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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과 관록으로 빛나는 열정의 아티스트, 듀크 엘링턴 듀크 엘링턴은 대중적인 지지도 엄청나지만, 클래식계에는 그의 작곡 실역이 조지 거쉬인 이후에 | |
지난 1999년 한해는 재즈계와 클래식 음악계 할 것 없이 온통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을 추모하는 음악회로 수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듀크 앨링턴이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적인 지지도 엄청나지만, 클래식계에서는 그의 작곡 실력이 조지 거쉬인 이후에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비록 흑인이었지만 중후한 멋과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심미적인 스타일리스트였다는 면에서, 많은 추종자들과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지목한다. 천하에 맹위를 떨쳤던 | |
듀크 엘링턴은 아버지가 당 시 백악관의 흑인 집사를 맡아 일하던 중류 가정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다감하여 ‘듀크’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였다. 1914∼1917년 사이에 암스트롱 하이 스쿨 재학중, 흑인종 지위 향상 협회가 주최한 포스터 콘테스트에서 수상했던 미술적인 자질과 더불어, 이 무렵 이미 여러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적인 소양 또한 겸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절묘한 기회가 왔다.‘푸들’이라는 카페의 피아니스트 레스터 딧츠맨의 대역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처녀작 <소다 파운틴 래그>를 작곡했다. 헨리 그랜트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고, 애버트 하우스의 차석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며, 오리엔탈 극장에서도 연주했다. 오토 하드윅(AS), 아더 웨셀(TP)과 함께 위스콘신에서 잠시 동안 연주한 후 ‘더 듀크스 세레네이더즈’를 결성하였다. 1923년 3월 5일부터 11일까지 윌버 스웨트맨과 일주일 계약으로 뉴욕에 갔다가 곧바로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엘마 스노든과 애틀랜틱 시티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워싱터니언’이라는 명칭의 스노든 밴드는 뉴욕의‘배런 윌킨스 클럽’을 거쳐,‘헐리우드 클럽’의 전속이 되었다. 드디어 1924년 봄, 듀크는 리더가 되며, 다음해 그는 작사가 조 트랜트와 같이 ‘초콜릿 키디즈’를 만들었다. 1925∼1927년에 걸쳐서 밴드는 뉴잉글랜드 투어링 콘서트를 하는 한편, ‘켄터키 클럽’을 메인으로 ‘플라밍고’, ‘해리 리치맨즈’, ‘시로’ 등에도 겹치기 출연을 했다. 또 ‘플랜테이션 카페’, ‘라파이에트 극장’, ‘스탠더드 극장’에도 출연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단장한 할렘의 ‘커튼 클럽’과의 출연 계약이 성사되면서 대망의 뉴욕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는데, 1927년 12월부터 1931년 2월까지 이 클럽의 전속으로 활약했다. 엘링턴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진 것도 바로 이‘커튼 클럽’시대로 대변된다. 쟁쟁한 아티스트의 영입으로 밴드의 역량 한층 강화 그 후 엘링턴 악단은 뉴욕, 캘리포니아, 보스턴 일대의 클럽, 극장, 영화관을 순회하며 연주하였다. 1933년 6월에는 영국 순회 공연을 하던 중 듀크 엘링턴의 열렬한 팬이었던 황태자 형제 주최의 파티에 초대되어 연주하는 영광을 누린다. 이런 해외 여행에서 그는 교양 있는 유럽의 신사 숙녀들의 예상 밖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음악계의 상업적인 요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보다 실험적인 대작도 시도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8월에 귀국하여 1938년 6월까지 국내 및 캐나다 투어링과 레코딩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그 해 여름에는 헤르니아(탈장) 수술 때문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때 발레곡 <시티 우먼>을 작곡하고, 그의 영원한 동반자였던 빌리 스트레이혼(작곡과 편곡을 담당)이 입단했다. 1939년 3∼4월에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을 투어링하고, 그 해 가을에는 전설의 베이시스트 지미 블랜턴이 입단한다. 그 다음해인 1940년 봄에 벤 웹스터가 테너 색소포니스트로 입단하면서 전문적인 테너가 없던 공백을 확보하였다. 1941년 여름, 자작곡 뮤지컬 <점프 포죠이>를 LA에서 공연했으며, 대망의 1943년 카네기 홀 콘서트를 성공리에 마쳤다. 1944∼1945년은 국내 순회 공연으로 내실을 기했던 시기로 보인다. 1948년 여름, 과로로 잠시 입원 치료 후 레이 낸스, 케이 데이비스가 빠진 밴드로 유럽 공연을 했다. 1951년에 자니 하지스, 로렌스 브라운, 소니 글리어가 탈퇴하면서 윌리 스미스, 후안 티졸, 루이 벨슨이 입단하는 등 멤버 교체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어서 클라크 테리, 윌리 쿡, 브리트 우트맨이 영입되어 밴드의 역량이 한결 튼튼해졌다. 순탄한 연주 활동 펼쳐 보이며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로 군림 조곡 <할렘>을 카네기 홀에서 초연하였고, 1955년 <나이트 크리에이처>를 또다시 카네기 홀 무대에 올렸으며, <심포니 오브 디 에어>를 엘링턴 악단이 초연했다. 1956년 여름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를 계기로「타임」지의 표지에까지 실릴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9년에는 영화「어떤 살인 Anotomy of a Murder」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 참가하여 그의 다양한 음악성에 일조를 한다. 그는「여왕 조곡」이라는 음반을 특별히 한 장만 프레싱하여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 헌상하는 여유로움도 보이고 있다. 1958년에 자니 하지스, 1960년에는 로렌스 브라운이, 1962년에 쿠티 윌리엄스 등이 차례로 옛집으로 복귀하여 엘링턴 악단의 오리지널리티를 강화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명실공히 최고의 재즈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과시하며 순탄한 연주 활동을 계속하기에 이른다. 물론 캔사스 시티 재즈를 표방한 카운트 베이시 악단도 결코 뒤지지 않지만, 상업적으로나 커리어 면에서 한 수 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일조한 것이 단시일 머무는 예가 없이 대개가 십 년 이상을 하루같이 연주하는 장기 근속자, 즉 엘링턴 악단 멤버들의 노고였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보면 듀크 엘링턴의 인간성과 대인 관계의 원만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면면이다. | |
듀크 엘링턴은 흑인의 정체성에서 일탈한 행위가 아닌 참된 음악으로서의 | |
듀크 엘링턴의 위세는 본국이나 유럽 전지역을 거쳐 일본에도 거센 열풍을 몰고 왔다. 1964년은 동경 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이 해에 일본을 방문한 재즈 뮤지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그중에서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도 6월 첫 일본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이때의 성공으로 1966년, 70년, 72년 1월 연주까지 네 차례에 걸친 투어링 콘서트를 할 수 있었다. 1965년 제1회 세이크리드 콘서트를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서 개최한 후, 1973년 제3회 세이크리드 콘서트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개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 |
이 무렵 발간한 그 의 자서전「Music Is My Mistress」에는 음악을 향한 그의 모든 것이 점철되어 있었다. 1974년 1월에 쓰러져 3개월 가량 입원하는 등 노년에 접어든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더니, 5월 24일에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세수 75세로 영면하였는데, 이상한 사실은 자니 하지스가 1970년 5월에 사망했고, 폴 곤제일브스가 엘링턴이 죽기 전 5월 14일에, 타일리 글렌이 5월 18일에 타계하고 그 해 10월에 해리 카니가 줄줄이 떠났다. 엘링터니언들의 시대를 마감하는 것 같았다. 엘링턴의 사후에 그의 오케스트라는 재정비하여 듀크의 외아들 머서 엘링턴이 이끌어 나갔다. 회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색소폰과 브래스 섹션의 앙상블 생전에 듀크는 몇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하였으나, 역시 수많은 앨범들을 통하여 그의 음악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콜럼비아와 빅터 레코드에는 초기 엘링턴이 숨어 있고, 파블로와 임펄스, 블루 노트에 남기고 있는 작품군에서는 비밥 아티스트들과의 교류가 빈번하고, 그 외에도 MCA/ Coral과 애틀랜틱 레코드에 카탈로그를 장식하고 있다. 빅 밴드 재즈의 편곡에는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서 일하던 돈 레드맨을 창시자로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정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섹션 간의 대립이 아닌 화합이요, 조화다. 환언하면 색소폰과 브래스 섹션의 앙상블이라는 뜻이다. 엘링턴이 창조한 사운드는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악기(트럼펫, 트럼본, 색소폰)가 만들어 내는 컬러풀하면서도 풍부한 사운드를 들으면 상당히 회화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유년 시절부터 미술적인 재능을 발휘한 엘링턴의 색채학적인 접근이 가능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는 면이다. 팔레트에 적당한 물감들을 섞어 맞추듯이, 악기의 사운드를 멋있게 블랜딩하는 것이다. ‘재즈 플레이어는 역시 기악’이라는 말이 있다. 듀크는 피아니스트지만 진정한 악기는 피아노가 아닌 그의 오케스트라인 것이다. 해리 카니처럼 16세에 엘링턴 악단에 들어와 64세로 사망할 때까지 49년 간이나 활동한 뮤지션도 있지만, 중간에 잠시 떠났던 시간을 제하고도 30년 이상 근속한 사람이 여럿 있다. 멤버들의 재능을 일일이 간파하여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작곡은 여타 오케스트라로서는 그대로의 형식으로 연주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구성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었고, 또 성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투영하고 있었다. 엘링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곡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밴드를 위해서 작곡하기 때문에 오보에를 위한 최고의 프레이즈가 생각난다고 해도 버리고 만다. 나의 밴드에는 오보에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밴드는 나의 악기다. 나의 입장은 농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씨를 뿌린 농부는 가을까지 기다리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뿌리면 바로 알고 싶고, 그날 밤 안으로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밴드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엘링턴의 작곡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일생을 통하여 천 곡 이상이나 작곡한 엘링턴은 차라리 작곡이라기 보다는 곡을 쓰는 자체가 생활의 전부요, 연주의 다른 형태라고 보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밴드 리더로서, 수많은 재즈 명곡을 쓴 작곡가로, 그의 일생은 음악과 함께 숨을 쉬었고, 밴드와 더불어 삶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흑인의 정체성에서 일탈한 행위가 아닌 참된 음악으로서의 재즈를 위하여 그는 혼신을 다했던 것이다. 재즈사를 통하여 듀크 엘링턴만큼 모든 뮤지션에게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지대했다는 표현이다. 아직도 살아 숨쉬는 엘링터의 음악은 영원히 그 빛을 발하리라. 지면의 제한으로 엘링턴의 일생을 간단하게 서술하였으나, 기회가 주어지면 엘링턴의 일대기를 단행본으로 만들고 싶은 심정으로 여기에서 멈춘다. | |
듀크 엘링턴의 음반들 Duke’s Big 4Duke Ellington Quart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