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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4일 월요일에 백 교수님과 뒷마당 작업에 필요한 자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애로우록 로드(Arrowrock Rd) 주변에서 모래를 두 번 가져 왔다. 매우 험하고 거친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의 황야를 보았다. 아래 지도에 나오는 붉은 표시의 A지점은 애로우록 저수지를 나타내고 있다. 웜 스프링스(Warm Springs) 골프장을 지나서 동쪽으로 달리면 21번 도로가 나오고, 큰 다리를 건너면서 82번 도로로 줄곧 달리면 바위가 많고 활처럼 굽어진 큰 저수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애로우록 로드 직전에 21번 도로에서 아래로 내려온 지점 어느 곳이다. 아래 사진 윗부분에 집이 조금 보이는데, 컨트리 가수 케니 로저스 닮은 노인이 살고 있었다. 모래를 가져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래 냇가에서 가져가라고 해서 작업을 하였다. 존 버거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풍경을 볼 때 '소유의 개념(Concept of Possession)'으로 바라본다고 <보는 방법>에서 말한바 있다. 여기도 그런 것 같다. 빨간 줄과 팻말 그리고 철조망은 여기가 ‘private’, 즉 사유지를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산들이 철조망으로 경계를 이루어 풍경에 관한 미국식 '소유의 개념'이 실현되고 있었다.
이십 년이나 운행한 포드 브롱코(iron horse)에 모래를 실고 나오는 중이다. 주변의 풍경은 아름답게 보이기보다는 황량하고 광활하다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이 곳 보이시(Boise)에는 고층 아파트는 없고, 삼층 정도의 아파트만 몇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주택형태는 단독 주택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건비도 비싸고 해서 정원을 꾸민다거나 부분적인 자동차 수리는 스스로 많이 해결하고 있다.
가던 방향으로 좀 더 가서 애로우록 로드를 타고 내려가 애로우록 저수지(Arrowrock Reservoir)에 있는 맥스 크릭 공원(Macks Creek Park) 근처에서 이 사물들을 촬영하였다. 풍경이라기보다는 거친 사물들로 보였다. 뷔스타망테(Jean-marc Bustamante)의 <정적(Dead Calm)>보다 더 사물처럼 보인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대상을‘사물성(Objecthood)으로 바라보기’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Pre-Reservoir Dogs
Jean-Marc Bustamante – Dead Calm
Stationnaire II
Jean-Marc Bustamante, Tableau T.72A.82, 1982.
In the work of Bustamante and others like him, however, that ability to feel as if the scenario in the photograph has been “genuinely grasped” is challenged both by scale, and the unilateral level of description. The photograph Tableau T.72A.82, for example, depicts a cypress tree, surrounded by an extending hillside behind it, covered in similar trees. Photographed by a photographer like Sternfeld, the scene could have come across as transcendent as the image in New York’s Central Park – the images do look somewhat analogous on the surface of things. However, as in all of Bustamante’s Tableau images, Bustamante uses his camera in a manner intended to flatten the subject matter into a single plane, shooting at high noon so that everything is described equally by the available sunlight. Whereas the Sternfeld image uses camera shifts, time of day and motion to create an image of an ethereal moment outside of the picture, Bustamante’s image does the opposite – the definition of the image he gives us can not be described by that which is beyond the frame of the photograph. Scale, too, plays a role in this. Bustamante’s prints, which are mounted on aluminum and framed without mats, are printed roughly 50x60 inches, and present the viewer with objects which are somewhat analogous to human scale. In essence, the experience of viewing a Bustamante print inextricably differs from that of viewing a Sternfeld – where Sternfeld gives you a somewhat cinematic experience of losing yourself in the image and it’s implied narrative qualities, Bustamante gives you the experience of observing a reproduction of the object itself. It is not the introduction of poetics into the photographic vocabulary that defines ones experience of the image, but the investigation of the image in front of the viewer as object.
I’m always fascinated when artists from elsewhere make work in New
England. So I took interest in New York photographer Joel Sternfeld’s “Oxbow Archive”
at New York’s Luhring Augustine gallery, which features landscape
photos he shot in Northampton, Massachusetts, from 2005 to 2007. The
gallery says the series “documents weather and atmospheric effects in a
field in central Massachusetts over the course of a cycle of seasons.
Sternfeld's new work represents a break with painterly notions of the
Picturesque and the Sublime.” True. In reproduction, the large (5 by 7
feet) deadpan photos are kinda bland.
“Joel Sternfeld: Oxbow Archive,” Luhring Augustine, New York, Sept. 6 to Oct. 4, 2008.
Pictured:
Joel Sternfeld, "March 13, 2006, The East Meadows, Northampton,
Massachusetts” and “August 19, 2006, The East Meadows, Northampton,
Massachusetts.” Courtesy of the artist and Luhring Augustine, New York.
미술사에서는 미니멀리즘에서 ‘사물성’을 논하였는데, 사물이나 물체 더 나아가서는 작품의 원자재라고 할 수 있는 모래, 흙, 바위, 나무, 상자, 형광등, 철근이나 각종 합금 판 등을 그대로 작품으로 배치하거나 제시하여 비예술의 경계를 확장시켰다. 사진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뷔스타망테와 제임스 웰링(James Welling) 또는 조엘 스텐펠드(Joel Sternfeld)의 일부 사진에서 표현된 바 있다.
음!
그러므로 이어지는 Joel Sternfeld, Steven Shore 등등 작가들의 무심한 미국식 현대사진이 어떻게 풍경을 사물로 재현하는지를 풀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5×7feet(150×210cm)의 무표정한(deadpan) 사진은 지루하게(bland) 보인다. 그러므로 무표정한 개들(? Natural something)의 사진이 내가 재현하는 미국식 풍경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뷔스타망테는 아름다운 사진을 찍지 않기 위하여 고심한 듯이 보이는 일련의 사진들을 ‘사물성’이라는 주제에 맞춘 듯이 일련의 사진들을 발표하였다. 이 연작은 사이프러스(Cyprus)의 어느 관광지에 있는 어떤 멋진 나무가 아니라,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으며, 어디 까지가 나무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화단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서 어떤 고유명사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이미지를 ‘정적’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이 사진을 프레이밍하기 위해서 최대한 대상이 평평하게 보이는 정오를 선택해서 원근법이나 명암법에서 벗어나게 촬영하였다. 인화지 크기도 이 나무의 실제 크기에 비슷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인지 50x60인치로 하고 액자는 테두리 매트를 대지 않고 알루미늄으로 마운트를 하였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보면, 사진적 어휘에서 오는 아름다운 시적인 설명이 아니라 관람자 앞에 마주친 한 사물이 이미지로서 대상을 그 안에 있는 대상을 탐색하게 한다. 지중해에 있는 아름다운 사이프러스의 나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나무들의 뭉치가 앞에 마주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미니멀한 사진은 풍경이 회화에서처럼 아름답고 경외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마치 대상인 나무가 사물에 다다른 것을 하나의 막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뉴욕의 사진가 조엘 스텐펠드(Joel Sternfeld)도 풍경을‘사물성으로 바라보기’의 유사한 예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2005년부터 2007년 까지 ‘Oxbow archive’라는 제목으로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에 있는 옥스보우 지역을 촬영하였다. 그 결과로 2008년에 매사추세츠 주 중부 지역의 날씨 기록과 대기 효과에 관한사계절의 변화과정을 연작으로 전시하였다. 스텐펠드의 이 새로운 전시는 풍경화에서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회화적인 것과 숭고한 화가적 관념을 다시 한 번 깨는 것이었다. 이 사진들은 실제 그 자체를 재현한 것이다. 그는 그곳의 낭만이 아니라‘True(사실 또는 진짜)’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적인 모든 것을 불태워라’는 뒤샹의 성상파괴적 태도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은 입체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주었다. 시각적 무관심(I think that seems like the political unconscious of Fredric Jameson)을 예술로 대체했다. “당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예술가에게 전혀 관심을 끌지 않았던 것을 선택하라.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라.그 순간 그것은 레디메이드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Rosalind Krauss가 사진은 ‘Readymade’라고 주장한 것을 적용한다면, 사진 자체가 ‘Readymade’라고 본다면 ‘무관심’과 ‘Readymade’, '사물성(things)'이 혼재하는 사진이 지금 현대풍경사진의 코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수지에서 풍경을 개들로 전환시켜 보았다.
개들. 이 날뛰는 개들.
Reservoir Dogs 1.
Reservoir(저수지)는 Pond(연못) 보다는 크고 Lake(호수) 보다는 작지만, 필자가 본 보이시 시내에 있는 Quinn's Pond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못보다는 매우 컸다. 이 곳의 Pond는 앞마당에 있는 연못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방죽이나 호수 정도의 크기로 보아야 한다. 또한 Reservoir도 한국의 일반적인 저수지와는 매우 다르다. Boise 근교에 있는 Arrowrock Reservoir는 춘천에 있는 소양강 댐 일원보다 더 크거나 비슷하게 보였다. Lake는 보이시 북쪽에 위치한 맥콜(McCall)에서 파옛 호수(Payette)를 보았는데, Reservoir가 강처럼 길게 형태를 나타낸다면, Lake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넓게 퍼져 있었으며 상당한 면적을 가진 크기였다. 그러므로 미국의 저수지와 연못은 한국보다 큰 형태를 가지고 있다.
Reservoir Dogs 2.
Reservoir Dogs 3.
Reservoir Dogs 4.
Reservoir Dogs 5.
왜 Reservoir Dogs냐구요?
저수지들을 지키기 있으니 저수지의 개들이라고 연상시킨 거지요.
또한,
이런 황무지도 전기로 감시되고 있었다. 인디언들처럼 보호된다는 명목하에 풍경은 소유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식 개들이 만들어낸 풍경!
교통 표지판들의 관리는 미국이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이런 교통 표지판들은 모두 '도로의 개들(Dogs of Avenue)'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인은 개들을 좋아 한다.
미국은 곳곳에 개들이 있으며 매우 많다. 모든 개는 묶여 있어야만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주인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를 묶지 않고 배회하는 경우도 있다. 개는 보호를 받는 수비형 무기이자 공격 장치이기도 하다. 개는 항상 주변을 감시하고 외부인이 다가올 때는 위협할 수도 있다. 개는 탱크이자 전투기이고 감시하는 안테나이기도 하다. 공격과 수비가 쉽게 전환되는 도덕성을 갖지 않은 충실한 보호 장비이다. 자동차처럼 항상 동반하고 다니는 개들을 미국인은 좋아 한다. 미국인은 개들을 좋아한다.
풍경에 관한 사물성에서 출발하여 개에 관한 사유로 연계시킨 데에는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ono)의 ‘저수지의 개들, 1992’과 그에게 영감을 준 영화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임영동 감독이 연출한 용호풍운(1988)의 마지막 장면을 보세요. 이 난데없는 이 사물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사물들. 하나의 사물들.
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
<저수지의 개들>은 위장잠입한 형사 때문에 다이아몬드 강탈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8명의 갱 집단에서 서로 누가 경찰인지 찾다가 비참한 최후를 다 같이 맞는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왜 저수지의 개들일까? 범죄를 양상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를 저수지로 본 것이고 그 속에서 범죄와 의심 그리고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개들’ 로 본게 아닌가 생각된다. 제목은 타란티노가 비디오 아카이브에서 일할 때 어떤 손님이 <Goodbye Children , 1987>을 저수지의 개들이라고 부른데서 자신의 첫 작품에 제목을 부쳤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타란티노는 인용의 연금술사이며 팝송의 백과사전이다. 물론 영화를 볼 때,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영화 내용과 곡의 의미를 충돌시킨다. 그러므로 타란티노의 영화는 이야기 줄거리만 아는 것은 부분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 외화면에 흘러 나오는 음악의 가사 내용과 그 음악이 유행된 시기의 사회적 배경들의 의미들이 공중에 함께 부유하면서 그 의미를 발생시킨다. 장 뢱 고다르 영화에서 타란티노 영화는 클래식에서 팝 쪽으로 우클릭되었다. 그래서 내면적 사유라고 보다는 즉발적이고 현실적인 대면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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