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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마지막 호국산행을 위해
수많은 영령분들을 모시고 간 낙동간 전선 동부 산악지역
전쟁기간 동안 낙동강 전선 왜관-진해까지 미군 담당
팔공산 중심으로 전투가 일어난 동부 산악지역 왜관 -영덕간 직선거리 80km
동부산악 지역 마루금 따라 180km에 이르는 대장정의 戰線(전선) 500리 길
클럽 호국산행
1차:낙동강-천생산-유학산- 가산-팔공산 전투 (6월 5-6일)
2차. 안강-기계전투 (9월 18일)
3차.왜관-유학산전투(10월3일)
4차.보현산전투 (미정)
5차 신녕전투 (미정)
최종미션 호국산행 낙동강- 유학산-가산-팔공산-보현산-영덕 180km
최종 미션후 내년도 6.25전쟁 61주년에는 몇몇 단체와 공동으로 진행 계획중이며
호국산행 마지막 미션은 ** 제약회사에서 실시하는 국토 대장정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올 년말까지 동부 산악지역 전투 지역의 유해 발굴지역과 전투 지역의 자료를 찾는데
노력하며 단순한 마루금 보다 더큰 의미를 부여한 호국산행 코스로 만들려고 합니다.
회원님들의 호국산행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호국산행 코스 이름을 전사의 혼(戰士의魂) 이라 부릅니다.
제1코스 | 제2코스 |
낙동강-영덕까지 180km |
낙동강-곤제봉 200km |
1구간:328고지-유학산-팔공산 43km 2구간 팔공산-화산- 보현산 44km 3구간 보현산-꼭두방재-성법령 40km 4구간 성법령-내연산-장사해수욕장 34km *도상거리 :160km 실거리 18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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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낙동강-유학산-팔공산 43kn 2구간 팔공산-화산- 보현산 44km 3구간 보현산-꼭두방재-성법령 40km 4구간 성법령-도덕산-곤제봉 60km *낙동강-곤제봉까지 도상거리 180km 실거리 2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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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산악지역 치열하게 전투 벌어진곳
1.328고지전투
2.다부동전투
3.팔공산전투
4.신녕전투
5.영천 보현산전투
6.장사상륙작전
7.안강-기계전투
8.구암산전투
자료 협조:국방부.국군 유해 감식단.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50일 만에 모두 내준 낙동강전선
장사상륙작전 1950년 9월 14일 기척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위장상륙작전 상륙작전에는 성공했으나 772명중 어린학도병이 90% 참가 8일간 중간 지원없이 버팀 상륙작전 도중 어린 학도병 200명 사망 "학도병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군사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국일념으로 전투에 참가한 탓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장사상륙작전 시나리오 "상륙을 할수 있어도 후퇴는 100%없는 ...후퇴 해봐야 바다이므로 인민군은 장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서 기관총으로 난사를 하였고...
인천 상륙작전을 하기 위해 인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했다. 그래서 장사 상륙작전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천에 상륙하여 반격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은 10대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기꺼이 참여하여 참여자 대부분이 전사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장사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상륙작전에 앞서 소규모 해군이 함포사격을 감해하였다. 대공포를 박살내고, 공군의 기총엄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대공포가 파괴되자, 미8군 예하 무스탕이 장사 상공에 떳다. 772명의 대원이 1차적으로 상륙을 개시했고 태풍 케지아호의 영향으로 배는 좌초 헤엄치지 못한 어린학도병들 익 사 했다.조국을 위해 책과 펜을 두고 피 묻은 총을 든 소년들이다. 정규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 쏘고 수류탄 던지는 법만 간단히 배운 학도병이라지만 매섭게 북한군을 몰아부쳤다. 모래사장은 피로 물들었다. 2차 상륙이 모두 완료되고, 1차 상륙의 병력과 합류하여 북한군 섬멸에 앞장섰다.. 모래사장을 넘어가는데, 수 백명이 전사했다. 무스탕이 가끔 날아와 기총엄호를 할 때면, 북한군의 사격이 멈췄는데, 그 때 엎드려 있다가 얼른 뛰쳐나갔다. 끝내 학도병이 장사를 점령하고 이후 몇시간 동안 포항을 향하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놓는데 성공했고, 상륙지점이 동해안이라는 강한 의식을 심어줌으로서 북한군의 시선을 서해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북한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이를 악물고 탄약을 모두 써가면서까지 적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2개 대대병력이 기갑병력과 함께 장사를 덮치자 , 미8군은 즉각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미 139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고 생존자 수십명은 동료들을 챙기며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이것으로 단 몇 시간동안만 이어진 장사상륙작전은 끝이 났다. 장사상륙작전은 772명의 자원입대한 학도병이 참전하여 139명의 전사자를 냈고 부상 92명을 포함 수십명이 행방불명 발생 마지막에 철수를 할 때는 철수를 돕기 위해 왔던 수송함이 매우 작았던 터라 1개 소대병력 36명을 태우지 못한 채 철수 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동료들을 배웅하며,모래사장에 남겨졌던 학도병들은 끝까지 철수하는 동료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다시 모래사장 건너편 북한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남겨진 학도병 중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렵게 좌초된 문산호와 해안의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 하였고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상륙한 대원들은 장사리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화진리.구계리 봉황산 까지 진출 적의 보급로 차단하는 등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
구암산 전투 전쟁이 한참이던 50년 7월 10-15일까지 7월11일 동해안의 춘양방면에서는 게릴라부대 300명이 울진방면으로 이동중에 있었고 남쪽 10km 지점에서도 적 제 5사단 예하부대 300명이 전차부대와 함께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경주와 포항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면서 죽장면과 기계면의 각지에 출몰하여 부녀자와 양곡, 농우 등을 약탈하여 갔다. 가세하여 후방교란에 열을 올렸다. 1개중대로 추산되는 적들이 영천군 구룡산으로 남하하여 잠입한 것을 탐지하고 12일 16:30에 경주를 지나 도유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개 분대의 척후대를 파견하여 적정을 관찰하였는데, 적들은 인근 마을에서 노획하여온 가축소리 때문에 그들의 위치를 노출하고 말았다.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아직 잠에 취해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분산도주하였는데, 2시간에 걸친 추격으로 8명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다. 부상자도 없이 13:00 포항으로 귀대하였다. 적을 추격하던중 15일 새벽에는 비학산 중복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정찰대원 3명을 침투시켜 100여명의 적들이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날은 이미 날이 저물어 교전없이 용기국민학교로 동본부를 이동하였다. 가사리 방면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한편 정자리에서도 400여명의 적들이 출현하였다는 적보가 들어왔다. 전개하였다. 군·경 합동부대는 전면과 좌우의 3면으로부터 적을 포위한 다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7일 14:30부터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제1소대가 이미 구축해놓은 중화기로 적의 정면에 사격을 가하자 적들은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자도 있었다. 급습 점령하는 한편 적전 최단거리인 500m 소고지를 확보하였다. 한편 제2중대의 1소대는 좌우에서 엄호를 받으며 적진정면을 공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와 버리고 간 취사기구만이 남아 있었다. [참고 국방부 한국전쟁사에서] |
보현산 전투 보현산 전투는 50년 7월부터 9월 초까지 보현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전개된 비정규전 및정규전 전투였다. 북한군은 남침과정에서 정규전을 실시하는 한편 유격부대를 침투시켜 그들로 하여금 남한에 있는 좌익세력과 합세,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주민을 선동하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제766부대가 동해안에 상륙한 후 보현산 일대로 진출하면서 유격활동을 펼치게 됐다. 아군은 최초 경찰병력을 동원해 적 유격대 소탕작전을 벌였으나 경찰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7월 하순부터 공병단과 유격대를 투입했다. 북한군 제 766부대가 투입됨으로 비정규전 형식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보현산 전투는 이곳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정규전으로 점차 확대됐다. 즉 국군은 제8사단을 이곳에 투입했고 북한군은 다부동 전방에 있던 제 15사단을 이곳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반면 아군은 이지역과 이곳으로부터 남쪽은 접근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적 제 15사단은 운주산과 봉화봉 사이에 형성된 공백지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죽장~자양~영천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고 9월 2일 저녁 공격을 개시해 돌파구를 형성해 영천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아군 제8사단은 결국 보현산을 포기하고 영천 북쪽에서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적은 동부전선의 진출이 지연되어 왜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적 제15사단을 청송지역으로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하게 하는 한편 목표로 한 8월 l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반적인 전쟁목표 달성에 차질을 가져왔다. 반면에 아군은 부대를 재편하고 정리하는 한편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획득하였다.한편 보현산 일대에 이동해 주저항선을 형성한 제8사단은 험준한 지세를 적극 활용해 22일간 우세한 전력의 적 제8사단과 제776부대를 억류하고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하지만 신편으로 인한 훈련부족과 병력 및 장비의 열세에 따른 전력 차는 결국 국군 제8사단을 기룡산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작용한 요인이었다.8월 15일 투입함으로써 이후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을 투입함으로써 국군 제8사단은 방어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보현산지구전투는 영천지구 전투를 위한 전초전으로서,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다시 말해,적이 총력을 집중한 9월공세로 9월 공세로 부득이 제8사단 예하 제15연대와 제21연대, 그리고 제7사단 제5연대와 독립 제 1, 제2유격대대,강원경찰대대 등이 9월 4일을 기해 인접부대와 연결 작전을 위해 다음 진지로 이동하였다.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모든 병력을 집중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영천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
화산 전투 화산전투도 칠곡 다부동 전투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화산(828m)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 경계에서 조림산과 마주하고 있다. 국군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퇴각한 북한군 일부와 낙동강을 따라 군위 우보에서 영천 신령 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맞섰다. 이 무렵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영천을 사수하는 신녕전투를 비롯해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화산 정상 부근은 모두가 유해 발굴지역이라 해도 된다. 고추장과 주먹밥 한덩이 지원도 끊어지는 전쟁속에 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줄어듬 북한군의 피해도 막대함 [교전내용] 화산828m은 지형적인 특성상 넓은 들판지역의 평지같은 곳이다 국군은 주간공격에 많은 전사자가 나오자 야간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중대원들은 주먹밥에 고추장 찍어 먹고 화산으로 침투 북한군 동쪽진지, 국군은 서쪽진지 서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다 보니 서로의 진지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다. 혼전과 혼전, 전투와 전투속에 진지가 바뀌고 또 바뀌니 식사를 운반해오던 한국청년단원이 적에게 사살되거나 붙들리니 주먹밥과 고추장 한숟갈 조차도 지원이 끊어져 버렸다 . 지원은 끊어 졌지만 실탄은 부족함이 없었다.수없이 쓰러진 전사자의 실탄과 부상자들의 실탄이 보급의 원천이 되었으니... MBC 드라마 2010년 소지섭의 "로드 넘버원" 촬영 배경이 된곳 신녕, 갑령, 화산지구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14일까지 33일간의 피말리는 전쟁을 한 격전지로 신녕지구전투는 갑령, 화산, 조림산 지구전투와 더불어 대구 동북부 방면 방어 작전 중 하나며, 낙동강을 건너게 된 북한군 제 8사단은 아군 제6사단과 교전하면서 신녕 북쪽으로 남침했고, 북한군 12사단과 15사단은 보현산지구로 진출했다 |
조림산 전투는 갑령전투와 더불어 주위 조망이 좋아 사방 수십km가 관측 되어 전략적으로 매우 좋은위치 [교전 개요] 조림산은 8부능선 부터 상당한 급경사의 오름이다. 조림산 정상은 적의 수중에 들어 가있는 상태이며 8월 말부터 북한군 제 8사단은 인접 북한군 제 13사단 및 제 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를 돌파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여 보려고 최후의 총공세를 다짐하였던 것인데 이 적을 맞이한 아군 제 6사단은 장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구 외곽선을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적의 야욕을 드디어 분쇄하고 말았다. 일로 북진반격을 재촉하였다. 원래 제 6사단의 신령 지구 싸움은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북한군 제 8사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그 전투 능력을 빼앗고 그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말았다 아군:약 8천 5백명 적군:약6천 500명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국군 6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적지로 당시 국군은 적 3천800여명을 사살하고 적전차 21대, 화포 14문을 파괴하는 등 수세적 전황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킨 곳이다. |
팔공산.가산전투 1950년 8월 초부터 왜관-다부동 지역에서 대구 공략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하던 북한군 제2군단은 8월 말에 이르러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험준한 산악지대로 침투하여 우회공격하라는 지시를 맡았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은 효령 일대 에서 다부동으로 남하 중인 북한군 제1사단을 가산-도덕산과 대율동 - 팔공산선으로 진출시켜 그 동쪽의 북한군제 8사단과 협동으로 대구 외곽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다부동 지구에서 작전 중인 국군 제1 사단의 방어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시킨 다음 국군 제 6사단의 좌측을 담당하게 하여 국군 제2군단의 방어정면 을 축소시켜 남침하는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다부동 전선의 동쪽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 6사단 지역 의 일부와 제 5연대 및 기갑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팔공산과 가산 지역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새로운 방어지역인수를 위해 8월 30일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육군본부는 제 1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현 담당지구 교대완료 후 즉시 신 담당지구로 이동하여 2개 연대로서 동 지구를 담당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제 2군단도 작명을 통해 제 1사단은 1950년 8월 30일 12시까지 현 진지를 미 제1기병사단과 교대 후 31일 19시까지 제7연대, 제5연대, 기갑연대와 교대하여 적의 남진 및 동남진을 저지하고 이를 진전에서 포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은 8월 31일 제6사단 지역인 신녕 부근으로 이동한 후 사단사령부를 신단동에 설치하였다 제11연대와 제 12연대는 제5연대와 기갑연대 그리고 제7연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558고지와 527고지 그리고 655고지가 30일 밤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압력으로 점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제 11연대는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제 5연대 및 기갑연대와 협동으로 이날 13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제 12연대는 제 7연대의 방어지역을 계획대로 인수하여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제 7연대는 제 2군단작명에 의해 신녕으로 이동한 후 사단예비가 되었다. 9월1일 기갑연대는 제11연대 제2대대의 지원을 받아 558고지를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탈환하여 제11연대 제2대대에 인계하고 신녕으로 이동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이날 12시에 655고지 를 공격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 2개 소대 병력을 격퇴한 후 점령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다시 527고지를 공격하였 으나 실패하자 우선 655고지만을 제 11연대 제 3대대에 인계하였다. 9월 2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전날 진지를 인수받 았으나 북한군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이날 2시에 381고지에서 318고지로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우측에 배치되었던 제 12연대 제 1대대가 적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예비인 제 2대대의 증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제5연대 제2대대는 제 11연대 제3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527고지를 3시에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점령하였다. 제5연대 제 2대대는 14시에 527고지를 제11연대 제3대대에 인계한 후 대구로 이동하였다. 9월 3일 제 11연대는 4시부터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제 2대대가 538고지 남쪽에서 적 2개 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14시에 538고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 3대대는 655고지에서 피아간에 서로 탐색전만 전개하고 교전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제 1대대는 318고지 동남쪽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원진지인 318고지로 다시 복귀하였다. 제12연대 정면에서는 제 2대대가 침입해 온 적을 격퇴하였으며 제1대대는 구미동 부근에서, 제 3대대는 제 1사단과 제 6 사단의 전투지경선 변경에 따라 제 2연대로부터 인수한 제370고지를 점령한 후 진지보강 작업을 실시하였다. 9월4일 제12연대 제1대대는 제2대대에게 전지를 인계한 후 연대지휘소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1950년 9월 5일 중부전선의 제 8사단전선이 돌파되면서 북한군 제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제1사단은 9월 5일 밤 전반적으로 전선을 조정하고 6일 오전에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사단의 좌측부대로서 538고지 북쪽 능선을 점령하여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는 384고지 좌측 전방에, 제2대대는 대율동 남쪽 능선을 점령하였다. 제 11연대 제1대대는 836고지인 파계재 일대의 주요지점에 배치되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군단예비가 되어 신단동으로 이동하였다. 제 12연대 제2대대는 573고지에서 329고지 사이에, 제 3대대는 388고지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 날 북한군 제1사단은 대구에 이르는 최단 접근로에 주력을 투입해 국군 제1사단을 돌파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1사단의 일부병력이 2시 야음을 이용하여 583고지로 침투하여 가산 부근의 적과 합세하여 중리를 향해 남진하였다, 그런데 이날 아침 중리에 도착한 제15연대 제1대대는 남진하고 있는 북한군과 불시에 조우하였으나 과감한 공격으로 이를 격퇴한 후 583고지를 계획대로 점령하였다. 이 날 오후 미 공군과 사단 제 17포병대대가 제 1사단 정면에 지원사격을 실시함으로서 적은 공세 행동을 하지 못하였 다. 북한군 제 1사단은 9월 9일 19시에 팔공산 북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제 1사단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도덕산으로 침투시켰으나 제 15연대의 공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한편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사단 좌측에 대한 적의 압력이 증가되자 제거하기 위해 이날 새벽 파계재에서 고도현으로 이동하여 적 1개 대대병력을 격퇴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 도 22시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이날 제 15연대는 연대지휘소를 매골로 이동하였고, 제 12연대도 연대지휘소를 왕산동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제1사단장은 1200여명의 병력을 증원받아 도덕산으로부터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으나 제15연대와 제11연대가 10일 미명에 도덕산을 탈취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사단은 3분의 2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 진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12일 적의 특공대가 제15연대 지휘소가 있는 매골지역으로 침투하였으나 사전에 인지한 아군의 매복공격으로 격퇴하 였다. 9월13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 제 8기병연대와 협동으로 756고지 부근에서 침투해 온 적을 포착 하여 격퇴하였다. 583고지를 방어하던 제 15연대 제 1대대는 포병지원을 받은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고 일시 고지 동 남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 1사단은 13일 12시부로 국군 제 2군단으로부터 미 제1군단의 지 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행작전은 계속 수행하였다. 제11연대 1대대는 적이 장악하고 있는 756고지를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여 탈취하였다가 다시 적의 역습을 받고 빼앗겼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14일 783고지를 공격하여 이날 19시 30분에 점령하였다, 제11연대 제 1대대는 15일 미군 전폭기와 포병지원사격을 받으며 756고지를 다시 공격하여 이를 점령한 후 추격전을 전개해 가산산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북한군 제1사단의 대구 동촌비행장을 점령하려 는 그들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제1사단은 가산과 팔공산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제1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제1사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어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그들 병력의 3분의 2를 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제1사단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이후 단행된 낙동강 방어선의 총반격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적을 주격하기 시작하였 다. 제 1사단은 팔공산 지역에서 적을 추격하여 가산 부근을 탈환한 후 다부동 지역의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하여 9월 22일 이 지역에서 북진의 돌파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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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죄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 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트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 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그러나 20일 밤 적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응사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더구나 다음날 오전에 적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제11연대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 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사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귀순한 포병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또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서- 우리 국군 1사단의 방어 전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전담했던 12연대가 이 유학산에서 혈투를 벌였다. 1950년 8월 17일부터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은 날이 밝으면 공격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또 공격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12연대는 적이 먼저 고지에 오른 이 유학산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식의 공세(攻勢) 를 벌여야 했다. 고지를 선점한 적은 우리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루고 있었다. 고지에 오르기 위한 길의 평이함에서도 적은 우리보다 유리했다. 더구나 남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은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쉬웠지만 그 이상은 험준한 암벽이었다. 몇 안 되는 등산로를 통하더라도 마지막에는 50~70m의 가파른 암벽을 올라야 했다.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고지를 빼앗으려는 12연대 장병의 큰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8월 13일 이후 유학산에서 격전이 벌어지면서 병력 손실이 계속 발생했다. 그를 보충하기 위한 추가 병력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을 올려보내는 일은 통상 밤 10시30분을 지나서 시작, 11시30분 쯤 마쳤다. 새 병력이 도착하면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내가 소대장 아무개”라고 소개한 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해 분대장에 임명하는 식으로 공격 진형(陣形)을 갖췄다고 한다. 한 뒤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동이 트면 시작하는 공격에 이들 분대원이 앞장을 섰다. 아침 전투에서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80~90%가 사라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의 화랑담배 껍질은, 그러나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설령 없어지지 않더라도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소대장의 땀과 피로 얼룩져 전선에서 죽어간 신병들의 이름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무명(無名) 용사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러나 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춰 서게 되는 곳은 70m 이상의 암벽이 버티고 있는 지점이었다. 적으로부터 수류탄이 날아오면 피할 곳도 없었다. 병력 손실이 생겨났다.모든 고지가 그랬다. 다부동 싸움의 모든 전장(戰場)도 그랬다. 이런 때에 과감하게 나선 사람이 노무자였다. 병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노무자들은 조국과 민족, 그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 또한 아주 컸다. 1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다부동의 유학산 전투에서 아군이 결코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에는 1사단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 갔다. 새로 전쟁터에 투입된 신병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그만 겁부터 집어먹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물처럼 흘렀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는 하천을 이루는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참혹한 정경이 나의 눈앞, 저 산에서 벌어지고 있 었다. 유학산은 이렇게 내 전우들의 피와 육신을 삼켰다. 그 무덥던 1950년의 여름날, 밤과 낮 구별 없이 벌어지는 전투 의 현장에서 내 부하들은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사단, 그리고 그 예하의 각 연대에서는 사정없이 ‘고지 탈 환’의 명령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득달같이 진지로 날아오는 공격명령을 받아들고 그들은 싸움터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
328고지 전투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군은 1만7천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은 왜관 남쪽 기산면 노석리에서 도하를 시도하고 있던 제3사단 병력을 328고지 쪽으로 돌려 집중 공격하였다. 8월 12일 밤에 국군 제15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매남에 설치하고, 동명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 배정하고, 154고지를 방어 중이던 제3대대를 반계리에 위치한 270고지에 배정하였다. 국군의 방어선 변경으로 인한 틈을 노려 북한군은 154고지를 차지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다. 8월 14일 1시 무렵 북한군 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북삼면 오평리 (현 북삼읍 오평리) 마진나루터의 수중 가도를 도하하여 328고지로 접근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국군은 고지 후사면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인접한 3대대의 270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중과부적으로고지를 빼앗긴 제15연대는 3~4시간 교육을 받은 신병을 보충병으로 부대를 재편해 다시 고지를 빼앗는 1진 1퇴의 공방을 24일까지 지속하게 된다. 날이 밝아지자 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역습을 시도하여 오전 8시 무렵 고지를 다시 탈환하고 고지의 전사면7~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국군은 낙동강 건너편에서 북한군을 지원하는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포격을 피해 고지의 후사면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5연대는 철수와 동시에 특공대를 328고지 뒤쪽으로 침투시켜 두었다. 8월 15일 새벽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 는 특공대와 함께 협공해 들어가 제1대대는 328고지, 제3대대는 270고지를 탈환하였다. 오후 4시 무렵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강 건너 언덕의 북한군을 제압하였고, 328고지에는 네이팜탄에 의한 북한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날 밤 11시 무렵 국군은 북한군의 재공격을 막다가 제1대대는 망정리로 후퇴하고, 270고지의 제3대대는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16일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하였고, 미 공군은 B-29로 북한군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크게 둔화시켰다. 그렇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8월 17일에도 계속되었고, 8월 24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8월 23일 국군 제1대대는 미군 105밀리 곡사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면서 다시 역습하여 270고지·328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328고지에는 수습하지 못한 적군과 아군의 시신이 즐비했으며 전투 중에는 시신 을 방패삼아 적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8월 24일 새벽 국군 제1·3대대는 여세를 몰아 154고지를 협공하자 북한군이 154고지를 버리고 369고지로 도주하였다.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서울사단’이라 불리던 북한군 제3사단은 제15연대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328고지 전투는 고지의 정상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극히 치열하였다. 적 제3사단은 기간 중의 전투에서 미 공군의 부단한 공중 폭격과 그리고 아군의 포격 하에서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끈덕진 공격을 거의 일과와 같이 반복 하였으나 도리어 막대한 손실만을 입게 되어 그 사기는 급하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적은 제15사단이 영천 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의 지연과 탄약 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지속된 공격행동을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자랑이었던 전차도 미공군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었고 아군의 장비한 3.5인치 로케트포에 여지없이 파괴됨으로써 전차지원 없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반면 아군 제15연대는 2주일에 걸친 이른바 328고지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투와 육박전을 통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이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인적 손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군 전선내의 요지를 담당하여 인접부대와 긴밀한 협조 하에 임무수행을 완전히 끝 마치고 8월 30일부터 기동을 시작한 결과, 이날 5시에 대구, 하양을 거쳐 9시에 신덕동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
첫댓글 6.25전쟁에서 낙동간 전투는 정말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가 패배 했다면 지금 우리가 지금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살려놓은 전투이기에 나는 낙동강 전투의 적전지 구미(왜관)-다부동-영천를 우리나라의 안보 1번지라고 생각한다.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큰 의미가 있다.
어제는 재향군인회가 주최하는 6.25 기념행사에 참석했는데"6.25 참전용사(할배)들이 보잘것 없지만 참전용사 모자, 빼지, 자켓들을 입고 자랑스럽게 참석하신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웠습니다. 우리도 80세가 되면 저 참전용사들 처럼 무언가 자랑스러운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