한주, 두주, 세주씩 금식에 대한 기본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특수한 방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원이나 혹은 특수한 장소에 가지 않고 그저 사택에 있으면서, 새벽기도 인도, 주일예배와 삼일 저녁예배 인도 등 기본적인 업무를 감당하면서 했습니다. 그것도 꼭 며칠 작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예배를 인도할 만한 때까지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금식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1일을 했는데 22일째는 새벽기도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하, 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계는 21일이구나, 이제는 그만 두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육체의 한계가 21일 인 것 같다고 말하고 이제부터는 한 시간 한 시간 하나님이 힘주시는 것만큼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놀랍게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빛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의 빛이 제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제 속에서 열이 나고 힘이 나서 2, 3일 금식한 것과 다름없는 기운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루하루 힘을 주시는데 늘, “오늘로서 끝내야지하면서도 38일째 되는 금요일을 맞이했습니다. 금요일 철야 기도를 하고 나면 활동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철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이튿날 39일째 되는 날에는 교인들 중에서 두 분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는데 두 군데 병원을 심방할 만큼 넘치는 힘을 주셨습니다. 40일째가 주일인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을 했는데도 다행히 그 40일째 마지막 설교는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서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해 본 결과는 이런 것입니다. 차라리 기도원에 가서 금식 한다든가 어떤 곳에 가서 쉬며 하는 것보다 그냥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기본업무를 하면서 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어떤 기도원에 가서 했으면 저 같은 경우 21일하고 끝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 교인이 기도해 주고, 내 기도 시간에 동참해 주는 가운데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손에 끌려 40일 금식기도를 은혜 중에 끝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힘주시지 않을 때에는 눈을 감았다 뜰때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이 들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끝내고 제가 얻은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태까지 해왔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40일 금식기도를 통해서 저는 영성훈련의 절정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영성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영성이 가장 밑바닥에서 있는 가장 부족한 인간이 과연 하나님의 종이란 말이냐! 가장 부끄럽고 질그릇같이 연약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시작과 끝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저는 아하, 여기 맨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인생을 출발하고 영성훈련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이로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기로 하고 교회도 성남교회를 사임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 내가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인데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영문교회에서 새로운 목회를 계획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 모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학위 논문을 쓰면서 발견한 것입니다.성령의 은사가 교회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 목회학 박사 논문입니다만, 사실 세계 교회의 모든 성장은 성령의 은사로 되는 것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는 성령에 대해서 물으면 대답도 분명했고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서도 많이 아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은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문도 쓰고성령과 교회성장 발전이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고 나니까 남은 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하면 저는 지금 잘 모릅니다라는 대답뿐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너무나 크고 방대한 것이어서, 그리고 하나님 은사는 그 주권대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성령의 은사는 이런 것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영성을 개발해 나가면 나갈수록 인간의 더 작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장 부족한 자기의 영성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명되신 주님께서는, 부족한 종인 저의 못난 모습을, 부끄러운 목회생활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영성을 간증하라고 존경하는 목사님들 앞에 불러주신 것으로 믿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성을 바르게 개발하여 선용하면 그 힘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됩니다.

영국에서 제일가는 옥스퍼드 대학의 총장 존 오웬(John Owen)박사는 성령의 은사를 일시적인 은사와 영속적인 은사로 구별한 대 신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영국의 큰 교회를 마다하고 늘 맨 앞자리에 무릎꿇고 앉아 말씀을 듣는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땜장이 생활을 하면서 설교하는 존 번연의 교회였습니다.

한 번은 당시 찰스 황제가 존 오웬박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대 학자요 신학자이고 총장인 사람이 갈 교회가 없어서 하필이면 땜장이가 설교하는 교회, 그것도 천막 속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경청한다는데 대체 뭘 들을 것이 있어서 그러는가?” 그러자 존 오웬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영국에서 가장 영성이 밝은 사람은 존 번연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영성이 개발된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국에서 오늘의 작은 예수, 오늘의 그리스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존 번연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작은 예수께서 설교를 하시고 오늘의 그리스도가 말씀을 전하는데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겠습니까?”

이렇게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도 없고 설 강단도 없어서 천막을 쳐놓고, 일주일 내내 땜장이 노릇을 하다가, 주일날이면 설교를 하더라도 대학 총장이 와서 무릎 꿇고 경청을 하게 만드는 존 번연같은 설교가는 영성을 온전히 개발했다고 생각됩니다.

존 번연은 베드포드 감옥에서 12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한달에 평균 한 번 읽기로 작정하고 1년에 열 두 번씩 성경을 읽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백번 읽고 나니까 그에게 환한 빛이 오고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쓴 책이천로역정이었습니다. 또한 그 깨달음을 가지고 한 설교가 바로 옥스퍼드대학 총장이 와서 무릎꿇고 듣는 설교였습니다. 존 번연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다가 깨달은 깨우침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는 것이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쓰고 나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한 감독이 그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황제께 잘만 보이고 아부하면 지금처럼 땜장이 노릇도 안하고 유명인사로서 잘 살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삽니까?”

그러자 그는 감독에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감독께서 나처럼 가난하게 살 줄 알고 최저의 생활을 할 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황제에게 가서 아첨하지도 않고 굽실거리지 않고 살아도 되는데 당신은 그것을 못해서 아첨하십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2, 13)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황제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기독교 영성을 개발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땜장이면서도 대학 총장을 무릎꿇게 할 수 있는 그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본 론

 

기독교의 영성(Spirituality)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충만하게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고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게 됩니다. 마치 스데반의 얼굴을 보고 천사의 얼굴을 닮았다고 한 것처럼 저 사람이 바로 작은 예수로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오로지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작은 예수로서, ‘오늘의 그리스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또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야 됩니까? 나타냄!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가득차서 내 성격이, 내 성품이, 내 인격이 그리스도로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영성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영성의 핵심은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 없이 영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설교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깨달음이 없는 말은 힘이 없습니다.

흔히, 설교자들이 얘기하기로,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분은 약 10%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70~80%는 자기 말과 설교를 하고 또한 20~30%는 남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 후에 하는 말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야말로 깨달음에 대한 책, 영성의 모본을 나타내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 가운데 옥토에 떨어진 씨 비유 이것이 아름다운 마음, 좋은 마음, 깨끗하고 가난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3:23)

 

옥토란 다름아닌 깨닫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성의 출발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영성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유를 18, 19절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그러니까 길가냐, 돌밭이냐, 가시떨기냐 하는 것은 깨닫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고 옥토라는 말은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현대 과학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현대는 깨달음이 없이도 버튼만 누르면 생각까지도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므로 깨달음과는 상관없는 시대입니다.

 

현대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의 병들을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무사 안일주의

어떻게 하면 무사히 안일하게 살 것인가 하는 이것이 전 교회에, 교역자들에게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살 것인가 하는 무사 안일주의가 완전히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상대주의

오늘 내게 절대적인 것이 내일이 되면 절대의 권위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됩니다. 지금은 최신 기계이던 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완전히 고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다 보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까지도 절대적인 신앙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절대의 권위도, 절대의 진리도, 소위 말하는 지성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문제는, 지성소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절대가 없으므로 피땀 흘릴 필요가 없고 고난을 다하면서 진리를 지키고 정의를 지킬 필요도 없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신성 불가침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노력하느냐 하는 상태에 교회도, 우리 자신도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실리주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과 실리라고 말합니다. 앞에 내거는 것은 명분이나, 뒤에서 계산하는 것은 전부 실리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에게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는 우리 목회자들까지도 앞에는 명분을 내세우고 뒤로는 실리를 계산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정은 무시된 채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무슨 짓을 하든지 돈만 많이 벌고, 성장하면 그 다음은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느냐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무사 안일주의, 상대주의, 실리주의가 만연되다 보니 이것이 교회안에까지 침투했고 또 자신도 모르게 목회자들까지도 이 속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3. 교회성장과 제자개발 ]

 

홍 정 길 목 사

 

서 론

   

제자양육의 실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은 어떤 문화나 거대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제자 열두 명을 키우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피하셔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열두 명의 제자와 가까이 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3년 동안 가장 정성을 쏟았던 것은 제자훈련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 불량품(유다를 지칭)이 있었던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세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 론

 

제자훈련의 본이 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열 한 명의 제자를 앞에 놓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겨우 열 한 명의 제자를 향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그 열한 명의 자질은 어떠했습니까. 북쪽 나사렛 동네에 사는 가난한 어부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배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자 모두 자기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간 비겁자들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없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했더라면 아마도 사상 최대의 코메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장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이 세계가 주님의 제자들로 꽉 차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지만 당시의 제자들을 이 훈련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이후에 나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3천명이 돌아오고, 5천명이 돌아오고,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복음을 증거하여 주님께서 인도하는 일이 사도들에 의해서 계속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에는 도무지 말씀을 증거할 수 없도록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바울은 결국 당시의 관례에 따라 두란노라는 서원을 빌어서 거기서 제자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2년 동안 사도 바울이 두란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매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흥회 스타일로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을 뽑아다가 두란노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제자를 키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8~12명이 바울의 주변에 늘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제자들이 바울의 곁에 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제자를 키우는 일에 자기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과 제자들에 의해서 신약의 3분의 2가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먼저 목회자가 강해져야 한다.

 

디모데후서 2:1~2를 보면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의 모든 신알을 정리함과 더불어 목회의 방법을 정리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디오데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강해져야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강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은혜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내 결심과 의지는 한없이 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속에 충만하게 채워 질 때에 우리는 한없이 강해 질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승리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에 앞서서 가장 강조해야 될 것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지식 속에 갇힌 사람인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제자훈련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말하기를 충성된 사람에게 복음을 부탁하라.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어떻게 제자삼는 사역이 전체 교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는 제자 삼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챠지는 말하기를 앞으로는 세계교회가 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하는 말보다는 제자운동을 하는 교회냐 안하는 교회냐로 나누어 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현재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하는 교회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전자는 계속해서 번창해 나가고 있고, 후자는 쇠퇴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제자훈련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필자가 제일 먼저 제자운동을 교회에서 시작했는데 맨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주변의 많은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학생단체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교인들 가르쳐 봐야 목사만 손해 본다하는 식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조금 안다고 하는 교인치고 목사에게 순종하는 사람 보았느냐는 얘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사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예배드릴 장소도 없어서 개인집에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흥 목사 그 좋은 아파트단지에서 교회 건물도 없이, 예배도 아닌 성경공부 스타일로 모인다면 교회가 될 법한 일이냐고 충고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시위대가 뒤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위대를 뒤집은 복음이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면 감옥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을 내가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하는 점이지 환경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물론 목회에 성공하려면 환경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환경이 가장 나쁜 곳에서도 여러 차례 목회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재개발구역으로 묶여서 완전히 없어진 산동네에서도 그곳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목회를 해 본 사람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안 된다고 말들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주신 복음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체험을 좀더 언급하겠습니다. 나의 부친은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나는 자연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아마 나처럼 교리적일 수는 있지만 고백적이지 못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약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마주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이 참으로 교리적인 동시에 참으로 고백적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교리적으로만 예수를 알고 지내다가 1965724일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했습니다. 그 분은 그 순간부터 내 구세주였고, 내 인생의 왕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몇 사람을 전도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붙잡아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 중에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김지철 교수(장신대학), 이동원 목사(워싱턴 제일침례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고 기뻐했더니 교인들이 말하기를, “그 열심은 쉽게 사그라진다. 조금 지나면 우리처럼 될 테니까 너무 좋아하지 말라.”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아니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나와 똑같이 변화되던데요하니까 그거야 어린 학생들이니까 삶이 없어서 원리만 맞으면 아멘’ ‘할렐루야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처럼 구조적인 악 속에 살다보면 어떻게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러한 말에 계속 도전을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일반 교인들에게도 성경공부와 제자 교육을 시켜 왔습니다. 대학생들은 그 분들의 말처럼 쉽게 변화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C.C.C에 만 10년 있는 동안에 무수한 대학생들을 만나서 전했고 그들이 말씀 앞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생애 전체가 바뀌는 것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평신도들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평신도를 대상으로 실시해서 어떤 결론을 얻었다는 소리를 못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평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 교회에서 봉사 해 본 경험 없이 그저 대학생 선교만 하다가 목회전선에 들어섰으니 아는 것이라고는 대학생들에게 제자교육을 시키던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제자교육이 일반 평신도들이라고 안되겠느냐는 확신 속에서 첫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포아파트(홍목사의 목회지)에서도 C.C.C에서와 똑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제자 교육이 되더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반포아파트 내에 보살회가 있는데, 이 불교 모임에서 기독교의 입문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섯 강좌를 가르쳤더니 보살회 회원 중 3분의 2가 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돼 버렸고, 반포 보살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신학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은 신학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학 자체가 영혼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제자훈련은 구원의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인가부터 타진해 보아야 합니다. 싹트지 않는 씨앗에는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어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일단 싹이 나 있어야 물을 주고 거름을 줄 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대상자의 거듭남에 대한 여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미 거듭났으면 됐지 확신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비록 거듭났다 하더라도 확신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감정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확신이 없으면 감격도 기쁨도 없고, 그에 수반되는 전도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생을 사는 것이 본인들에게 확인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영양소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식물이 싹이 났으면 그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거름을 공급해 주어야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다섯 가지의 영양소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안 생깁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어질 것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믿는다 믿는다 하는데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없이는 인격이 성숙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목사라 할지라도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신앙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곧 나를 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영혼의 능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내가 스스로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각 사람이 스스로 목사의 도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키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지 않느냐옳은 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목회는 목사의 도움이 필요없는 목회가 아니겠습니까.

교인과 목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각 사람마다 끝없는 상황들에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어떻게 목사가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다 해결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서 그 때마다 대처해 나가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준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성경본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80%는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설교준비를 위해서 본문을 80번씩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스타트 목사도 설교준비를 위해서는 성경본문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만약에 우리 목회자들이 설교할 본문만이라도 일주일 동안 계속 묵상하면서 그것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능력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아무런 깨우침도 없이 그냥 남의 글을 따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쏟아 놓는 설교라면 무슨 역사가 있겠습니까

 

 

 

 

[4. 목회자의 설교개발 ]

              (사도행전 6:1~7)

이 중 표 목 사     

(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서 론

 

목회자의 최대 과제는 설교를 어떻게 개발해 가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설교는 목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설교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건물이 아님)를 먹이는 사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전부가 설교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목사님들이 설교한 그대로 된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개발은 설교개발이라는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에 목회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말씀을 제쳐놓고 얼마나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말씀을 제쳐놓고 심방한다, 말씀을 제쳐 놓고 행정한다, 말씀을 제쳐놓고 교육한다, 말씀을 제쳐놓고 전도하는 것 등등은 궁극적으로 말해서 목회에서 외도하는 것입니다.

   

본 론

 

초대교회 사도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고, 그 말씀으로만 선포했으므로 예루살렘의 제자의 수가 많아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는 무리가 많아졌다는 것 보다 말씀이 왕성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말씀이 왕성해져서 거둔 열매 중의 하나가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지 않고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외친 가운데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스데반은 집사로서 말씀을 증언하였고(7) 이어서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볼 때 이같이 말씀이 왕성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말씀은 왕성해지지 않고 교회당만 왕성해집니다. 날마다 교회 건물이 생기고 커집니다. 기도원도 많이 생기고, 설교가 한정없이 쏟아지지만 생명의 말씀은 풍성하지 못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홍수가 넘칠 때 식수에 기근이 있다.’ 장마로 물은 많지만 먹을 만한 물은 적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기독교인이 많아졌지만 진실한 의미의 기독교인은 적습니다. 설교 횟수가 그렇게도 많아졌건만 생명의 말씀은 적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인들의 수만 많아진 이유,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이유를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100년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지금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적은 없습니다. 반면 지금처럼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습니다. 3·1운동 때에 지극히 적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역사를 주도하였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왕성해지면 반드시 타락과 관계가 깊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에 불교가 왕성해질 때 신라가 망했습니다. 고려도 샤마니즘화된 불교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조는 유교가 왕성할 때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를 가르쳐야 할 유교가 지리도참설로 변질하여 마침내 국운을 기울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말씀의 능력 때문인지, 말씀의 변질 때문인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진지한 성찰이 요구됩니다.

 

교회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목회자의 일생의 과업은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양에게 먹이는 양식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배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베들레헴떡집이란 뜻입니다. 또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는데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떡으로 왔고, 구유에 누우셔서 떡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잊고 동물화 되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예수님이 떡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먹는 양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구제를 안하고 무엇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적인 빵을 먹이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먹이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2535~40절 말씀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가난한 자가 곧 예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비약한다면 국민복지가 좋아져 가난한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유명무실해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교회의 최우선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민중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24:19~22)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곡식을 남겨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구호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약적인 의미로 볼 때 객은 안믿는 자들, 아버지의 집이 없는 길가는 나그네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 없이 버려진 안믿는 자들이고, 과부란 예수 신랑 없는 안믿는 자들을 뜻합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24:19~21)는 말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곡식을 남겨두라는 것은 오늘날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떡을 먹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감람나무에서 짜낸 기름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 반면 포도나무의 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증거하여야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보면 더욱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주어야 할 양식을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르고 마시게 한 후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강도 만나 쓰러져 신음하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곧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순수한 말씀을 먹이라

 

설교란 신령한 양식을 요리하여 저들에게 먹이는 것이며, 교회는 음식점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신령한 음식을 개발하여 먹여 주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오장동 냉면집에 갔었습니다. 골목집에 손님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손님이 많은가 하고 마담 얼굴이 잘생겼나 보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집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냉면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목사 얼굴도 볼 것 없고, 교회 건물도 볼 것 없더라도 음식맛을 잘 내는 요리사같은 목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한신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 한신교회는 32평 아파트에서 월세를 지불하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와 1, 2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00여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헌금도 한 달에 몇 백만원이 들어와 그 당시 기장교단에서 최고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3년이 지나자 연 예산액이 1억을 넘었습니다. 다락방에서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 원리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순수한 말씀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요즈음 음식맛을 내는 화학조미료가 인체에 해롭다고 선전합니다. 의복은 가공섬유가 인체에 나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식품을 권장합니다.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합니다. 설교 말씀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설교에 필요이상으로 가공을 하면 교인들의 영혼에 해롭습니다. 순수한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때에 위대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말씀의 능력이 상실된 것은 말씀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말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사무엘을 부르셔서 예언하게 하셨고, 예레미야, 에스겔 모두 하나님 말씀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설교로 시작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일, 치료하는 일, 설교하는 일 중에서 설교하는 것이 그의 최우선적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설교를 우리는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방이나 다른 용무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사역임을 깨닫고 사도들도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말씀보다 교회 행정하고, 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15~17).

양을 치라고 한 번 부탁하셨고, ‘양을 먹이라는 부탁은 두 번 하셨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은 교회 행정, 교육, 심방을 의미합니다. ‘양을 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말씀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양들에게 말씀 먹이는 일에 2/3를 투자해야 합니다.

다른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쓰면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심방가셔도 설교해야 합니다. 설교 속에 문제의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요즈음 상담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만, 상담이란 것도 케리그마 상담이어야 합니다.

 

미국에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초기에 하루에 다섯 명씩 상담을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 교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때의 가정문제, 심리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 물으니 그들의 대답은 목사님 설교 듣고 해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님은 그들의 문제에 관계된 설교 테이프를 상담하러 오는 교인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10:17) 했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은 설교를 들을 때에 형성됩니다. 목사의 설교만큼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목사 자신의 설교를 먼저 변화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직 듣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케리그마 설교를 개발하라

 

설교의 발전사를 상고해 보면 기독교와 설교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가 포사이스(P.T. Forsyth)기독교의 흥망은 설교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그 선포된 말씀으로 교회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그 시대에 한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방법과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왕국은 침체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장과 발전의 시기가 5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첫 시기가 바울의 사도행전 1세기이고, 두 번째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의 4세기, 세 번째가 아시스의 성 프랜시스 13세기이며, 네 번째가 루터와 칼빈의 활동하던 16세기, 다섯 번째가 스펄젼과 휫필드의 19세기 입니다. 이 시대에는 설교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설교가 침체되어 있던 시대에는 기독교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암흑시대와 14, 15, 17, 18세기가 거의 그러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카톨릭에 의해 의식화되자 말씀이 쇠퇴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전반적인 침체라는 결과가 뒤따랐습니다.

복음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과 함께 살고 말씀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교회 수준은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의 수준 그대로이며

 

 

 

 

[5. 목회자의 인격개발 ]

               (사도행전 20:17~24)

이중표 목사 

 

서 론

 

이번 세미나에서 다른 강사님들이 목회의 기능면을 주로 강의하셨는데 저는 목회자의 인격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령 목회에 있어 교육이나 설교나 선교 혹은 영성훈련 등이 목회의 기능적 측면에서 목회의 외부에 나타난 실적이나 형태 등에 주로 관심한 것이라면 저의 이 강의에서의 관심은 목회자가 최후에 설 자리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목회의 내면에 관한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본 론

 

인격개발의 중요성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보면 목수인 아버지 밑에서 목수로서 기술을 배우면서 30,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시느라 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속의 사업을 이루시기 위해 3일을 보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3일밖에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30년 세월을 보냈으며 또 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30년을 보내야 했고, 제자들의 인격을 개발시키기 위하여 3년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3년 세월 동안에 예수님이 하셨던 많은 일들 가령 병자들을 고쳤다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빵을 먹였다든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든지 하는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없었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인격이 성숙해지도록 끊임없이 개발시켰다는 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는 어떤 의사보다도 위대한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직업을 의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가 말해 주듯이 농사에 관해서도 어느 누구보다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고기잡는 기술에 있어서 베드로보다 앞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어부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유대인들이 랍비라고도 불렀지만 그의 직업은 선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직업은 철저하게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수직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목수의 기술을 배워서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목수였습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한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땅위에 친히 오셔서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년 동안 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기고 자로 재어 반듯하고 쓸모있는 재목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 모양의 사람들,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가꾸고 다듬어 교회의 기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그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에 따라 교회의 기둥으로 우리를 가꾸고 다듬어 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수직의 최대의 현장은 아마도 십자가상에서일 것입니다. 목수인 주님이 목수가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수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는 내가 간 것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목수로 가신다는 말입니다.

 

펄시 콜레목사님이 쓰신내가 본 천국에 의하면 천국은 옛날 만들어진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를 수호하던 천사마저도 오랫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다보니 천국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못 알아보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책에서 천국에서 가장 큰 맨션에 사는 사람이 누군가를 소개하는데 그것은 전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전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목수이신 주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친히 지으신 맨션이 예비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위대한 목수이십니다. 그는 하늘에서도 목수이시고 땅에서도 목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집만 짓는 목수가 아닙니다. 쓸로 없고 투박한 목재같은 인생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가꾸고 다듬어 하늘나라에 쓸모있는 일꾼을 만드시는 목수라는 말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인격입니다. 다른 사람의 교회는 부흥하는데 내 교회는 언제나 그 모양이냐 하면서 안타까워하며 고민하는 것보다 더 큰 과제는 자신의 인격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실적보다 내적인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인격 성숙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목회자의 인격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20장 말씀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 목회자로서 자기 심정을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위해 50킬로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온 장로들에게 보여준 바울의 언행은 목회자로서의 위대한 인격을 말해 주는 귀한 본보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장로님들과 목회자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다.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을 만나려고 그 먼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 왔습니다. 바울과 장로들은 서로 눈물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우리의 장로들과 눈물로 껴안고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목회이겠습니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또 장로 편에서도 목회자가 부르는 곳 어디나 달려와 목회자와 함께 모든 문제를 상의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훌륭한 장로가 되겠습니까?

멕가브란 박사가 그의 교회 성장학에서 말한 대로, 확실히 교회의 성장은 목사의 비젼만큼 성장하고 교인 수준은 장로의 수준만큼 형성된다는 말은 옳습니다. 장로의 수준을 교회가 넘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비젼과 설교의 능력과 성서적 교회성장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의 수준은 여전히 장로의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장로님이 열심히 기도하면 교인들도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장로님이 열심히 충성하면 교인들도 충성하게 됩니다.

 

첫째, 목회자는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변함없는 진실한 인격을 생각해 봅시다. 대개의 경우 목사들은 교인들 앞에서 유창하게 설교는 하지만, 자신의 인격에 과한 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왜냐하면 몇몇 교인들이나 장로들은 목사 가까이에서 목사의 인품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있게 얘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장로들 앞에서 자기의 삶과 인격을 자신있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일관되게 행했던 그의 목회와 인격의 발자취를 자신있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의 인격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시종여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 교회에서 3년 목회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30년 목회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목회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에서 목회하는 경우를 보면 1년에 22%의 인구가 아파트마다 이동합니다. 그러니까 3~4년되면 얼굴이 바뀌게 됩니다. 계속 나가고 또 새로 들어오니 언제나 얼굴이 새롭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그의 인격을 전면에 공개하지 않더라도 목회가 가능합니다. 얼굴만 잘 생기고 호감살만한 매너로 대인관계만 원만히 잘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목사의 사생활을 알려고도 않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목회의 한 생을 끝내려고 하거나 그의 인격이 분명하게 노출되는 시골 목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기목회를 하려면 목사는 그 인격이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메시지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처음에는 사명을 가지고 시작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사명이 식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후배는 저더러 목사님은 나이가 50이신데 사명이 식지않고, 옛날의 그 열정으로 일하시니 그 비밀을 알 수 없노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열심이 옛날에 비해 많이 퇴색하고 늙은 것을 압니다. 그 눈물, 그 감격, 그 정열이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때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교회를 훌륭하게 섬기고 있었는데, 교회가 문제가 생기다 보니 그것 때문에 사모님이 쇼크를 받아 중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4~5년 동안 꼼짝을 못하고 병석에 누어있게 되었고 목사님은 심방갔다 오시면 약을 다려다 사모님을 간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니까 목사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나더랍니다. “이제 그만 죽지 너무 오래 산다그런 생각으로 약단지를 가지고 방문을 여는데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약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라 죽이는 사약이다.” 그런데 사모님은 그런 약을 며칠 더 드신 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내가 어떻게 강단에 설 수 있겠는가? 병으로 고생하며 죽어가는 아내에게 사약을 먹였으니 나도 목사인가? 그렇게 생각한 목사님은 40일 금식에 들어갔고 진실로 회개한 다음 강단에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모님들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목회를 못하고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병든 사모님이 죽고 새 사모님이 들어오면 좋은 것 같아도 교인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은 사모님들 오래 사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은 제가 과천에 갔다 오는데 운전을 하던 집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시고 주무시든지 명상을 하시든지 하세요.” 그 말을 들으니 집사람이 나와 함께 고생한 일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집사람은 그런 내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우세요?” “당신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뭐가 미안해요?” “나와 함께 살아 준 일이 고맙고 미안해그래서 우리는 함께 울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와 함께 사는 집사람이 참으로 고맙고, 또 한편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 때 집사람을 깨울 수 없습니다. 하루종일 나 때문에 고생하고 몸이 약해 피곤해서 잠을 자는데 어떻게 깨울 수 있겠습니까? 이 종이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이 많은 권사님이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사모님은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잔다고 말하면서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그 권사님을 불렀습니다. “권사님, 이 교회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목사님이십니다.” “권사님이 사모에게 월급 주었습니까? 목회는 이 종이 할 것이요, 교회 일은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사모에게 충격을 주지 마십시오. 만약에 연약한 사모가 괴로움에 쓰러지면 권사님이 살아 줄 것이오?” 이때 권사님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사실 사모가 약해지거나 병 들거나 집을 나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목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사모가 살아 준 것만으로도 목회의 50%는 달성된 것입니다. 사모가 무슨 은사나 능력을 나타내고 기도와 심방으로 목회를 도와주는 것보다 조용히 있어주는 것으로도 최대의 협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모를 시집살이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사모를 평론하거나 시비하면 목사는 사모를 아껴주고 교인들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 앞에서는 천사가 되고 유창한 설교자가 될 수 있어도 사모에게는 진실한 인격과 사랑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모가 자기 남편을 진실한 인격자로 신뢰하고 존경한다면, 교회가 작거나 크거나 그 목사는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진실은 목사의 생명입니다.

 

예수를 닮는 인격

 

우리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보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는 일입니다. 누가 축복 받은 종입니까?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이루었기 때문에 축복받은 종입니까?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의 그 인격을 닮아 그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종이 가장 축복받은 종입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 축복받은 종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으려고 애쓰는 종이 축복받은 종입니다.

 

제가 한신 대학에 다닐 때 신연식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는데 강의 시간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한 백 번은 하시는 분입니다. 그에게 기독교 교육의 중심은 사랑이요, 내용도 사랑이요, 그 방법도 사랑이었습니다.

한 번은 시험을 보는데 얼마만큼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성령님이 이 종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종아 너 무슨 시험을 치고 있니?” “, 기독교 교육이옵니다.” 이때 성령님이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쳐라그때 제가 시험지를 덮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묻습니다. “이군, 다 썼나?” “예 다 썼습니다.” “벌써?” 교수님은 이 종의 실력을 아시니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시험지를 덮고 저는 기도실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시험을 치러 하나님의 점수를 따기 원합니다.” 이때 성령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글로 써서 표현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점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점수는 그 사랑을 나타내고 그 사랑의 종이 되고 그의 어린양을 사랑하므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오매, 종으로 하여금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저는 지금까지 목회해 오면서 이런 정신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종이 이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사랑을 행하는 것이 저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하나님에게 받은 시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로부터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어느날 시골교회의 정원에 앉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 종을 사로 잡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또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종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6. 목회자의 의식개발]

           (예레미야 1:4~10)

 

이중표 목사

서 론

 

세계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을 연구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위대해진 것이 아니고, 인물이 뛰어나서 위대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분명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를 불러 쓰실 때, 예수님이 많은 제자들을 불러서 큰 사역을 이루실 때,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의식을 개발해 주셨습니다.

현대 사회학에서도 기업의 발전이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 의식을 개발시키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목회자의 의식 개발은 교회의 발전에 핵심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의식을 개발하는 과제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제자를 불러쓰셨지만 특별히 세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보다 후에 불러 세우신 제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소망·사랑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믿음의 사도요, 요한은 사랑의 사도요, 바울은 소망의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식을 어떻게 개발시키셨습니까?

바울이 소망의 사도인 이유는 그의 부르심에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생애에서 끝없이 부활을 증거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부활 신앙을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에게는 그 이름을 보아너게(Boanerges),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늘의 우뢰소리, 사랑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요한은 거듭 하늘에서 우뢰가 울었다고 말합니다. 이 계시록을 재림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우뢰 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에게 목회자의 사명을 주기 전에 네가 날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부르시면서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도다하시면서 그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16:16~18). 페트로스(Petros),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는 반석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소녀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언제나 성급해서 예수님께 책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변화무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어 그의 의식을 일깨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드디어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위로부터 요한의 복음과 땅으로부터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에게는 우뢰 소리라는 신령한 하늘의 소리가 그의 의식 속에 있었고, 베드로에게는 반석같은 믿음이 그 의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이는 다메섹 도상의 예수님이셨습니다.

목회하는 우리도 이러한 고상하고 숭고한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고상하고 숭고한 체험을 통해서 의식을 개발하고, 그 의식을 통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위대한 사역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본 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살다가 갑니다. 그래서 인생을 일생(一生)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생을 의미있게, 보람있게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목회자가 된 최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광스러운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목사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나에게 이 이상 더 영광스러운 길이 없다고 하는 의식을 가질 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올바른 성공의식

 

제가 며칠 전 어느 서점에 갔었는데, 놀랄만큼 재미있는 책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성공한 놈은 뭔가 다르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다를까 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의 점이 다른데 하나는 성공한 놈은 반드시 실패해야 성공한다.’ 왜 그러한가? 좋은 환경 속에서 잘한 것을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생애가 실패와 불행과 고난,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사람만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개척한 교회에 계신 목사님은 목회 성공의 50%를 보장받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 가운데 안되는 교회를 맡으신 분 계십니까? 그 분은 벌써 성공의 50%를 보장받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실패한다 하여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는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의식,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의 성공, 성공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므로 하늘 아버지 앞에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를 조금 크게 세우고, 교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성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권능을 행하고 많은 표적을 행한 사람에게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될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고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라 이전 것들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바울 사도가 말했습니다. 새 것이란 무엇입니까?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보니 똑같은 세상이지만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온 천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고, 천하만물이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 목사의 목사관, 자가용, 양복을 보고 부러워 하고 있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성공을 보는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성공에는 목적으로서의 성공, 과정으로서의 성공, 결과로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목적으로서의 성공은 자기가 하는 일에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최대의 실패는 목적의 실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적없이 하는 목회는 근본적으로 실패인 것입니다.

어느 산상집회에서 성령을 받아라. 그래야 자가용도 사고, 월급도 올라갈 것 아니냐고 부르짖는 부흥사의 설교를 듣다가 어느 목사님은 저렇게 타락할 수가 있을까?’ 한탄하며 하산했다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다 실패입니다.

과정으로서의 성공이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결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실패자입니다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없다고 실패가 아닙니다. 목회하면서 성실과 최선을 다했다면 그 사람은 과정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결과로서의 성공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성공을 다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의식 개발에 있습니다. 의식개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소명의식을 개발하라

 

그 첫 번째는 소명의식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부릅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이 말씀을 듣고 예레미야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시면서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여 심게 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목회자로 예정되었고, 일을 맡기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이 소명의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 번 태어납니다. 한 번은 영적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구원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소명이라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영적인 일을 위해서 태어나는데 이것을 사명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적인 소명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일을 위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자신이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를 점검해 봅시다.

 

첫째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자기가 하는 일을 귀하게 느끼는 것을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직업이 소명의식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40년을 목회하고 겨우 13평 아파트에서 여생을 지낸다고 하면서, 교장으로 은퇴하여 50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동창을 부러워하셨습니다. 일생을 주의 사역에 희생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시는 모습이 더욱 가련하게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한번 물어보십시다. 목사에게 희생이 있습니까? 목사에게는 희생이 없습니다. 희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자기 공로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희생은 없습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건너가 그의 일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투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전생애를 희생하신 당신의 위대한 생애를 높이 찬양합니다.” 이에 리빙스톤은 주께서 날 부르시고, 시간마다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감사와 감격과 기쁨 속에 살면서 보답도 못했는데, 나는 희생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분명한 소명의식이 없으면 일생을 주의 사역에 헌신 할지라고 그것은 허상이요 위선일 뿐입니다.

 

가끔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대학에 떨어져서 여기에 왔으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합리화이지 소명의식은 아닙니다. 소명의식이란 일류대학에 입학할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의 일이 너무 귀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왔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으나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때 주께서 고기잡는 어부가 되지 말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을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그 많은 고기를 팔아 장사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고기가 안 잡혔을 때 따른 것이 아니라, 많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일에 실패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회개하면 됩니다. “이 어리석은 종을 용서하소서 주의 부르심을 일찍이 깨닫지 못하고 실패하고서 깨닫는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소명의식을 새롭게 갖는 것이 최선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소명의식은 자기가 하는 일은 쉽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라는 의식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자기 일이 아닌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결실이 없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7. 교회발전과 설교 개발]

 

 

이 중 표 목사

 

교회발전의 성서적 의미

저는 오늘 밤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설교자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제가 설교자로서 능력이 있어서 여기 선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능력있는 설교자로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자그마한 연구 발표일 뿐입니다.

목회자로서 공통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부흥이요, 그리고 설교를 잘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설교를 잘한다고 하여 교회가 반드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잘 못해도 교회가 성장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설교를 잘 해야 교회는 발전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잘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는 설교가 잘하는 설교인가에 대한 설교학적인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설교학적으로 완벽한 설교를 한다고 하여 교회가 성장하거나 설교를 통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설교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하여 좋은 설교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고치는 신유의 설교를 합니다. 많은 병자가 고침 받으러 모이기도 하고 또 고침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귀신을 쫓아내는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기도 합니다. 어느 면에서 말씀의 능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설교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는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설교자는 많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청중이 많고 성전을 크게 짓고 교회가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빌딩을 짓고 사업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 발전은 성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장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장이 물량적이라면 발전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성장이 외적인 것이라면 발전은 내적인 것입니다. 성장이 사적인 것이라면 발전은 공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확장되고 기독교인의 수가 날마다 늘어서 기독교의 왕국처럼 되었는데도 여전히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부조리와 악이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교회발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장은 제도적 교회의 종교적 성장이며 발전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는 복음운동입니다. 능력있는 설교는 결과에 있어서 교회발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설교가 교회발전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였어도 그것은 능력있는 설교는 아닙니다.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최초의 설교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베드로는 성령받고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설교자가 되었고, 그의 설교는 교회를 발전시켰고 성장도 시켰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성장 측면에서도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교회발전 측면에 더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한번 설교에 3천명이나 더하더라 했는데 여기에는 숫자만 보아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사도행전 241절에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한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도 빌리그레함 전도대회에서 설교 듣고 하룻밤에 3천명이 결신하고 손들고 등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출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자의 수가 3천이었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44절에는 말씀을 들은 사람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었더라” 514절에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했습니다.

여기 두 번이나 성장의 숫자가 나오는데 여기는 제자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큰 사건이 있었으니 2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날에 제자의 수가 3 천이나 더하더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곧 교회발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을 구분하면 제자가 있고 학생이 있습니다. 학생은 선생의 지식과 기능을 배웁니다. 그리고 배우면 졸업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졸업이 없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배웁니다. 설교의 능력은 예수님의 인격을 닯도록 역사하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너희가 모든 족속 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 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삼으라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는 신도들이 예수님의 제자 입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 학생이 된 것 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출세방법을 배우고 병낫는 방법을 배우고 죄짓고 천국의 위로를 받는 학생들로 초만원 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 사도같은 설교 능력이 나타났다면 어찌할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도 그런 회개의 사건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설교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 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함께 물질을 통용하고 네것, 내것을 찾지 않고 재산 있는 사람은 그것을 팔아 공동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공유생활은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요, 천국의 한 그림자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도들에게 설교의 능력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실현되는 복음운동의 산 증거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극도의 이기주의 기복성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외쳐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여드는 것이 설교에 큰 능력이 나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의 능력 이 나타나야 되겠고 교회마다 참 예수님의 제자가 날마다 더 하여야 되겠습니다.

 

개발1-설교의 내용

먼저, 설교의 권능은 설교의 내용에서 나타납니다. 능력있는 설교는 설교의 내용에서 솟아오릅니다. 설교가 권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케리그마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설교는 그 목적이 윤리적인 것이든 위로를 위한 것이 든 또는 복음적인 것이든 교리적인 것이든 반드시 구속적인 선포에 기초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저들이 어찌할꼬 회개하는 큰 능력이 나타 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설교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예수의 선포는 모든 설교의 진정한 출발이요, 그 근거이며 내용이며 대상이 됩니다. 사도 들은 성령이 강림한 이후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고 자신이 에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분석하여 보면

첫째, 구약의 약속하신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모든 사실은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된 것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보내서 오신 것이며 예수의 부활 사건도 하나님의 권능때문 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 있을 수 없었음이라(2:23~24). 또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2:33) 하였습니다. 오순절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베드로는 이 약속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하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적 사건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케리그마였습니다. 철저하게도 예수로 시작하여 예수로 마치는 설교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설교에 그토록큰 권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살아계신 말씀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면서 예수님께 가보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나 왕이 나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 성경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는 우리의 몽학선생입니다.(3:24) 율법이 우리의 불순종한 일에 대하여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수 불가결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우리가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게 나가도록 몰아부칩니다. 그 다른 예로 구약의 회생제도는 죄에 대한 완전한 회생이 십자가 뒤에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예로는 메시야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런 그를 그의 왕국이 임하면 평화와 의와 안정이 따를 다윗 왕조의 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세계의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해서 죽을 주의 고난받을 종으로 모든 백성이 섬길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쪼개고 쪼개보면 예수가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을 쪼개면 예수가 있습니다. 모세를 쪼개면 예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쪼개고 이사야를 쪼개어도 그속에 예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위대한 것은 그 중심에 있는 예수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성경을 이루었다고 친히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신 후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4~15)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한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고, 회개하고 복을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전파한 내용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말한 중거대로 내가 왔다고 전파하신 것입니다. 곧 자기가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 예배하러 가셨을 때 그는 이사야 61장을 읽으면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 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 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전파가 헬라어로 케류세인이란 단어입니다. 여기 전파하는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또한 전파하는 내용은 예수님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자기 자신이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성령이 임한 후 전파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꼬회개 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2:36~37)

바울은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니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고전 2:4~5) 하였습니다. 여기 바울이 전도라고 한 단어가 케리그마입니다. 바울의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케리그마는 케류세인에서 온 명사입니다. 케류세인이 전파한다는 동사인데 케리그마는 전파하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부활, 재림의 전 사건을 의미합니다. 결국 설교는 케리그마를 증언하는 것이요, 성서의 케리그마요, 교회의 생명이 케리그마입니다. 설교가 케리그마를 증언하는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서 케리그마를 증언하지 못하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성경속에 있는 케리그마를 발견하지 못하고 탈무드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나 교훈을 중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영적인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없이도 성경은 어느 정도 유익합니다. 시편을 읽으면 시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잠언서를 읽으면 정치철학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인간 윤리의 대강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적으로 유익하려면 성경에서 케리그마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예수사진)을 통해 그리스도와 생동감 넘치는 교제를 지속할 때 영적으로 은혜가 됩니다.

2천년 교회역사를 돌아볼 때 기독교의 성쇠는 그 시대 설교에 케리그마가 있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발전했던 시대는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행전 1세기처럼 케리그마가 선포된 때이고 쇠있습니다. 중세기처럼 교회 당도 많고 신자도 많이 있었으나 교회가 케리그마를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초대교회 로마의 핍박 속에서 기독교회가 지하에 들어가 있을 때는 흥했고 중세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하였을 때는 쇠했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흥한 것도 아니요, 사람이 적었다고 쇠한것도 아닙니다. 케리그마 없는 신앙은 아무리 많아도 교회는 쇠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중심이 케리그마요, 교회의 중심이 케리그마요, 설교의 중심이 케리그마요, 신앙이 케리그마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기독교인이 일천만을 넘는다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케리그마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복 받으시오 하니까 너도 나도 불교적으로 무속적 신앙으로 세속적 기복을 위하여 모여들었습니다.

 

 

 

[8. 사도적 설교와 그 개발]

 

 

이 상 훈 교수

(서울신대)

 

서  론

 

성실한 신앙과 교훈 신학을 수용하는 기독교의 지성은 신앙과 규범을 현대정신에 의해 홍수처럼 나오는 오늘의 수필신학 위에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의 증언 위에 확실히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초부터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 종교성이나 인간의 공통적 심성인 종교적 본능이나 그러한 인간의 갈구가 축적되어 창출한 종교적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연인의 심성을 압도하고 모든 자연인의 지성을 심판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사건이 그 출발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론

현 세계 의식의 거대한 흐름

 

소위 초대교회 이후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크리스찬들은 오늘의 세속 철학과 현대의식으로 재조명한 여러 형태의 세속신학의 선전을 너무나 많이 접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의 세속적 지성이 경험론적 실증의 유일한 방법론이 되어 비평하고 분석한 합리주의의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구원과 영생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전대미문의 도전을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앞에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의식이 매스컴을 주도하고 이런 자유로운 비평적 방법론을 현대교육의 핵으로 시행하는 강의실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내일의 세대를 그들에게 위임하려고 하는 현대교육의 거대한 흐름을 비평 신학자 존 나이스피트는 메가트랜드’(Mega-trend)라고 했습니다. 메가톤의 메가(Mega), 흐름이라는 트랜드(trend)입니다.

현대인의 의식이 당당하게 대하처럼 흘러가고 있는 그 속에 우리 목회자 는 가령 교회성장이 양이 양을 출산학적으로 출산하는 성장원리에 기대한다거나 교회성장이 관광학 개론의 이론에서 좋은 장소에 보기 좋은 건물을 호텔처럼 세워 자기 과시를 할 필요가 있다거나 큰 군중을 도식적으로 초조직함으로 능률화하여 효율성이 증대되는 힘의 논리를 교회성장학에서 활용하여야 한다고 하는 등등의 세미나 교육은 나름대로 현장교육의 개선책은 되지만 작금의 도도한 세속정신과 가치론에 의한 민중의식화의 도전 앞에서는 너무나 임시적이고 잠정적이고 실적신학의 방법론이 아니냐는 심각한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성서와 비교될만한 베스트셀러인 메가트랜드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존 나이스피트는 오늘 우리가 3의 자각 또는 제3의 혁명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교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에 이어 오늘의 의식혁명에서 오늘의 교회가 그 도전의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기에서 그러한 기회를 다시 한번 원천적 기독교의 에너지인 사도적 증언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증언의 원형적 이해가 절대적 요구이면서 동시적으로 초대교회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증언의 막중한 의미는 그들만이 예수의 공생애의 동참자요, 역사적 예수의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각별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들이 예수 지식과 증언의 내용과 그들의 신앙 규범의 성격에 관한 역사적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역사를 집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교회 역사의 중심적인 존재 였던 12사도에 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는 이유

 

첫째로 사도들은 순수한 역사를 집필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과거 역사를 회상적으로 저술하려는 의사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역할에 전심했습니다. 상술한 순수한 역사의 집필은 니케야 교부 들 시대에 와서야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의 집필 동기 역시 일반 역사의 문서 가 아닌 기독교 변증의 문서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어떻게 종교의 구조에서 벗어나 이방인 선교의 거시적 안목을 지닌 세계 교회가 어떻게 출현했는가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만일 저자 누가에게 질문을 했다고 하면 그가 초대교희의 막중한 역사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스승인 바울의 변호를 의도한 것이 결과적으로 초대교회의 유일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둘째로 초대교회 시대는 복음서 집필과 바울의 편지 등이 집필된 이후에 다시 침묵기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기독교의 활동이 터널을 통과하는 비유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복음서나 신약의 편지들이 복음이 전도된 초기의 요구에 응한 문서들이고, 예수의 재림이 매일매일 뜨겁게 대망되는 역동적인 초기의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예수의 재림이 가장 강력한 주제였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미래를 지향한 교류와 질서에 관한 이론의 체계가 아직은 요구되지 않았으며 그런 자각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사정으로 보아 바울의 설교 주제는 긴박한 예수의 재림이었고 그 강조가 너무 강력하여 바울이 그것을 전한 후에는 일손을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연로하여 죽은 연장자의 구원을 걱정하는 가정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역사의 기록이 필요하다고 아무도 언급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초대교회 사도들의 기록이 희소한 까닭은 사도들이 전기문학의 제목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활동을 제보해 줄 역사적 기록은 아주 적습니다.

오늘의 안목에서 평가하면 사도들은 초대교회의 건립자요, 창립자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의 맥락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교리와 교회의 감독자이기 보다는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증인이며, 아직 조직이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전도자의 유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 때 이방인이 구원의 권속 안에 수용되는 최초의 교리도 거기에 모인 전원의 동의에 의해서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사례일 뿐(1528) 아직 고위층의 권위라는 교회론적 구상은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은 아직 조직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전도자이고, 교회정치가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 의 이야기는 전도자의 이야기일 뿐 아직 교회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기원 69년 이전 예루살렘 안에 머문 유대인 교회의 활동은 거의 아는 바가 없고, 70년 예루살렘 몰락 이후에는 사도들이 뿔뿔이 흩어져각처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맛디아는 현대의 소비에트 흑해 동안의 아르메니안 지방에서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서,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마가는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을 지낸 후에 구주의 오지의 고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넷째로 당신의 로마제국이나 희랍문화에서는 아직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취급이 되어야 할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초기 당시 역사적 관심은 제왕과 정치가에 관한 일이며 갈릴리 어부들이 전한 갈리리 목수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요세푸스도 예수의 형제 야곱의 순교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기독교 자체 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젊은 사도의 기록을 빼놓고는 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바 없고 사도시대가 훨씬 지나가서야눈을 돌렸습니다. 실제적으로 12사도의 행적과 영향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언급은 헤게시프스나 유세피우스 같은 조직된 교회지도자의 시대에 가서야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몇 사람을 예외로 하고 평범한 존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누가 쓰겠습니까?

그럼에도 현대 지식은 초대교회가 있었던 그 시대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당시 로마 역사에 관한 연구가 지금에 지극히 활발하여 새로운 고고학적 고증에 의한 많은 지식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런 활발한 로마제국의 역사적 연구 속에서 사도들이 생존했던 그 세계의 정황에 관한 지식이 마치 엊그저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런 활발한 역사탐구로도 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무엇이 아니다하는 만큼이나 어떠했다고 하는 상당히 정확한 유추를 해낼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들어 사도시대의 로마는 비교적 안정되어 시민들의 유동이 활발하였고 광범한 문화의 교류가 가능한 환경이었습니다. 한 예로 고린 도에서 바울이 써 보낸 로마서를 보면 아직 바울이 방문한 일이 없는 로마시 에는 이미 바울을 잘 아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 편지 속에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주전 60년에 나온 시세로의여행기에는 주전 50년에 시저 가 영국을 침공한 사실이 그 사회가 안으로는 광범위하게 안정되었고 또 열려있는 역동적 사회였음을 알게 합니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제국은 한 언어 한 통치자에 의한 질서, 구석구석 도로가 발달한 방대한 영역으로서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인도에서 서반아까지 도로망이 있어 불편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주전 44년에 시저가 이미 정복한 서반아의 선교를 소망한 적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코 무리가 없는 생각입니다. 사도시대는 그들의 선교활동이 성공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문명, 통일된 판도, 활발한 교통수단, 하나의 언어, 이 네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활짝 열린 무대 위에서, 그리고 그 너머의 변경으로까지 힘차게 뛰는 사도들의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역사가는 기독교 자체를 거의 간과해 버렸습니다.

 

다섯째로 사도시대가 지난 후에는 하나의 기독교가 희랍과 로마로 분리되었습니다.

사태가 크게 변화되어 소위 로마제국 자체가 로마와 바잔틴으로 분리되면 서 동방기독교, 서방기독교로 나뉜 교회는 서로 사도적 권위와 정통성을 시비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교회는 사도들의 유물, 유품 등의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때 콘스탄틴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소위 12사도의 교회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사도들의 거룩한 뼈들을 수집하여 한 곳에 묻은 공동묘지를 터로 정하여 그 위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콘스탄틴 대제의 유명한 12사도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사도 안드레, 사도 아닌 사도적 권위의 지도자 누가, 디모데의 유골은 입수할 수 있었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뼈는 특별히 안치될 방만 준비했을 뿐 그대로 로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콘스탄틴의 꿈은 두 줄로 12사도의 유골을 안치하고 그 중심에 자기의 무덤이 위치하도록 설계했었지 만 결국 자기 무덤 이외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고 유세피우스의콘스탄 최후의 날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꿈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유골을 찾기 시작한 노력의 출발점이 되어 쇠위 카톨릭 교회의 유품을 정중히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교회와 중세의 정치 권력자에게 더욱 극단화되어 고가를 지불하여 뼈를 얻고 유품을 얻는 미신의 요소가 불필요악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도 연구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지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동서 구교가 성유골에 대한 경쟁을 덜 할 뿐 아니라 교황 바오로 경우에는 그가 로마에 안치하여 온 안드레의 뼈를 도로 안드레의 순교지인 희랍에 반납하여 동서교회의 화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사도들의 선교 동기의 이해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사도 연구에 있어서 부동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외없이 전원이 마태복음 28장에 기록이 된대로 예수님의 위대한 선교명령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이야기 다시 말해 사도들의 역사는 주로 초대교회의전도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들은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는 서민이나 왕, 모두에게 차별없는 전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여 자급하는 사람들로, 유급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중 바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할 수 있는 대로 더 멀리 찾아가 남이 이미 세운 터 위에 세우지 않았다고 하였거니와 대체적으로 모든 사도들이 그와 같이 거의 단독 개척의 전도를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그들에게는 뚜렷한 사도적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사도들에게는 비상하고도 지극히 현명한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상역로상에 위치한 큰 도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중심에서 다시 사도의 제자들이나 결신자들을 도시의 외곽으로, 그들의 거주지로 보내어 그 자리에 교회를 설립하게 하였고 그렇게 설립된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활용한 방법은 전략적으로 중심분산이라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의 근거와 복귀라는 방법만을 일삼는 현대의 선교행위, 선교기구, 선교회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당시의 사도들은 교회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들이 세운 것은 교회 회중 또는 교회 신자였습니다. 많은 현대의 선교활동은 교회와 분리되어서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도록 다시 움직이는 데 힘이 듭니다. 아니면 밖에 있는 선교기구를 교회 안에 끌어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결신자들로 하여금 즉각 교회가 되게 했다는 그 점을 현대의 전도학이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근래의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태국으로 진출한 모든 선교사는 지금 전부 LA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출국한 선교사는 전부 미국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이민의 변형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규범적인 가치를 거기에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5절에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이 말씀은 그의 신학적 요약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했다는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소위 세인트(saint)라고 하는 머릿글 칭호를 로마교회와 희랍교회가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 많은 종교 위인들에게 이 관례를 적용함으로써 사도들의 실상보다 지나치게 위대하게 숭앙하는 점도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신약의 정전으로 매듭이 끝나기 전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21:14)고 말한 본문이 있습니다. 이미 기원 1세기 후반에 가롯 유다가 떠난 자리에서 맛디아가 초대교회 전체의 인정 속에서 사도로 있었다는 증언으로 중시되는 이 본문으로 미루어 볼 때 서서히 12사도의 행적과 그 의미성이 새 예루살렘의 기초로서 평가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12사도의 요건

전통적 이해대로 예수가 12사도를 택한 것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상징적 의미때문일까요? 예수 자신이 새로운 영혼의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열세번째의 지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21~22절에 보면 베드로의 사도적 모습을 예수의 구속적 공생애에 관한 동반자적 지식과 함께 예수의 부활에 관해 우리로 더불어 증거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규범에서 맛디아가 피선되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의 회심 이후에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사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지만 그 많은 수고와 또한 표적과 크신 능력에도 불구하고 12사도로 용납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15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12사도의 관계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유대주의 속에 한 갈래의 운동이었던 것이 바울의 부신 활동으로 설명되는 바와같이 어떻게 지중해 연안 제도시의 기독교가 되었으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50년이 못되어 로마제국의 전 판도를 굴복시키는 세계의 종교가 되었는가의 이해를 위한 단서가 될 유일한 초대교회의 역사문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어떻게 유대적 기독교의 핵심에서 성장하여 배타적인 유대주의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고 이방인 기독교가 되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은 어떻게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기독교에서 바울 중심인 세계의 기독교로 발전했는가의 해명입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베드로도 바울과 동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에서 선교했습니다. 그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 큰 이유도 되지만 제 1세기 이후에 실제적으로 유대인 사회 안에서는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이 명백히 하는 바는 기독교가 유대인 사회의 구조와 맥락 안에 서, 한 갈릴리 목수에서 시작된 메시야 운동이었지만 다른 우수한 종교적 에너지인 바리새나 사두개나 에세네파 같이 유대주의와 유대인 배타적감정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한 신앙 운동이 왜 아니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같이 사도행전으로 완벽한 초대교회 역사를 찾아내려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의 뜨거운 정열로 귀국한 당시 14개 지역의 모든 교회와 그들의 성장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친구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의 처형시에 북부로 도주하여 짐작컨대 흑해 연안인 남부 코카서스에 정착했다는 추측은 있지만 그후 그들의 소식과 함께 당시 흑해 연안의 기독교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9. 설교의 정신 분석학적 이해]

 

김 호 식 목 사

(경동교회)

서 론

 

우리나라의 무교를 연구해 보면, 세습무말고 강신무의 경우에 있어 소위 입신이라고 하여 무당이 되는 과정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냥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나서 몸살을 앓고 어떤 심신의 이상상태에 들어간 후에 갑작스러운 치유와 동시에 입신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학적으로 말할 때 무교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우리나라 천도교의 창시자 최수운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최수운은 제세안민(濟世安民)하기 위하여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을 모두 다 섭렵했지만 처음엔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045일 갑자기 몸살같이 몸이 떨려오고 한기가 드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병이 무슨 병일까? 아마 그 병은 보통 병은 아닌 것 같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영적인 몸살이라고 할 그런 병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갑자기 대오각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는 법열과 희열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바로 입신하여 신적인 존재와 접합하게 되고 신탁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과 설교

 

구약의 예언자들 역시 예언자가 되기 전에 어떤 예언자 병을 앓게 되는데 특히 문서에 기록된 후기 예언자들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겔서 315절을 보면 에스겔이 얼마나 병을 앓았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야웨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올렸다. 야웨의 손에 꽉 잡혀 내 동족이 포로되어 와서 살고 있는 그발강 텔아비브까지 끌려갔다. 칠일이 지난 후에야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운다.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본문에서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라고 했는데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대신자라는 말입니다.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 거기다가 자기의 지식이나 자기의 많은 생각들을 덧붙여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못되게 구는 자에게는 그 그릇된 길을 떠나 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일러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님의 예언자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의 책임이라고 할까.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뒤에 에스겔은 야웨의 포성에 묶여 벙어리가 되어서 몸살을 치르다가, 22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기운을 힘입어 열리는 그런 광경이 나옵니다.

다니엘서 10장을 보면 정월 24일 티그리스 강가에 혼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입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그 장엄한 모습을 보다가 그만 땅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난 후 몸살을 앓게 됩니다. 즉 정신나간 사람, 미친 사람같은 영적인 몸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도 계시를 받던 순간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너무나 괴로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포에 떨던 순간을 213~4절에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박국도 3:16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뱃속이 뒤클리고 입이 떨리고 아랫도리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론

 

이와같이 예언자는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언자 병, 영적 몸살을 앓고 신에 접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점은 우리 설교자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문을 닫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으며, 하나님의 영에 접하는 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스겔처럼 묵상의 시간에 우리의 몸을 위탁해야 할 것이며, 사람 앞에서 말하기 전에 한번 벙어리가 되는 어떤 기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홀로 있는 시간을 통과해서 공적인 생활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목마른 영혼들에게 물을 주기 전에 먼저 우리의 그릇을 깊은 생의 근원으로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 사회의 유한한 정황을 옳게 읽기 전에 무한과 먼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지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예언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고 신탁을 받기위해서 몸살을 치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신도들에게 공부를 시킬 때에도 성경에 관한 이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중요한 교수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목사들은 사람들을 영혼의 절대자의 현전에 다가서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영혼의 문외한이어서는 회중들을 그곳으로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영적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주의 영으로 하여금 직접 말씀하시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에 은혜받아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입으로 말은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슴 속에 계시는 주의 영이 직접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에스겔의 양면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은 고요한 독거, 혼자 있는 그런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가 하면 사회로 나아가서 거리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막 돌아다니는 면도 보여줍니다.

여기에 어떤 법칙이 생기는데 그것은 시대적 정황(context)에 대해 너무 어두우면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상실하게 되고, 또 시대적 정황에 너무 밝으면 영적인 요소가 죽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K. Barth는 성경과 동시에 신문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text를 알기 위한 것이고 신문을 읽는 것은 context를 알기위한 방법인데 성경을 읽지 않고 context만 너무 많이 읽으면 세상 정황은 잘 알지만 반면 영적 요소가 죽어 버리고, text만 읽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혀 모르면 우리가 설교할 때 회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는 소리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항상 정황 속에 살고 있고 늘 상황과 맞부딪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현 위치를 파악해서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조화를 어떻게 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설교자가 병을 앓지 않으면, 고민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설교자가 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엘 2:27, 28을 볼 것 같으면 너희 젊은이들은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면 너희 아들과 딸은 환상을 보리라그러니까 환상, 예언, 꿈 이런 것들이 영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래를 예언하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좀 뒤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실과 예언하는 것 사이의 간격 때문에 욕을 먹을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소지도 안고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설교의 말씀은 항상 조직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환상이 없어집니다. 꿈이 없어집니다. 때때로 논리를 초월해서 현실을 비약해서 비논리, 초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소위 설교의 영성(spirituality)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보통 강의와 다른 것은 거기에 어떤 꿈이 있고 영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은 때때로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햇빛이 환하건만 산 위에 올라가서 배를 만드는 노아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겠습니까. ‘저 병신! 햇빛나는데 배를 만들다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사람은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각오를 해야 됩니다.

현실에 아부하고 현실의 달콤한 말만 한다는 것은 설교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설교에는 어떤 논리(theoretic)보다는 환상적인 것(fantastic)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환상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설교자로서 제일 어려운 것은 설교 횟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우유를 마시려면 소에게 좋은 먹이를 먹여야 되는데, 우리 교인들은 목사님들에게 좋은 먹이 줄 생각은 안하고 자꾸 젖만 짤 생각만 해요. “젖 나오라, 젖 나오라그러나 먹은 것이 없으니까 나올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런 모임에 와서 우리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참신하게 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목회 생활이라는 것이 너무 바빠서 심방하랴, 병문안하랴 장례며 생일이며 너무나 행사들이 많아서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도 없거니와 고단하고 지쳐서 책을 펴 놓고는 졸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설교하기 위해서 무엇을 채워야 하는데, 채워지지 않았으니 결국 남의 설교집을 들추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설교집을 보더라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서 살을 붙여야 되는데, 정리할 시간조차 없어 남의 것을 먹고 그냥 그 자리에서 설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설교에 회중이 감동하고 삶이 변하고 폭발적인 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맥이 빠져 있는데 어떻게 회중들이 그 맥빠진 설교를 듣고 감격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은 김선도 목사님이 계시는 광림교회 주변의 주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를 선택할 때 어떤 점을 보고 선택하십니까?’의 물음에서 교회 종파를 보고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이 8.78%입니다.

다음에 거리가 가깝고 가기 편한 곳에 가겠다는 응답자는 26.98%입니다. 도시 교인들의 1/4은 그저 가기 편한 데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R.Schuller의 이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R.Schuller는 교회가 수퍼마켙 같아야 된다고 합니다. 수퍼마켙이 사람이 가기 힘든 산꼭대기에 있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수퍼마켙처럼 가기 편하고, 주차하기도 편한 그런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교인들의 구성요소를 보겠다는 응답은 7%이고, 설교를 들어보고 교회를 선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44.44%입니다. 반수의 교인들은 설교 때문에 갈 뿐 교회를 섬기려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시에서 목회하기 위해서는 회중의 그런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매저키즘적 자기과시

 

그러면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통계표에도 잘 나와 있듯이 한 50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해 보면 “textcontext에다가 재해석하는 것즉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변하는 정황 속에 다시 한 번 재해석 하는 작업이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황에다가 가지고 와서 동시대화하는 작업이다.” 동시대화라는 말은 성경이 이천년 전에 씌어졌지만은 이천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지금 현대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던 유대 민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야가 대립하고 학생과 군인이 대립하는 지금 이 정황에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선포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한 가지 정의를 내리자면 설교를 매저키즘(masochism)적인 자기과시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매저키즘은 새디즘(sadism)의 반대를 말합니다. 새디즘은 가학증, 매저키즘은 피학대증으로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서 피동되고 억눌림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매저키즘적인 자기과시다라고 하는 말은 조금 상반되는 개념을 붙여 놓은 이야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회중의 요구가 context의 요구에 의하여 피동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해 들어오고, 회중이 원하고 있고 그 다음에 context가 있는 정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자같이 병을 앓지 않았던 것처럼, 많은 국민들 가운데서 특별히 영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사회의 사건들이 모든 국민들에게 동일하다 하더라도 몸살을 앓습니다. 특별히 예민한 사람은 밥도 못 먹고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소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예민한 감각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6·10사태, 4·13조치 등 보통 국민은 그저 그런가 보다 옛날에 하던 것 또 반복하겠지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장사하고, 열심히 자식 낳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데 일부의 사람은 속이 상하고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어 합니다. 그런 몸살을 하는 사람들이 설교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앞서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은 매저키즘적이라는 뜻이고 자기과시입니다. 자기과시란 말은 설교가가 제 잘난 맛, 우월감이 없으면 설교가로서 성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적으면 마음이 안심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떨린다는 사람은 설교가로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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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지기 추천 0 조회 38 12.06.05 11: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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