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아니, 사양하겠어."
시리아는 별 실망하는 기색 없이 돌아선다. 나는 그러려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겨우
이 정도 일로 실망할 리가 없겠지. 엘프니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었던 거지,
엘프니까. 그래도 조금 심했던 것 같다. 돌아서 마을로 돌아가는 시리아의 귀가 조금 처진 것 같
다.
흥.....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라는 엘프는 이상하게도 다른 엘프들과의 관계가 껄끄럽다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이 시기에 그래도 꼭 한명은 나에게 다가왔다. 당
연하겠지, 남자 엘프의 수가 부족하니까. 다산을 못하는데다가 생식력도 약한 엘프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그리 엘프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면서도 싫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여자 엘프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벌
써 세 번째, 나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만 글쎄, 이번의 시리아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거절해버렸으니 어
쩔 수 없다. 가족이란 것을 만드는 일이 그리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리아는 대체 나의 어디가 좋아서? 시리아는 엘프답지 않은 밝은 성격에 모두에게 매우
상냥하기 때문에 마을에서의 인기도 꽤 좋은 편이었다. 원한다면 나보다 멋지고 잘난 엘프들이
줄을 설 텐데. 혹시 나를 동정이라도 하는 거였나. 역시나 나는 이 순간에도 스스로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았다. 제길.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거절한 거냐, 디트리히."
그런 말을 하며 다가오는 엘프는 엘리신이다. 뭐 얼굴은 저렇게 젊어 보이지만(엘프니까 당연한
가) 저래뵈도 우리 마을의 촌장이다. 자세한 나이는 모르지만 듣기로는 한 700살쯤 된다고 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200살 정도밖에 안된 나와 꽤 친한 사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그
친한 친구도 어딘지 모르게 꺼려지는 것이다. 그도 나도 남성 엘프이니 당연한 것인가, 이런 시기
에는.
"그래, 아직 준비가 안됐어."
"그렇게 말한 게 벌써 몇 번째냐. 지금부터 가족을 만들어도 언제 자식을 가지게 될 지 몰라."
"알고 있다고. 그래서 너는 네 자식 나이밖에 안 되는 나하고 그렇게 친한 거냐?"
어딘지 모르게 그의 말이 나를 훈계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비꼬는 말투로 말해
버렸다. 하지만 나이 많은 엘프의 참을성이라고 할까, 아니면 연륜이라고 할까. 그는 빙긋이 웃기
만 할 뿐, 별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나조차도 그런 엘리신이
바로 '엘프다운' 엘프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 스스
로도 지금의 내가 어딘지 모르게 엘프답지 않다는 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뭐 내 생각
이야 어찌됐든 엘리신은 그 변함없는 100만 Gp짜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 나이에는 원래 생각할 것도 유달리 많고, 고민도 많아. 호기심도 인간처럼 많아지지. 나
도 그런 이유로 고민도 많이 했어."
"헤에, 냉정침착의 대명사인 엘리신이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재미있는데. 그래서 그 시기를 어떻
게 넘겼지?"
엘리신은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웃었다.
"모험을 했지."
"모험?"
그날 밤 나는 내 공간(엘프들의 말로는 다르게 표현하지만 인간의 말로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내가 소유하고 있는 공간이고, 인간들처럼 꾸미거나 무언가를 들여놓거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에 누운 채로 엘리신이 했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모험.
인간들의 세계에 나가 인간이나 드워프같은 이종족들과 함께 세상을 누비며 진기한 것들을 보고,
강력한 몬스터와 싸우고, 또 알려지지 않은 공간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동료들
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법도 배우고, 자기 자신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는 것. 언제나 목
숨을 내놓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떠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성숙
하게 되어버리는 것. 엘리신이 말한 모험이란 그런 것이었다. 미화된 구석이 없지는 않아보였지만
또한 상당부분 진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
게 힘차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작은 고민 같은 것은 까맣게 잊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그리
고 생각이 많이 성숙해진 후에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떠오르면, 그때는 너무나 편협하고 치졸했던
자신의 그 고민거리가 부끄러워질 정도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그렇게 모험을 하면, 언젠가 다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고민들을 떠
올리며, 이 고민들의 치졸함을 부끄러워할까? 잊어버릴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나의 머릿속에 꽉 차서 그 안에 나
뭇잎 하나 올려놓을 자리조차 없는 나의 이 고민이, 어느 순간 떠올릴 때에는 치졸해서 부끄러워
질 정도로 나의 의식이 자랄 것이라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비록 200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
만(엘프에게는) 그 200년의 순간동안을 나는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오
며 형성된 나의 의식이란 것이,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편협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정도
로 자그마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 또다시 엘리신의 그
100만Gp짜리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그의 그 미소라는 것은 그의 인격과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는 어떠한 엘프들의 불만에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을뿐더러,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침착함을
절대로 잃지 않아 결국은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짓곤 했다. 일부의 엘프들은 엘리신을 '무사태평'
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모험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사상의 편협함을 깨닫고, 스스로 그것
을 극복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도 그렇게 나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느꼈다. 엘리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으
면 하고 생각했다. 아니, 세상의 어떤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그것을 마다할 수 있을까. 인간도,
드워프도, 호비트도, 아마 심지어는 오크들조차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내가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개체로
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단 나는 거기서 생각을 접었다. 생각만으로는 당장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
태여 지금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
리고 모험에 대한 것은 내일 엘리신을 찾아가 의논해보기로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엘리신! 엘리신 있나?"
"안에 있으니까 큰 소리로 부르지 말라고."
나무 아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엘리신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면박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엘리신
의 눈 앞에 섰다. 그는 마치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읽고 있
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구성원'?"
저 구성원이라는 말은 저 녀석이 꼭 나에게만 써먹는 말이다. 에잇 그래, 넌 촌장이고 난 마을 구
성원이다. 그딴 건 아무려면 어떠냐.
"어제의 얘기, 계속할까?"
"아.... 그럴까나."
그는 그런 식으로 대답하고는 그의 옆에 앉아있던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요하네. 미안하지만 잠시 둘만 얘기하고 싶소."
요하네는 잠시 엘리신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곧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
가 자리를 비켜주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엘리신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고, 엘리신은 빙긋이 웃
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
"글쎄, 아직도 자네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어떤 면이 아직도 의심스러운가?"
"음, 정신적인 면의 성숙.... 이겠지."
"듣고 있어."
"난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허송세월을 보낸 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렇게 200년
을 살면서 다져진 내 자의식이 고작해야 10년, 길면 2~30년 걸리는 모험을 하면서 '스스로가 부끄
럽게 생각될 정도'로 보이게 된다는 것,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질 않아."
엘리신은 이미 내 질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그 반증으로 그는 내가 질문을 던지
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무리 설명해줘야 모르는 일이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날 이해시킬 셈이 아니었나?"
"응."
"....."
역시나 무사태평 엘프. 간단한 대답인 동시에 정곡이다.
"자네는 내가 모험을 해 보기를 바라는 거로군?"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모험이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니까."
"그럼 뭐야?"
"굳이 말하자면 추천이지."
"추천?"
"그래. 약간의 위험부담은 있지만 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그게 모험이니까."
엘리신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귀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엘프들은 모험을 잘 떠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그 드물게 모험하는 엘프들은
인간들과 파티를 이루어 모험하게 되지. 이건 뭐랄까, 악순환 같은 거야. 애초에 모험을 떠나는
엘프가 적은 탓에 인간들과 여행하게 되었고, 그걸 싫어한 엘프들은 점점 더 모험을 떠나지 않게
되고, 그럴수록 드물게라도 나오는 엘프들은 더욱 함게 모험할 엘프를 찾을 수가 없게 되지. 하지
만 난 그 악순환에 꼭 단점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럼, 장점이 있다는 건가?"
"물론이지. 바로 다른 종족과 모험한다는 것이 장점이야."
"....그게 어떻게 장점이야."
"파티(Party)란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혹은 서로 상반된 목적을 가졌지만 서로의 목적 달성을 위
해 협력하는 이익집단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래. 그 종족의 특성과 사고 방
식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이해관계라고 난 생각하네."
"이해관계?"
"그래. 들어봐. 만약 자네가 인간과 드워프, 그리고 자네의 세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를 결성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
가정(加定)이라는 말은 엘프들이 처음부터 사용하던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사용하게 되었다. 인간과 교류한 후부터다. 그래, 가정이라는 따위의 불확실한 미래, 혹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인간들뿐이었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그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해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넘어가자.
"듣고 있어."
"그리고 그 파티가 공통된 한 명의 도망자를 쫓는다고 하지. 도로와, 숲과, 던젼이 있어. 자네는
어디로 가겠나?"
"당연히 숲이지."
"숲에서는 인간과 드워프가 빨리 달릴 수 없을텐데?"
"아? 으음...."
"마찬가지야. 인간은 도로를 달리려 할 테고, 드워프는 던젼을 달리려 할 테지. 하지만 만약 도망
자는 숲에 불을 놓으며 도주했다고 할까. 자, 자네는 숲을 달릴 수 없게 되었군."
"그렇다면.... 도로를 택해야겠군."
"도로에 거대한 행렬이 가로막혀있다면?"
"그때는 정말 내키지 않지만 던젼을 달려야겠지."
"좋은 대답이야. 자네의 파티가 숲을 달리기로 결정을 한다면 자네는 좋겠지만 남은 두 명은 불
편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할거야. 그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야. 동시에 공통된 목적을 위한 협력이
지."
"그게 이해관계라는 건가?"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음, 좀 더 넓은 의미의 이해관계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질문에 엘리신은 고개를 저었다.
"디트리히, 디트리히. 좀 더 내 말을 음미해 봐. 지금의 자네는 자신의 일,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몰라. 하지만 모험을 시작해서 다른 누군가와 공통의 목적을
가지게 되면 이야기가 틀려진다는 걸세. 싫어도 남의 생각을 해 주지 않으면 안돼. 좁게는 그것이
자네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넓게는 자네의 파티 전체에 이익이 가는 일일테니까. 자네는 지금 자
네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겠지만 싫어도 남의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
방법은 뭐가 있겠나?"
"생각할 여유가 늘어나는 것...."
"그거야."
나의 대답에 엘리신은 겨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잠깐동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지쳤는지 나무의자에 몸을 기댔고, 나는 그의 이야기가 가진 의미를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싫어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생각할 여
유가 늘어나는 것.... 달리 말하면, 지금의 내 생각을 망각하는 것....
"잠깐. 자네 말은 뭔가 좀 이상해."
"뭐가?"
"자네 말대로 하자면 나쁠 것이 없겠지만 잘 들어보면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져."
"어떤 부분이?"
"그러니까... 음, 자네의 말처럼 남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
민 따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건 생각할 여유가 늘어나는 게 아니잖아. 단지 지금 그 순
간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개인적인 고민을 잊어버릴 뿐이겠지."
"그건 예전에 이미 말한..."
"아니, 분명히 달라. 그런 순간이 되어서 내 고민을 하며 남의 생각까지 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
겠지. 인간이라고 해도 없을 거야. 그렇다면 그것은 생각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야. 단지 자신의
고민이 작아질 뿐이지."
"그것만으로도 성과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건가?"
"모르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짧게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가는 건가?"
"음, 아무래도 모험 건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엘리신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분명 모험을 하고 나면 그때는 자기 자신의 고민 같은 건
어느새 작아져 부끄러워질 정도가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면, 그
것은 자신의 자의식이 성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고민이 작아질 뿐이 아닌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자의식이 성숙하는 것이지, 지
금의 내 고민이 작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나의 고민이 작아진다고 한들, 그
빈자리에는 또 다른 고민이 들어와 다시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계속 하다보니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난 그쯤에서 잠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내 쪽으로 급히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밝은 녹
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성 엘프. 시리아였다.
"디트리히! 얘기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응?"
"엘리신이 말했어. 너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며?"
"뭐?"
나는 잠시 멍청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시리아는 내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잠시 후에 이를 바드득 소리가 나게 갈면서 말했다.
"엘리신.... 이 자식!!"
"엘리신! 엘리신 안에 있겠지!!!"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
나무 아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엘리신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면박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엘리신
의 눈 앞에 섰다. 그는 마치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읽고 있
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구성원'?"
"그딴 농담은 집어치워. 방금 시리아한테 얘기 들었다."
"이런, 벌써?"
"벌써가 아냐! 누가 여행을 한다고 정했지?"
"내가."
"뭐?"
엘리신은 읽던 책을 집어 슬슬 매만지며 말했다.
"네 스스로 여행을 떠나길 결정했다고 얘기한 기억은 없어. 단지 네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을 뿐."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의 도시로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어."
"무슨?"
내 질문에 엘리신은 몸을 일으켜 느긋한 움직임으로 내 주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노르딘이 죽은 것은 알고 있겠지?"
"노르딘이 죽었나? 하긴 900살이 넘었으니까."
"그래. 바로 어제 일이야. 그리고 노르딘이 유언을 남겼어."
"뭐라고?"
"자신이 여행할 때 알게 된 인간이 있다고. 그 인간의 후손들과 계속해서 만나고 있었다고. 하지
만 이제 자신이 죽어 정령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인간의 후손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네. 그들이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일
이 없도록."
".........그래서, 그 전령 역할을 내가 하라는 건가?"
"맞아."
엘리신은 수긍의 뜻을 했지만 고개는 끄덕이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잠시 가만히
앉아있었다. 엘리신은 내 쪽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얼굴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나를?"
"촌장으로서의 최선의 선택이야."
"그러니까 그 선택의 배경을 ㅇ어보란 말이야!"
쾅! 나는 결국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하지만 엘리신
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천천히 몸을 돌리며 빙긋이 웃었을 뿐.
"자네는 여행에의 욕망은 가졌지만, 목적이나 명분이 없었으니까."
"누구 맘대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는 거야!"
"아, 그래? 그럼 내가 틀렸다고 해 두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투. 이쯤 되면 화가 나는 수준을 넘어서서 기가 막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리고 나는 그렇게 기가 막혀버려 입을 딱 벌린 채로 엘리신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엘
리신은 그런 나를 보며 또 한번 피식 웃더니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촌장이라는 직위는 단순히 놀고먹자고 있는 게 아닐세, 디트리히. 촌장이란 그 마을 전체를 책임
져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야. 그리고 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거나, 개선의 여지가 필요
하다고 느끼는 사항에 대해서는 개선하지 않으면 안돼."
"그래서, 날 개선해보시겠다는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최선의 선택이지."
최선의 선택이라, 나는 속으로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허울좋게 꾸며대고는 있지만 결국
엘리신이 정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나를 잠시나마 '쫓아내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자네도 알아야 해. 우리는 인간이나 드워프들과는 틀려.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를 지키는 일은 엄
청나게 중요한 일이야. 알고 있겠지? 우리는 오래 살지.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도 오래 살아. 하지
만 그 뿐이야. 죽으면 끝이야.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살았었다는 기록도, 흔적도 우리가 죽
으면 그것으로 사라지고 마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아. 그 할 일은 우리의
긴 삶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런 우리의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 이 땅 위
에 존재하고 있어야 하네."
"그러니까 뭐냐, 내가 그 존재에 방해가 된다는 거냐?"
"이해해 주길 바라네. 우리는 오래 살지만 그 뿐, 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야. 협동이 필요한 존재야.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도. 그런 우리의 공동체 안에, 그 결속을 무너뜨릴 여지가 있는 존재를 계속
방치해 둘 수는 없는 거야. 그 존재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큭....."
엘리신이 의도하는 것은 대충 짐작이 갔다. 결국 계속해서 겉돌기만 하는 나를 '결속을 무너뜨릴
여지가 있는' 세균덩어리 같은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거로군. 누구 탓을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
만 엘리신의 결정은 억지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입을 꼭 다물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고 침착한 만큼,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그의 사고방식은 약간의 이탈도 용서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가 정신적인 면의 성숙이냐. 결국은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서 날 내쫓고 싶
었던 거잖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그런 '겉도는' 존
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격차이가 나는 것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그 대가가 좀 가혹하지 않나.
"내 말, 알아들었기를 바라네."
"........한가지만 묻지."
나는 엘리신의 말에 그렇다 아니다 대답을 하는 대신에 내가 궁금한 점에 대해 묻기로 했다. 그
리고 엘리신은 내 질문은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나를 보았다.
"질문해 보게."
"돌아올 수는 있나?"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물론이네. 일을 마치면 언제라도 돌아와도 좋아."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군."
"하지만 자네가 절대로 그 일만 조용히 마치고 돌아오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네."
......정말이지 끝까지 얄밉게 쏘아대는군.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하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댄 것도 그저 내 자신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뿐
이지,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이미 내려진 결정을 번복할 엘리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겐 매우 불행하게도, 일개 '구성원'에 불과한 내가 촌장의 결정을 무시할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는 것도.
"그래서 정말 떠나기로 결정한 거야?"
"결정이고 뭐고, 나한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것, 알고 있잖아."
시리아의 말에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래도 그 동안 겉돌기만
하던 나에게 가장 잘 대해준 시리아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부드럽게 대해주고도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리 겉돌고 살았다고는 해도 태어나서 자란 마을을 떠난다는 일이 그
리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무슨 일이던지 처음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법이다. 게다가 이것은
정말로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여지가 충분한 일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숲을 나가
면 그때부턴 나를 보호해주고 있던 '우리'라는 개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나를 보호하는
것은 오직 '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는 실감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모를 것이라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가능했던 일의 대부분은 '나'라는 단독의 존재로
서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동안 검술이나 마법 수련을 좀 더
열심히 해 두는 건데, 후회막급이다.
".....두렵지 않아? 마을을 떠나는 거."
두렵지 않을 리가 있냐. 시리아도 마을을, 그리고 이 숲을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소위 '어
린' 엘프다. 자신이 직접 나가게 된 것은 아니니 조금 덜하겠지만 그녀의 엘프답지 않은 풍부한
상상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두렵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겁이 나던
진저리가 나던 간에 일단은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는 편이 스스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뭐, 조금 그런 면이 없진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조심해....."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불만스러웠던 내 기분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주
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생각하고 있던 말 대신 - 그럼 당연하지 따위의 건방진 말 - 최대한 부
드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올 거니까."
그 말은 그녀의 배려에 대한 작은 보답이자, 나 자신의 강렬한 소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