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와 열반,
찰라와 영원.
이 단어들은 서로 극단적인 반대말입니다.
생사-는 살고(태어나고) 죽는 것인데, 윤회하는 중생계(2승)이고 열반-은 살고(태어나고) 죽음이 없고, 윤회하지 않은 부처님 세계(1승)이어서 아주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생사 속에 열반이 있고, 열반 속에 생사가 있다." 라고 양 극단을 서로에게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실"의 반대가 "거짓"이라 한다면,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있다" 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역설적 명제입니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말이나 글로는 이런 <대립하는 상대의 법>을 설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만이 이 명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인지요.
사람들은 한 쪽만 좋아합니다. 그와 다른 반대쪽은 부정하고 아주 싫어합니다.
불교인은 불교만 좋아합니다. 다른 종교는 모르기도 하지만 싫어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쁜 것만 좋아합니다. 못나고 더러운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함께 사는 세상. 내 속에도 온갖 것이 다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의 <불구부정>을 나날이 외면서도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좋다 ↔ 싫다>는 이 구별만 없어져도 참으로 시원한 큰 마음이 될텐데요.
찰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영원-은 그 반대인 무한정의 시간인데 이 반대되는 극단도 서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즉일체 다즉일"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이다.=법성게) 와 같은 명제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왜 땀이 나는 것이며, 비명소리(아주 아프거나 아주 슬플 때 내는 외마디 소리)는 또 무엇입니까?
아마도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너무 기뻐서 내는 비명소리 아닐까요?
겨울에는 거지도 춥다고 들어 앉아 동냥도 게을리하다가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 지면 동냥(구걸)을 나섭니다.
거지가 동냥 달라고 오는 걸 보니, 아, 겨울이 다 가고 봄 바람이 불며 봄 꽃들이 곧 피겠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겠구나.
귀뚜라미 소리 가까이 들리니 가을이 왔구나. 우리 인생에도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곧 오겠구나....
===<참고>========
열반 <nirvana> (涅槃) ---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의 ‘니르바나’의 음역인데, 니원(泥洹)·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멸도(滅度)·적멸(寂滅)·원적(圓寂), 또는 무위(無爲)·부작(不作)·무생(無生) 등으로도 의역한다. nir(out)+√va (to blow)의 어원으로 해석되는 열반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평안,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남방의 팔리 불교에서는 조림(稠林)이 없는 것으로, 이 경우에도 번뇌의 숲이 없어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 이르러서는 석가불의 이상화·신격화에 따라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얻어진 열반은 불완전한 것(有餘涅槃)이며,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無餘涅槃)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석가불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유여·무여열반 외에 본래자성 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일체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의 진리) 그 자체임을 달관하여 안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열반으로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 즉 열반 비지원만(悲智圓滿:자비와 지혜가 원만함)·임운무작(任運無作:아무런 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 운용됨)의 불·보살의 상태를 말한다. 결국 열반이 어떤 특별한 경지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미혹이며, 열반은 유(有)도 무(無)도 아닌 공(空)으로서 윤회나 열반이나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보살의 활동이 강조되었다.
찰나 (刹那) ---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 산스크리트의 ‘크샤나’, 즉 순간(瞬間)의 음역인데, 《대비파사론(大毘婆沙論)》 권136에 따르면, 120의 찰나를 1달 찰나(一刹那:tat-ksana, 순간의 시간), 60달 찰나를 1납박(一臘縛:lava, 頃刻의 뜻), 30납박을 1모호율다(一牟呼栗多:muhurta)를 1주야로 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1찰나는 75분의 1 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설도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 한다.
너희가 말하는 "먼 전생, 그 전생에.."는 어쩌면 너희의 말처럼 타당할 수도 있다.
가족의 인연이 헤어짐으로 받는 과보의 전생에는 반드시 알게 모르게 불협화와 대립과 원망과 거역 등의 순탄하지 못했던 인과가 쌓여 있게 마련이다.
나는 통계적으로도 그런 인과를 실제로 금생에서 많은 분들의 경우를 상담을 통해 관찰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동안 설법을 통해 알고 있는 "전생"이라는 시간의 범위를 통상적으로는 "출생하기 이전"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보다 더 절실한 전생의 범위는 "출생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이다.
그렇더라도 본인은 자신의 오류나 악업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님들께서 기도 방편으로 무조건적인 참회: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생각으로 엎드려 절을 하라고 시키는데, 그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악업을 지어 왔으므로 더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 한 사람을 향해서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참회가 있어야 진짜 참회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를테면 가상적으로 너희가 태어나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14년 동안 아버지에게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그것은 구구절절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통틀어서
"아버지, 제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께 잘못한 일들을 참회하오니 이런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안 계시는 동안 겁도 없이 만만한 어머니께는 또 얼마나 속을 썩히고 거짓말로 어머니를 속인 일과 어머니 훈계하시는 말씀을 듣기 싫은 잔소리로 거부하며 얼마나 악을 쓰고 대들었던 이런 많은 불효를 이제야 참회하오니 이런 업장을 소멸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한 모든 일들이 극락에 계실 아버지께도 걱정을 끼쳐 드리게 되었는 줄조차 모르고 있었던 이 우매한 중생의 모든 업장을 참회하오니 소멸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그 아버지의 화신 한 분을 부처님 인연으로 만나옵고 이 분이 친아버지의 화신의 모습임을 믿사오며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리광을 부렸던 이런 모든 업장을 참회하오니 소멸하여 주시옵소서. ......"
이런 기도문으로 참회발원을 하라는 뜻이다.
어쩌면 너희보다 더 어려운 마음 고생을 하는 분들이나 불효의 업장으로 현세에 고통을 받으시는 분들이 이런 나의 편지 한 통을 읽고 참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어찌 너희 혼자만 성불하고 싶겠느냐?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동안 실로 부처님께서 여기 와 계시고 관세음보살님께서 너희에게 해 줄 이야기를 일러 주시며 너희 친아버지께서도 내 곁에 닥아오셔서
"제발 우리 딸에게 무엇을 좀 알아듣도록 편지 써 주세요."
라고 애절한 부탁이라도 하시는 것만 같구나.
나는 그저 그 분들 하라시는대로, 시키시는 대로, 부탁하시는 대로, 몇 줄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 뿐이다.
알겠는가? 어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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