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은 장애우의 날이다. 장애우의 날이 다가오면 내 마음에 미 증류된 채로 남아있던 영화 한 편이 증발한다. 1991년 ‹토토의 천국›으로 깐느 영화제 황금카메라상(신인감독상)을 거머 쥔 자코 반 도마엘(Jaco Van Dormael)이 만든 ‹제 8요일› 이다. 1996년에 이 영화에서 주연한 다니엘 오떼이유(Daniel Auteuil)와 파스칼 뒤켄(Pascal Duquenne)은 깐느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으로 수상한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파스칼 뒤켄은 장애우 최초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5번이 넘게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성공한 비즈니스 세일즈 기법 강사인 ‘아리’(다니엘 오떼이유)는바쁜 일상 때문에 가족을 소홀히 여기다가 부인과 두 딸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괴로운 마음으로 밤길을 운전하던 아리는 정신지체 요양원에서 탈출한 ‘조지’(파스칼 뒤켄)의 개를 치고 만다. 처음부터 재수없이 말려든 일인지라, 아리는 가능한 빨리 조지를 떨궈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애쓰지만, 조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조지의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렵게 찾아간 조지의 누나는 자신의 인생을 지키고 싶다며 조지에게 요양원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한다. 결국 아리는 조지를 요양원에 데려다 주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리는 언제나 부인과 두 딸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한다. 조지는 정신지체우 친구들과 함께 아리에게 부인과 딸을 돌려주려고 폭죽과 불꽃놀이를 계획한다. 계획은 성공적이어서 아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조지는 아리의 인생에서 한 걸음 물러나와 하늘나라에 있는 어머니에게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하늘로 비상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감미로운 ‘루이스 마리아노’의 노래 “Haman la Plus Belle du Monde”가 흘러나온다.
‹제 8요일›의 영화적 장치는 놀랍도록 치밀하다. 이 영화는 우리 주변의 장애우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장애우가 상처받은 비장애인 ‘아리’의 영혼을 위로한다. 영화의 제목 ‹제 8요일›은 중요한 메타포를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나라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비장애인에게 장애우는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신은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도 잠정적인 장애우라는 사실을 말이다.
2001년 보건사회 연구원의 통계에 따르면 후천적인 장애인은 130여 만명. 전체 장애인 145만명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10명 가운데 9명이 후천적인 장애인이라는 말이다. 선천적인 장애인은 5만 9000여 명으로 4.4%에 불과해 10명 중 1명도 안됩니다. 후천적인 장애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를 비롯한 불의의 사고로서 장애인 65만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청각장애의 발생원인도 86.3%가 후천적 원인에 의한 것이었으며, 원인 미상이 8.9%, 선천적 원인이 3.2%였다.
우리는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이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보도를 통해서 정신지체우가 위험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 강력 범죄중 정신적 장애인의 범죄가 차지하는 비율은 0.37%로 극히 적은 수치를 점하고 있다(2000년도 범죄백서). 그러므로 통계적으로 정신장애우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제 8요일› 에서 아리는 조지와 함께 조지의 누나를 찾아간다. 두 자녀들이 조지 삼촌을 향해서 소리치며 반갑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조지의 매형은 그 아이들을 조지로부터 떼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우리의 현실을 읽게 된다. 그렇게 사랑을 갈구하는 정신지체우 ‘조지’에게서 조카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소위 우리의 지성이라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없는 지성, 그것은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장애우 시설이 우리 마을에 들어오면, 아파트값 혹은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느끼고 반대하지는 않는가? 장애우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장애우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 적은 없는가? 장애우들이 도시 한복판을 활보하는 모습이 후진국의 모습이라고 멋쩍어 하지는 않았는가? 복지국가를 외치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정책이 장애우들을 도시 변두리에 강제입소시키는 현실은 누구의 잘못인가? 하루에 버려지는 장애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청년들과 태국선교를 떠나기 전에 오랫동안 장애인 시설을 섬기시는 원장님의 딱한 사정을 듣고, 필자가 아는 기독교 방송기관에 단신이라도 좋으니 방송을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 드리고 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행히도 뉴스시간에 그곳의 사정을 아시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국에 알려주셨다. 필자가 태국에서 서울로 도착하자 마자, 원장님께 방송이 나간 후에 반응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원장님은 “전화 5통 정도 왔어요!” 기대에 미치는 숫자는 아니였지만…”이라고 말꼬리를 흐리셨다. 나는 “그래요! 좋은 소식은요?” 그러자 한동안 말을 잊은 원장님이 입을 열었다. “5통 모두가 그렇게 좋은 생각으로 정신지체우를 돌보는 곳이라면 불쌍한 내 아이 좀 맡아달라는 전화였어요” 필자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 꼭대기까지 막아선 벽을 느꼈다.
우리의 현주소이다. 말로는 사랑이지만, 몸은 아직 멀었다. 말로는 헌신이지만, 몸은 아직 설었다. 왜 장애우를 낳게 되면, 모두 입양을 시키거나 요양원에 버리고 떠나버리고 마는가? 바로 우리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장애우 가족을 만나보면, 장애를 가진 아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 때문에 더욱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 가운데 장애우가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참으로 힘든 일이다. 누군가 함께 도와주지 않으면 해결해 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 주변으로부터 수치심까지 느끼며 살아가게 하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필자에게 건넸다. 우리가 차별하고 있는 장애우는 신체와 정신에 다소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만, 소위 비장애인은 영혼에 문제가 있다고. 우리는 언제쯤 우리의 기득권을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저는 그 말을 밤이 새도록 곱씹었다. 우리의 영혼이 비정상이다. 우리의 영혼이…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교회의 책임도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별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강단에서 행해지는 복에 대한 메시지가 얼마나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난의 화살을 던지게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의 복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체험한 감격보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복에 집착하게 만든다. 심지어 물질적인 복이 병행되지 않으면 구원의 감격도 헛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는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말로 세상의 모든 고통과 질병은 죄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일까?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아니다. 그런게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기대하는 복과는 다르다” 시편 1편과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을 주목해서 읽어본 적이 있는가? 시편 1편은 어떤가?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만약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서 혹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복받지 못한 것일까?
또, 마태복음 5장은 어떤가? “마음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영어 성경을 보면 the blessed 라고 기록하고 있다. 복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회사에서 정직하게 일하려고 주가조작을 고발했다가 오히려 쫓겨난 교우보다, 회사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가를 조작해서 승진하게 된 교우에게 하나님의 복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를 쓰고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복받은 자가 되려고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걸어가는 것은 아닌가?
교우가 장애우를 낳게되면, 사랑하고 격려하는 대신, 마치 신앙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도록 설교하고 있지는 않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이러한 개인과 가정의 아픔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인해서 정죄되는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물질의 복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러한 복을 간절히 원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때로는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신다. 그것을 통해서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는 주의 은혜가 거기에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세상의 복은 땅값의 상승, 주가 상승, 직업의 인기도 상승 등 소위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삼고 일하는 사람가운데, 시류를 읽지 못해서 손해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는 이 세상에서 남긴 물질 하나 없이 십자가에서 육체마저 비우셨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평생 가난한 자가 되어서 살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삶도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복은 소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것에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의 양이 하나님의 복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장애우를 향한 우리의 시각이 바뀔 수 있고, 그 가족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몫이 그 가족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임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조지는 아리를 떠난다. 아리에게 가족이 있기에, 그리고 그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기에 빌딩의 옥상에서 알레르기 증상을 가지고 있는 초콜렛을 맘껏 먹고 하늘로 뛰어든다. 죽기 전날 저녁, 모든 여인에게 버림받고 울부짖는 장애우 조지와 함께 추는 아리의 부르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춤이였다.
이제 이 영화의 마지막 궁금증을 풀어보자, 왜 영화의 제목이 ‹제 8요일›일까? 영화의 마지막에 그 이유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다. 그리고 무언가 빠진 것이 없나 생각하신 후, 제 8일에 하나님은 조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