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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소원
우리동네 옛이야기- 지사편
김여화
거사물의 번창과 지역특성
삼국시대 마한의 거령현으로 불리웠던 지사면 옛이름은 지사랑(지시랭이)이다. 고려때는 남원부 거령현 조선시대에 들어서 남원부 지사방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사면은 노령산맥의 덕재산 아래로 평야를 이루면서 아무리 악천후에도 재해가 발생되지 않은 축복받은 천혜의 농지를 가졌다.
85년 왕방제를 막아 지사면을 비롯해서 장수의 산서까지 농업용수를 공급받고 특성상 평야지대이므로 시냇가에는 돌대신 금모래가 많아 금시내라든가 영천(寧川) 계산리(溪山) 옥산(玉山) 선천(仙川) 아름다운 지명을 지녔다.
특히 안하(雁下)는 덕재산 자락에 노닐던 기러기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되고 목평(牧坪)금평(琴坪)사촌(沙村)계촌(桂村)방계(芳溪)계산(溪山)실곡(實谷)봉루(鳳樓) 관기(館基)원산(圓山) 한자 표현만 보아도 평야지대의 특성을 쉬이 알수 알 수있다.
면적은 작지만 동쪽으로 장수 팔공산과 뒷편의 덕재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을 건너 번암의 천황봉이다. 해서 이곳의 땅은 비옥하고 또 관개 시설도 잘 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작은시내가 많다.
일찍이 지사는 서원이 많은고로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고려공민왕 때 충신겸 정치가였고 부원군에 영천이씨 능간(凌幹)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현주서원을 비롯해서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제당 안처순 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영천서원, 호연정 통천인 최윤덕 선생과 합천인 청호 이적 선생과 그 아들 비암 형남선생을 모신 관곡서원, 전주인 연촌 최덕지 선생을 주벽으로 최연손 장급 장경세 선생등을 모신 주암서원,등 작은 면에 4곳의 서원을 지닌 교육의 요람인 고장이다.
거사물 문화권 즉 지사면에 해당 되는데 고려시대 까지는 현의 소재지로 부근의 삼계면 봉현리에서 지석묘가 발굴되었고 지사면과 근처 오수면등에서도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지석묘가 옥산마을에서 가군과 나군으로 3기가 발견되었고 관기 부락의 고분은 이 마을 남서쪽 야산을 넘어 오봉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온 능선의 한줄기로 남쪽사면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고분은 성수면 왕방저수지에서 농업용수를 끌어오는 공사를 하면서 잘려나가고 석실 내부는 상단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정확한 형식은 알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남쪽부분이 잘려나가서 연대의 유무도 확인 할수 없으며 유구의 크기는 325센티 폭 125센티이며 유구 주변에서 청동제 사발편과 수저세트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은 출토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거사물정(居斯勿停) 정치와 군사적 유물에 관한 해석
지사면은 백제시대에는 거사물현 이라고 부르다가 통일신라 이후에 청웅현으로 바뀌고 임실군에 속하였는데 현의 소재지는 영천이라 알려졌다. 이때 신라에는 군대조직의 하나로 十停이 있었는데 진흥왕 5년(344)에 설치한 것으로 되어있고 처음에는 5정이 있었으나 통일후 10정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십정이 소재한 지명으로 보아서 백제를 멸하고(660년) 고구려를 멸하여(668년) 3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전국의 주와 군을 새로 마련한 (657년) 이후 즉 九州와 五小京을 완성함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 한 것으로 추정되고 9주와 5소경이 신문왕(^85년)까지 완성되었으나 十停도 이때를 전후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며 停은 국방상 요지에 두는 것은 물론 대게 州마다 한군데씩 배치하였는데 지금의 국방 제도로 보면 사단이나 군단에 해당하고 十停에 3천의 당(幢)당을 두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당 병력은 300명으로 一停의 병력은 3천명이니 이러한 병력은 수도인 경주나 한산성(지금 서울부근) 등 중요한 곳은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곳 거사물정에는 五幢쯤(약 1500명) 배치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그리고 각 당(幢)마다 옷깃 옷고름의 색을 다르게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청금당, 황금당, 록금당, 흑금당, 적금당, 백금당, 벽금당, 비금당 으로 거사물정의 병력은 청금당에 속한다고 했다. 이때에 신라에는 장군이 36명 대관대감이 70명 당주가 10명이엇는데 거사물정에는 적어도 장군 1명과 대관대감 2명 부대감이 2~3명 그리고 당주가 있어 그 밑에 중 또는 하급 지휘자로 소감이 10명 대척이 10명 정도 배치되어 군대를 통솔함은 물론 전북지방을 진압하면서 유지 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거사물은 이때를 고비로 전성기를 이루고 영천 사대문에는 찬란한 당기가 휘날리고 마상의 늠름한 장군들이 병력을 통솔하고 화랑도의 무술을 닦으며 임실은 물론 전북일원을 순회하였을 것이며 이 무렵의 거사물 즉 지사면은 군사도시로 번창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원 소경이 번성하고 전주가 번창하면서 임실은 전남 양대도시의 중계지 역할을 하다가 지금의 오수는 전주 남원간의 직선거리가 되므로 거사물의 번영이 차츰 오수로 이동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사물의 번영은 오수로까지 뻗치고 오수라는 지명의 유래를 만든 의견에 얽힌 이야기도 당시 거사물에 살던 김개인이라는 분이 오수장에 나왔다는 전설은 이러한 거사물의 영화를 말함이다.
특히 이러한 고장의 번영은 고려로 나와 이능간 안처순 같은 분이 생겨나고 또 그분들의 충절을 기리는 서원이 세워진 것도 이러한 거사물의 영화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백제 때에는 면을 중심으로 거사물현이라 하여 독립된 현이었는데, 그 관할구역은 대체로 지금의 남원군 덕과, 사매, 보절면과 장수군 산서면, 본군의 오수, 삼계, 지사면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757년 경덕왕16년 현의 명칭을 청웅현이라고 바꾸어 임실군 영현이 되고 고려 초 다시 거령 현으로 바꾸어 남원부에 속하여 일명, 영성이라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 거령 현을 폐지하고 본 면을 지사 방으로 바꾸어 남원부 48방중의 한방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임실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면은 임실군의 동남단에 위치하여 임실읍에서 동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면소재지인 방계 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은 장수군 산서면이며 서쪽은 본군의 오수면 남쪽은 남원군 덕과면 북쪽은 성수면에 둘러싸인 해발 140미터의 구릉의 분지이다.
면적은 1,848핵타로 협소하고 노령산맥의 명봉의 하나인 장수 팔공산정과 남쪽으로는 천황봉, 북쪽엔 매봉이 솟아있고 서북쪽에는 430미터의 덕재산이 둘렀다. 낮은 야산이 산재하고 비교적 농경지가 많고 비옥하며 서 남쪽으로는 영천(옛 이름 거령천)이 흘러 오수 천과 합류된다.
오랜 전설을 지니고 있는 만큼 예부터 선비들이 많아 서원이 다섯이나 있다.
남원군 지사면이었던 영천동, 사촌, 계가동, 주암동, 삼산동, 천옥동, 옥산, 현계동, 실곡동, 안화동, 관기, 장암동, 원산, 대성동, 목평동, 16개리였다.
◆ 관기(館基) 관 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성수 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기위해 남원고을에서 이 마을까지 당도했을 때 해가 저물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마을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가면서 이런 곳에도 객주가 있다고 하여 집관자 터기 자를 써 관기라고 불러져 오늘에 이른다 한다. 관 터에서 조치를 넘어 성수왕방리로 갈수 잇다. 밀양박씨가 많이 살았으며 합천 이씨도 많았다고 전한다. 오백 여 년 전부터 합천이씨 형남이 이곳에 자리 잡고 같은 무렵 밀양 박 씨도 터 잡았다고 한다.
행정구역 개편 때 관기와 대산 안하 일부를 합쳤다.
관 터 입구 송고개에서 좌측은 십이지산, 그 뒤로 덕재산이다. 덕재산은 한치 재와 서당골, 당재가 있고 동쪽은 아침 재라 부른다. 8초정과 영모재가 있고 덕암재가 있으며 비암정은 선돌이 앞에 있고 진양 강 씨 효열비가 있다.
마을에는 모정은 송영정이라 부르고 순흥안씨사당이 문화재급이다. 관곡서원이 있으며 관곡서원은 문중에서 세운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각성받이 성의 유림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곳에는 1820년 세운서원에는 최윤덕 이적, 이형남의 위폐를 모시고 서원에 관련된 고서적이 3책이 보관 되었다고 전한다. 나는 관곡서원 향제 음력 2월 17일 어느 해 향제에 초대를 받고 참여 한 적이 있다. 이곳 향제시 여자에게 공개한 것은 첨이라 하였다. 모든 제수는 날것으로 남자 분들이 준비하며 미리 초대장을 보내온다. 당시는 이경식의 부친이 유사를 맡고 계시어 그분이 시누이남편이라 가능하였다.
한치 재에는 배나무 골이라고 있어 전설이 전하는데 배나무에 깃들인 귀신 이야기다. 예부터 아름드리나무는 령이 깃들인다고 전해오는데 이배나무에 얽힌 전설은 애석하다.
팔초정은 노초 안병용, 관초전병두, 벽초이명식, 가초안덕수, 덕초이점상, 만초전병택, 석초안명진선생등이 세웠다한다. 이분들의 호가 모두 뒷글자가 초자를 쓰므로 팔 초정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방에는 8개의 현판이 있다는데 일제 시부터 뜻을 모아 쌀을 매끼니 마다 한숟갈씩모아 50가마를 마련했다는데 그 쌀로 논을 사고 분비를 해 오다가 해방이 되자 정자를 짓기로 하여47년 3월에 착공 3년 5개월 만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또 이분들이 작고 한 후에는 그 자손들이 팔초계라고 해서 이곳에서 동네잔치를 했던 것으로 전한다. 영모재는 마을 뒷산아래 농업용수로 아래 있다. 근처에 팔초정과 인접해 있다. 동네사람들은 보통 재실로 부른다. 정면 5칸 측면 3탄의 팔작지붕이다. 솟을대문이 있고 양쪽으로 고방이다. 합천 이씨의 재실로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마을 서쪽에 덕암재는 방앗간 뒤편인데 전주최씨문중에서 세우고 관리한다. 수문리이야기는 이 지역사람들의 빨치산이야기로 열여섯 명이 끌려가다가 두 명은 도망쳐 목숨을 구하고 한꺼번에 죽어 한날한시가 제삿말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병목고개, 아침재, 서낭댕이재, 서당고개, 성고개, 점앞고개. 북바우, 장군바우, 칼바우, 갑옷바우, 명씨바우, 무지바우, 귀신바우, 잉에 밑들, 솥단지앞시암등의 지명이 있으며 조치제와 서당제를 1943년에 준공하였다.
◆원산(圓山) 도루메(둥근 뫼)
행정개혁때 원산 사촌을 합하였다.
선천마을과, 서원, 새내, 강당 뜸으로 부르는데 이 마을에 덕암서원이 있다. 1607년에 창건하여 정몽주, 최양, 박종수, 정지년선생의 이패를 모셨다.
1530년경 전주최씨 최원현이라는 분이 통정대부였는데 이 마을에 터 잡았다고 한다. 그 후, 채 씨, 이씨, 소씨 점차 모여들고 마을 터가 시묘의 집이라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며 마을 뒤편이 둥그렇게 생겼다고 해서 도르매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일제시 원산으로 고쳤다한다.
일찍이 덕암서원은 많은 학자들이 찾아오게 만들고. 원산리에 초등학교를 세웠다가 지금은 원불교 영산식품으로 바뀌고 영산식품은 이곳에서 향토장류(청국장, 된장, 고추장, 식초 쥐눈이콩)을 생산한다.
장태봉, 달랑 고개, 점골 고개, 한우물고개, 널벙바우, 강당뜸 보리골, 칙덕골등
◆선천(仙川) 서너니
이환용이라는 분이 사촌마을에 살다가 새터를 잡아 초가를 지어 살게 된 것이 1900년경인데 후에 선생의 아우가 이사를 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운(船運)리로 부르다가 마을 앞에 백호 산서서두에 쌍바위가 널려있어 후에 선원(仙源)리로 바꾸어 부르다가 선천(仙川)리라 불렀다 한다.
◆신천(新川) 새내
1943년 하씨가 살다가 오씨가 들어와 살았으며 합계 태 씨의 9대손 배은이라는 분이 1787년부터 살았다고 전한다. 후에 전주최씨 들어왔으며 사촌마을의 안동네라는 뜻으로 사내라 불렀다고 한다.
서당 터로 알려져 덕재산을 등지고 산줄기에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고 산은 동남으로 내려와 3면이 병풍을 두른 듯하고 물이 서쪽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흘러가니 전쟁 중에는 피난지로 불렀고 명현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한다.
◆안하(雁下) 안하
대정, 안하, 원산의 일부를 합치고 안산 아래라 하여 안하로 부르고 조선조 이전에는 원씨가 살았다고 전하며 후에 평강 채 씨가 들어오고 1450년부터 전주최씨가 정착했다고 전한다. 조선말까지는 안화(安和)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경 개편 때 안하(雁下)로 바꾸었다한다. 마을 뒤에 십이 연주라는 산이 있는데 기러기가 내려앉는 마을이라 하여 안하로 했다고 한다. 안하제의 벚꽃은 하얗기로 소문나있다. 보통 고목진 벚나무의 꽃이 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수지 주변의 벚꽃은 눈부시다. 또 저수지 위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약수가 나오고 그곳에서 약수를 길어다 먹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저수지 위쪽 산기슭에는 참철쭉이 많은데 진달래꽃보다 조금 늦게 피는 참철쭉은 빛깔이 연미색으로 참으로 아름답다. 저수지 왼편에서부터 서당골, 큰불무골, 작은 불무골, 정다물골, 사점골, 가늠골, 항골(한골-성수 구곡사람들은 열골중에서 한 개 골짜기를 주었다고 하여 한 개의 의미라고 하셨다.)삼바골 넘어들, 웃골,
덕수암은 고려 때부터 조용한 곳을 찾던 선비가 토굴을 파고 공부를 하였다 전하며 암자 뒤에 암벽이 있고 물이 좋아 피부병이 낫는다고 전해왔다한다.
안산, 안하고개를 넘다보면 오른쪽은 공동묘지 그 우에는 반정재들, 낸르 건너서는 동산머리들, 반정재들 건너는 정자편들이다. 십이봉, 느진목재, 덕재고개, 덤사니고개, 한치재, 여시바우, 덤바우, 구레들, 두름박골로 부른다.
◆대정(大井)한우물-큰우물
덕재산 아래 중간 평야지로1650년 경 부안김씨가 통덕강 동몽관 김공과 경주정씨가 거주했다고 전한다. 그 후1782년 전주최씨가 옥천 조씨, 전주이씨, 동래정씨등이 들어오고 마을이 점차 발전하였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연화도수라는 우물지명이 있고 대정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 우물 시암이 있으며 덕수암 안하제는 1936년에 준공하였고 덤사니방죽, 대정제가1942년 준공되었다. 보통 대전을 한밭으로 부르는데 한밭은 큰밭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한우물이라는 말은 크다는 뜻으로 대정이라고 함, 이는 오수면 대정도 같은 뜻으로 표현된다.
◆금평(琴坪) 개금실(琴谷)가야금실)
본래는 지사면으로 금곡(琴谷) 목평(牧坪) 주암(舟岩) 일부를 합하여 금평으로 불렀다. 개금실, 목들, 지름바우, 가무터로 자연부락을 형성한다.
1509년 성종 10년에 전주최공이 옥녀봉우리 아래 가무 터에 정착하였다고 해서 처음에는 가무 터라 하였으나 절터, 서골, 진등, 회곡등에 집이 산재하여 점차 옥녀봉 아래 집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옥녀 한봉금이 있다고 하여 금곡(琴谷) 가야금 골로 부르다가 일제말 금곡과 목평을 합쳐서 금평으로 불렀다고 한다. 가무터, 절터, 서골, 진등, 회곡등. 여러 곳에 산재한 집들이 덕재산 아래모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마을앞 도로건너 지르메들, 도로안, 집 앞들, 가우치들 로 부르며 원불교가 들어와 오랜 세월 뿌리내렸다. 금평제 뒤편 왼편은 큰골 제 바로 뒤는 절골, 저수지 위는 서골이다. 덕재산 483.8미터를 넘으면 성수면 덕재리 갓골, 가운데골이다
용맷등, 노성동, 모산제, 목너머고개, 비늘치, 영계골 고개, 작은덕재, 제랭이고개, 비름바우, 고깔바우,
◆목평: 목들
영조 27년 1761년경 전주 최 씨와 은진 송 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 후 이, 허, 강 씨가 머물러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이름은 목들이라 불렀으며 앞산, 뒷산에 비옥한 땅이 있고 마을 아래쪽 위쪽 노적봉이 있어 부자가 난다고 해서 목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앞산에 소바위가 있고 그 바위앞면이 마을을 보고 있으면 청년들이 죽는다는 전설이 있어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사람들이 떼를 입혀 보호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거르지 않고 떼 입히기를 한다고 한다. 금평제 저수지 아래로 도로를 가운데로 들이름은 정지르메들이다.
◆영천: 지사랭이, 지시 랭이, 사창
조선 때는 지사 방으로 불렀다고 하나 순흥안씨가 많이 거주하며 안처순선생이 초묘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후 타성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금령 현에서 지사 방으로 부를 때 마을 앞에 하천이 있다 고하여 영천(寧川)으로 부르고 들 이름 지시 랭이, 사창들로 부르며 사창들 내를 건너면 졸보들로 들이 들이 넓다.졸보들 다리건너 산서쪽은 다래미들 번개들이다. 영천서원은 사액서원으로 해마다 향제를 올리며 의견의 주인공 김개인의 생가를 영천마을에 복원하였다. 영천 왼편 원산쪽은 중방들
◆사촌: 沙村 지사랭이
지시 랭이(학교터) 바위거리, 향교터 영천서원 사액서원으로1619년 창건 1686년 숙종 12년에 사액현판을 내림, 안처순을 주벽으로, 정한, 정황, 이대범을 모촌 앞 내를 여기서는 염수천으로 부름또한 장살미에는 돌무덤인지 릉인지 작은 동산이있었는데 농지개량으로 없어짐. 소원님이 경계석하고, 무덤하고 답사후 알려주시기 바라며, 앞동네는 영천, 좌측에 서너니(선천),우측에 제껄(계촌),뒷에는 새내(신천)부락으로 구성된 부락입니다셨다. 사촌 앞 내를 여기서는 염수천으로 부름,
사창들 정담, 중방들, 장살미, 무엇보다 지시랭이 끝자락 돌무랭이에서 선천을 바라보는 히한한 암수바위, 그 밑의 고인돌의 형태같은 바위들을 보며, 어쩐지 이고장 역사가 석기시대까지 올라가는거 아닌가 했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저만큼 운치있는 새내(신촌)의 모정, 그 옛날 영천 사촌 계촌등이 한마을이었다고 한다. 다음카페 돌이님의 기억: 사촌 다리에서 마을입구로 50미터 지점에 오강바우가 있고 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평상거리, 더올라가면 합친데(선천과 바웃거리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합침)선천쪽으로 냇물따라 올라가면 돌무렝이, 이런곳에서 어린시절 알몸으로 멱 감던 시절이 그립네요
◆계촌: 桂村 제거리
지사중학교 뒤 모퉁이들과 영천 못미처 지사교 가기전 이 부근이 계촌이다.
마을 뒷산에 태봉이 있고 금계포란의 명당이 있다고 전하고 마을 형성은1394년 쯤 태조3년 충숙공 이 정착 하였다 전하며 그 후에 최 씨 유 씨가 들어왔다고 전한다. 마을 앞은 계촌앞들
◆방계: 방계, 제수동, 홈멀이, 실곡(북창) 동녘개, 응달뜸, 주암, 송정
1436년 세종17년에 연촌 최덕지 선생이 남원부사에 취임하여 이곳을 순시 하게 되었는데 이곳 산과 물이 좋은걸 발견하고 큰아들 호군조를 살게 하여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고 전한다. 후에 점차 늘어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풍수로는 행주형 이라하여 마을 앞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조선 초부터 주암마을이라고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주암, 삼산, 북창을 합하여 방계리로 불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충효열 사상이 강하여 우수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최연손(도승지) 최윤지(사헌부 감찰) 최계창(갑산부사) 최원제(삼화 방위사) 최운제(진사)최봉호(진사)를 배출하고 마을앞 행주형의 노상에 전주최씨 종중에서 만휘 정을 건축하여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한다. 세종 문종 조에 대제학을 지낸 연촌 최덕지선생을 기리는 추모정이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저수동고개, 소날, 송정고개, 서답바우, 존의당, 주암서원, 진구네들, 독보,
지사중학교 앞들은 자래울들 중학교들 돌아가는 곳은 모퉁이들, 중하교 앞들 건너 냇가를 건넌곳은 짐실보들, 지사농협 지나서 다리는 실용교, 그아래는 중보가 있다.
◆삼산(三山) 홈멀이
행정구역개편때 제동(濟洞)삼산(三山) 실곡(實谷) 주암(舟岩) 현계(玄溪)옥산(玉山) 과 장수군 외진전면(산서면)당동 의 일부를 병합하여 중심마을인 방계(芳溪)이름에서 방계리라 했다고 한다.
방계,제수동-제동, 홈멀이(三山)실곡(實谷) 북창(北倉), 동녘게, 응달뜸 주암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300여 년 전부터 진 씨 송 씨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앞냇가 물이 말고 깨끗해서 금산김씨가 터 잡았다고 전하며 농사를 짓는데 마을에서 홈통을 이용하여 논물을 끌어들였다고 하여 호올이라 불렀다고 하며 마을 주변에 산이 세 개가 있어 삼산이라 불렀다한다. 보통 삼산을 홈멀로 부른다.
◆실곡: 實谷
전남 곡성에서 300여 년 전 산세가 좋아 이거 하였다고 전한다. 본래는 남원군에 속하였다가 북쪽에 국채가 있다고 해서 북창이라고 하였으나 90여 년 전부터 실곡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뒷산의 형세가 황우를 닮았고 황소가 강을 건너갔다고 하여 황우도강이라하며 꼬리 밑에 똥이 나오는 곳에 마을이 하여 잘산다는 전설이 전한다.
북창은 우리지역 근처의 서창(순창 동계면)북창은 임실군 신평면 북창, 동창은 진안군 백운면 동창으로 알려지는데 옛날 이곳에 나라에서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구휼미로 풀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창은 남원쪽일 것으로 보여지는데 전하는 바가 없다.
◆계산: 溪山 옥산이, 바우거리, 바우백이
현계 옥산 덕고면(덕과면) 상리일부를 합치고 현계, 옥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전설에는 목천 마 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촌 으로 불렀고 후에 정씨가 들어와 정촌 이라 이르다가 변 씨 강 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본래는 마을이름을 현주라고 하다가 조선 태조가 등극할 때 지리산으로 가던 중 현주 천을 건너려 하는데 물이 적으니 천을 계자로 하고 물이 없으니 현이라 했다고 하며 현계라고 불렀다고 한다.1914년 계산으로 고쳤다.
현주서원은 영천이씨 이능간, 장연 변씨, 변유, 김부흥, 정견을 모심 숙종1704년에 건립. 서원이 있는 곳을 서원 뜸으로 부름. 계산제, 탑봉제, 광암제는 1944년에 준공하고 선바우, 바위거리, 소류지 앞 바우골가든, 서원뜸, 안터, 옷바우골(옷밥골) 기만시암, 며느리덤풀, 소쟁이들, 옥밭골. 자봉귀소의 명당이 있다는 삼밭(새골) 독적골
여기서는 오수천 남산보 계양보로 부른ㄷ.
◆봉서:
예부터 권렴관시형(捲簾觀市形)의 명당 설에 의한 대지가 있다하여 새골(鳥谷)으로 부르다가 새봉자 깃들일 서 봉서(鳳棲)라 불렀다고 전한다. 명당 설은 이 마을에 우리나라 8대 명당에 속한다는 대지가 있다고 하여 주렴을 짓고 저자를 보는 형국으로 풍수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전한다.
◆옥산: 옥산이
1760년 영조 36년경 이거만 통훈대부군자강정 이 산수에 매료되어 머물러 살기시작하고 장, 소, 송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뒷산이 옥을 꾸어 놓은 듯 하여 연주산이라 불렀다하며 마을 뒤에 옥산사라는 절이 있다고 전하는 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고 함. 마을은 강한 돌로 둘러져 있어서 마치 성안에 들어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산수가 수림이 잘 가꾸어져 있다. 대대로 문장가가 많이 난다고 한다. 덕옥제는 마을동쪽에 바위위에지은 정자로 옥의 온윤(溫潤)함은 인(仁)이요. 화광(華光)은 예(禮)이며, 강영(剛穎)함은 의(義), 청월(靑越)함은 (智)라 해서 옥은 덕을 겸비하였다 하여 덕옥제라 이름 지었다고 함.
◆인터넷카페 지사면 향우님들: 큰까끔-안한식님, 청석-최태룡님, 플러스 원-장용환님, 눈꽃-김영숙님,지사면안하님, 돌이님, 덕재산님, 지사면향우회장 김성기님, 한마음님, 지사랑님,
첫댓글 난 이라고 질믄 안일거븐디....그서 이케 무식흐까??
흐메. 거시허부네~~~~~`
선천(서너니)에 새터를 잡아 마을을 세운 이환용씨는 우리 친할아버지닷 알았 아울러 기두할아버지도 되지 않느냐
지금까지모르고있던 자사면의 역사를 한눈에 알수 있도록 수고해준 안창렬님 감사합니다
그래 언냐 맞어 이케 좋은 자리 만든 울 대장님께꾸벅
고향에서 태어나 이렇게 많은 유적지와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자랑 스럽그만 이 기회에 많은것을 배웠고 고히 간직 할게요 고맙읍니다......
선배님 귀중한 향토자료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관기 관터에 유래에 대해서는 어릴적 아버지로 부터 전해들어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유래가 있는지는 몰랐습니다.고맙습니다,그리고 내고향에 역사를 내자식들에게 가르쳐 주겠습니다.엄마의 고향 에 대해 자랑스럽게 애기하겠습니다,좋은 자료 감사합니다.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