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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음악
낭만주의는 19세기의 음악을 지배한 기본적인 지도 이념으로써,
특히 문예분야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요한 본질은 새로운 것을 희구하는 욕구,
개성의 존중, 자유에의 태도, 또한 새로운 시대 정신에의 동경등 이다.
따라서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에서 존중하던
보편적인 형식과 이상화된 내용을 버리고
신기한 것을 쫓고 통제적인 울을 벗어나 개성적인 색조를 강화한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로 자기의 음악을 가지고 노래하려는 정신경향,
또한 시나 희화 등 음악 외적인 분야로부터의 새로운 자극을 희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혁을 갖게 되어
고전음악시대의 최고의 이상형식이던 소나타를 대담하게 변형 또는 포기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단일악장의 환상적인 소품 형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 선율은 고전음악 시대처럼 마디 수가 배수로 구성되는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것이 많아지고 당김 음이라든가 잇단음표 등을 자주 사용해서
다채로운 변화와 표현의 폭을 넓히고 그 음역도 확대하고
때로는 비성가적인 음정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리듬도 자유롭게 되어 복잡한 겹리듬을 자주 쓰게 되었고,
화성도 아직 3화음을 원칙으로 하나 보다 자유롭고 변화를 가져와
불협화음을 자주 사용하고 대담한 조바꿈을 하게 되었다.
또한, 관현악 편성도 다양하고 확대되어 새로운 음색을 모색하게 되었고,
편성도 대대적인 편성으로 압도적인 음향을 요구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듯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대두된 시기였다.
프랑스대혁명은 일반 시민계급이 특권계급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은 18세기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과
그 문예사조등에 의해서 양성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계몽주의는 이성에 지나치게 편중하고 전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들어오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냉철한 이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합리적인 것보다는 공상적, 목가적인 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개개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낭만주의인데 예술가들도 자유에 대한 이상과
개인주의 사상에 심취하기에 이르렀고,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낭만적 요소가 깃들기 시작하였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형식성을 중심으로 하여 객관적인 아름다운을 추구한데 대하여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무엇보다도 자기표출이라는 주관성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감정을 유일한 실마리로 삼고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의 결과 부유한 자본주위 중산층이 형성되어 청중의 범위가 크게 확산되었고,
이러한 부유 중류계층들은 곧 작곡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일반청중을 대상으로 곡을 써 나갔다.
청중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연주를 하였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여러 형태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폭넓게 독서했고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다루는 소재는 다양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부터 전설과 동화, 자연의 경관, 연인의 사랑 등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소재는 다양하고 풍부하게 음악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 초기 낭만파
초기 낭만파음악은 베토벤의 중기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18∼1826)가 1821년에 오페라 《사탄의 마수》를 발표하고 모차르트, 베토벤에세 바그너에 이르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악기에 의한 상징법, 혁신적인 악기사용,
독일의 전설을 소재로 사용하는 등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베버는 오페라 이외의 작품에서도 강한 극적 효과와 다양한 색채저거 효과를 거두어
낭만적인 경향을 추구하였다.
예술가곡과 즉흥곡으로써 시정이 흐르는 낭만 정신을 이끌어들인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600여곡의 가곡 작품에서
그의 끊임없이 샘솟는 선율을 서정시에 붙여,
다양하고 오묘한 화성을 창출하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낭만적인 정감속에 융합하였다.
교향곡, 실내악곡 그리고 피아노곡 등 그의 모든 작품들은
낭만적 풍취가 넘치는 낭만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2)중기 낭만파
낭만의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로서 서정적인 작은 형식을 자유롭게 다루며,
자매예술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표현법으로 주관적인 사고로서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멘델스존(Felix Jakob Ludwing Mendelssohn-Batholdy, 1809∼1847)은
시의 세계를 피아노에 도입시킨 '무언가의 창시자'로서,
그의 작품은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고전적인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나 《
한 여름밤의꿈》,서곡《핑갈의동굴》,교향곡《스코틀랜드》《이탈리아》
등의 표제음악에서 볼 수 있는 회화성은 분명히 낭만적인 꿈과 시(詩)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기악곡 등으로
독일 낭만주의를 절정에 끌어올린 슈만(Rovert Schumann,1810∼1856)은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서정시와 관계되는 서정성을 밑바탕으로 하여
피아노 페달의 효과적인 사용, 대담한 반음계적 화성,
음형의 다양한 변화 등의 개성적인 표현이 뛰어났다.
그의 가곡은 문학과 음악이 가장 접근된 것으로서 아름다운 선율과 다양한 피아노 반주로
시의 이미지에 의한 내적 융합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피아노의 온갖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들이 대부분이며,
모두 아름답고 향기가 높다.
대개가 즉흥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의 변화,
독특한 장식음의 전개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기에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1868),
도니체티(Guetano, Donizetti, 1797∼18480),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68)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프랑스에서도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낭만주의 사조에 의한 낭만적인 정서가
그들의 작품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후기 낭만파
후기 낭만파 또는 신 낭만파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낭만주의 음악이 결실을 맺는 시대이며
또는 새로운 음악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기운이 있는 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표제음악의 발달과 함께 교향시, 악극(Music Drama)이 창시되었고,
관현악이 발달하였으며 오페라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EH한 말기에는 무조(撫棗, Atona)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최초의 작곡자는 이탈리아의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이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기교를 연주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며 그의 신기에 가까운 다채로운 표현을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환상교향곡》을 발표하여 관현악에 새로운 효과를 시도하여 표제음악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고정관념(Idee Fixe)이란 것을 창안하여
음악의 줄거리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모티브로서 주인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관현악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악기의 그 표현 능력을 극도로 발휘시켰다.
또 이와 같은 새로움을 헝가리의 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에 의해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냈다.
리스트는 12곡의 교향시를 작곡하였는데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또 악장을 나누지도 않는 음악으로 시적인 묘사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표제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오페라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탈리아의 가극왕
베르디(Giusepe Verdi, 1813∼1901)는 민족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오페라를 작곡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그는 초기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중시하여 작곡하였으나
당시 낭만주의 문예의 영향을 받은 중기 이후의 작품에서는 극적 진실을 추구하여
극과 음악이 함께 중요시되었고 관현악법도 충실한 명락들을 이루면서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은《리골레토 Rigoletto》《춘희 La Traviata》
《아이다 Aida》등의 많은 걸작들이 있다.
베르디 이후에 이탈리아 작곡가는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5∼1945)와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 1858∼1919)인데
이들은 신낭만주의 수법을 써서 현실생활의 잔인한 사건을 묘사적으로 다루는
베리스모(Verismo), 즉 사실주의 오페라를 시도했다.
이것은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토스카 Tosca》에 이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인 풍부한 서정적 선율에 탁월한 관현악법으로 《
라보엠 La Boheme》《나비부인 Mudame Butterfly》등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비제(George Alexandre Leopold Bizert, 1838∼1875)가 오페라《카르멘 Carmen》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악극(樂劇, Music Drama)을 창시하였다.
기존의 전통적인 오페라의 불합리한 점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의 음악극을 만들어낸 그는 유도동기(誘導動機, Leit motiv)를 사용하여
극중 인물이나, 특정 장면을 나타냈고, 극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한선율(無限旋律, Unendliche Melodie)'를 창안하였다.
이런 수법의 악극으로 《크리스탄과 이졸데》가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데
반음계의 빈번한 사용과 불협화음의 사용 등으로 재래의 기능 화성법의 한계를 넘어
조성의 붕괴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바그너파인 오스트리아의 브루크너(Anon Bruckner, 1824∼1896)는
오르간의 명수이면서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의 창작활동으로
조용하고 종교적 달관을 느끼게하는 음악경지를 이루었고
볼프(Hugo Wolf, 1860∼1903)는 주로 가곡을통하여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슈베르트 이후의 독일 가곡의 문학적, 예술적 발전을 정상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이와같은 진보적인 신낭만주의는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음악계 전체의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는데,
그 반면에 고전파 음악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작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의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인데 그
의 화성이나 선율은 중기 낭만파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그는 바흐와 베토벤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일 고전의 정수를 순수하게 지켰다.
4개의 교향곡 이외에 관현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신고전악파'라 불리울 만큼 절대음악에 온갖 힘을 경주한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밖의 후기 낭만파 음악의 작곡가는
프랑스의 프랑크(C. Auguste, Frank, 1822∼1890)와 생상스(C, Camile Saint-Saens, 1835∼1921),
러시아적인 성격으로 독일 낭만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향곡
《비창》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등이 있고,
가곡과 교향곡 분야에 두루 뛰어나고 특히 거대한 규모의 작품을 쓴
오스트리아의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와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하였고
200역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하여 독일 리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R슈트라우스(Richad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오페라 이외에 기악곡을 중시하여
능란한 관현악법으로 색채감있게 창작활동을한 레스피기(Ottorio Respighi, 1879∼1936)등이 있다.
한편, 이 시대에 파리와 빈, 그리고 런던을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경음악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오페레타(Operetta)의 세계였다.
파리에서는 오페라부파, 빈에서는 오페레타,
런던에서는 라이트 오페라(Light Opera)등으로 명칭이 달랐지만,
그 내용은 모두 친숙한 제재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특색으로 삼고 있다.
파리에서는《천국과 지옥》을 작곡한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
빈에서는 오페레타와 많은 왈츠의 명곡을 남긴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1804∼1849, 1825∼1899) 부자,
서곡《경기병》으로 유명한 주페(F, van Suppe, 1819∼1895),
런던에서는 설리번(A.S. Sullivan, 1842∼1900)등이 유명하다.
1)카알 마리아 폰 베버 -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2)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11) 카알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1786-1836]
베버는 1786년 12월 18일 독일 류우베크에 가까운 오이틴에서 태어나 1
826년 6월 5일 영국 런던에서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초의 낭만파 작곡가 베버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과 형으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부친이 순회극단의 책임자로서 여러 곳을 돌아다닌 관계로
베버는 극장과 무대의 기교를 이 익히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무대음악, 특히 오페라의 작곡가로 완성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가 10살 때 오르간과 오보에 연주가인 호이슈겔에게 지도를 받았고,
12 살 때에는 잘쯔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에게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다.
그후 유명한 이론가 포오글러에게 사사하면서 선배 대가들의 많은 작품에 접했고,
또한 민속 선율도 연구한 동시 에 색채적인 관현악법도 익혔다.
베버는 10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3살 때에는 오페라를 썼다고 한다.
그는 1800년경까지 뮌헨에 체류하면서 최초의 오페라 <사랑과 술의 힘>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고
한편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약을 하였다.
그 후 1804년 브레슬러 가극장의 악장을 비롯하여 프라하의 가극장 지휘자 등
여러 곳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낭만적 오페라를 위한 수완을 닦았다.
그러다가 1816년 드레스덴의 궁정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외면적으로도 독일적이고 낭만적인 오페라를 작곡할 필요성을 느껴
민속적인 전통에 의한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1821년에 완성하였다.
이<마탄의 사수>는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어 2년반 동안에 베를린에서만 공연50회를 기록하였다.
이 오페라의 평판이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아덴 가극장의 지배인으로부터
가극 작곡의 청탁이 들어와 베버는 1826년 2월에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건너갔다.
베버는 런던 체류중에 그의 최후의 오페라 <오베론>을 완성하여 4월에 초연한 결과 성공을 하였지만, 그는 건강을 해쳐 6월 5일에 귀국 직전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일 낭만음악의 선구자 베버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해도 독일 국민가극을 참다운 예술적 수준으로 올려 놓은 일일 것이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오페라라고 하면 으례히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고 있었고 독일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베버는 이러한 이탈리아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일 민속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참다운 국민가극의 창조에 힘을 기울였다. 비단 가극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품에서도 낭만문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고 과거의 형식위주의 전통을 깨뜨리고 내객을 묘사적으로 하는 동시에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하였다. 대본도 처음으로 독일말로 쓴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는 독일 최초의 완전한 민족적 오페라인 동시에 최초로 완성된 낭만적 오페라이다. 베버의 극적인 성격은 음악을 표제에 따라서 자유로운 형식을 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의 낭만적 표제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요작품> "마탄의 사수" [1821] "오베론" [1826] "오이뤼안데" [1823] "무도회의 권유" [1819] "전쟁과 승리" [1815] "클라리넷 협주곡 제1번" 2) 프란츠 슈베르트 -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가까운 리히텐터르에서 태어나, 1828년 11월 19일 역시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31살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는 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장과 이것을 작품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직감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느낀 영감을 따라 애환을 그리고 감정을 음악에 도입시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서정의 음율을 노래한 것이다. 또, 가곡이란 장르를 통해 낭만주의, 독일 리이드의 세계 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슈베르트이다. 낭만적인 가곡에 있어서는 선배인 베에토벤이나 베버도 아직 눈 뜨지 못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에토벤이 아직 비인에 살고 있을 때, 같은 도시 안에서 31년이란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한 시민으로서 보냈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학교 교원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하며 불완전하나마 음악 교육을 받은 이외에는 이렇다 할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천재적인 재질은 14살에 이미가곡을 썼고, 17살때에는 <실 잣는 그레첸>, 18살때에는 <마왕>, <들장미> 등 유명한 가곡들을 연달아 작곡하였다. 이 당시 슈베르트는 부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19살때에는 이것도 그만 두고, 아무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생활하며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리한 감성과 풍부한 정감으로 작품을 썼고, 그 에 필요한 가곡 기교도 스스로 습득하였다. 이리하여 슈베르트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모짜르트와 베에토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고전음악의 전통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낭만주의의 새로운 현대의 물결이 거셌고, 따라 서 그는 새 사조의 선각자로서 낭만음악을 썼던 것이다. 그를 엄격히 따지자면 고전적 낭만주의자라고 하겠다. 샘물처럼 흐르는 그의 선율은 서정이 젖어 있고, 그의 화성은 섬세하고 뭉클한 정감에 차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그의 재능을 잘 발휘한 것은 뭐니 해도 가곡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섬세 한 감정과 약동하는 생명력, 깊은 통찰력 등, 필연적이고 유동적인 음악적 표현에서 이루어져 있다. 한편 기악곡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구성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흔히 듣고 있다. 그러나 전통 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마음에 떠오른 선율을 애용하였고, 이를 독특한 화성으로 뒷받침하며 소박한 감동을 유화한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다양한 환상과 섬세한 감각이 곁들여 슈베르트의 유니크한 음악미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슈베르트의 예술이 낭만주의 정신에서 유연한 증좌이기도 하다. 이는 <미완성 교향곡>을 비롯한 10곡의 교향곡, 16곡 이상의 4중주 곡과 그밖에 실내악,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와 소품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주요작품>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1823] "겨울 나그네" [1827] "백조의 노래" [1828] "숭어 5중주곡" [1829] "미완성 교향곡 b장조" [1822] "알폰소와 에스트렐라" [1822] "마왕" [1815] 3)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멘젤스존은 1809년 2월 3일 독일 함부프크에서 태어나, 1847년 11월 4일 역시 독일의 라이 프찌히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파 작곡가이다. 멘젤스존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음악이 개화한 중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상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부유한 가족 환경에서 자랐고, 또한 일생을 경제적인 구애나 빈곤을 모르고 지냈다. 이러한 환경이 음악가로서의 멘델스존에게 플러스가 되었는지 또는 마이너스가 되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의 기질과 더불어 그의 음악이 밝고 경쾌한 반면, 중후한 맛이나 심각성이 없다는 대조적 반응이 이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대부분의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과거의 전통이나 질서에 대해 부정적 태도나 저항을 하는 사례에 비하여 그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기존형식을 아무 주저없이 받아 들이는 보수적인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을 주로 베를린에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데다가 일찍부터 모친으로부터 피아노지도를 받았으며 후에 피아노를 베르거에게, 그리고 작곡을 체르터에게 배우는 등 부모의 각별한 배려로 윤택한 음악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9살 때 공개 연주를 하였고 11살때부터는 작곡을 시작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의한 유명한 서곡을 쓴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살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으로 북쪽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남쪽은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인상과 감흥을 통 해 작곡의 소재를 얻어 작품을 썼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고전주의 적인 형식감을 이어받아 여기에 묘사적이고 표제적인 내객을 담은 작품들로 지방색이 짙은 리듬이나 멜로디, 여기에 색채적인 관현악법 등 낭만적인 감각이 짙게 풍긴다. 멘젤스존은 또한 1833년부터 듓셀르도르프의 교회음악과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서, 그리고 케른의 라인 음악제의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그는 창작가로서 뿐 아니라 연주가로서 지휘자로서 또한 교사로 서 분망한 생활을 해야했고 라이프찌히에 음악학교를 설립하는등, 사회적인 책임도 무거워져 겹친 과로로 38세라는 단명으로 일생을 마쳤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보는 보수주의적인 음악가였으나, 그를 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은 낭만주의에다 형태는 고전주의적 질서와 조화의 감각을 가진 작곡가라고 하겠다. 그의 형식이 완벽에 가깝도록 완성된 데 비해 심각한 내객이 부족한 탓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 감동이 없다는 것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성격탓도 있겠지만 그의 생활 환경이 너무나 행복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현실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 각된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에서 강렬한 열정이나 비창은 느낄 수 없지만, 밝은 빛과 시적이고 그림처럼 경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세련된 형식은 그의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요작품>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1842] 교향곡 4번 "이탈리아" [1833] 교향곡 5번 "종교개혁" [1832] 서곡 "한 여름밤의 꿈" [1826] "핑갈의 동굴" [1832] "성 바울" [1836] "무언가" [1829-45]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4) 프리데릭 쇼팽 - Fryderyk Chopin [1810-1849] 쇼팽은 1810년 2월 22dfl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노라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이다.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 를 읇은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란드 사람을 어머니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보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 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 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에는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브니라는 사람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살 때에는 그 해 2월 26일 바르샤바 청중들 앞에 나타나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사람드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일찍부터 제시 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2세때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 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쇼팽은 19살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 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 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 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 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 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 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쇼팽은 런던으로의 여권을 얻어 1831년 7월, 21세때 비인을 떠났다. 쇼팽은 1831년 9월말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 고 있을 때였었다. 그는 멘델스존과 리스트 그밖에 카르크브랜너 등의 음악인들의 따뜻한 도 움을 얻어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 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진 쇼팽은 1836년 겨울 그 나이 26세때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인기 여류작가였던 죨쥬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길지 못해 1846년 11월 36세때 그는 상드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 와 동시에 그의 건강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생활을 위해 1848년 영국에 건너갔고 옛날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의 악화로 1849년 10월17일 오전 2시 쇼팽은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폴란드 흙이 유해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그의 작품중에 실내악곡과 가곡등이 약간 있으나 뭐니 해도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 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작품중에 폴로네이즈나 마즈르카는 분명히 폴란드적이지만 전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나 섬세한 감각은 파리에서 출입한 귀족사회의 취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국적불명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정신과 감정은 어디까지나 폴란드적이며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 국에의 애국심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적인 체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특징은 깊은 서정과 풍부한 정서, 여기에 고상한 품위가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주요작품> "즉흥 환상곡 c# op.66 [1835] "뱃노래 F# op.60" [1846] "피아노 콘체르토 no,1 e" [1380]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1831] "피아노 트리오" [1829] "첼로 소나타" [1846] "군대 폴로네이즈" 5) 로베르트 슈만 - Robert Schuman [1810-1856] 슈만은 1810년 6월 8일 독일 작센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7월 29일 역시 독일의 본에 가까운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슈만은 라인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고,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은 사인 동시에 장차 장인이 될 뷔이크와 법정에서 대결하는 등, 그의 전기에 심심치 않은 화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생활이 다사 다난 하기도 했으나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위해서도 선 두에서 싸웠고 또 많은 업적도 남겼다. 그러기에 슈만하면 독일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인 작 곡가로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슈만은 소년 시절부터 쟌 파울이라든가 호프만등의 문학작품을 가까이 함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하여, 그 의 음악은 자연 낭만적인 시정이 넘치게 되었다. 따라서 슈만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적인 구 성보다는, 시적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의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 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하나 베에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라암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 슈만의 음악은 규모가 큰 곡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구성에 집착된 느낌도 있고, 피아노 외에는 악기의 취급이나 균형이 미숙하게 다루어지며, 특히 관현악의 기교에 숙달되지 못하여 높이 평가되지는 않지만 내객에 내포된 낭만적인 환상과 정열, 그리고 꿈과 동 경은 대단히 신중한 것이다. 슈만은 음악에 때해서는 조숙하여 7살때에는 교회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을 비롯해서 점차 음악에 흥미를 가져 작곡도 하게 되었다. 부친은 음악 공부에 비교적 이해하는 태도였지만, 모친은 음악가의 장래성에 불안을 느껴 음악 전공을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슈만이 16세때 누님이 정신병으로 죽었고 이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보다 내성적이고 몽상적으로 되어 문학과 음악에 인생의 위안을 찾았다. 모친은 그를 법률가로 입신시키기 위해 라이츠찌히에서 법률공부를 시켰으나, 본인은 오히려 철학이라든가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프리드리히 뷔이크 밑에서 본격적인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뷔이크의 딸인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알게 되었다. 1830년 슈만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모친의 승낙을 얻어 뷔이크의 지도를 다시 받아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20살이 된 슈만은 손가락이 잘 돌지 않아 너무 무리한 훈련을 한 결과 손가락을 다쳐서 사용불능이 되자 작곡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인 도른 에게 이론을 배웠고 바하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슈만은 한편 음악이론에도 붓을 들어 1822년 쇼팽을 소개한 유명한 글을 발표한 이래 34년 에는 <신음악 시보>의 주필로서 독일음악의 전통과 진정한 낭만음악의 옹호를 위해 싸우기 도 했다. 그리고 한편 피아노곡 등 작곡에도 열을 내었다. 1843년에는 멘델스존이 창립한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 1847년에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그리고 1850년에는 <듓 세르돌르프>시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창작에는 쉬지 않고 정열을 쏟아 많은 작품을 썼으나 정신병이 점점 악 화되어 1854년 2월 27일에 라인 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어 185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주요작품> "여인의 일생과 사랑" [1840] "시인의 사랑" [1840] "가곡집" [1840] "아베그 변주곡" [1830] "환상 소곡집" [1837] "어린이의 정경" [1838] "낙원과 페리" [1843] "파우스트에서의 한 장면" [1853] "피아노 5중주 e 장조" [1842] 6) 프란츠 리스트 - Franz Liszt [1811-1886]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라이딩그에서 태어나, 1886년 7월31일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에 있어서 피아노 음악의 거장으로서, 또한 희귀한 연주 기교의 명인으로서 먼저 들 수 있는 사람이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화려한 연주가로서 전 구라파를 석권했으나, 그는 단지 한 피아니스트로 시종하기에는 너무나 풍운아의 기질과 패기가 넘쳤다고 보겠다. 이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사, 평론가, 그리고 승려로서의 다양한 그의 생활 행각이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리스트는 그야말로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으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단지 역사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바그너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고, 후세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음악가라 하겠다. 리스트의 부친은 게스테르하지 후작의 관리인 이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있어서 피아노도 치고 첼로도 즐기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이 부친의 영향과 교육을 받아 피아노 연주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리스트는 1820년 9세 때, 처음으로 에덴부르크에서 공개 연주회를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결과 귀족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10살 때에는 비인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가족들과 같이 라이딩그를 떠나 비인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인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피아노 교칙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에게 피아노 지도를 받았고, 한편 살리에르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리스트는 1833년 22세 때 말리 더그백작부인과 알게 되어 나중에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이 말리 더그부인과는 성격차이로 39년경부터 불화가 잦아 1844년에는 끝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4년후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할 때 키에프에서 알게 된 카로리네 뷔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 다시 두 사람은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물론, 이러는 사이에도 리스트는 창작에 강한 의욕을 보여 연달아 작품을 썼고, 28년 경부터는 거장적인 연주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절찬을 받으며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야말로 비인이나 베를린도 리스트가 석권해버리다시피 하여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연주 생활도 카로리네 부인의 권고로 1947년36세때 와이마르에 정착하여 창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리스트는 낭만파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여러 방면에 걸쳐 밚 은 작품을 쓴 다작가로서 여러 종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향악시와 피아노 곡이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때는 바야흐로 낭만주의가 무르익던 시대로서 특히, 그가 살던 파리는 여러 예술의 근원지로서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문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유고, 라마르티이느, 졸쥬 상드등과 친교함으로써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여기에 리스트는 구성이 크고 복잡 다채로운 표현력을 갖는 관현악에 자기의 이상을 찾게 되어 드디어는 시적인 상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교향악시>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곡들은 19세기의 거장들이 갖는 어려운 연주 기교를 구사하여 화려한 효과를 내는 풍조를 따르고 있다. 19곡으로 된<헝가리안 랩소디(헝가리 광시곡)>, 12곡으로 된 <초절 기교용 연습곡>등이 그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러한 피아노 작품에서의 기교라든가 효과는, 동 시대는 물론 후세의 연주가나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리스트의 업적으로는 형식에 있어서 주제를 변용, 사용하여 전체의 곡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등, 그리고 연주가로서, 교사로서의 공적, 또한 베에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의 재 인식, 바하, 그밖에 피아노 레퍼토리의 확대, 지휘에 있어서 바그너를 비롯한 동시대작 곡가의 작품은 물론 선배 대가들의 명곡을 소개하는 등, 그의 업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 A장조" [1839] "단테교향곡" [1855-56] "파우스트 교향곡" [1857] "오르페우스" [1854] "레 프렐뤼드" [1848] "헝가리광시곡" [1839-47] "동 상슈" [1824-25] 7)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나,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70세로 객사를 한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베를리오즈에서 시작되어 리스트에 이르러 꽃을 피웠던 후기 낭만주의 즉, 신 낭만주의는 바그너에 와서 최고도에 달했고 완성의 과정에 왔다. 웅대하고 대규모적인 구상과 방대한 표 현 양식, 대담한 화성법과 반음계적인 도입에 의한 조바꿈의 연속, 형식의 자유로운 확장, 관현악의 대규모적 편성과 웅장한 음향의 표출 등 작곡 기교의 개혁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걸고 완성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악극을 창시함으로써 이른바,바그너 주의로 온 구라파를 휩쓸었던 바그너의 역사상 업적이야말로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그너는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보여준 천재적인 음악 재능은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연극에 흥미를 보여 14살 때에 5막짜리 비극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베에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음악에 눈 뜨게 되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작곡 이론을 배웠다. 바그너는 이때부터 교향곡과 그밖에 큰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20살 때 뷰르츠브르그 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함과 동시에 순수한 기악 작곡을 그만 두고 오페라에 전념하였다. 바그너는 21살 때 마그데브르그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24살때에는 <리이거>의 악장이 되었으나 전부터 파리에서 성공할 것을 꿈꾸던 바그너는 1837년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 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생을 하며 편곡같은 하찮은 일을 해 주고 호구지책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작곡만은 꾸준히 계 속하였고 드레스덴의 혁명운동에 가담한 나머지 추방령이 내려, 그는 스위스로 도망을 갔다. 1862년에 바그너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어, 2년후에 바이야안 의 젊은 루우드비히2세의 후원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여 186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고, 1867년에는 <뉴유 룬 베르그의 마이스타징거>를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작의 음악극을 이상적으로 공연하기 위 해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건설하여 대대적인 악극<니벨룽겐의 반지>로써 개장을 했다.바그너 의 작품은 대개 3기로 나누어진다.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그대로 따른 제 1기, 외면적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오페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극과 음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기교적으로는 지도동기라고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짧은 동기의 사용 등 많은 발전을 보던 제 2기, 오페라 양식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밀착해서 이어지는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사용, 아리아의 폐지와 서곡을 전주곡으로 대치하는 등 완전한 악극을 확립한 제3기로 나누어 진다. <주요작품> "연애 금지" [1836] "리엔치" [1842] "방황하는 네델란드인" [1843] "탄호이저" [1845] "로엔그린" [1850]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 "니벨룽겐의 반지" [1876] "파르지팔" [1882] "황제행진곡" [187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1868] 8)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베르디는 1813년 10월 9일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에 가까운 롱코레라는 농촌에서 태 어나, 1901년 1월 27일 역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난 19세기의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공교롭게도 베르디가 세상에 태어난 해에 독일에서는 악극의 창시자 바그너가 탄생하였다. 베르디는 행상을 상대로 하는 조그마한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을 열광적으로 좋아 하였다. 7세 때 교회의 미사 성제의 시동이 된 베르디는 교회 오르간에 흥미를 갖고 이 를 배워, 10세때에는 노령으로 인해 은퇴하는 오르가니스트의 뒤를 이어 베르디가 오르간 주법을 배웠다. 그리고 밀라노 음악 학교로부터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입학을 하지는 못하였다. 베르디는 후에 스칼라 좌의 성악 지도자 빈첸초 라뷔나에게 주로 대위법을 배웠다. 1835년 22세 때에는 고향인 브세토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그 후 본격적인 가극의 작곡과 라 스칼라 좌의 공연을 위해 1839년 가족과 더불어 밀라노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리하여 그 해에 그의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초 백작 오베르트>가 초연되어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그는 계속 오페라의 명작들을 작곡하여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바그너처럼 전 구라파를 휩쓴 극음악의 대가가 되었다. 베르디는 물론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수법은 전통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새로 운 풍조도 도입하고, 새로운 극적 구성도 시도할 뿐더러 관현악법도 무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데 노력했다. 그의 작품의 중심은 역시 성악의 선율이며 관현악도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결국 노래의 배경을 이루는데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생기있고 극적으로 힘찬 박력이 있으며, 베르디는 풍부한 영감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겠다. 베르디는 26세 때에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를 발표한 이래 많은 오페라 작품을 썼는데,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전통에 따르고 있고, 노래의 선율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하나, 그 선율이 활기에 차 있어 성공을 하였다.그러나 그는 이러한 전통적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극적 인 오페라를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고레토>이다. 여기서는 종래의 선율을 풍부하게 살리면서 전에 보지 못한 극적인 구성과 박력을 갖게 되고 인물 성격의 묘사를 정확하게 하였다. 그후 양식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착잡한 줄거리에 너무 극적이 아닌 그러나 풍부한 선율로 유명해진 <트로바토오레>, 애절하고 낭만적인<라 트라비아타> 등을 만들었다. 베르디는 그의 긴 생애를 거의 오페라에 바쳤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작품은 그리 없고 1874년에 시인 만쏘오니의 죽음을 애도한 장대하고 극적인 그리고 기묘하고 박력에 넘친<진 혼곡(레퀴엠)>을 발표하여, 19세기 최대의 레퀴엠을 남겼다. <주요작품> "오베르토" [1838] "나부코" [1842] "맥베스" [1847] "리골레토" [1851] "일 트로바토레" [1853] "라 트라비아타" [1853] "아이다" [1871] "오델로" [1887] "팔스타프" [1893] 9) 페테르 차이코프스키 - Peter Tch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 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 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근경인 시골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살 때, 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법률 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 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연금 6,000루불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 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893년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주요작품> "대 서곡" [1812] "백조의 호수" [1877]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0] "호두까기 인형" [1892]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1869] "비창 교향곡" [1893] "만프레드" [1885] "유진 오네긴" [1870] 10) 안토닌 드보르작 - Antonin Dvoralk [1841-1904] 드보르작은 1841년 9월 8일 보히미아(지금의 체코슬라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약20마일 떨어 진 네라호제베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904년 5월 1일 역시 체코의 프라하에서 63세로 세상을 떠난 체코의 민족주의 작곡가이다. 드보르작은 고깃간 겸 여관을 경영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사를 계승시킬 부친의 의사와는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했고, 민속 음 악에 친근해졌다. 1857년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에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드보르작으로서는 이 학교 교육보다는 당시 작곡가 겹 지휘자였던 카레르벤들 과의 교우에 의해 얻어진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여기 저기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도 있었고, 사적인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주자로도 일했다. 이와같이 생활고와 싸우면서 착실히 공부하며 작곡도 꾸준히 하였다. 그의 초기의 작품은 고전적인 견실한 기초위에 민족적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후에 스메타나에게 인정되어 더욱 민족주의에 기울어 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메타나의 음악을 모방하지 는 않았으며 민족적인 감정을 개성적인 입장에서 표현하였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처럼 세련미는 없지만 소박하고 생기에 차 있을 뿐더러 박력과 정열이 넘친다. 그의 음악가로서의 영감은 슈베르트에 비할 만큼 풍부하고 자연적이며 항시 발랄한 음악성이 충만되어 있다.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드보르작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실내악이다. 특히 9 개의 교향곡은 견실한 고전적 구성으로써 체코적 감정을 노래한 근대 체코 교향곡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1890년 드보르작은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과 관현악법, 악식론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1892년 51세때 뉴요오크 국민음악원 원장으로 초청되어 도미하였다. 이때의 산물이 유 명한 <신세계교향곡>, 현악4중주곡 <아메리카>등이다. 드보르작은 1895년 다시 체코로 귀국해서 작곡과 교육에 전념을 하였으며, 1901년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스메타나에 의해 확립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이 처음으로 세계적으로 발전한 것은 드보르작의 공이라고 하겠다. <주요작품> "미국" [1893] "성 루드밀라" [1886] "미사" [1887] "레퀴엠" [1890] "신세계 교향곡 e단조" [1893] "첼로 교향곡" [1895] "쟈코뱅" [1897] "자연, 삶, 사랑" [1892] 내용출처 : [기타] http://my.netian.com/~eg4/music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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