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안내하는 게시판입니다.
고요히 집에서 혼자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기서 소개합니다.
성서...
책이기에 그냥 누구든 읽으실 수 있어요.
그러나
신앙의 경전이기에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고전으로 옛 문화와 언어의 옷을 입고 있기에
복잡하고 어렵다는 느낌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일정한 방법을 통해 읽으면 그 메시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탁(神託)을 듣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런 취지로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이르게 되는 성서를 독서하는 고유한 방법을 렉시오디비나라고 합니다.
성서를 읽은 다음에는 무엇인가를 합니다.
이미 읽으시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스치겠지만 멈추어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묵상한다. meditatio(메디따시오) 한다고 합니다.
성서말씀을 주의깊게 읽고 난
읽은 성서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읽은 말씀이 무슨 내용인가? 무슨 뜻인가?
되뇌어 생각해 보고 세밀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적(知的)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지성으로 읽은 내용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엔조 비앙키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메시지가 당신 안에서 깊이있게 메아리치도록,
필요하면 성서본문을 다시 읽으십시오.
마음속으로 말씀들을 되씹으십시오.
그리고 성서 본문의 메시지를 당신 자신의 현재 상황에 적용하십시오.
이때 주의할 점은, 심리 관찰에 빠지거나
양심성찰로 끝나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곰곰이 살핀 말씀 내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읽은 성서말씀이 나를 어떻게 비추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집중하여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어떻게 비추시는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말씀 안에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있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듣는 일'이 일어납니다.
깊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뜻을 헤아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리하는 것입니다.
곧 마음 뜨락에 말씀의 씨가 내려앉은 것입니다.
참고도서들을 알려 드립니다.
엔조 비앙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이연학옮김), 분도출판사, 2001.
텔마 홀, 깊이깊이 말씀 속으로 (차덕희 옮김), 성서와함께, 2001.
서인석, 말씀으로 기도하기, 성서와함께, 2002.
서인석, 말씀의 불꽃, 분도출판사, 2002.
F.R. 데 가스페리스, 렉시오디비나와 영적여정 (최안나옮김), 성서와함께, 2003.
여기서 하는 기도는 특별합니다. 지금 성서를 읽고 잘 생각해서
알아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해 하는 응답이기에 특별하다고 표현했습니다.
평상시 하고 싶던 말씀, 소원, 탄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렉시오 하고
메디따시오 하여 알게된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기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이지요. 이제는 내가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대답하는 것입니다.
3. 기도하기 oratio
마음에 말씀이 들어왔다면
이제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는 겁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고 곱씹고 되뇌는 과정을 통해 마음 한 가운데 모시고
하느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그 말씀 안에서 만납니다.
이것이 '기도하기'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내가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현존하시는 그분을 마주 대하고
들려주신 말씀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말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나의 말이 통교를 하는 것입니다.
응답하는 그 말에는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탄원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신뢰와 진실함으로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성서 말씀을 기록하는데 영감을 불어넣으신 같은 성령께서
성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에 영감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은 '오늘'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며 내 안에서 말씀이 활동하시게 합니다.
이 때 말씀은 내 안에서 살아나 생명을 더해 주고 길을 밝혀줍니다.
엔조 비앙키 수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독서에서 신앙인이 지니는
"예언자" 자질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효력있는
그 말씀을 메아리치게 할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왕"으로서의 자질은 역사를 "축성"하여 구원역사로 만드는 데서 솟아난다.
"사제"로서의 자질은 성서에 기록된 사건과 오늘 사이에,
어떤 성사적인 동시성을 탄생시키는 능력에서 표현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성서에 기록된 한 사건을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알아듣는 능력이다.>>
표현이 굉장히 멋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기도의 노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각 개인의 신앙의 힘에 협력하시며,
개인기도나 공동기도의 절실함에 비례하여 나타나신다>>고 하며
<<거룩한 독서에 앞서 중요한 것은 성서를 읽기 위해
자유로운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하여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서는 어느 한 부분을 선택 혹은 선별하여 읽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어느 한 대목만을 절대적으로 선택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각 대목은 전체 계시 맥락에 이끌리며 읽어야 합니다
④ 관상하기 contemplatio
관상...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얼마나 맛보고 싶은 일인지 해보고 싶은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세요?
연서(戀書)를 받으면 몇 번이나 읽을까요.
글쎄요. 대개는 읽고 또 읽어 담아보낸 마음을 다 헤아릴 때까지 읽지요.
선택해서 쓴 단어의 의미, 반복해서 쓴 단어, 혹은 문장의 의미, 생략한 표현까지...
행간(行間)에 있는 의미까지 읽어냅니다.
다 읽고도 가끔 거기에 담긴 마음 속에 잠겨있지요.
애틋한 사랑 속에...
연인사이에 편지가 아니라도 부모님께서 보낸 편지, 혹은 자제분의 편지, 혹은 소중한 친구의 편지, 존경하는 분이 보내주신 편지 등
마음을 담아보낸 편지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아무튼 연서(戀書) 읽기의 경우가 그 중 Lectio Divina 의 것과 닮은 듯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성서말씀을 세밀하게 읽고 또 읽고(lectio)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여
행간에 숨겨진 의미까지 파악하여
말씀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듣고(meditatio)
하느님께 나의 마음으로 의지로 응답을 한 후에(oratio)
이제는 그 말씀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연서(戀書)를 잘 음미하고 난 다음에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잠겨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물론 큰 차이가 있지만요.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다리며 기다림의 자세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기를,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의탁하는 것.
이 영역은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입니다(contemplatio).
우리는 그저 신뢰하며 수동적으로 있을 따름입니다.
잠깐이지만 이러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듣기를 바라며 있는 시간을 갖습니다.
은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그것은 온전히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편에서는 단지 그분께
렉시오디비나 과정 안에서
잠시나마 그분의 시간을 떼어놓는 것을 할 따름입니다.
어떤 때는 마음에 잔잔하고 고요한 평화가 안개처럼 퍼져오며 마음을 채울 수도 있고,
까닭 모를 기쁨으로 왠지 가볍고 상큼할 수도 있고
이유도 없이 맑은 눈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개운하고 착하고 순해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지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억지로 만들 분위기는 아니고
중요한 것은 경청한 말씀을 따를 순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온유하면서도 단호한 의지와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아마 이 때,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하느님과 일치를 맛 볼 수 있다는 대데레사 성녀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관상의 은혜에는 아직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담기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담기는 일이 일어난다면 관상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귀고2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관상이란 영혼이 하느님께 이끌려 자기 자신을 넘어서 고양되는 것으로서,
영혼은 이때 영원한 감미의 즐거움을 맛봅니다.
독서가 껍질에 머무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 속 깊은 데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이요.
기도가 갈망하게 된 바를 청원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얻게된 감미로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첫댓글 관상이란 주님의 "미스테리온"신비에 몰임하는 것입니다.보이지 않는 천상의 신비를 마나는 체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