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산악인
산악인 엄홍길 --
한국 산악계의 계보를 따지면
고상돈 허영호에 이어서 엄홍길을 꼽는다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28번 도전 끝에 상공했기에 거의 절반은 실패했다.
특히 안나푸르나 등정은 다섯 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안나푸르나봉 도전 시에 지현옥을 잃었다)
무명 산악인 엄홍길의 이름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맞추어 기획한 이벤트중
에베레스트(8848미터)와 로체(8516미터) 동시 등정에 참가하여
엄홍길은 에베레스트를 밟으므로 유명해진다
그전 엄홍길은 85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으나 7500미터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고
또다시 86년 또다시 도전했으나 8600미터 지점에서 좌절하고야 만다
엄홍길은 경남 고성출신으로 나이 겨우 3세 때 의정부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에
도봉산 자락에서 매점을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도봉산을 놀이터로 자란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등을 누비면서 산악인으로의 길을 가지만
산악인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않은 무명 산악인에 불과했다.
키는 167센치 체중 66키로 정도의 보통체구이지만 체력은 좋았다
동두천의 양주고를 졸업한 뒤에 2년여를 희운각 대피소에 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해군특수부대 udt를 제대한 후에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던중
그를 유심히 본 산악인 어느 선배가 85년 에베레스트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해외 원정 산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맏는다
88년도에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에도 --
이후 92년도 까지 6번이나 에베레스트의 봉우리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나 93년도에 2주간 사이에 희말라야의 초오유봉(8021) 사사팡마봉(8021)
연속등정에 성공하였고
이듬해부터 브로드피크(8047) 로체(8516) 다울라기리(8167) 마나슬로(8163)을
차레로 정복하였다
엄홍길을 가장 힘들게 했던 정상은 안나푸르나였다
89년 첫 도전 실패 이후 꼭 10년이 소요되었다
97년 세 번째 도전에서 셰르파가 크레파스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를-
그리고 98년 안나푸르나 네 번째 도전에서 7700미터 지점에서 셰르파가 빙벽으로 추락했다
추락한 셰르파를 구하려던 엄홍길은 로프에 발목이 걸려 180도로 뒤틀리고
2박3일 동안 거의 기다시피 켐프로 기적 같은 상황에서 내려와 헬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재기가 불가능 하다던 엄홍길은 1년 뒤 1999년 안나푸르나에 또다시 도전한다.
10년 동안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기어이 성공했으나
동행한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이곳에서 잃어버린다.
(지현옥의 추모비가 조령산에 있다)
그리고 2000년 7/31일 k2(8611미터)에 오르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 8번째
14좌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이 되었다
엄홍길은 그동안 28번 도전하여 드디어 대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의 시신을 희말라야의 산속에다 묻었다
그중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박주훈 황선덕 한명근 등 전문 산악인의 시신을 히말라야의
얼음과 눈의 산에다 묻었고
셰르파 술염도로지 나티 카미도로미 앙다와다망도 희말리아의 산에서 보내야만 했다
엄홍길은 등반도중 시체마자 잃어버린 동료대원 박무택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영하30도의 강추위속에서 비박을 해가며 결국 시신을 찾아서 묻어주는
초모랑마 휴먼 원정도 성공했다
14좌 등정이후 2004년 알룽캉(8505)에 오르고
16좌인 로체사르를 등정함으로서 16좌를 오른 세계 최초의 등반인이 되었다
수많은 죽음을 담보로 오늘의 영광을 쟁취한 운이 좋으면서 한편으로 비운의 산악 왕이 된 것이다.
고상돈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날아온 고상돈의 메시지는 전 국민을 열광하게 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의 지붕에 올라섰으며 세계 57번째의 순간이었다.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움라기봉 정찰등반이후
2003년 까지 한국의 원정대는 457개팀 3421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하여
8000미터급 14좌 완등자 3명(엄홍길 박영석 한완용)
1977년 고상돈의 쾌거에 이어
1987년 허영호가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을 한다.
고상돈을 국민적 영웅으로--
그러나 고상돈은 2년뒤 북미주 최고봉인 메킨리(6194미터) 하산 길에
빙벽에 추락하여 사망 한다
고상돈 그때 나이 31세
그의 유해는 고향인 제주도 한라산 1100고지에 묻혔다
산악인 김정섭의 3형제
슬프고도 안타가운 이야기
산악인 김정섭형제는 1971년 마나슬루봉(8163미터 세계7위봉) 첫 등반에서
김정섭은 동생 김기섭을 돌풍에 잃어버렸다
이듬해 김정섭 호섭 형제는 2년전 동생 기섭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나슬루에 재도전합니다만 7250미터 지점에서 대형 눈사태가 발생하여
동생 김기섭을 비롯하여 대원 5명과 10 명의 셰르파가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난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사고)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은 김정섭은 1976년 또다시 세 번째
마나술루에 도전 하지만 또다시 실패 한다.
왜? 그는 두 동생 을 차례로 잃어가면서 집념의 도전을 했을까?
한으로 남은 김정섭의 마나슬루봉 도전은
1980년 동국대 산악부에 의하여 성공을 하게 된다
.
허영호
1987년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등반가라기보다는 탐험가에 가깝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에는 남극점 북극점을 차례로 밟았고
91년도에는 7대륙 최고봉과 지구의 3극점을 모두 올라서
세계3번째로 어드벤처 그랜드 슬램의 대기록을 세웠다
박영석
엄홍길과 함께 한국등반계의 양대 거봉인 박영석
1993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도전 4번 만에 성공한 것이다
91년 첫 에베레스트 도전 시에는 얼굴이 함몰되어 헬기로 이송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97년 한 해 동안 8000미터 급 5개를 등정했고
2001년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그리고 14좌 완등 후엔 극점으로 시야를 돌려서
산악 그랜드 슬램 (14좌완등 +7대륙 최고봉+남북극점)을 달성하는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다
한왕용
2003년 한국인으로 세 번째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한 한왕용은
엄홍길이나 박영석 만큼은 주목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한왕용은 14좌 등정 내내 단 한명의 대원도 잃지를 않았다
물론 몇 번은 엄홍길을 대장으로 몇 번은 박영석을 대장으로 한 대원 신분으로
참가하여 대장으로의 기회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2002년 k2(8611)등반 때에는 산소통이 고장 난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양보하고 무산소 등정을 했다
14좌 완등 후 지금은 그의 등반대원들이 히말라야에 남기고 온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등반대를 꾸려 에베레스트, k2 ,마나슬루 등을 찾고 있다
지현옥
청주 서원대학교 ob인 지현옥은
93년 한국여성 등반대 대장으로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그녀는 1999년 엄홍길과 함께한 안나푸르나 등정 하산 길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지현옥 대원은 실종되었다
오은선
불의의 사고로 떠난 지현옥의 빈자리는 오은선이 채웠다
그녀는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등정에 성공한
첫 한국 여성등반가가 되었다
현제 희말라야 14좌중 7봉을 등정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