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동명성왕(東明聖王)B.C 58~B.C 19 |
B.C 37 ~ B.C 19 |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추모(鄒牟), 추몽(皺蒙),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 고두막루(高豆莫婁)와 유화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解扶婁)와 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東扶餘)의 금와(金蛙)의 아들 대소(帶素)의 모해를 피하여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부위압, 극재사 등과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연호 다물(多勿). 서기전108년 북부여 시대에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하자 졸본(卒本)의 한(汗)이었던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 고두막한(高豆莫汗)이 곧 북부여의 제후인 천자(天子)인 것이다. BC 36년 3월 15일 눌현 천도 |
2 |
유리왕(榴璃, ?~18) |
B.C 19 ~ A.D 18 |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위나암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정비(송씨 : 도절, 해명, 무휼) 사후 후비 화희(고구려여), 차희(한나라여): 황조가 |
3 |
대무신왕(大武神, 4~44) |
18~44 |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괴유 부여왕 대소왕 살해. 호동왕자 |
4 |
민중왕(閔中, ?~48) |
44~48 |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
5 |
모본왕(慕本, ?~53) |
48~53 |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
6 |
태조왕(太祖王 47~165) |
53~146 |
유리왕 손자 궁. 7살의 나이로 즉위 94년간 통치.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국조왕(國祖王) |
7 |
차대왕(次大, 71~165) |
146~165 |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태조왕 맏아들 막근 살해, 막덕은 자살, 76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명림답부에게 시해됨. |
8 |
신대왕(新大, 89~179) |
165~179 |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2년 명림답부를 최초 국상 임명(좌보+우보). 11년 한침입 격퇴. ①拔奇②南武③發岐④延優⑤罽須 |
9 |
고국천왕(故國川, ?~197) |
179~197 |
휘는 남무(南武). 안류의 천거로 을소의 손자 乙巴素 등용. 왕16년 4궁(四窮: 鰥寡孤獨)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賑貸法, 糶糴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왕비 于氏. 왕 19년에 후사없이 사망 |
10 |
산상왕(山上, ?) |
197~229 |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發岐 요동태수 공손도 3만 군사. 우씨와 사이 자식없고 酒桶村 처녀 후녀와 사아에 난 교체(郊彘) : 郊彘仲媒(교체중매). 왕 13년(209년) 국내성에서 환도성 천도 |
11 |
동천왕(東川, ?~248) |
227~247 |
휘는 우위거(憂位居)(교체(郊彘).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동양왕(東襄). 왕 19년 (245)년 위(魏)나라의 관구검(毌丘儉), 왕기에게 함락(陷落). 밀우 유옥구, 유유(적장실해하고 자살)의 분전. 죽은 신하들을 시초로 덮은 柴原 |
12 |
중천왕(中川, ?~270) |
247~270 |
동천왕의 아들 연불. 왕비 연씨. 革囊에 넣어 바다에 던진 관나부인 |
13 |
서천왕(西川, ?~292) |
270~292 |
중천왕 차자.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위멸망후 영토 회복, 왕 11년 동생(안국군) 달가 숙신 격퇴 |
14 |
봉상왕(烽上, ?~300) |
292~300 |
서천왕 아들.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교만하고 시기심 많아 달가 무고히게 죽이고 아우 졸고를 죽이고 그 아들(을불)도 내쫒음. 왕2년과 5년에 전연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북부대형 고노자(高奴子)가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
15 |
미천왕(美川, ?~331) |
300~330 |
서천왕 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 아들. 휘는 을불(乙弗),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음무의 머슴, 소금장수현도군을 공격하고 미천왕 14년 313년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
16 |
고국원왕(故國原, ?~371) |
331~371 |
미천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 국강상왕(國岡上王)·소열제(昭烈帝). 휘는 사유(斯由), 쇠(釗). 336년(고국원왕 6) 동진(東晉)과, 338년에는 후조(後趙)와 연결을 꾀하여 외교면에 힘을 기울였고, 335년 제3현도군 지역을 차지하여 신성(新城)을 축조.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 339년 신성침입, 342년 침입하여 국내성함락하고 미천왕의 시체를 빼앗기고 왕모(王母)(10년후 송환)·왕비(무소식)가 잡혀갔다. 343년 국도를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기고, 전연에 아우 무를 사절을 파견하여 스스로 신하로 칭하여 355년에 전연으로부터 '낙랑공고구려왕'(樂浪公高句麗王)에 봉해짐. 전연과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나, 370년 전진(前秦)이 전연을 격파하고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게 됨에 따라 전진과의 우호수립에 노력했다. 369년 백제가 한반도 중부지역 진출을 꾀하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으나 치양(雉壤: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에게 패했고, 371년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함. |
17 |
소수림왕(小獸林, ?) |
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국내성 천도, 왕2년 372년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태학설립. 373년 율령반포, 374년 초문사와 이불란사 건립. 372년과 374년 전진과 외교사절 교환 |
18 |
고국양왕(故國壤, ?~391) |
384~391 |
소수림왕 동생. 휘는 이련(伊連). 왕 2년 여름 요동성과 현동성 함락, 8월에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왕7년 백제 고구려 공격하여 백성 200명 잡아감 |
19 |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
391~413 |
휘는 담덕(談德). 17세 즉위. 불교를 신봉하였고, 백제공략. 관미성, 수곡성 함락. 영토를 만주(후연, 거란)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 영락대왕(永樂) |
20 |
장수왕(長壽, 394~490) |
413~490 |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427년 평양천도.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휘에 조공외교. 과개토왕비 |
21 |
문자명왕(文咨明, ?~519) |
491~519 |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
22 |
안장왕(安藏, ?~531) |
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
23 |
안원왕(安原, ?) |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
24 |
양원왕(陽原, ?~559) |
545~559 |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
25 |
평원왕(平原, ?~590) |
559~590 |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
26 |
영양왕(瓔陽, ?~618) |
590~618 |
휘는 원(元). 수나라의 조공요구에 왕9년(598년) 고구려의 북천성 선공*대장군 강이식, 부장 을지문덕)에 응수하여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612년)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군대 섬멸하였음.평양왕(平陽) |
27 |
영류왕(榮留, ?~641) |
618~641 |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
28 |
보장왕(寶藏, ?~681) |
642~668 |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645년 안시성 싸움(양만춘, 양수봉, 고연수, 고혜진).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2. 백제(百濟, B.C 18~A.D 660 , 678년간, 총31대)
代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온조왕(溫祚, ?~28) |
B.C 18~A.D 29 |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漢山(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
2 |
다루왕(多婁, ?~77) |
28~77 |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33년 남부주균에서 처음 논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 |
기루왕(己婁, ?~128) |
77~128 |
다루왕의 맏아들. 한강이 처음으로 범람하여 백성들의 집이 무너짐 |
4 |
개루왕(蓋婁, ?~166) |
128~166 |
기루왕의 아들. 신라 아찬 길선이 역모후 도망옴.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
5 |
초고왕(肖古, ?~214) |
166~214 |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 |
구수왕(仇首, ?~234) |
214~234 |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수왕. |
7 |
사반왕(沙泮) |
234 |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
8 |
고이왕(古爾, ?~286) |
234~286 |
초고왕 동생. 6좌평 등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낙랑 변두리 잠식 |
9 |
책계왕(責稽, ?~298) |
286~298 |
고이왕 아들. 낙랑의 작은 나라 왕녀 보과부인. 아차산성 축조. 맥인을 막다가 전사 |
10 |
분서왕(汾西, ?) |
298~304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 |
비류왕(比流, ?~344) |
304~344 |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
12 |
계왕(契王, ?~346) |
344~346 |
분서왕의 맏아들. 설왕 |
13 |
근초고왕(近肖古, ?~375) |
346~375 |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하고 치양(雉壤: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고국원왕 물리치고 . 371년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사유)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3 |
14 |
근구수왕(近仇首, ?~384) |
375~384 |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 많음. |
15 |
침류왕(枕流, ?~385) |
384~385 |
근구수왕의 아들. 동진의 마라난타.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385년 한산에 절을 창건. 동진에 사신 파견 |
16 |
진사왕(辰斯, ?~392) |
385~392 |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다가 병사함. |
17 |
아신왕(阿莘, ?~405) |
392~405 |
침류왕의 아들. 외숙 진무와 동생 훈해와 더불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
18 |
전지왕(琠支, ?~420) |
405~420 |
아신왕의 아들. 琠 1. 두터울 전 2. 착할 전 3. 이를 전 전증(腆贈)후한 선물 |
19 |
구이신왕(久爾辛, ?~427) |
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아신왕이 죽자 동생 훈해가 섭정하고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다른 동생 접례가 훈해를 죽이고 임시왕이 되었다가 살해당한후 즉위하자 어머니 팔수부인이 섭정. 상좌평 설치 |
20 |
비유왕(毘有, ?) |
427~454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
21 |
개로왕(蓋鹵, ?~475) |
455~475 |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도미의 처 사건과 도림(신성)의 바둑으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백제에서 고구려로 달아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 피살됨. |
22 |
문주왕(文周, ?~477) |
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
23 |
삼근왕(三斤, ?) |
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덕솔 진로(眞老)로 하여금 토평하게 함. |
24 |
동성왕(東城, ?~501) |
479~501 |
이름은 모대(牟大). 문주왕 아들 곤지의 아들이며 개로왕의 손자. 493년에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하여 소지왕과 혼인 동맹을 맺고, 북위 침입 격퇴, 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탐라국 조공, 위사좌평 백가에게 피살 |
25 |
무령왕(武寧, ?~523) |
501~523 |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백가 반란 평정.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양과 교류 |
26 |
성왕(聖, ?~554) |
523~554 |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왕 16년 538년 사비(泗沘, 소부리성, 공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남조문화(양) 수용: 모시박사, 열반경, 장인, 화공. 일본에 금동석가상, 경론, 반개관음상, 의박사, 역박사, 불교(노리사치계). 554년 신라를 공격,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함. 성명왕. |
27 |
위덕왕(威德, ?~598) |
554~598 |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
28 |
혜왕(惠, ?~599) |
598~599 |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
29 |
법왕(法, ?) |
599~600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漁獵)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을 착수함. |
30 |
무왕(武, ?~641) |
600~641 |
휘는 장(璋). 薯童. 수(여수전쟁때 중립), 당(조카 복신파견)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미륵사창건 |
31 |
의자왕(義慈, ?~660) |
641~660 |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3. 신라(新羅, B.C.57~935, 992년간, 총 56대) 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代 |
왕 |
재위기간 |
성 |
약사 |
1 |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
BC57~AD4 |
朴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
4~24 |
朴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 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
24~57 |
朴 |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
4 |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
57~80 |
昔 |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
5 |
파사이사금 (婆娑, ?~112) |
80~112 |
朴 |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이사금(祗摩, ?) |
112~134 |
朴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
7 |
일성이사금(逸聖, ?) |
134~154 |
朴 |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
154~184 |
朴 |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 등 내치에 힘씀. |
9 |
벌휴이사금(伐休, ?~196) |
184~196 |
昔 |
탈해왕의 손자(탈해-구추(仇鄒)-벌해) |
10 |
나해이사금(奈解, ?~230) |
196~230 |
昔 |
벌휴왕의 손자. |
11 |
조분이사금(助賁, ?~247) |
230~247 |
昔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
12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
247~261 |
昔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이사금(味鄒, ?~284) |
262~284 |
金 |
김씨 왕가의 시조 |
14 |
유례이사금(儒禮, ?~298) |
284~298 |
昔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
298~310 |
昔 |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16 |
흘해이사금(訖解, ?~356) |
310~356 |
昔 |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
356~402 |
金 |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
18 |
실성마립간(實聖, ?~417) |
402~417 |
金 |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
19 |
눌지마립간(訥祗, ?~458) |
417~458 |
金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마립간(慈悲, ?~479) |
458~479 |
金 |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21 |
소지마립간(炤知, ?) |
479~500 |
金 |
우역(郵驛), 시사(市肆) 설치 |
22 |
지증왕(智證, 437~514) |
500~514 |
金 |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23 |
법흥왕(法興, ?) |
514~540 |
金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24 |
진흥왕(眞興, 534~576) |
540~576 |
金 |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
25 |
진지왕(眞智, ?) |
576~579 |
金 |
휘는 사륜(舍輪) |
26 |
진평왕(眞平, ?~632) |
579~632 |
金 |
휘는 백정(白淨) |
27 |
선덕여왕(善德, ?) |
632~647 |
金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28 |
진덕여왕(眞德, ?~654) |
647~654 |
金 |
휘는 승만(勝蔓) |
29 |
무열왕(武烈, 604~661) |
654~661 |
金 |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
30 |
문무왕(文武, ?~681) |
) 661~681 |
金 |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
31 |
신문왕(神文, ?~692) |
681~691 |
金 |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듬. |
32 |
효소왕(孝昭, 643~702) |
692~702 |
金 |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聖德, ?~737) |
702~737 |
金 |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34 |
효성왕(孝成, ?~742) |
737~742 |
金 |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景德, ?~765) |
742~765 |
金 |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36 |
혜공왕(惠恭, 765~780) |
765~780 |
金 |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宣德, ?~785) |
780~785 |
金 |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
38 |
원성왕(元聖, ?~798) |
785~798 |
金 |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39 |
소성왕(昭聖, ?~800) |
798~800 |
金 |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哀莊, 788~809) |
800~809 |
金 |
휘(諱)는 청명(淸明.)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41 |
헌덕왕(憲德, ?~826) |
809~826 |
金 |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42 |
흥덕왕(興德, ?~836) |
826~836 |
金 |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 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43 |
희강왕(僖康, ?~838) |
836~838 |
金 |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閔哀, ?~839) |
838~839 |
金 |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45 |
신무왕(神武, ?~839) |
839 |
金 |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
46 |
문성왕(文聖, ?) |
839~857 |
金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憲安, ?~861) |
857~861 |
金 |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48 |
경문왕(景文, ?~875) |
861~875 |
金 |
휘는 응렴(膺廉) |
49 |
헌강왕(憲康, ?~886) |
875~886 |
金 |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
50 |
정강왕(定康, ?~887) |
886~887 |
金 |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眞聖, ?~897) |
887~897 |
金 |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
52 |
효공왕(孝恭, ?~912) |
897~912 |
金 |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왕(神德, ?~917) |
913~917 |
朴 |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54 |
경명왕(景明, ?~924) |
917~924 |
朴 |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景哀, ?~927) |
924~927 |
朴 |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
56 |
경순왕(敬順, ?~978) |
927~935 |
金 |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4. 가락(가야)(駕洛, 42~532 , 490년간, 총10대)>
代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수로왕(首露, 42~199) |
42~199 |
수로왕(首露, 42~199) 42~199 |
2 |
거등왕(居登, ?~253) |
99~259 |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
3 |
마품왕(麻品, ?~291) |
259~291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居叱彌, ?~346) |
291~346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伊尸品, ?~407) 아들 |
346~407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坐知, ?~421) |
407~421 |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
7 |
취희왕(吹希, ?~451) |
421~451 |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
8 |
질지왕(?~492) |
451~492 |
취희왕의 아들 |
9 |
겸지왕(鉗知, ?~521) |
492~521 |
고이왕 아들. |
10 |
구형왕(仇衡, ?) |
521~532 |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5. 발해(渤海, 699~926 , 227년간, 총15대)>
代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고왕(高, ?~719) |
699-719 |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2 |
무왕(武, ?~737) |
719~737 |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732년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등주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 |
3 |
문왕(文, ?~?) |
737~793 |
휘는 대흠무(大欽茂). 786년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쓰고 실록 125권 편찬 |
4 |
대원의(大元義, ?~794) |
793~794 |
성격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못되었다. |
5 |
성왕(成, ?~795) |
794~795 |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기고 1념만에 사망 |
6 |
강왕(康, ?~809) |
795~809 |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
7 |
정왕(定, ?~813) |
809~812 |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함. |
8 |
희왕(僖, ?~817) |
812~817 |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
9 |
간왕(簡, ?~818) |
817~818 |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
10 |
선왕(宣, ?~830) |
818~830 |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
11 |
대이진(大彛震, ?~858) |
830~858 |
선왕의 손자.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침. |
12 |
대건황(大虔晃, ?~871) |
858~871 |
|
13 |
대현석(大玄錫, ?~892) |
871~894 |
|
14 |
대위해(大瑋瑎?, ?~906) |
894~906 |
|
15 |
대인선(諲譔?~926) |
906~926 |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
6. 고려(高麗, 918~1392, 473년간, 총 34대)>
代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877~943) |
918~943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
2 |
혜종(惠宗, ?~945) |
943~945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
3 |
정종(定宗, 923~949) |
945~949 |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
4 |
광종(光宗, 925~975) |
949~975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956년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958년 과거제를 실시하고 960년 백관공복 제정. |
5 |
경종(景宗, 955~981) |
975~981 |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
6 |
성종(成宗, 960~997) |
981~997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7 |
목종(穆宗, 980~1009) |
997~1009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현종(顯宗, 992~1031) |
1009~1031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
9 |
덕종(德宗, 1016~34) |
1031~1034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
10 |
정종(靖宗, 1018~46) |
1034~1046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11 |
문종(文宗, 1019~83) |
1046~1083 |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
12 |
순종(順宗, 1046~1083) |
1083 |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선종(宣宗, 1049~1094) |
1083~1094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헌종(獻宗, 1084~1097) |
1094~1095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15 |
숙종(肅宗, 1054~1105) |
1095~1105 |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예종(睿宗, 1079~1122) |
1105~1122 |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
17 |
인종(仁宗, 1109~1146) |
1122~1146 |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18 |
의종(毅宗, 1124~1173) 0 |
1146~1170 |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명종(明宗, 1131~1202) |
1170~1197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20 |
신종(神宗, 1144~1204) |
1197~1204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21 |
희종(熙宗, 1181~1237) |
1204~1211 |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22 |
강종(康宗, 1152~1213) |
1211~1213 |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고종(高宗, 1192~1259) |
1213~1259 |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24 |
원종(元宗, 1219~1274) |
1259~1274 |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25 |
충렬왕(忠烈, 1236~1308) |
1274~1308 |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충선왕(忠宣, 1275~1325) |
1308~1313 |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27 |
충숙왕(忠肅, 1294~1339) |
1313~30, 32-39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
28 |
충혜왕(忠惠, 1315~1344) |
1330~32, 39-44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에서 남만으로 귀영가다 악양땅에서 피살됨. |
29 |
충목왕(忠穆, 1337~1348) |
1344~1348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
30 |
충정왕(忠定, 1337~1352) |
1348~1351 |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
31 |
공민왕(恭愍, 1330~74) |
1351~1374 |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1374년 9월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 권진, 홍관, 한안에게 시해 당함. |
32 |
우왕(禑, 1364~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창왕(昌, ?)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
34 |
공양왕(恭讓,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7. 조선(朝鮮, 1392~1910, 518년간, 총 27대)>
代 |
왕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1335~1408) |
1392~1398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4대문과 4소문. 1396년 金士衡 대마도정벌 |
2 |
정종(定宗, 1357~1419) |
1398~1400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1369~1422) |
1400~14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 1398년, 1400년)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호패법, 신문고 |
4 |
세종(世宗, 1397~1450) |
1418~1450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四郡(崔潤德, 李蕆 : 閭延, 虞芮, 慈城, 茂昌)과 六鎭(金宗瑞: 穩城, 鐘城, 慶源, 慶興, 會寧, 富寧), 남쪽에 삼포(三浦, 내이포(乃而浦)<薺浦, 熊川>, 釜山浦<東萊>, 鹽浦<蔚山>)를 두었음. 1419년 李從茂 대마도 정벌 |
5 |
문종(文宗, 1414~1452) |
1450~145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1441~1457) |
1452~1455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병자사화(丙子士禍, 1456년) 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1417~1468) |
1455~1468 |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
8 |
예종(睿宗, 1441~1469) |
1468~1469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1457~94) |
1469~1494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1494~1506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1488~1544) |
1506~1544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1515~1545) |
1544~1545 |
휘는 호(艤). 章敬王后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1534~1567) |
1545~1567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文定王后의 소생.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14 |
선조(宣祖, 1552~1608) |
1567~1608 |
초휘는 균(鈞), 휘(諱)는 공(公),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1608~1623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1595~1649) |
1623~1649 |
휘 는 종(倧).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 1835년 병자호란을 격음. |
17 |
효종(孝宗, 1619~1659) |
1649~1659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1641~1674) |
1659~1674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1661~1720) |
1674~1720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1688~1724) |
1720~172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1694~1776) |
1724~1776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듦.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1752~1800) |
1776~1800 |
휘는 산.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신해사옥(1791, 정조15), |
23 |
순조(純祖, 1790~1834) |
1800~18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1801, 순조원년)을 비롯하여 을해박해(1815, 순조 115), 정해박해(1827, 순조 27)를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1827~1849) |
1834~1849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1839, 헌종 5)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1831~1863) |
1849~1863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1862년( 철종 13년)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1852~1919) |
1863~1907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1874~1926) |
1907~1910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