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 낭만파 음악가
[정서현 실용음악]
후기 낭만파 또는 신 낭만파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낭만주의 음악이 결실을 맺는 시대이며 또는 새로운 음악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기운이 있는 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표제음악의 발달과 함께 교향시, 악극(Music Drama)이 창시되었고, 관현악이 발달하였으며 오페라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EH한 말기에는 무조(撫棗, Atona)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최초의 작곡자는 이탈리아의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이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기교를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며 그의 신기에 가까운 다채로운 표현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환상교향곡》을 발표하여 관현악에 새로운 효과를 시도하여 표제음악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고정관념(Idee Fixe)이란 것을 창안하여 음악의 줄거리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모티브로서 주인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관현악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악기의 그 표현 능력을 극도로 발휘시켰다. 또 이와 같은 새로움을 헝가리의 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 의해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다. 리스트는 12곡의 교향시를 작곡하였는데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또 악장을 나누지도 않는 음악으로 시적인 묘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표제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오페라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탈리아의 가극왕 베르디(Giusepe Verdi, 1813∼1901)는 민족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오페라를 작곡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그는 초기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중시하여 작곡하였으나 당시 낭만주의 문예의 영향을 받은 중기 이후의 작품에서는 극적 진실을 추구하여 극과 음악이 함께 중요시되었고 관현악법도 충실한 명락들을 이루면서 만들어 냈다.
1) 베를리오즈 [Berlioz, Louis-Hector, 1803.12.11~1869.3.8]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 출생. 17세 때까지 가정에서 일반교육을 받고, 그 후 파리에서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작곡가가 되고자, 르쉬외르에게 사사하였다. 182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고 1830년 로마상 콩쿠르의 대상으로 로마에 유학하였다. 그사이 파리를 방문한 영국 셰익스피어극단의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을 짝사랑하여 《환상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1830)을 작곡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고,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뒤마(부친) 등과 교유하는 한편, 1834년부터는 자작의 연주회와 작곡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시기의 작품에는 독주 비올라에 이탈리아의 추억을 상기시킨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 Harold en Italie》(1834), 《레퀴엠 Requiem》(1837), 오페라 《벤베누토첼리니 Benvenuto Cellini》(1838),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 곁든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o et Juliette》(1839) 등이 있다.
그러나 1838년 《벤베누토첼리니》의 상연 실패로 후반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게 되었다. 파리에서 자작의 활동무대를 잃은 그는, 1842년부터 국외로 나가 연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곧 1842∼1843년에는 독일 각지에서 연주를 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 Le Carnaval romain》(1843)를 작곡하였으며,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1844)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다가 1845∼1846년의 프라하·부다페스트에서의 연주여행이 성공하자, 이에 힘입어 귀국 후 《파우스트의 겁벌(劫罰) La Damnation de Faust》(1846)을 완성, 초연하였으나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1847년 러시아와 영국에서 장기 체류할 예정으로 건너갔으나 이듬해 일어난 프랑스혁명(2월혁명)이 걱정되어 귀국하였으며 그의 《회상록》은 이 무렵 영국에서 착수되었다.
1850년에는 '필하모닉협회'를 결성하여 혁명 후의 파리에서 적극적인 연주활동을 추진하였지만, 이 역시 이듬해에 좌절되어 다시 국외 연주여행을 떠났다. 1854년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L'Enfance du Christ》이 비로소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1849년에는 완성 이후 연주장소를 얻지 못하였던 대작 《테 데움 Te Deum》이 만국박람회 개막을 축하하여 연주되었으며, 1856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마침내 그는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만년에는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 Les Troyens》의 작곡에 열중하였으나, 이 작품을 상연할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 없었으며, 1863년 제2부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 Les Troyens a Carthage》만이 상연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희극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 Batrice et Bndict》(1862)가 있다. 다년간에 걸친 연주여행은 1867∼1868년의 러시아 연주회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고, 지병의 악화로 1869년 3월 8일 파리에서 고뇌에 찬 일생을 마쳤다.
베를리오즈가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유일한 교향곡 작곡가이었으며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한 데 있다. 그리고 이 음악과 더불어 그의 새로운 '관현악법'은 이후의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바그너와 더불어 명문가로 명성이 높으며,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분야에서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2)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라이딩그에서 태어나, 1886년 7월31일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있어서 피아노 음악의 거장으로서, 또한 희귀한 연주 기교의 명인으로서 먼저 들 수 있는 사람이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화려한 연주가로서 전 구라파를 석권했으나, 그는 단지 한 피아니스트로 시종하기에는 너무나 풍운아의 기질과 패기가 넘쳤다고 보겠다. 이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사, 평론가, 그리고 승려로서의 다양한 그의 생활 행각이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리스트는 그야말로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으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단지 역사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바그너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고, 후세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음악가라 하겠다.
리스트의 부친은 게스테르하지 후작의 관리인 이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있어서 피아노도 치고 첼로도 즐기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이 부친의 영향과 교육을 받아 피아노 연주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리스트는 1820년 9세 때, 처음으로 에덴부르크에서 공개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결과 귀족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10살 때에는 비인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가족들과 같이 라이딩그를 떠나 비인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인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피아노 교칙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에게 피아노 지도를 받았고, 한편 살리에르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리스트는 1833년 22세 때 말리 더그백작부인과 알게 되어 나중에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이 말리 더그부인과는 성격차이로 39년경부터 불화가 잦아 1844년에는 끝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4년후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할 때 키에프에서 알게 된 카로리네 뷔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 다시 두 사람은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이러는 사이에도 리스트는 창작에 강한 의욕을 보여 연달아 작품을 썼고, 28년 경부터는 거장적인 연주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절찬을 받으며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야말로 비인이나 베를린도 리스트가 석권해버리다시피 하여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연주 생활도 카로리네 부인의 권고로 1947년36세때 와이마르에 정착하여 창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리스트는 낭만파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여러 방면에 걸쳐 밚 은 작품을 쓴 다작가로서 여러 종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향악시와 피아노 곡이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때는 바야흐로 낭만주의가 무르익던 시대로서 특히, 그가 살던 파리는 여러 예술의 근원지로서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문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유고, 라마르티이느, 졸쥬 상드등과 친교함으로써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여기에 리스트는 구성이 크고 복잡 다채로운 표현력을 갖는 관현악에 자기의 이상을 찾게 되어 드디어는 시적인 상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교향악시>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곡들은 19세기의 거장들이 갖는 어려운 연주 기교를 구사하여 화려한 효과를 내는 풍조를 따르고 있다.
19곡으로 된<헝가리안 랩소디(헝가리 광시곡)>, 12곡으로 된 <초절 기교용 연습곡>등이 그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피아노 작품에서의 기교라든가 효과는, 동 시대는 물론 후세의 연주가나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리스트의 업적으로는 형식에 있어서 주제를 변용, 사용하여 전체의 곡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등, 그리고 연주가로서, 교사로서의 공적, 또한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의 재 인식, 바하, 그밖에 피아노 레퍼토리의 확대, 지휘에 있어서 바그너를 비롯한 동시대작 곡가의 작품은 물론 선배 대가들의 명곡을 소개하는 등, 그의 업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 A장조" [1839]
"단테교향곡" [1855-56]
"파우스트 교향곡" [1857]
"오르페우스" [1854]
"레 프렐뤼드" [1848]
"헝가리광시곡" [1839-47]
"동 상슈" [1824-25] 돌아가기
3)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나,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70세로 객사를 한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베를리오즈에서 시작되어 리스트에 이르러 꽃을 피웠던 후기 낭만주의 즉, 신 낭만주의는 바그너에 와서 최고도에 달했고 완성의 과정에 왔다. 웅대하고 대규모적인 구상과 방대한 표 현 양식, 대담한 화성법과 반음계적인 도입에 의한 조바꿈의 연속, 형식의 자유로운 확장, 관현악의 대규모적 편성과 웅장한 음향의 표출 등 작곡 기교의 개혁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걸고 완성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악극을 창시함으로써 이른바,바그너 주의로 온 구라파를 휩쓸었던 바그너의 역사상 업적이야말로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그너는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보여준 천재적인 음악 재능은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연극에 흥미를 보여 14살 때에 5막짜리 비극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베에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음악에 눈 뜨게 되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작곡 이론을 배웠다. 바그너는 이때부터 교향곡과 그밖에 큰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20살 때 뷰르츠브르그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순수한 기악 작곡을 그만 두고 오페라에 전념하였다. 바그너는 21살 때 마그데브르그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24살때에는 <리이거>의 악장이 되었으나 전부터 파리에서 성공할 것을 꿈꾸던 바그너는 1837년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 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하며 편곡같은 하찮은 일을 해 주고 호구지책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작곡만은 꾸준히 계 속하였고 드레스덴의 혁명운동에 가담한 나머지 추방령이 내려, 그는 스위스로 도망을 갔다.
1862년에 바그너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어, 2년후에 바이야안 의 젊은 루우드비히2세의 후원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여 186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고, 1867년에는 <뉴유 룬 베르그의 마이스타징거>를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작의 음악극을 이상적으로 공연하기 위 해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건설하여 대대적인 악극<니벨룽겐의 반지>로써 개장을 했다.바그너 의 작품은 대개 3기로 나누어진다.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그대로 따른 제 1기, 외면적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오페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극과 음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기교적으로는 지도동기라고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짧은 동기의 사용 등 많은 발전을 보던 제 2기, 오페라 양식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밀착해서 이어지는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사용, 아리아의 폐지와 서곡을 전주곡으로 대치하는 등 완전한 악극을 확립한 제3기로 나누어 진다.
<주요작품> "연애 금지" [1836]
"리엔치" [1842]
"방황하는 네델란드인" [1843]
"탄호이저" [1845]
"로엔그린" [1850]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
"니벨룽겐의 반지" [1876]
"파르지팔" [1882]
"황제행진곡" [187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1868]
돌아가기
4)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베르디는 1813년 10월 9일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에 가까운 롱코레라는 농촌에서 태 어나, 1901년 1월 27일 역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공교롭게도 베르디가 세상에 태어난 해에 독일에서는 악극의 창시자 바그너가 탄생하였다. 베르디는 행상을 상대로 하는 조그마한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을 열광적으로 좋아 하였다. 7세 때 교회의 미사 성제의 시동이 된 베르디는 교회 오르간에 흥미를 갖고 이 를 배워, 10세때에는 노령으로 인해 은퇴하는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이어 베르디가 오르간 주법을 배웠다. 그리고 밀라노 음악 학교로부터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입학을 하지는 못하였다.
베르디는 후에 스칼라 좌의 성악 지도자 빈첸초 라뷔나에게 주로 대위법을 배웠다. 1835년 22세 때에는 고향인 브세토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그 후 본격적인 가극의 작곡과 라 스칼라 좌의 공연을 위해 1839년 가족과 더불어 밀라노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리하여 그 해에 그의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초 백작 오베르트>가 초연되어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그는 계속 오페라의 명작들을 작곡하여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바그너처럼 전 구라파를 휩쓴 극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베르디는 물론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수법은 전통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새로 운 풍조도 도입하고, 새로운 극적 구성도 시도할 뿐더러 관현악법도 무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데 노력했다. 그의 작품의 중심은 역시 성악의 선율이며 관현악도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결국 노래의 배경을 이루는데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생기있고 극적으로 힘찬 박력이 있으며, 베르디는 풍부한 영감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겠다.
베르디는 26세 때에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를 발표한 이래 많은 오페라 작품을 썼는데,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전통에 따르고 있고, 노래의 선율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하나, 그 선율이 활기에 차 있어 성공을 하였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전통적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극적 인 오페라를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고레토>이다. 여기서는 종래의 선율을 풍부하게 살리면서 전에 보지 못한 극적인 구성과 박력을 갖게 되고 인물 성격의 묘사를 정확하게 하였다. 그후 양식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착잡한 줄거리에 너무 극적이 아닌 그러나 풍부한 선율로 유명해진 <트로바토오레>, 애절하고 낭만적인<라 트라비아타> 등을 만들었다.
베르디는 그의 긴 생애를 거의 오페라에 바쳤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작품은 그리 없고 1874년에 시인 만쏘오니의 죽음을 애도한 장대하고 극적인 그리고 기묘하고 박력에 넘친<진 혼곡(레퀴엠)>을 발표하여, 19세기 최대의 레퀴엠을 남겼다.
<주요작품> "오베르토" [1838]
"나부코" [1842]
"맥베스" [1847]
"리골레토" [1851]
"일 트로바토레" [1853]
"라 트라비아타" [1853]
"아이다" [1871]
"오델로" [1887]
"팔스타프" [1893] 돌아가기
5)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 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 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근경인 시골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살 때, 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법률 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 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연금 6,000루불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 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893년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 "대 서곡" [1812]
"백조의 호수" [1877]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0]
"호두까기 인형" [1892]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1869]
"비창 교향곡" [1893]
"만프레드" [1885]
"유진 오네긴" [1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