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Serment des Horaces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1785)de
Jacques-Louis DAVID (1748-1825)
Ø 로마의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가 이웃 도시인 엘베와 전쟁이 터지자 전쟁터에 나갈 것을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시민들의 애국심이 사라지는 것에 염려한 루이 16세가 당시 최고의 화가이던 다비드에게 이 그림을 주문하여 제작된다. 장식 없는 단순한 배경과 기둥으로 대표되는 고대 희랍의 연극적인 장면설정 속에서 주제의 비장함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삼형제와 슬퍼하는 여동생과 부인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있다. 그것은 색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웅심과 비장한 각오는 붉은 계열로 표현되어 있고 여인들은 비교적 차가운 색조로 처리하고 있다. 다비드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림 속의 늙은 아버지의 발을 25번이나 고쳐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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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Recamier (1800) de Jacques-Louis DAVID (1748-1825)
Ø 자크 루이 다비드가 사망할 무렵 그의 화실에서 발견된 미완성 작품이다. 레카미에 부인은 당시 유명 문인들과의 교우관계로 알려진 여성이다. 사교 생활에 분주했던 레카미에 부인이 자주 약속을 어겨 초상화 제작이 늦춰졌다는 설도 있고 완벽주의자인 다비드의 느린 일의 속도 때문에 레카미에 부인이 다비드의 제자에게 주문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다비드가 그리던 초상화를 주인에게 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레카미에 부인은 은행가의 딸로 태어나, 16세 때 42세의 은행가 레카미에와 결혼하였는데 뛰어난 미모와 풍부한 감수성, 남다른 재치를 지녀 나폴레옹 시대에서 왕정복고시대에 걸쳐 파리 사교계에 이름을 날렸다.
신고전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연필 자국을 완전히 지우는 것을 철칙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이 그림에 남아 오히려 그림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얼굴을 제외한 그리스 의상과 배경의 붓자국이 오히려 그림에 신비감을 더하여 다비드가 그린 초상화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풍의 여인의상, 당시 제국 양식의 긴 의자의 단순한 형태, 배경을 단순화하고 갈색을 주조로 색채를 차분하게 표현한 점이 인물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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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rande Odalisque (대 오달리스크, 1814)de Jean-Auguste-
Dominique INGRE (1780-1867)
Ø 앵그르는 이탈리아에서 몇 년간 체류하면서 나폴레옹의 여동생, 나폴리 캐롤린 왕비의 주문으로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황제 술탄의 애첩들을 지칭한다. 앵그르는 쟈크 루이 다비드의 충실한 제자였으나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다비드는 앵그르가 예술적인 뛰어나지만 소묘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여 다른 제자를 궁정화가로 임명한다. 오달리스크는 살롱전에 출품하자 마자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는 묘사 즉 긴 등, 왼쪽 발만 그린 듯한 데생 때문에 살롱에서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앵그르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은 해부학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눈으로 보아서 아름다운 것이었다. 따라서 관능적인 우아함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허리를 늘이고 볼륨감을 주었다. 한편 커튼과 침대의 주름, 여인의 터번, 여인이 두른 진주 장식, 공작 부채의 치밀한 묘사를 보면 그의 데생 실력이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당시 시작되어 19세기 내내 지속되는 예술가들의 이국취향, 특히 중동 지방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뿐 만 아니라 화가가 이탈리아 체류기간에 영향을 받은 라파엘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라파엘의 온화함과는 달리 마치 조각 같은 냉담한 분위기가 동시에 풍긴다. 이는 그가 이탈리아 체류기간동안 확립한 독특한 스타일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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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ort de Sardanapale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de Eugene
DELACROIX (1798-1863)
Ø 이 그림은 기원전 9세기 앗시리아의 사르다나팔루스 왕이 적군의 침공으로 수도인 니오베가 함락당하자 몰락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부하들로 하여금 애첩들과 애마, 애견 등 자신이 생전에 사랑하던 모두를 병사들을 시켜 죽이고 독배를 마시며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는 전설을 그린 것이다. 이 내용을 영국의 문필가 바이런이 희곡으로 썼고 마침 영국을 여행하던 들라크루아가 읽고 회화로 재현한다. 유심히 보면 그림의 빛은 화면을 가득 채운 격동과는 달리 너무나 고요하고 서늘한 죽음을 바라보는 사르나다팔루스왕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시선이 닿는 영역은 사선으로 길게 놓인 침대 시트와 담요 등에 의한 일련의 붉은색의 흐름과 일치한다 .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화려한 색상의 대비와 대각선 구조의 동적이며 바로크적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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