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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대단원 <구국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조선의 후계임을 내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나, 실상 문화에 있어서는 한족(桓族)의 것을 대부분 잃고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 모화 사상에 빠지다. 이는 통일된 중원의 정치적 상황과 고도의 문화에 반해 소수 미개 부족들로 전락한 북방의 구이와 그들을 통일하여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부족하였던 한반도 조선의 현실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중국 문명도 유구한 문명의 발원인 배달 문화에서 비롯되었음이니 이 또한 한 겨레의 유원한 역사와 비교하면 일시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태종 대에 군역과 부역을 피하여 울릉도로 들어가는 백성의 수가 날로 증가했다. 이에 왕은 이것이 왜구의 울릉도 침략을 부추길 소지가 있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둔다.’는 공도 정책을 실시하다. 세종대왕은 고래의 배달 문자를 완성하여 훈민정음이라 칭하니, 이로써 애민 문화 겨레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확고히 되다. 또한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다. 선조는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을 당해 몽진을 가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성웅 이순신 등 민관의 활약으로 난을 평정하다. 숙종 대에 어부 안용복의 활약으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대마도주로 하여금 독도의 조선령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내도록 하다. 순종 대인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로 치욕의 식민 지배를 받다. 하나 대결 2001년 00월 12일 [일본 최대의 야쿠쟈, 무사시 파의 두목 무사시와 부두목 야마시타, 피살체로 발견] "사인(死因)은 둔탁한 흉기에 온 몸을 두들겨 맞은 것으로 담당의 소견 피력" "오까고마!" "예, 각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무사시가 왜 죽은 거야?" 노부오가 조간신문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며 경호 실장을 다그친다. "예, 각하. 그 문제로 경시청에 조회를 해 보았습니다." "뭐라 그래?" "예, 피살된 동기는 수사 과정에 밝혀지겠지만 피살체의 몸에서 드러난 상흔에 대한 견해가 심상찮게 생각됩니다." "뭐라 그러는데?" 노부오가 실장의 브리핑을 받는 눈빛에 기운을 뿜어내며 거구의 오까고마를 노려본다. "부검의 소견과 종합한 담당 수사 과장의 견해는 사체의 피격 부위와 상흔의 크기로 보아 엄청난 파워를 지닌 전문 싸움꾼의 가격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노부오가 지나가는 생각으로 가볍게 말을 뱉는다. "조직의 세(勢) 싸움과 관련한 타 조직의 테러를 받았다는 말인가?" "각하, 야쿠자 세계에서 다른 조직의 보스를 공격하는데 맨주먹을 사용하는 예는 없습니다." "그럼, 누구 짓이란 얘기야?" 프로젝트 실패의 불길한 예감에 노부오는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오까고마를 다그친다. "수사 과장의 견해로는 주먹에 관한 한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의 스피드와 펀치를 가진 자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투 선수라도 된다는 얘기야, 뭐야?" 다나까 노부오가 무심결에 뱉은 말에 스스로 깜짝 놀라며 온 몸에 돋아나는 모골의 송연함에 볼품없는 노구를 옹송그린다. "각하, 침착하십시요." 오까고마가 노구의 건강을 염려하며 다나까를 진정시킨다. "과장의 말로는 복서라도 보통 복서의 실력이 아니랍니다. 설령 과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일본 최고의 야쿠자 보스 두 명을 맨주먹으로 살인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가공할 무술의 실력자임이 분명합니다. 무사시와 야마시타가 어떤 자들입니까? 격투기의 달인들 아닙니까? 특히 야마시타의 타격 부위는 턱 아랫부분 단 한군데로서 부검의와 수사 과장은 그가 결투 중에 타격을 받은 것으로 진단을 내렸습니다만, 제 소견으로도 상대가 대결 중에 번개같은 스피드에 가공할 파워를 실어 상처 부위인 야마시타의 턱을 한방에 찍어 날려 절명시킨 것으로 사료됩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야마시타의 턱을 해머같은 쇠뭉치를 전력으로 가격했다는 것이 객관적인 설득력이 강합니다만..,그 위력은 무사시의 것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위력이 다르다...?! 그럼, 한 놈의 짓이 아니란 말이 되지 않나?" 노부오는 범인이 규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을 걸고 오까고마를 바라보며 긍정적 대답을 채근한다. "각하, 무사시와 야마시타의 상흔의 경우에 범인은 동일 인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노부오가 불쾌한 표정으로 눈빛에 그 이유를 물어 전한다. 오까고마의 설명은, 한 사람이 치는 주먹이 언제나 같은 대미지를 상대에게 입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롱 펀치와 숏 펀치의 차이, 예각과 둔각의 차이, 스피드와 파워, 끊어 치기의 정도에 따라 펀치의 위력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위력이 다르더라도 타점의 흔적만으로 전문가들은 동일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경우는 두 쪽 모두 동일 인물이 필살의 타법으로 주먹을 휘둘렀으나 타격을 할 당시의 상황에 있어서 무사시의 경우 범인의 상대가 안되었는지 범인이 부담없이 연타를 두들겨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마시타의 경우에는 범인이, 힘에 겨운 상대의 순간적, 결정적인 허점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롱 펀치에 가까운 둔각의 타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까고마의 말을 흘려들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다나까 노부오의 하체도 이미 기력이 다 빠져나가 무생물 덩어리와도 같이 의자에 축 늘어져 있다. 강렬한 인상으로 노부오의 가슴을 향해 밀려오는 배규호의 환상은 노약한 다나까의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배규호의 각인된 형상으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르던 다나까는 배규호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유일한 안식처인 오까고마의 두터운 가슴에 강한 눈빛을 집중하여 가까스로 평정을 구한다. "배규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오까고마와 이심전심으로 녀석임을 확신한 노부오는 오까고마의 가정에 큰 동요없이 긴 한숨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기운빠진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 녀석이 일본에 와 있다는 얘기야?" "공식 창구를 통해 의뢰해 본 바로는 녀석의 입국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밀입국을..?"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각하" "그 녀석이외의 가능성은 없는 거야? 놈은 며칠 전에 미국에 갔다고 그러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만, 녀석은 타이틀전을 마치고 귀국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으~ㅁ!" 노부오가 가라앉는 단음절의 신음을 토해내며 생각에 잠긴다. "그 며칠 사이에 녀석이 밀입국을 해서 무사시와 그 수하를 죽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녀석이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알았다는 말이지? 그를 지원하는 세력이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보 기관이 개입해 있다...? 아니면 며칠 전 테러를 행한 재일 한국인들의 비밀 조직과 연계되어 있는 걸까?" 이 궁리 저 궁리로 연쇄적인 발상에 침을 말리며 소파에 얹혀 있던 늙은 다나까는 문득 스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오까고마의 대답을 재촉한다. "히데오는 무얼하고 있나? 경호는 잘 하고 있는 거야?" "예, 각하!" "연락해 봐. 잘 하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프로젝트 수행에 차질이 생기면 안되는데...무사시가 죽었으니..." 다나까 노부오가 얼굴을 들어 전화를 거는 오까고마를 바라다가 입을 뗀다. "오까고마, 무사시의 일을 대신할 자를 찾아 봐! 무리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녀석으로...역시 야쿠자가 제격이겠지?" 오까고마의 대답을 흘리며 햐야시가 건네받은 전화로 입을 가져간다. "히데오 별 일 없느냐? 그래...프로젝트는 잘 수행하고 있겠지? 매스컴 반응이 괜찮은 것 같으니 잘 해봐." 섬을 출발한 경비행기는 하늘 높이 떠올라 하얀 파도로 해안선을 이루는 일본 열도를 굽어보며 푸른 바다 위를 날아간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포승에 묶여 눈을 감고 있는 히데오를 힐끗 바라보는 규호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개인의 출세를 위하여 온갖 교활한 술수를 다 부려서 두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상황을 접해서는 이 녀석을 잡기만 하면 살이라도 씹어먹을 것 같았는데 한 번의 급소 공격으로 연약하게 무너져, 지금은 창공에서 떨어져 고기밥이 될 운명을 모르고 기절해 있으니......정치를 하는 사람끼리, 국익을 다투는 나라끼리 권모술수가 횡행하지 않는 나라가 이 세상에 없지만 히데오, 당신이 더 자라기 전에 우리를 만난 게 악연이라면 악연이라고 할 수밖에......" 두 사람이 공통의 화두로 공감하는 가운데 규호가 조종석에 앉은 한금을 바라보며 말을 건다. "최 동지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알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조종간을 쥐고 말이 없던 한금이 비장한 표정으로 낮은 음성을 규호에게 던진다. "모르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딴은 그렇기도 했다. 규호의 입장에서야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양국 국민들의 안녕을 위하여 악의 근원인 하나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일이지만 한금과 히데오, 특히 히데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국익을 다투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현실적으로 적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사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히데오의 한금을 향한 우인(友人)으로서의 신뢰감은 일본인 친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어서 자신을 죽이는 자가 한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히데오는 죽음보다도 더 큰 절망을 안고 죽어 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규호가 침묵으로 한금의 뜻을 따른다. "몸은 괜찮습니까?" 한금의 부상이 염려되는지 규호가 근심스런 안부를 묻는다. "괜찮습니다. 견딜만 합니다." 한금의 부상을 언급하던 규호는 어젯 밤 야쿠자 보스와의 결투를 떠올린다. 2. 동북아 정치 경제 연구소의 산하 점조직들의 전국적인 농성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무사시와 야마시타는 다음 날에 있을 재일 한국인 지도자들을 제거할 계획의 검토를 한 후 그 날만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경호 부하들을 물리치고 술집을 찾았던 것이다. 감정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기분 좋게 술을 마신 그들이 주점을 나와 승용차로 동경의 인적 없는 도로를 달릴 때, 그 때까지 무사시의 스피드에 맞춰 따라오던 검은 색 승용차가 과속으로 달려와 야쿠자의 승용차를 옆으로 들이박아 도로 가장자리에 멈추어 세운다. 기습에 놀란 무사시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가슴을 더듬으니 일이 안 풀리려고 그러는지 총도 사무실에 두고 그냥 나왔다. 지난 번 테러 조직의 일망타진 후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해이해진 탓이 크다. 야마시타가 보스를 수행하는 입장에 그의 장기인 검술용 쌍검을 휴대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일 적이 총이라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위험하다." 순간, 더 이상의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으려는 듯 다시 한번 괴한의 승용차가 운전석을 향해 돌진한다. "보스! 뛰어 내리십시요!" 차 문을 급하게 열고 튀어 나와 횡단보도로 몸을 피하는 두 사람의 차 문 앞에 괴 승용차가 급정거를 한다. "끼이~ㄱ!" 잠시의 정적 뒤에 야쿠자들이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듯, 승용차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3. 한금이 박 주임과 하나꼬 등 첩보원들로부터 수집한 정보와 함께 규호가 진작에 박 주임으로부터 전해 받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통해 동북아 정치 경제 연구소의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 입수한 정보로 두 사람이 그들의 행적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빌딩 숲 동경, 대낮의 햇빛 기운이 잦아든 회색 하늘의 서녘은 어스름 황혼이 유화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 태양 주위를 붉게 물들여 가고 낮아진 일광의 조도를 좇아 시나브로 떨어지는 명도가 지상을 어둡게 물들여 간다. 서녘, 지평선 나무가지에 지쳐 걸린 태양이 힘겹게 뿜어내는 예각의 장파로 인해 땅거미가 짙고 길게 내뻗을 무렵, 두 사람은 오피스텔을 나와 프로젝트 완성을 향한 행동을 시작한다. 무사시를 먼저 제거하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무사시의 사무실을 찾았고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그들의 뒤를 추적할 수 있었다. 4.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간 권총을 바지의 뒤쪽 허리춤으로 밀어 넣은 두 사람이 각자 자기가 맡은 상대를 찾아간다. 급정거 후 잠깐의 정적 동안에 규호가 무사시를, 한금이 야마시타를 상대하기로 두 사람은 결정하였던 것이다. 챔프를 알아본 무사시와 야마시타도 야쿠자의 보스들답게 정해진 자신들의 상대를 확인하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다나까 선생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이 녀석은 진작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이제는 우리의 목숨을 앗으려 하는 역전된 신세라니...!" 일말의 후회와 함께 잠깐동안 다나까 선생의 영상을 스쳐 보내는 무사시의 눈두덩이 이지러진다. 미련을 떨치며 살생의 결투를 준비하는 야쿠자 총수의 포즈는 완벽한 무인(武人)의 기를 내뿜어 상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비록 가라데의 고수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야쿠자 두목이라고 할 지라도 현역 세계 챔피언으로서 세계 복싱 판도를 뒤집어 놓을 실력과 야망을 갖춘 배규호의 상대가 되기에 무사시는 늙어 있었다. 기선을 제압할 듯, 무사시의 선공으로 목숨 건 결투가 시작된다. 한두 번의 상대 발차기를 보고 실력을 파악한 규호에게 세 번째 날아든 무사시의 어설픈 돌려차기는 그 순간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흘려 보낸 규호가 앞쪽을 향하는 상대의 가슴 아래로 파고 들어 오른쪽에 이은 왼쪽의 숏 훅을 살 오른 볼에 터뜨려 버린다. 혼절과 함께 흰자위만을 드러낸 야쿠자 보스가 시간이 멈춘 공간의 순간에서 마치 하얀 석상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서 있다. 이윽고 다나까 가(家)의 한 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절명을 결심한 챔프의 정권에 강력한 기가 뿜어 난다. 야쿠자의 복부를 향해 필살의 주먹이 예각을 이루며 나가려는 순간, 규호의 뇌리를 파고드는 한 영상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나타난다. 다나까를 향한 분노의 제물이 되어 링 밖으로 떨어진 가토의 모습이 무사시에게 오버랩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가토는 그 시합의 후유증으로 뇌를 다쳐서 반 식물 상태로 은퇴를 하였다고 한다. 건전한 스포츠 정신을 위배한, 국가적 사안과 관련하여 극도로 분노한 감정의 표출이었음을 규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토의 소식을 접하고는 못내 괴로운 마음을 한동안 달래기가 힘들었었다. 또 다시 그 순간을 맞이한 규호는 촌각의 갈등 끝에 바스라들 듯 이빨을 짓깨물어 흔들리는 심지를 극복한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리기로 마음을 결정한 규호의 좌우 철권이 무사시의 복부에서 얼굴로 이어지는 섬광을 번쩍인다. 마침내 일본 야쿠자의 아성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꿈틀거린 야망의 꿈도 모래탑과 같이 붕괴되어 버린다. 짧은 시간에 힘들지 않게 상대를 잠재운 규호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야쿠자의 부두목과 결투중인 한금을 바라본다. 5. 두 명의 적은 횡단 보도의 철책을 넘어 언덕 아래 숲 속에서 목숨을 다투고 있다. 격투기의 고수이면서, 또한 닌쟈 조직의 총수답게 암수의 달인인 야마시타를 상대하는 한금이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결을 벌이고 있다. 아니, 보다 냉정하게 말하면, 칠흑의 밤을 가르며 차갑도록 번득이는 야마시타의 예리한 쌍검의 칼날을 한금이 힘겹게 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야쿠자라는 허울만 벗겨 낸다면 야마시타의 무술의 경지는 가히 여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술의 대가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암흑의 무대, 주인공의 율동을 쫓아 비추이는 단 하나의 조명 아래에서 화려한 검무(劍舞)를 선뵈는 아티스트와도 같이, 구름을 벗어난 교교한 달빛 아래 야마시타의 무공은, 직선적 무술의 경지를 부드러운 곡선의 예술로 승화시킨 고아한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겨진 살기를 한금에게 마구 퍼부어 댄다. 촌각의 겨를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살수(殺手)를 피해 나가는 한금의 얼굴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달빛에 반사되는 그의 모습은 보석의 반짝임과도 같이 영롱하기까지 하다. 무사시의 후계자로서, 차기 야쿠자 조직을 이끌어 갈 보스로 지목되고 있는 야마시타는 30대 중반의 강건한 근력과 체력을 지닌 190센티미터의 체구를 자랑하는 건장한 사내이다. 거기에다 타고난 유연성과 날랜 스피드는 명암을 초월한 주먹 세계의 1인자 임을 자타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가 야마시타를 맡았어야 하는데...! 무술의 고수에게 쌍검까지 쥐였으니...긴 리치에 검의 길이를 더하면...이건 지금까지 잘 피해 온 최 동지를 칭찬할 일이다." 규호가 한금을 돕기 위해 야마시타의 후미(後尾)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때까지 숲의 지형 지물을 이용해 잘 피해 나가던 한금이 더욱 더 공격의 고삐를 죄며 달려드는 야마시타의 섬광을 다급하게 피하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곁눈질로 무사시의 몰락을 깨달은 야마시타가 필살 승부로 스피드와 템포를 높여 가공할 밀어붙이기로 승부를 걸어 오자 그때까지의 공격 리듬에 익숙해 있던 한금이 야마시타의 기(技)와 힘의 급습에 당황했고 설상가상으로 돌부리의 지형 지물까지 야마시타를 도와 한금이 풀밭에 나뒹군 것이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절박감을 섬뜩하게 전율한 한금이 신속하게 땅을 뒹굴고 일어나 무릎을 딛고 자세를 잡는다. 그 순간, 은빛 섬광이 꼬리를 문 차가운 비수가 한금을 향해 날아든다. 1000분의 1초도 안되는 순간의 본능적 직감으로 한금이 상체를 비틀어 젖힌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무게의 비수가 번개의 섬광을 폭발시키며 한금의 삼두근에 불꽃을 튀기고 지나간다. "으윽!" 정확하게 심장을 향해 날아오던 비수가 한금의 본능적 감각과 날랜 동작으로 팔을 스쳐 보낸 것이다. 찢겨져 나간 살점의 부위에서 신랄한 통증이 전해짐과 거의 동시에 상처 아래로 뜨거운 액체의 전율이 세포 하나 하나를 자극하며 흘러내린다. 한금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통증을 인내하며 다시 한번 땅바닥을 굴러 가까운 나무 뒤로 몸을 숨긴다. 나무에 등을 기댄 한금이 오른손을 등 아래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이런, 총이 없다!" 땅바닥을 뒹굴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한금이 순간의 낙망을 잊고 다시 초미지급의 해법을 강구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편 야마시타는, 치명타를 입은 초식동물의 피할 수 없는 은닉 행위를 즐기는 천부의 가학적 오락 행위를 즐기는 맹수와도 같이 입술에 차가운 미소를 내비치며 한금을 향해 서서히 발길을 옮겨 간다. 어느 정도 거리를 맞춘 야마시타가 나무 옆으로 몸을 날려 한금의 측 후방에 자리를 잡는다. 한금이 다시 나무를 돌아 몸을 움직일 사이도 없이 칼을 치켜든 야마시타가 한금을 향해 몸을 던지려고 한다. "탕!" 일촉즉발의 순간, 자고이래로 인간의 감성을 고양해 온 밤의 주인공이 휘영청 황금빛을 내리쬐어 일구어 내는 세상의 진리적 풍경을 일거에 깨뜨리는, 쇠붙이의 파열음이 토해져 나온다. 한금의 위급한 장면을 목격하며 쫓아오던 규호가 혁대 뒤에 끼워 둔 권총을 꺼내 야마시타를 향해 공포를 쏘며 달려온다. 야마시타의 동작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곧장 고개를 돌려 규호를 노려본다. 한금이 다시 한번 찰나의 틈을 타 낙법으로 야마시타를 피해 규호를 향한다. 한금의 안전을 확인한 규호가 권총을 들어올려 야마시타의 얼굴을 향하고 검지로 몰린 감각의 신경 세포는 차가운 방아쇠의 서늘함에 정신마저 뚜렷해진다. 미동도 인정치 않으려는 듯 규호의 안광이 심야 야수의 눈빛을 거침없이 뿜어낸다. 무술의 달인으로서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무공과 감정의 깊이를 읽을 수 있는 야마시타가 암수(暗數)의 동작을 포기한다. 방금 전까지 쌍칼을 들고 승자의 우월한 세를 과시하던 야마시타가 역전된 입지를 인정하고 칼을 든 손에는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답게 야마시타가 실전의 경험을 살려 천행(天幸)을 기대하며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진다. 맨주먹의 대결을 유인하는 야마시타의 노련미를 충분히 간파하는 규호가 그에 개의치 않고 권총을 한금에게 넘긴다. 규호는 일본 야쿠자와 닌자의 실전 총책이자 무공의 달인인 상대를 정당한 대결로 극복해 보고자, 야마시타는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 결투의 와중에 삶의 기회를 얻고자, 두 적수는 필살의 태세를 안광으로 뿜어내며 거리를 좁혀 나간다. 프로 복서로서 세계 타이틀을 거머쥔 챔프임을 잘 아는 야마시타가 샌드백을 두드려 온 자신의 권력(拳歷)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긴 키에 긴 리치를 이용해 잽을 날려 온다. 스텝만은 맹수의 조심스런 접근을 유지하며 날카로운 눈을 챔프의 동작에 전념한다. 상대의 전공 분야를 택해 도전해 오는 야마시타를 잠시 의아해 하던 규호가 귀 주변으로 이는 바람의 흔들림으로 전해 오는 심상찮은 펀치의 무게를 감지하며 상체와 하체의 움직임에 신중을 기한다. 지금껏 링 위에서 만난 어떤 상대보다도 강인한 냄새를 풍기는 상대를 심야, 천연의 숲속에서 대적하는 규호는 야마시타와 함께 숲의 제왕을 다투는 두 마리의 맹수로 돌변하여 자신들을 동점으로 한 타원 위를 탐색(探索)의 긴장감으로 돌아간다. 잽과 함께 이따금씩 카운트 펀치를 터뜨리기 위해 타이밍을 잡는 야마시타의 자세는 웬만한 허점을 잡기가 힘들다. 마치 전성기의 토마스 헌즈의 괴이, 음험함을 풍기는 장신의 세밀한 근육질 몸매가 강자의 카리스마를 오만하게 내뿜고, 연속되는 주먹의 반복은 근지구력으로 단련된 훈련의 강도를 짐작케 한다. 현란한 조명 아래에서 관중의 환호를 받는 공인의 권좌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도 영예의 자리를 마다하고 음지의 암흑 세계를 평정하는데 만족하며 일상의 무(武)를 즐기는 신비의 사내를 마주한 규호는 프로 복서가 되기 전의 자신과 야마시타를 비교하며 작으나마 교집합의 공감대를 인식한다. 상대를 뚫어질 듯 몰두하는 야마시타의 시선은 자신의 실력에 흔들리는 현역 챔프의 심중을 읽고 세상으로부터 숨겨 놓은 주먹의 위력을 발휘하고픈 자만의 욕구가 꿈틀거린다. "쉬쉭! ??! 츄츄??!" 한동안의 탐색 시간을 보낸 야마시타가 길고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달려든다. 자신의 복싱 실력을 발휘하고픈 욕구로 잠시 전 죽음의 기로를 망각한 야마시타는 사각의 링에서 챔피언을 마주하는 환상을 가지고 마치 모터 달린 창과도 같이 근접을 허용치 않는 기계적인 반복의 날카로움을 상대에게 쏟아낸다. 빠른 스텝으로 사이드를 빠지며 상대의 약점을 찾는데 곤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던 규호가 자신의 자존심을 긁는 상대의 술수에서 벗어난 것이 그 잠깐 후였다. 규호의 스텝이 야마시타의 잽과 스트레이트를 피해 멀찌감치 백스텝으로 물러나자 야마시타가 다시 방심 없는 자신감으로 규호를 밀고 들어온다. 순간, 야마시타의 진입과 동시에 규호가 더킹으로 상대의 품으로 달려들듯 자세를 취한다. "슉!" 기다렸다는 듯이 야마시타의 섬광 같은 레프트 어퍼커트가 불을 뿜는다. 일발필살의 가공할 펀치가 규호의 안면에 바람을 가르며 솟아오르고 한번의 트릭과 함께 야마시타의 맞은편 좌측으로 스텝을 옮긴 규호는 왼발 뒤꿈치를, 오른쪽잡이로서 앞으로 체중을 실어 내민 상대의 왼발 뒤꿈치에 걸어 힘차게 상대의 앞쪽으로 잡아 차 당긴다. 갑작스런 트릭으로 발목을 걷어차인 야마시타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잃고 상체는 규호 쪽을 향한 채 뒤쪽으로 중심이 기울어진다. 기회를 놓칠세라 야수보다도 민첩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균형을 빼앗은 챔프는 왼발의 안정된 착지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지는 자신의 왼팔에 무심(無心)의 에너지를 응집한 레프트 훅으로, 균형을 잃은 채 상대를 돌아보며 뒤로 가라앉는 야마시타의 끄떡 들린 아래턱을, 어깨를 축으로 한 본능의 기계적 작동으로 유연하게 돌려버린다. "빠각!" 턱뼈가 바스러지는 통음(痛音)이 차가운 공기를 긴장시키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생사를 결정하는 오롯이 한방의 주먹을 온전히 맞은 야마시타는 침과 피로 범벅이 되어 흐르는 게거품을 낭자하게 하늘을 마주하며 누워 있다. 한참이 지나 기절해 있던 야마시타가 혼미한 정신을 차리고자 머리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다가 극심한 통증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 "크윽!" 부서진 턱뼈가 건들거리며 살아 있는 미세한 신경세포들을 일일이 자극한 것이다. 그와 함께, 이빨을 짓이겨 극심의 고통을 참으려 애쓰던 야마시타는 역시 턱으로 전달되는 관련 신경조직을 통증으로 절감하면서 고통의 물리적 인내를 포기한 채 격렬한 통증을 즐기려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고통으로 벌어지는 입을 자연스럽게 그대로 두고 격렬하게 뼈 속을 스며들어 후벼대는 고통의 오르가즘에 혼을 놓더니 다시 엎어져 숨을 놓아 버린다. 챔프의 자존심을 긁으며 신경전의 우월을 점하려던 야마시타는 링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야산의 숲을 인지한 냉철한 챔프에게 전문 싸움꾼의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적을 제거하여 첫 날의 계획을 완수한 두 동지는 그들의 아지트로 돌아온다. 다음 날을 일본 체류의 마지막 날로 정한 두 동지는 박 주임과 더불어 치밀한 계획을 마련한다. 회의를 마치고 한금이 전화를 걸어 하나꼬를 부른다.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한금이 그들을 이해시킨다. 그녀가 그토록 열망하던 고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한 그녀가 아쉬워 마지 않던 학업 중단 재개의 길을 고국에서 열어주기 위하여 데려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미꼬에게 청하여 휴가를 받은 하나꼬가 한금을 찾아 온 것이다. 둘 집행 1 "오까고마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거야?" 집무실에 들어선 다나까 1세가 여비서를 바라보며 묻는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주군의 잠자리까지 돌보아 오던 오까고마가 오늘은 내내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각하, 오까고마님이...흑!" 다나까 1세가 가는 눈을 치켜뜨며 흰자위를 드러낸다. "또 무슨 일이 난 거야?"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다나까 1세가 불쾌한 언성을 높여 지른다. "예..., 각하. 방금 전에 경시청에서 전화가 왔는데......어젯밤에 히데오님의 연구소에서 피살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럼, 히데오는...히데오는... 어떻게 됐어? 응? 히데오는?!" 다나까 노부오가 제 수족의 죽음마저 잊어버리고 사색이 된 얼굴로 여 비서를 다그친다. 말문이 막혀버린 듯한 어눌한 음성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희망의 메세지를 간절히 재촉한다. "경호원 두명과 운전 기사의 사체는 발견했지만 히데오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답니다." "그럼.., 살아 있다는 말이냐? 응? 그 말이야? 어서 전화를 해 보아라, 어서!" 희망의 음성인지 절망의 언어인지 반반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전하는 여비서의 말이 끝나자 마자 다나까 1세는 제 성미를 못 이겨 성화같이 다그친다.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만,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소 직원의 말로는 일과 시간이 끝나면서 히데오님이 경호원과 기사 두명을 남기고 모두 퇴근시키셨답니다." "무엇이...!" 철렁 내려앉는 심장을 절감하며 무호흡의 절망을 경험한다. 낙망의 대답을 듣고 난 노부오의 안색이 시나브로 창백해지고 노안(老眼)은 퇴색하여 절망의 빛으로 바뀌어간다. "그토록 경호에 만전을 기하라고 일러 두었더니..." 힘없이 빠져 나오는 책망의 언어가 입안으로 잦아들고 회백색 피부에 돋아난 푸른 핏줄의 윤곽이 더욱 뚜렷해진다. 놀란 마음에 억눌려 마비된 신경이 손과 발끝 둔감해진 피부를 되살리듯 자욱하게 저려온다.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청년 노부오의 발자취를 더듬어 오던 그는 그의 분신 히데오에 이르러 깊은 감회를 감추지 못한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입신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역도 기꺼이 맡아 오기를, 마침내 일본 사회의 지존으로 자리하여 개인의 꿈, 가문의 번창을 다시 이루는데 성공하였건만...내가 하고자 해서 못한 일이 없건만, 뒤를 이을 하나뿐인 아들의 일은 왜 이리 힘이 드는지...이제는 행방이 묘연하여 생사가 걱정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낙망의 사색에 사로잡혀 사건의 개요를 훑어가던 다나까 노부오는 문득 기억의 저편에서 밀려오는 검은 영상을 인식하면서 심기가 불쾌한듯 이를 앙물어 지우고자 애쓴다. "배규호...!" 검은 영상이 밀물에 실려 다가올수록 점점 선명해져 그 모습을 확인시킨다. 조류(潮流)의 대세를 막기에 벅찬 기력의 노부오는 할 수 없이 만조의 바다에서 부유의 쟁의를 받아들인다. 편견에 사로잡혀 왜곡된 가치관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자행한 불의를 각성하여, 올바른 길을 걷기에 지혜의 깊이가 너무 얕고 도덕성의 함양이 너무 소홀하다." 2 연구소에서 내일의 사건 시나리오를 짜느라 직원들과 경호원들을 퇴근시키고 운전사와 경호원 두명만을 남기고 밤 늦도록 일에 몰두하는 히데오 앞에 배규호와 장한금이 나타난 것은 밤의 한가운데를 벌써 지난 후였다. 사무실 밖에서 밤을 힘겨워 하품짓는 경호원을 간단히 처리한 두 사람이 불켜진 히데오의 사무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국의 청년들이 재회를 한 현장에서 두 젊은이에게 3차원의 통용어는 필요없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미 다나까 가의 음모를 파악, 다나까의 프로젝트를 무산시킬 정의의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피아(彼我) 적대적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위하여 마침내 일본 청년 앞에 선 것이다. 일본 청년 역시 밤늦은 그의 방문객들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던 소음의 원인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금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흔들리는 감정을 제어하기 힘든 표정을 짓던 히데오가 이내 체념의 미소를 입술의 끝으로 미세하게 내비친다. 한금을 뒤로하고 규호가 히데오 앞으로 다가간다. 규호의 주먹에 힘이 실리려는 순간, 히데오가 말문을 연다. "장 상!" 한금이 말없이 무감(無感)의 시선을 대답으로 대신한다. "지난번 방문이 이 일과 관련이 있었던가..?" 저으기 깔린 어조에 히데오의 감정이 진액(津液)으로 농축되어 전해온다. 자신에 대한 한금의 심중을 확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배신의 깊이를 가늠하고자 하는 히데오의 생각이 떨리는 입술에 묻어있다. 그러나 국가를 초월한 대의(大義)의 수행을 신념으로 하고 있는 한금에게 히데오의 질문은 사사롭기 그지 없어 대답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 말게, 히데오" 한금의 불명확한 대답으로 깊어지는 골을 인식하는 히데오가 다시 한 번 의혹의 해소를 요구한다. "술자리에서 얻은 것이라도 있었던가..?" 지금 자기 앞에서 적과 함께 선 우인(友人)의 실체를 감지하는 히데오는 당시 한금의 방문을 첩보원의 그것으로만 간주해 버린다. 한금의 방문 후, 광란의 주연(酒宴)이 종내 찜찜했던 히데오가 연구소 부하에게 지시해서 알아본 한금의 행적은 수개월에 걸친 열도의 여행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비밀 통신이 포착되었고 부하의 보고는 한금이 한국의 정보 요원 정도로 파악된다는 거였다. 히데오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찾았을 때 이미 한금은 귀국한 후였다. "......" 증오의 눈빛으로 이글거리는 히데오가 마지막 의문의 확답을 촉구하여 묻는다. "우리의 극비 프로젝트를 어떻게 알아 내었지?" 히데오의 질문을 무시하는듯 한금이 휴대폰을 꺼내 박 주임과 통화한다. "후다닥 후다닥!" 잠시 후, 사무실 밖 건물 입구로부터 조금은 급박한 듯한 발걸음 소리가 중첩되어 들려온다. "박사님!" "아저씨!" 연구소 밖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 주임과 하나꼬가 한금의 연락을 받고 들어온 것이다. "아니! 너는...?!" 게이샤였다. 한금과 함께 주연이 있던 날, 한금의 파트너였던 그 숫처녀 게이샤였던 것이다. "그렇네 히데오, 이 아이일세." 한금은 문득 히데오에게 재일 한국인인 하나꼬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거란 생각이 들었고 또한, 그것이 히데오의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성실한 대답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히데오의 인상이 더 이상 구겨질 수 없도록 한껏 이지러진다. "이 년이...대 일본국의 국민으로서...황국신민의 성스러운 국민이 조센징의 끄나불이 되다니...네 년이 대 일본국의 사업을 이렇게 망쳐버렸구나...!" "히데오, 이 아이는 너희 나라 일본의 여인이 아니라 한민족의 순수혈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한민족의 딸이다." 히데오와 규호가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한금과 여인을 번갈아 본다. 한금은 하나꼬의 첫 남자로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한국인의 긍지와 배달민족의 혈통을 꿋꿋이 지켜 온 조상들의 후예답게 자긍심을 갖고 있는 그 녀에게 자신의 역할을 간단히 소개한 후 하나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히데오의 프로젝트를 어렴풋이 접수한 바 있던 한금에게는 기미꼬의 주점에서 일하는 하나꼬가 너무나 긴요한 인물로 다가온 것이다. 하나꼬에게 있어서 주점에서의 첫 손님이자 첫 남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사실은 그 녀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고 국가적 대 사업에 사소한 자신의 일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한금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꼬는 기꺼이 역할을 수용했던 것이다. 한금이 하나꼬의 신변 보장은 물론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 하나꼬는 주점에 들르는 히데오의 동향을 빠트림없이 한금에게 전해줄 수 있었고 한금은 하나꼬를 통해 다나까 부자의 프로젝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들과 관련된 야쿠자 조직에 관한 정보도 입수할 수 있었다. “장 상, 꽤나 큰 것을 얻었구만! 나를 찾아와서 가장 큰 선물을 받았어!” 패배를 인정하는 듯 허망한 몇 마디 말을 하고 두 눈을 감아버리는 히데오의 얇은 얼굴이 주름져 일그러진다. 규호가 그의 복부에 신속한 타격을 가해 기절시킨다. 쓰러지는 히데오를 붙잡아 자신의 어깨에 둘러맨 규호가 세 사람과 함께 서둘러 히데오의 방을 빠져나온다. 연구소의 입구를 향하여 발을 내딛는 순간, 짙은 그림자가 검은 연기를 뒤로 하여 어렴풋이 시야로 들어온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섬광이 휭하니 지나간다. 네 사람을 발견한 괴물의 그림자가 복도를 가득 채우며 그들에게 접근해 온다. "뚜벅...뚜벅..." "........!........!" 거구의 물체가 내딛는 발걸음에 맞추어 나는 구두 소리가 네 사람의 긴장을 한층 고조시킨다. "너희들 누구냐?" 일본어로 내뱉는 고성(高聲)이 복도를 타고, 온 연구실을 쩌렁쩌렁 울려댄다. 스모 선수를 연상시키는 거구와 괴력을 짐작케 하는 기력이 야수의 눈처럼 어둠 속을 번득인다. 온 몸의 신경이 본능적으로 깨어나 표피를 뚫고 나오듯 전신에 전율을 일으킨다. "오까고마 실장님!" 뒤따른 사람이 있었던 듯 거구의 고함을 뒤이어 바쁜 발걸음 소리와 다급한 음성이 네 사람에게 한층 더 벅찬 위협을 가한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고비다!" 규호와 한금이 공감의 위기 의식으로 눈빛을 마주친다. "오까고마라면 히데오의 아버지인 다나까 노부오의 경호 실장이 아닌가?!" 오까고마, 그 역시 야마시타와 같이 무술의 달인이지만 음지의 야마시타와는 달리 일본 및 세계의 무술 대회를 휩쓸어 양지에 우뚝 솟은 전설적 영웅이다. 가라데와 검도, 유도의 전 일본 선수권을 제패하여 일본 고유의 무술과 무예를 정복한 그는 열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유도 대표 선수로 세계 무대에 진출한다. 올림픽을 3연패한 그가 서른을 전후하여 후진의 길을 터 주기 위하여 현역에서 은퇴하지만 세계의 팬들은 영웅을 그냥 두지 않는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데드-매치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대 최강의 프로 레슬러와 죽음의 승부를 앞둔 그는 지난날 찬란한 영광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죽음의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고강도의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한다. 실전에서 마주친 상대는 시합 시작 1분만에 식물 인간을 선고받고, 오까고마는 플래시 라이트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서른 중반을 넘긴 오까고마는, 검정 양복을 갖추어 입고 일본 총리를 보좌하는 당당한 경호실장의 모습을 보이며 다시 양지로 복귀한다. 오까고마는 대 일본국 현역 총리 다나까 노부오의 오른편을 항상 고수하여 주군의 카리스마를 빛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몇 년이 지나 다나까 노부오가 건강과 체력을 이유로 현역을 은퇴하게 되자 오까고마는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여 가신의 지위를 기꺼이 자원한다. 일행이 두명 뿐인 듯 익숙해진 검은 정적 속에 더 이상의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 상황을 파악한 박 주임이 어느새 권총을 뽑아 들고 오까고마와 그의 부하를 조준한다. "철컥!" 탄알을 장전한 박 주임의 검지가 방아쇠의 촉감을 미세하게 느끼며 과녁(貫革)을 조준하고 있다. 어둠 속 선명한 금속음이 날아와 귓전을 울리자 오까고마와 다른 한 명이 방심의 허를 찔린듯 움찔 긴장하여 동작을 멈춘다. "꼼짝 마라!" 위협하는 박 주임의 음성이 두 사람의 위기 상황을 확인시켜 준다. 두명의 적이 이내 석상같이 굳어서 검은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려댄다. 박 주임이 총을 쥔 손과 팔로 사격에 적절한 에너지량을 전송하여 흔들림없는 자세를 견지(堅持)한다. 어느정도 위기 상황을 벗어난 안도감으로 박 주임이 두 사람을 한쪽 벽으로 몰고간다. 그들을 벽에 붙여 세워 상황을 수습한 박 주임이 나머지 손을 가리켜 일행들이 건물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한다. 일본 탈출의 시급함을 긴박하게 느낀 일행의 앞으로 당황한 하나꼬가 박 주임의 지시를 따라 공포의 순간을 부리나케 벗어난다. 하나꼬의 뒤를 이어 히데오를 둘러 맨 규호가 두명의 적을 지나려는 순간, 흰자위를 드러내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까고마가 놀란 눈으로 굵은 목소리를 뱉아낸다. "히데오! 히데오 아니냐!?" 오까고마의 놀란 목소리가 네 사람의 안심을 깨뜨리고, 다시 그것은 그를 돌아보는 일행을 깊은 긴장의 늪으로 몰고간다. 마치 적의 시선을 유인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처럼 오까고마의 놀란 눈빛이 제 발을 한걸음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어 준다. 박 주임의 총구가 옮겨진 타겟에 몰두하여 이동한다. "움직이지 마라!" 박 주임이 다시 한번 경고를 하여 오까고마를 제지하려고 한다.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감은 히데오가 고기덩이와 같이 걸쳐 축 늘어져 있다. "이럴수가...!" 마치 시체와 같이 걸쳐 있는 히데오의 모습을 확인한 오까고마가 거구의 몸을 곧추 세워 사지와 몸통으로 분노의 기를 뿜어낸다. "네 놈들 배규호란 놈의 패거리구나!?" 화를 삭이면서 내뱉는 오까고마의 질문에 네 사람이 침묵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바가야로! 이 교활한 시라기 놈들!” “!” 그들의 실체를 확인한 오까고마는 다나까 가의 경호 총책으로서, 자신의 영토 안에 들어와 주군과 그 아들을 위기에 빠뜨리고 생명보다 귀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적들을 눈 앞에 두고 격한 감정을 삭이지 못한다.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아니, 처음부터 죽음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칼과 총이 두려운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패기있는 나의 행보에 예기치 않은 뜻밖의 상황으로 다가와 잠시 나를 긴장시킬 수는 있어도 나의 기개(氣槪)를 꺾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즉, 칼과 총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의 혼과 명예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나이의 길을 걸으면서 깨달은 것은 죽음보다 두렵고 생명보다 고귀한 것이 명예라는 사실이었다. 사내의 자존심이 꺾여버린 지금 생명은 무의미한 것이다. 비장감이 휩싸는 오까고마에게 불현듯 고뇌에 찬 주군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십년 쌓아 올린 영광의 카리스마를 먹칠당한 당신의 분노와 좌절이 그 얼굴에 더하여 우러난다. 거기에다 기대를 건 아들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가는 마당에 정치적 동지들이 피살당하고 낙망하시던 모습이 분노와 함께 가느다란 연민의 정으로 되살아난다. 주군의 계보 인사들이 살해되고 무사시마저 피살당하자 오까고마는 누군가 프로젝트를 눈치채고 의도적으로 주군을 압박해 들어오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 핵심 인물이 배규호일 것이란 심증은 지배적이지만 물증이 없다. 지난 번 테러 사건과 같이 일부 재일동포 청년들이 제 1, 제 2의 배규호가 되어 저지르는 일이라는 가정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그 바람을 일으킨 사람은 독도 문제의 주인공인 배규호임에 분명하다. 실체 주변을 맴돌기만 하면서 추정과 가정을 거듭하여 반복하던 오까고마는 취침에 들기 전,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히데오에게 전화를 한다. 아침에 깊은 심려로 아들의 신변 경계를 강조하던 주군의 모습이 연상되는 한편, 오까고마 자신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잠들기에는 심기가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오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초조한 마음으로 부하 경호원에게 연락을 취하니 경호원 한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퇴근하였다는 말을 전해온다. 폭발물에 피폭당하는 전율을 느낀 오까고마가 벌떡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 입는다. 그리하여 오까고마는 무술의 고수인 부하 직원을 대동하여 초미지급의 심정으로 연구소에 달려 온 것이다. 이윽고 분노의 감정들이 일거에 응집하여 발산한 오까고마의 잠재적 괴력은, 140 킬로그램의 근육 덩어리를 두드러진 푸른 핏줄로 얽어 매고 총알도 튀어나갈 듯한 촘촘한 섬유질의 데피니션을 선명하게 쥐어짠다. "총성이 울리면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규호가 박 주임의 동정을 살피며 난국 타개를 고민한다. 규호의 마음을 인식치 못하는 박 주임이 마음을 결정한 듯 검지에 힘을 가하기 시작한다. 거의 동시에, 네 사람의 적들이 오까고마에게 몰두한 틈을 타서 오까고마의 부하가 무술에 능한 그의 오른발을 차올린다. "탕!" 총구가 불을 뿜고 권총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총알이 오까고마의 머리 옆을 지나 복도 천정에 박히고 발등에 차여 날아오른 권총은 공중 회전을 몇번 반복하다가 거의 수직으로 떨어진다. 엉겁결에 당한 박 주임이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적의 왼발이 날아와 박 주임의 턱을 날려버린다. "빠각!" "끅!" 그예 박 주임이 고꾸라지는 틈을 타서 오까고마의 부하가 공중으로 날아 오른다. 그가 팔을 뻗어 총을 잡으려는 순간 박 주임의 뒤에 서 있던 한금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공중에 떠오른 적의 국부를 향해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신속하게 박아 버린다. "퍽!" "헙!" 생식기가 터져 버린 상대는 공중에서 즉사하여 떨어진다. 규호와 오까고마가 대치하기도 전에 순식간으로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네가 배규호란 놈이로구나?" 배규호가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실력은 물론, 독도 문제를 일으킨 의협의 주인공임을 잘 알고있는 오까고마로서는 적의 국부를 쳐서 승부를 짓는 그의 모습에서 배규호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급박한 위기의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펀치와 의로운 정신은 국부만은 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탕!" 또 한번의 총성이 복도를 울려댄다. 오까고마가 쓰러진다. 두개골을 관통당한 오까고마 역시 그의 부하와 같이 즉사하여 무너진다. "...........!" 일본 무술의 아성을 쌓아 자신의 카리스마를 세계에 떨치고 불패 신화를 이루어 낸 일본 무술의 신(神), 오까고마가 총탄의 위력 앞에 바위 덩어리같은 모습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실로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규호는 오까고마에게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의 죽음 앞에 서 있다. "배 동지, 빨리 나갑시다. 총성이 났으니 곧 경찰이 몰려 올 거요." 오까고마를 쏜 한금이 박 주임을 일으켜 부축하여 규호를 재촉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내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일만은 개운치 않은 마음을 달래기가 힘들다. 규호의 심정을 아는지 한금이 그를 위로한다. "배 동지, 이해하시오. 내 마음도 편치 않아요.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소." 상황은 우리가 지체힐수 없도록 만들었고 좁은 복도에서 괴력의 거구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무리였다. 게다가 오까고마가 우리의 정체를 안 이상 그를 살려둔다는 것은 어불성설, 대한민국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무술인으로서 그의 최후가 너무 비참하다는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 무술인의 아쉬움을 묵언의 동공으로 피력하여 검은 하늘로 날려 보낸다.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격투기계에 있어서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한 오까고마의 카리스마에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내재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이렇게 아쉬운건지 모를 일이다...이미 마흔에 이른 나이인 만큼 현역 프로 복싱 챔피언인 내가 그를 이긴다 해도 의미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잘 다듬어진 근육은 그의 성실성을 말해 주어 청년 오까고마가 아니라면 아직도 그를 뛰어 넘을 무술인은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만일 내가 그와 대결을 하였다면?" 3 오까고마의 부하를 제거한 한금이 바닥에 떨어진 박 주임의 총을 집어들기 위하여 몸을 숙이는 순간, 자신의 질문에 대한 규호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오까고마가 몸을 날려 한금을 향하여 미끄러진다. 마치 야구에서 주자가 도루를 하기 위하여 스파이크를 앞세워 수비수를 위협하는 것처럼, 거구의 몸이 물찬 제비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한금의 손이 권총에 닿는 순간, 오까고마의 발이 한금의 손과 총을 앞으로 차 나가면서 들린 발로 한금의 안면을 강타한다. 총이 두 사람의 곁을 떠나 복도 끝까지 밀려가 버린다. 타격을 받은 한금이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오까고마를 벗어난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규호가 히데오를 내려놓고 허리춤에 찬 권총을 뽑아든다. "오까고마!" 규호의 우렁찬 호명에 오까고마와 한금, 두 사람이 동시에 규호를 바라본다. 규호가 오까고마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 그의 행동이 신중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오까고마의 타격에 충격을 받은 한금을 고개짓으로 부른다. "일행을 데리고 나가 차 안에서 기다리시오. 시동을 걸어 두고..." 규호의 의중을 파악한 한금이 건투를 당부하는 눈빛을 동지에게 던지고 나머지 일행과 함께 히데오를 메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이제는 둘만이 남아 차가운 공기가 엄습하는 어둠의 공간 속에, 지존의 자존심과 야수의 본능을 가진 격투기의 달인들이 마주하고 서 있다. 맨손 대결의 진정한 강자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무기는 약자의 전유물일 뿐이다. 총을 버리려던 규호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총을 들어 올려 오까고마를 겨눈다. 오까고마가 멈칫거리며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오까고마의 촌탁(忖度)으로는 규호가 총으로 승부를 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맨손 대결로써 승패를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규호는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하는 권총의 극대 효용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권총이 지닌 최소한의 메리트는 누리고자 오까고마를 입구 쪽 넓은 공간으로 몰고 간다. 좁은 복도에서의 결투는 거구의 상대를 맞은 규호에게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규호는 권총의 효용을 거기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불리하지 않은 공간에 들어선 규호가 총을 구석으로 집어 던진다. 그리고 상체를 벗어 남성미 물씬 풍기는 육체미를 드러낸 규호는 복서 자세를 취하여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도전자의 대범하고 의연한 기개를 파악한 오까고마는, 동질적 성정을 가진 상대에게 가슴 속으로 우러나는 경의의 마음을 눈빛으로 전하면서 지난 날의 악감정을 씻어버린다. 결전을 위하여, 오까고마 또한 자세를 낮추어 몸과 시선을 상대에게로 향한다. 세계 지존의 카리스마를 구축해 나가던 시절의 유도 자세를 선택한 오까고마는 갈기 휘날리는 숫사자의 위엄을 한껏 풍기며 상대를 노려본다.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듯이 허점을 찾을 수가 없다. "얼굴, 목, 명치, 국부...급소란 급소마다 거구의 근육 덩어리가 사방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니...내가 유리한 것은 오직 스피드뿐이다." 스피드를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한 규호가 서서히 오까고마의 주위를 돌아간다. 오까고마도 제자리에서 상대의 스텝에 맞추어, 정면의 대치 상황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정신을 곤두세우고 몸을 돌려나간다. 서로가 상대의 허점을 찾아 탐색에만 열중하여, 그들은 공전과 자전, 주기적 원 운동의 단순한 그림만을 지속적으로 그려간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면서 긴장 상태의 리듬에 변화를 주려는듯 오까고마가 변화된 행동으로 규호의 반응을 타진한다. 오까고마의 스텝이 규호의 회전을 따라 도는 가운데 한 걸음, 두 걸음 서서히 규호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수록 상황은 체력 좋은 규호에게 유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오까고마는, 상황에 변화와 자극을 계속 주면서 상대의 허점을 찾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본능적 판단을 하여 조심스런 접근과 함께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상대의 리딩에 따라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도 지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오까고마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규호가 은근슬쩍 상대의 접근에 당황하여 몰리는 인상을 던지며 한발, 두발 뒷걸음질 친다. "녀석이 뒤로 밀리고 있다." 오까고마 또한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석하며 몰이를 계속한다. 사실, 140 킬로그램과 70 킬로그램의 몸무게 차이는 가히 살인적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온몸이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경우에는, 직접 눈으로 경험하기 전에는 그 덩지를 말로 표현해서 이해시키기도 힘들 정도이다. 대치 상황에서 상대의 접근을 힘으로 맞받아 치는 전면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옆으로 돌아 나가거나 뒤로 밀리는 것은 대결의 기본적인 전술이다. 그러므로 140 킬로그램의 무게가 산과 같이 포위하여 다가오는데 전면전을 생각할 리는 만무하니 누가 감히 밀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더 이상 밀리면 위험하다!" 오까고마의 접근으로 한쪽 구석에 거의 몰려가던 규호가 신속한 상황 판단을 한 다음 오까고마를 노려본다. 먹이를 막바지로 몰아가는 포식자의 눈빛이 강렬함을 더해 간다. "스피드의 차이가 있어 빠져나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체가 맨몸이라 잡힐 위험도 그다지 없다. 단지 문제는 나에게 있다. 균형을 잃지 않고 스텝을 잘 밟아가야 한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규호가 다리의 탄력과 원활한 사이드 스텝을 위하여 무릎을 굽히고 보폭을 벌린다. 궁지를 벗어나고자, 자세를 바꿔가며 묘수를 찾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오까고마가 왼발을 반보 앞으로 내밀어 상체를 앞으로 옮기면서 90도 아래로 접어 상대를 향하고 있던 자신의 왼팔을 쭉 뻗어 수도(手刀)를 날려온다. "??!" 복싱에서의 잽과 같이 오른쪽잡이인 오까고마가 날려오는 왼손 수도를 기다렸다는 듯이 규호가 고개를 숙여 흘려 버린다. 그와 함께 규호가 오까고마의 왼쪽으로 빠져 나가기 위하여 오른발을 떼어낸다. 그 순간, 자신의 왼손 수도를 피할 상대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있던 오까고마가 자신의 오른팔을 신속하게 뻗어 내공으로 단련된 손바닥을 눈 아래 움츠린 상대의 머리로 힘차게 날린다. "푸쉭!" ".....?!" "털퍼덕!" 신속하게 빠져 나가는 규호의 머리를 옆으로 스친 가공할 파워의 흉기는 곧바로 상대의 어깨를 폭격해 버린다. 오른쪽을 향하는 힘과 뒷쪽으로 미는 힘이 맞부딪친 규호의 몸이 바람에 날리듯 중심을 잃고 그 중간 쯤으로 나동그라진다. 그리하여 구석으로 연결된 벽을 부딪쳐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왕이면 좀 더 일찍 빠져 나왔을 것을, 너무 지체하여 관록의 오까고마에게 기회를 주고 만 것이다. 오까고마는 규호가 구석으로 몰릴만큼 몰렸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는 뒤로 빠지지 못할 것이란 확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좌우로 빠져야 하는데 만일 자신이 왼손을 뻗으면 당연히 상대는 위험이 사라진 상대의 왼쪽으로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오까고마는 왼손에 이어 오른팔을 거침없이 왼쪽으로 뻗었던 것이다. 오까고마의 판단이 뛰어났다고는 할 지라도 그보다 그의 스피드가 훨씬 더 뛰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역 챔피언으로서 배규호의 스피드는 대단해서 경량급 선수들 조차 그를 맞히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엄청난 체구와 근 매스가 상대의 펀치를 크게 의식시키지 않은 탓도 있었다. "으음...!" 진정 가공할 펀치의 위력을 공포로 느끼고 생전 처음 바닥을 나뒹구는 치욕을 당하여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다. 타격과 함께 균형을 잃어 넘어졌다는게 바른 말이겠지만 상대 펀치의 두터움만은 엄청난 위력으로 전해졌다. 다행히 어깨를 빗맞아 신체적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첫 다운을 당하여 바닥에서 느끼는 굴욕은 대단했다. "어깨가 아니고 머리를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아마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을 것이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려 일어나는 규호를 향해 오까고마가 천천히 다가온다. 승부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작게 풍기면서 접근하는 것이다. 벌떡 일어난 규호가 신속하게 중앙으로 뛰쳐 나간다. "중앙에서 철저한 아웃 복싱을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아까처럼 트릭을 쓴다거나 자만하는 마음은 절대 오까고마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쓰라린 경험으로 체득한 규호가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다시 오까고마의 주위를 돈다. 이제 긴장감은 없다. 차라리 워엄업된 근육이 유연함을 더 살려주고 스피드를 가속시킨다. 체중과 덩지에 비하여 신장은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다. 10센티미터에 조금 모자라는 키는 아웃 복싱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이따금 얼굴로 뻗는 잽이 작은 대미지를 입힌다. "슉! 슈슉!" 잽에 이어 두드리는 가벼운 원투 스트레이트가 상대의 얼굴을 뒤로 젖히기도 한다. "퍼벅!"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앞서 상대로부터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자신의 대응 스타일을 확고히 한 규호의 공격앞에 오까고마의 코피가 터지고 턱이 들썩이며 대미지가 누적되어 간다.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고, 사정거리를 유지하여 중앙만을 맴돌다 치고 빠지는 상대를 잡지 못하던 오까고마가 흥분하기 시작한다. 이성을 잃어가던 오까고마가 자신의 왼쪽으로 돌아 나가는 규호를 주의 깊게 노려본다. 이 상태로 나가다가는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오까고마가 승부수로 비장의 카운터 펀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규호는 철저한 아웃 복싱을 견지하여 다시 잽을 툭툭 던지며 돌아간다. 어느 정도 규호의 아웃 복싱 스타일과 리듬을 파악한 오까고마가 두 눈에 더욱 더 강렬한 눈빛을 번득이며 오른쪽 어깨에 힘을 싣는다. 천하의 파이터도 이럴 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규호의 잽이 두번 툭툭 날아든다. "이때다!" 오까고마의 몸통이 왼발을 축으로 하여 360도 회전하여 돌아가고 오른발이 180도 돌아 위치를 옮긴다. 거기에 맞추어 쭉 뻗은 오른팔이 주먹쥔 손등을 앞세워 360도 회전하여 규호의 몸을 향해 날아든다. 킥 복싱 등 이종 격투기에서 자주 쓰이는 타격 방법인 백스핀블로우를 연상시킨다. 발빠른 상대를 잡는데 손과 주먹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한 오까고마가 임기응변으로 택한 타격 방법이었다. 주먹이야 사정거리 안에서도 좌우 상하, 후면으로 피할 수가 있지만 긴 막대와 같이 휘두른 팔에는 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충격은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세가 흐트러질 것은 분명하니 360도 회전한 후에 제 자리로 돌아오는 자신이 흐트러진 상대를 공격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상대를 고려하면 괜찮은 공격 방법이었던 것이다. 두번의 잽 후에 한 두방의 가벼운 스트레이트를 치고 빠지는 상대의 리듬을 읽고 있었던 오까고마가 규호의 잽 두방 이후에 멈추어 서 있을 상대의 거리를 측정하여 독오른 펀치를 힘껏 휘둘러 온 찰나, 천운이었을까? 아니면 규호의 전술이 훌륭했던 것일까? 가벼운 주먹으로 일관된 리듬을 타면서 상대로 하여금 피로와 방심을 누적으로 이끌던 규호가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두 번의 잽 후에 몸을 바싹 숙여 상대의 가슴팍으로 파고든 것이다. 이번에는 전보다 강도 높은 펀치를 날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휘익!" 오까고마의 쇠방망이가 허공을 가른다. "?!" "?!" 두 명의 승부사가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응을 받아 순간의 혼돈을 경험한다. 타고난 전사의 기질과 천부적인 파이터의 재능이 그 수준에 있어서 거의 유사성을 가지는 두 승부사는 상황을 파악하는 타이밍까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나 언제나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는 존재하기 마련, 거의 동시에 비책(秘策)으로써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였던 상황은 두 사람의 자세에서 승부가 판가름난다. 뜻밖에 자신의 가슴 아래로 숙여 들어온 상대의 머리 위를 오까고마의 무쇠같은 팔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간다. "휘청!" 오까고마의 거대한 몸이 상대 앞에서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린다. 거구의 흔들림을 포착한 규호는 그와의 부딪힘을 피해 신속한 몸놀림으로 다시 공격 자세를 취한다. 먹이를 한 순간에 제압하고자, 맹수의 눈빛을 짙게 뿜어내어 상대의 급소를 훑어가던 챔프가 종내 그의 시선을 상대의 명치에 고정한다.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적의 눈빛과 교차한 오까고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패배감을 감지한다. 몸의 균형을 잃은 상대의 복부는 근력이 이완되어 전신에서 가장 취약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또한 앞으로 몸을 숙여 있는 자신에게 있어서 상대의 복부는 자연스런 각도의 펀치로 가장 큰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부위였기 때문이다. "퍽!" "헙!" 그토록 큰 거구의 덩어리가 짧은 명치 한방에 아래로 식어 내린다. 배를 움켜잡고 내려와 다시 펀치의 사정권에 들어온 오까고마의 얼굴을 향해 규호의 좌우 펀치가 예각으로 섬광을 일으킨다. 관자놀이와 인중 등 안면을 무차별로 타격당한 오까고마가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무게의 머리를 바닥으로 가져간다. 오까고마가 앞에 놓인 규호의 발목을 잡아 애써 움켜쥐더니 곧 기운이 풀려 버린다. 사자의 용맹 앞에 제물이 된 들소의 마지막 호흡이 힘겹게 빠져 나온다. 규호도 긴장이 풀린듯 힘빠진 다리에 잔잔한 떨림이 전해져 온다. "생애 최강의 상대였다. 이런 사람이 나이 마흔이라니..." 믿기 힘든 상대의 실력과 나이를 감안하여 규호는 청년 시절의 오까고마를 외경심으로 감상한다. "오까고마의 명예는 한 점 훼손되지 않은 채 그 아성은 여전히 공고하다. 비록 내가 오까고마를 꺾었다고는 하지만 청년 오까고마의 담을 뛰어넘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건물을 벗어난 네 사람이 도로가에 세워 둔 박 주임의 차에 오른다. 그들의 차가 히데오의 연구소에서 자취를 감출 무렵, 여러 대의 경찰 백차가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일행은 경비행기가 숨겨진 섬을 향해 새벽녘 동이 틀 때까지 먼 길을 나아간다. 그 와중에 긴 신음을 토한 히데오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자 박 주임이 긴급할 때 사용하는 최면제를 히데오의 얼굴에 뿌려 다시 잠재워 버린다. 그것으로 히데오의 의식은 끝이었다. "배 동지, 히데오가 깨어나기 전에 일을 처리합시다." 히데오가 깨어나면 여러모로 주변 상황이 곤란해질 것 같은 생각에 한금이 규호를 재촉한다. 냉철한 이성적 대의로써 나라와 겨레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규호와 달리 젊은 유학 시절에 돈독한 우정을 나눈 친구를, 대의를 명분으로 어긋난 욕망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친구를 가벼운 충고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몰고가는 자신의 입장이 못내 괴로워 보인다. 국가의 큰 일을 다루는 지위에 섰던, 아니 사실상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 한금의 입장에서 냉엄한 이성만을 요구하는 직책은 히데오를 적으로만 간주할 뿐 지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번에 일본에 오기 전, 직속 상관에게 사직원을 제출하여 공인의 지위를 버렸다. 청와대 직원으로서 이 일을 수행해서 빚어질 부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국가와 국민에게 큰 짐을 안기게 될 것이므로 미련 없이 사인의 지위를 택하였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원하면 복직을 시켜주겠다는 실장을 뒤로 하며 한금은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다. “남보다 좋은 기회를 부여해 준 조국을 위하여 대의를 행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숙명의 과업일진저......” 한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규호가 고개를 돌려 창밖 바다를 내려다 본다. 박 주임이 히데오를 끌고 기문으로 다가간다. "히데오, 잘 가게...!" 차가운 바람이 폭풍의 핵과 같이 기내를 휘감아 도는 사이 급변한 기내의 공기도 의식치 못하고 잠들어 있는 히데오를 검은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킬러가 아닌 이상, 크나 큰 대(大)를 위하여 지극히 작은 소(小)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국가적 사업을 하는 그들이지만 살인의 현장에서 숙연해지는 감정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는 듯 어깨를 들썩인다. "이번 사건을 일본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박 주임이 분위기도 바꿀 겸 두 사람을 향하여 말을 건다. "글쎄요, 자국의 국내 문제로 다루지 않을까요? 우리가 비밀리에 출입국한 것도 모두 그것을 노려서 한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글쎄요, 아들 히데오의 죽음을 당한 다나까 1세가 가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데오는 공식적으로 실종 처리가 됩니다. 히데오의 사망은 우리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므로 다나까 1세는 자신의 아들을 거론하여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떤 구실도 만들지는 못합니다. 지난 번 재일동포 청년들의 테러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명확한 물증이 없는 한 의혹만으로 우리에게 트집을 잡을 수는 없죠. " 조종에 열중인 한금의 시선이 물결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흔들리는 눈빛을 시야에 펼쳐진 흰 구름 속으로 숨긴다. 한금의 감정을 짐작하는 세 사람이 어느덧 침묵으로 돌아간다. 아침 햇살에 은빛 광채를 반사하며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의 뭉게구름 속으로 하얀 동선(動線)이 묻혀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