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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정서와 아름답고 쓸쓸한 回憶
-정윤천 론
1.
정윤천은 두 권의 시집을 가진 시인이다. 두 권의 시집을 낼 정도의 시인이라면 이미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진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9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를 써 왔으니 그의 작품 세계는 어느 정도 자기세계를 가질만한 시공간과 이력을 가진 셈이다.
나는 그와 가까운 데서 살며 같은 시의 길을 가는 동역자라서 그를 쉽게 만나는 터라 그의 인간 됨됨이는 물론 그의 삶을 나름대로 들여다보는 입장이다. 그런 연고로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크게 어려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형님, 아우”하며 지내는 사이여서 얼마만큼 객관적으로 그의 시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 자칫 염려스럽기도 하다.
화순에서 태어나 화순에서 성장한 정윤천은 최근까지 화순읍 만연리에서 살았던 화순 토박이다. 마을 골목의 싸움닭이었던 정윤천의 어린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지고지순한 시인이라는 걸 알면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할 정도로 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정윤천은 대한민국의 쓸만한 시인이 분명하다. 시인이란 전혀 엉뚱한데서 탄생하는 법, 다시 말해 시인은 도덕군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윤천이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입담 좋고, 걸죽하니 노래 잘 부르고 의리 있는 그는 광주·전남의 문학판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명물이다.
그렇듯 문학판에서 우스개 소리로 바람 놓고 다니는 정윤천은 때로 철딱서니 없는 소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따스한 손처럼 그의 깊은 곳에 흐르는 뜨건한 강물은 그가 이승에서 시인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천부적인 시인이게 한다.
이제 그가 펴낸 두 권의 시집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정윤천의 시 세계를 포괄적으로 보면 ‘한국적 정서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혹은 사라져간, 또는 사라질 것들에 대한 회상을 통해 연민을 보내거나 그의 다스한 마음을 애잔한 눈길로 보내기도 한다. 아무리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추억의 기억도 그의 심상을 통해 걸러지며 아름답고, 그러나 쓸쓸한 풍경으로 되살아온다.
시인을 일러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했지만 감칠맛 나게 전라도풍으로 언어를 비벼대는 솜씨를 누구도 따르지 못할 그는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다.
먼저 그의 첫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그의 작품을 통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2.
80년대 이후 한국시단이 보여준 변모의 하나는 서정시로의 복귀 현상이다. 그 동안 기성시단의 보편적인 창작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나 매스컴, 그리고 반기성시 운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시들에 의해서 70년대 이후 급격히 그 위상이 약화되어 왔다. 후기 모더니즘운동이 보여준 반서정시적 경향은 절대 이념이 상실된 현대물질문명의 분열된 자아, 해체된 삶의 문학적 반영에서 연유한 것이다. 70년대 이후 고도산업사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돌출되기 시작하여 후기 모더니즘 시의 경향이 대두되고, 70년대 이후 정치 및 사회의식을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하여 의식화를 통해 사회를 개조하려는 목적시들의 민중시 운동의 확산은 서정시의 위축을 가져오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80년대 말 민중시의 핵심 그룹내에서 김지하의 시집 『애린』이나 고은의 『전원시편』등을 축으로 점차 순수전통서정시 창작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80년대 그렇게 격렬했던 민중시들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못 궁금할 지경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민중시의 본질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서정시의 개인성, 주관성, 직관성, 미학성, 형상성 대신에 집단성, 객관성, 의도성, 이념성, 전달성을 중시하는 민중시가 추구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성이다.
그러나 서정시의 가치, 서정적 감동의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한국 시단의 경향이 시의 서정성 회복으로 반전되고 있다. 그것은 70·80년대 유행투의 문학적 의의가 상실되었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민중시의 가치를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부 저널리즘에서 정윤천의 작품세계를 농촌시 또는 상황시 일변도로 규정짓는 것에 대해 시인 자신이나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또한 그의 시 세계의 정체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며, 신토불이(身土不二)처럼 우리 체질에 맞는 건강한 한국시, 즉 우리의 정서와 정신이 배어있는 시의 확산을 바라는 입장일 뿐이다. 여지껏 민중시와 순수 전통서정시(순수시와 민중시의 해묵은 개념정리는 여기에서 유보하고 이하 편의상 순수시와 민중시로 구분한다.)가 각각 보여준 것에서처럼 시의 본령에 더 접근된 시의 출현을 바라는 뜻에서 서정시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정윤천 시인이 시 세계에서 그 가능성을 꿈꾸며.
3.
정윤천의 시집의 제4부로 나누어진 시편 중에서 제1부만 가지고 그의 시 세계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물론 정윤천 시인의 시집 끝에 쓴 김준태 시인의 발문에 대한 필자 나름으로의 경계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 세계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으며, 가능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정시인의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에 사족을 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다는 것도 고백해 둔다.
제1부는 가장 최근에 쓴 작품으로 짐작되며 시적 완성도가 높고 그의 시적 개성이 가장 잘 발휘된 점으로 보아 시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제2부와 가족사 중심의 애환과 시인의 개인적 삶의 모습을 담은 제3부, 그리고 습작 기간 등을 망라해 기타 여러 세계에의 탐색 등을 눈치채게 한 제4부를 놓고 볼 때, 앞으로 그의 시적 전개는 제1부에서 지향하는 것의 연장, 혹은 발전, 변모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제1부를 제외한 시편들 모두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편협된 시각으로 한쪽으로만 몰고 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80년대 광주의 한 복판에 있었던 정윤천 시인이 서정주나 박재삼 또는 송수권만을 쳐다보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양성우나 김준태, 또는 김용택의 그늘에 놓여 있다고도 보기 힘들다. 정윤천의 첫 시집에서는 그가 시적 세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시집을 통해 정윤천 시인의 시적 출발은, 그리고 시의 방향은 한국적인 정서의 탐구라고 점쳐보면서 그의 정신세계를 밝혀보고자 한다.
전라도적인 것이 반드시 한국적인 것의 대표성을 가진다고는 볼 수 없지만 판소리 등 전통가락의 다수가 전라도적 정서와 가락, 언어로 되어있는 연유로, 한편으로는 전라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정윤천이 추구하는 전라도적 정서의 탐구는 한국적 정서의 대표성을 획득한 것도 많고 그 가능성도 크다. 서정주가 추구한 언어와 시적 주제의 그것과 경상도 출신의 박재삼이 한때 탐색했던 전라도적인 것에의 관심은 앞에서 밝힌 전라도적인 것이 곧 한국적인 것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소재도 그렇지만 잘 비벼내어 감칠맛 나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때로는 탁월하다. 적어도 최근 보기 드물게 언어조탁에 많은 노력을 공들이는 시인이다.
그러나 정윤천의 가장 빛나는 개성은 전라도적 또는 한국적 정서의 개성이다.
키 높은 미루나무 들길 꾸불텅 지나
석정리 큰 고모네 처음 갔을 때
고모는 살가운 마음 주름진 눈매에도 어려
그날 따라 닷새장, 헤어름 파장터에서
당신의 속마음 닮은 두툼한 털실스웨타 한 벌
말없이 내게 사 입혀 주시더니
처녀적의 보름달 둥근 얼굴로
왠지 그렇게 환해지시고 말았던가
-「春陽行」에서
이름도 따사한 춘양(春陽) 고모집에 갔을 때 춘양 닷새장에 친정 집 조카를 데리고 가 “당신의 속마음 닮은 두툼한 털실 스웨타 한 벌/말없이 사 입혀 주”던 유년의 기억에 환히 웃는 큰 고모에 대한 추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름답게 남아있다.
시인의 고백처럼 비록 고단한 월급쟁이지만 그때 그 큰 고모에 대한 유년의 기억이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옛부터 우리네 아버지의 정(情)이 속으로 깊고,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획이 굵었다며, 어머니들은 잔정이 많고 자주 베풀고 싶고 하는 편이다. 비록 스웨터 한 벌이지만 시인의 가슴은 비록 추운 출장이어도 춥지 않은 따뜻한 옷을 평생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정윤천 시인의 시집에 ‘초생달’ ‘보름달’ ‘달마중’ ‘달밤’ ‘만월’ 등 달의 이미지를 간직한 시어들이 많이 출몰하는 것은 요즘 신세대들에게서 나는 빠다나 커피냄새보다 수묵화같은 동양적 정서 내지는 한국적 정서의 그림이 그의 정신배경에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해보면 음풍농월의 차원을 떠나 한국인에게 가장 가까운 벗이었으며 신앙이었다는 것은 다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달밤에는 사연도 많이 생기기 마련인데, 낮보다 밤이, 또는 햇빛보다 달빛과 더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민족성과 무관하지 않다. 달빛 아래에서의 강강술래의 역동성은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태양의 공격성보다, 달의 부드러움, 또는 모든 꽃들이 밤에 피고 대부분의 생명이 밤에 태어나는 것처럼 밤에 생명의 원형질이 생성되는 까닭과 통한다.
이런 연유로 생각해 볼 때 정윤천의 시 중에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이루는 몇 편의 작품이 있는데, 서정주의 초기시 몇 편과 오버랩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①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서정주의 「대낮」에서
②땅에 누어서 배암같은 게집은
땀흘려 담흘려
어지러운 나-ㄹ 업드리었다.
-서정주의 「麥夏」에서
③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을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서정주의 「입마춤」에서
④그날 밤, 아슴하게 불 꺼진 신방 너머로
보리밭의 보리는 쓰러지도록 익었어.
-정윤천의 「보리는 익고」에서
⑤어젯밤 너 떡 한 말 곤히 쳤지야
구들장 구들구들 구들 방아로 울리더라
-정윤천의 「맑은 아침」에서
⑥아는지 몰라라
팔베개로 진한 잠 든 신랑각시야
-정윤천의 「첫날밤」에서
앞에서 인용한 ①②③은 서정주의 초기 작품이고 ④⑤⑥은 정윤천의 작품이다. 모두가 남녀의 성적사랑을 나타낸 것들인데, 서정주의 시에서는 대담하고 더 구체적인 묘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정윤천의 시에서는 은유 뒤에 암시하는 수법을 동원해 서정주보다 더 은근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한국적 정서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서정주의 「麥夏」라는 작품은 여름날 보리밭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정윤천의 「보리는 익고」에서의 심상과 오버랩된다는 것이다. 즉 “땅(보리밭)에 누어서 배암같은 게집은/땀흘려 땀흘려/어지러운 나-ㄹ 업드리었다.”고 하여 정윤천의 「보리는 익고」에서 “그날 밤, 아슴하게 불 꺼진 신방 너머로/보리밭의 보리는 쓰러지도록 익었다.” 시행의 심상적 이미지와 서로 마주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서정주나 정윤천의 에로티시즘에 표현된 주인공들은 모두가 끈질긴 생명력과 우리의 전통적 정서의 상징적 존재로 은근함을 보여주고 있다.
정윤천 시의 드러나는 특징 하나는 대개가 이야기 중심의 서사구조시라는 점이다. 또한 과거의 추억과 정서적 사건(궂은 일이나 기쁜 일이나)의 회상 등이 승화되어 오늘 시점에서 시인이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지난 추억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겨운 삶이었지만 행복했다던가, 또는 좋았다던가 하는 추억으로 기억된다.
우리들 여린 발돋움으로 꼰지발을 세우고
거기 이른 별 하나 따 가지고 싶었던
그 봄밤에의 기억,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달마중 핑계로 손잡고 나섰다가
괜한 일로 다투고 왔었던 어떤 일이며
숨바꼭질도 시들해진 해름참이면
영님이네 들집 울타리 바람벽에 기대 서서
먼산 허리께 걸린 취한 놀빛 속에 취해
우리들 눈길들이 또한 엇비슷한 어지러움 타곤 하였습니다.
-정윤천의 「추억에게」에서
사발도 드높은 흥건한 국물 속의
시래기국밥 한 그릇도
그때 누구나 다 허한 속으로 건네가야 했었던
질척이나 한겨울 밤의 지난함을
쬐끔은 덜 힘들게 하고 그랬었는데
그 밥상머리가에 얽힌 식구들의 추억이
후제까지 여영 따뜻하고 그랬었는데.
-정윤천의 「시래기국밥」에서
약간의 감상이 곁들여진 「추억에게」나 지난 추억의 그리움을 따뜻하게 안고 있는 「시래기 국밥」등은 60년대까지 농촌이나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에게는 향수 할 수 있는 정서이다. 특히 가난했지만 “그 밥상머리가에 얽힌 식구들의 추억이/후제까지 여영 따뜻하고 그랬었는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시래기국밥으로 한겨울을 나면서도 훈훈했던 시인 자신의 추억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인은 그리운 추억을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시래기국밥을 생각할 때마다 정제되어 맑은 정서를 유발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의 추억을 만난 시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곗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그리운 추억의 입담을 풀어보지만 남는 것은 쓸쓸한 주정뿐(「곗날」), 어쩌다 읍내 장길에서 불현듯이 만난 옛날을 모르게 따라가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 옛날 그대로 변한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하지만 시인은 빈 마음일 것이다. 고단한 삶이라는 것이 그렇고, 단절되었던 만남 사이에 세월의 이끼가 끼어 어느 새 옛날이 옛날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한다고 그랬는지 모른다.
정윤천의 시를 읽게 되면 왠지 서러움이 묻어나는 것 같다. 「감꽃」에서의 덕골아짐 이야기도 그렇고 「옛집 마당에」 역시 그렇다. 정시인의 가슴 가장 밑바닥에 고여있는 것이 눈물이어서 그 얼비치는 눈물이 때로는 하나의 에너지로 재생산되어 「만월」에서처럼 밤하늘 가득 비추는 달빛이 되고 아들의 늦은 밥상을 챙기시는 어머니의 얼굴로 변용되기도 한다.
4.
첫 번째 시집에서 그가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재담시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이 얘깃거리가 고갈되면 작품생산에 한계를 쉽게 느낄 수 있다는 점과 언어선택과 배열에 신경을 쓰다보니 주제가 가려질 수 있다는 우려를 했었는데 그러나 두 번째 시집을 통해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정윤천은 입증해 보였다. 끊임없이 터지는 입담을 통해 그는 시 공간을 과거에 설정해 놓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요설로 비춰지기도 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스스로 개발한 시적장치를 통해 살아있는 언어로 변환하는 등 그의 시는 첫 번째 시집에서 보아왔던 매끄럽지 못한 문장들이 시는 애초에 노래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노래라는 것이다. 때로 정윤천의 어떤 작품은 그 위험 경계에 서 있기도 한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흰 길 이 떠올랐다』를 살펴보자.
정윤천의 시를 읽으면 참으로 쓸쓸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라진 것에 대한 쓸쓸함이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퇴락한 시골마을의 야기, 동네에 무성했던 누구누구의 춘정에 얽힌 얘기, 아버지에게 눈구덕에 던져졌던 그러나 지금은 무덤이 된 아버지를 떠올리는 얘기, 연탄 개스에 중독 된 별세계다방 오봉순이 야기, 시젯날 투덜거림으로 선산을 따라나서던 얘기 등 이제 막 사십이 된 그가 보낸 60년대거나 70년대 혹은 80년대의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이다.
이것은 비단 이번 시집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그의 첫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렇게 입담좋게 유년기 혹은 청·소년기의 추억의 잔상을 자꾸만 떠올리는가. 그는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도 “굳이 바꾸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로되 나는 아직 찐득찐득한 이야기풍이 더 좋아라루”하며 계속 이러한 이야기를 써내겠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적 현장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 십수년 혹은 몇십년 묵은 낡은 풍경 속의 사건이다. 그 낡고 오래된 가난이, 상처가, 사랑이 세월을 거슬러 와 오늘을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때로 쓸쓸함이, 때로 연민이, 그래서 그리움으로 우리를 뜨겁게 하는가.
그때 마침. 황혼의 엷은 노을이 서늘하게 비껴가던 시간의 그늘 밑으로, 빨간 자전거들 반짝이는 은륜의 바퀴살들을 간지르며, 은행나무 노오란 가을 잎들이. 한차례 투명한 손뼉소리로 날아오르며 빈 가로의 저녁 무렵을, 휩쓸고 가기라도 한다면. 일순, 우리들 모오든 상처의 그림자들이, 우와! 한꺼번에 빛을 발하며 탄성처럼 반짝여주기도 하였던 것을,
아직도 그 길 너머, 우리들 가슴 안 희미한 비탈길의 저편엔, 굽은 담장을 끼고 돌아가 사뿐히 내려섰던 높다란 지붕을 지닌 마음이 성채 하나.(발자국 소리를 죽이지 않고도, 아무렇게나 쿵쿵 울리면서 가는, 기인 복도 끝의 낡은 회랑 안까지-이어진,) 삐걱이는 목조 계단 앞 난쟁이 화분 속에, 키작은 가을 꽃 몇 송이 힘에 겨운 꽃대궁들은 바람 속에 가만가만 흔들리며 서서,
- 있었던 것을.
-「길 머너」의 2·3·4·연에서
지금은 사라진 우체국을 회상하며 쓴 위의 작품은 소녀에게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던 고등학교 시절쯤이었을까. 소녀들에게 들려줄 데미안 몇 구절을 외우며 우체국 앞에 있는 우편배달부들의 빨간 자전거를 바라본다. 은행나무 노오란 가을잎들이 바람에 날아갈 때마다 상처의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빛을 발하며 탄성처럼 반짝여주기도 하였다고 추억을 떠올린다. 시가 시인의 정신표정일진데, 위의 작품을 통해 아름답고 순수했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름답고 지순한 것을 꿈꾸는 내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봄, 눈이, 머물다간……」도 위의 작품과 같이 읽을 작품이다.
서커스에서 ‘팔목이 여린 한 계집애가 아슬하게 펼쳐주기 시작한 몸짓 눈부신 아름다움’이 정윤천은 자신의 사춘(思春)의 가슴녘 안에 봄, 눈이 지던 그 자리 깊게 새겨왔다고 고백한다. 그때 바라본 “몸피 애잔했던 병색의 부신 계집애, 그 아이의 앙증맞은 발바닥 위에 물구나무로 지탱하고 서서, 가뜩이나 힘들게 흔들거렸던 촛불의 그림자들도…… 봄, 눈 속의 그 자리 아래 흉터처럼 선명하게 머물다 갔다”고 회상하는데,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서커스 소녀가 잊혀지지 않는 걸까. 사십대 중년 사나이의 세월 저편에 있는, 연민의 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착한 눈망울의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늘 아랫길 지나 우리들은 더러 학교에도 들고, 반쪽의 조국을 익혀 책보에도 담아왔던,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 아래. 어찌 보면 껄떡쇠 양반 뭣 같기도 했던, 회칠한 시멘트 기둥 하나. 때려 잡자 공산당 간첩도 자수하면 내 동포 내 형제.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 아래.
오늘은 거기 예전의 그 자리에, 옆으로 세운 볼썽 사나운 물건하나.
-「앵두나무 그늘 아래」 중에서
그 옛날 앵두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골프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바라보며 시적 동기유발을 가져 쓴 위의 작품은 70년대 이후 80년대를 지나면서 나타난 독점자본의 횡포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을에 골프장이 생겼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혹은 농촌 공동체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히려 “밤마실 어슬렁대는 늙은 똥개들 뒷간이나 되어버린” “옛 앵두나무 그늘 아래”를 편치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적 배경은 넉넉하지 못한 가난한 농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거개의 작품이 80년대 상황시들이 보여주었던 도시 빈민과 피폐한 농촌 모습을 통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의 부조화와 갈등을 드러낸 것이 아닌 것처럼,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점자본의 횡포를 드러내려는 것보다 근원적으로 훼손된 풍경에 더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정윤천이 그려내는 과거 회상의 시편은 오래되어 낡은, 그리고 화석처럼 정지된 풍경들이 자주 등장한다. 쇠락한 집안 풍경이 구체적으로 잘 그려진 위의 작품은 사람이 있어도 인기척이 고요한 풍경에 묵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모습이다. “잔솔불에 그을린 옹벽”, “녹슨 못대가리마다 매달린 씨앗봉지들”, “물기마른 살강위에 밥사발 두벌”, “물바래고 해진 머릿수건”, “장광의 간장독” 등이 그 단서이다.
그런데 정윤천이 왜 하필이면 쓸쓸하고 고요한 집에 눈길이 갔을까. 경제적 근대화 이후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진출하였다. 농촌엔 힘없고 능력 없는 노인들만 남게 되어 농촌은 이제 노인들의 나라가 되었다. 산업화로 오랫동안 지켜왔던 대가족제도가 해체되고 우리가 간직해왔던 전통적인 삶의 모랄과 가치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위의 작품에서 “벌레는 죄다 먹어 그 사무치게도 고요하던 집”은 정윤천의 아픔만이 아니다. 그래서 “벌레 먹은” 고요한 집은 사람이 살아도 쓸쓸한 풍경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이다.
정윤천의 시를 읽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의 시가 유독 과거 회상의 구조로 많이 짜여진 것이기에 시간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다. 그저 과거를 과거에 두고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작품들의 공통점은 오늘 그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
형제는 모처럼 만나 그 동안의 심심한 안부를 묻고 자리를 옮겨 변두리 식당 안에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고(-그러고 보니 얼마만이냐)
어린놈이 벌서 귀밑머리가 볼 만하구나 무심코 던진 형님의 한 말슴 뒤에서 아우는 벌써 정색이 되고 말허리를 분지르고 나서고 덜 씹힌 밥알을 담은 그 놈의 입에서 `세월'이라는 매큼시큼한 단어 하나가 눈깔을 부라리며 튀어나오고
…중략…
형제여 그러고 보니 너희들은 흔해빠진 일취월장은 커녕 겨우 제 집 앞의 담장들이나 눈치 죽여 넘어왔느냐
형도 이제 안간힘을 다하여 하다못해 그 무슨 풍경이라도 하나 눈깔 아프게 사랑할 때가 아니겠냐고 밥알을 튀기던 아우 놈의 강 같은 `세월'이 그늘 실팍하게 어두워진 담벼락 너머로 가슴에 어리고.
-「세월이, 저녁 한때」1·3연에서
어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형제가 모처럼 만나 많이 달라진 서로의 모습과 바둥바둥 살면서 궁기를 면치 못한 모습을 확인하며 가슴아파하는 위의 작품은 ‘시간’의 간극속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진다. 위의 작품을 통해 정윤천은 형제애를 떠올렸지만, 오랫동안 각기 제 삶을 열어가며 보낸 ‘세월’속에 잊었던 소중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간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망각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하면서 보다 성숙한 인간의 길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것을 정윤천은 불혹의 나이에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정윤천의 시는 유한한 인간의 목숨이 세월을 탕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변해 가는, 변해버린 여러 모습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좁쌀전 재식이 자식은 똥배도 제법 불거져 나왔고”(「그 자리」), “아버지 뒤를 따라가던 아이가 이제 혼자 가기도 하는”(「그길」) “어린놈이 벌서 귀밑머리가 볼만하구나”(「세월의, 저녁 한 때」) 등 연륜이 더할수록 삶의 무게와 깊이도 더해가고 있다.
지나간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는 말처럼 정윤천은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시를 통해 떠올리는 그의 추억은 쓸쓸하고 애잔하지만 아름답다. 때로 살을 에이는 듯한, 몸서리치는 그리움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감상적인 그리움이기보다는 과거를 통해 오늘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참된 모습을 꿈꾸어 보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과거의 추억을 아프게 즐기며, 그 비내리는 필름 같은 낡은 세월을 자꾸만 배설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정윤천은 과학과 문명에 핍진한 현대인을 실향민으로 여기며 망향의식으로 회귀시키려 하는 것이다.
정윤천은 과거를 반추한다.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망을 말하지도 않았다. 과거의 쓸쓸하고 애잔하지만 따뜻한 불빛을 노래하였다. 그는 과거에 비춰진 오늘의 모습을 통해 결국 미래의 희망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5.
이상으로 시집 두 권을 통해 정윤천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 보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정윤천은 끊임없이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이며, 이 땅을 살다간 사람, 또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80년대 민중시의 기세가 절멸한 지금 정윤천은 과거 민중들의 삶과 상처를 아름답고 따스하게 이야기함으로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민중이라면 바로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일진대 그는 우리 민중문학이 노래불렀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의 어두운 부분보다는, 굴절되고 피폐한 역사의 이면을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따스하게 노래하고 있다. 정윤천의 두 권의 시집이 나름대로 차별성을 갖고 개성이 있지만,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 그것은 그의 토박이 한국적 정서임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그것은 담은 언어에서 기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인으로서의 귀족주의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수더분한 ‘범인의식’은 그의 생활에서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수많은 주인공은 평범하고 표준적인 삶을 사는 한국인이며 그는 보통 한국인 속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한 그의 삶의 모습과 자세가 작품의 형식에서도 풍겨 나오는데, 깔끔하다든가 귀공자풍이라든가 보다는 때로 수다스럽고, 때로 격정적이고, 때로 조금 희극적으로 보이는 등 그는 가장 한국적 정서를 간직한 시인이며 ‘아름답고 쓸쓸한 상처의 회억’을 연출하는 시인으로 우리 문학사에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