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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가는 길
(2003년에 다녀온 뒤 쓴 글입니다. 다소 내용이 오늘 시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입장료,,지금은 입장료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그리 세상이 바쁜지 산에 간 지 꽤 오래, 근 몇 년이 흘렀다. 물론 절을 자주 가기에 산도 자주 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나다니기 시작한 것은 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산이 있는 곳에 절이 있고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보니 그렇게 중심이 절로 이동하게 되고, 근 몇 년 사이에는 산보다는 절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갑자기 산이 그립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번 사찰 기행은 산행을 겸하고자 설악산 봉정암을 참배하기로 하였다. 봉정암 가는 길은, 오색으로 올라가서 대청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길도 있지만, 여름철이고 해서 보통 많이 가는 백담사를 거쳐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서울에서 설악산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새 길이 다 개통된 것이 아니었다.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고 아예 진행되지 않은 곳도 있다. 그래도 이미 새로 난 길과 우회로 때문에 그 전보다는 빨리 용대리에 도착하였다. 산이다. 얼마 만인가.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백담계곡으로 향하였다. 처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매표소. 국립공원 입장료, 문화재 관람료, 도합 2600원. 이곳은 조계종 신도증도 인정되지 않는다. 늘 매표소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씁쓸하다. 국민 복지 차원에서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입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백담계곡은 물살에 다듬어진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굽이쳐 흐르는 물길로 처음부터 ‘과연 설악산이구나’ 하는 감탄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대부분 입구에서 순환버스를 타고 그곳을 빠르게 지나치게 되니, 그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다. 편한 만큼 좋은 것을 놓치는 셈이다. 우리 역시 버스를 타고 가기에 마찬가지지만,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왼쪽 좌석에 앉아 계곡을 내다본다. 곧 버스는 정류소에 도착하고, 이제부터 걸어가야 한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으며 걷노라면 야릇한 산 기운이 몸에 퍼지는 것 같다. 이윽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인다. 그 동안 비가 많이 오지 않은 것인지 계곡 물의 양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전에 보지 못했던 ‘내설악 백담사’라는 편액이 붙은 커다란 일주문이 나타난다. 크기도 하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 눈앞에 보이니, 미리부터 백담사의 변화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물론 몇 년 전에 왔을 때에도 백담사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를 증명하듯이 곧 이어서 나타나는 백담사 안내문은 한 눈에 백담사가 크게 변모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80년대 후반 내가 처음 백담사에 왔을 때 겨우 대여섯 채에 불과하였던 전각이 이제 스무 여 채가 되어 있다. 전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오늘날 백담사에 왔다면 그때처럼 허허벌판에 놓여있는 허름한 백담사를 보고 서러움에 그렇게 눈물도 흘리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백담사가 이렇게 변화를 겪은 것도 전 대통령이 머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백담사사적기 등에 의하면, 백담사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한계령 근처였다고 한다. 647년 자장율사가 한계령 근처에 한계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한 뒤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장소와 이름을 바꿔가며 중창을 계속하다가 결국 1783년(정조7년) 지금의 위치에 백담사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거듭되는 화재에 고민하던 스님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노승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백 번째 웅덩이(潭) 옆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단다. 스님은 그 꿈대로 절터를 잡아 절을 중건하고 절 이름도 ‘백담사(百潭寺)’라고 하였으니. 그 뒤 오랫동안 화재가 없다가 그 영험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1915년 겨울 화재가 나서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범종까지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백담사의 불사는 옛 모습을 찾으려는 것일 수도 있는데, 현 백담사를 대하는 나그네의 마음이 선 듯 흐뭇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왜 일까. 안내판 오른쪽으로 수심교(修心橋)가 나타나고, 저 멀리 백담사 경내가 보인다. 저 건너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전각이 서있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운 것이다. 사격을 맞추기 위해 앞서 일주문부터 금강문, 그리고 다음 사천왕문으로 이어지게 불사를 했나 보다. 새로운 것에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나그네도 아니지만 새로운 것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인지, 수심교 다음에 현재의 금강문이 보이는 것 보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현 사천왕문)이 바로 보이는 것이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사실 현 구조 때문에 금강문 뒤에 있는 솟을삼문은 옛보다 그 멋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옛날 기억으로는 그 솟을삼문이 나그네에게는 백담사의 얼굴처럼 기억되고 있는데. 절 마당에 들어서니 정면에 삼층석탑이 보이고 그 뒤로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 안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잠시 자리에 앉는다. 협시보살과 함께 본존불 아미타부처님은 나그네를 내려다보시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신도들의 단체 기도 접수가 이어지자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법당 주위를 돌다 법당 현판을 올려다보니 ‘극락보전’이라는 글자 끝에 ‘全斗煥印’ ‘日海’ 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전 대통령이 머문 화엄실과 더불어 나그네에게 묘한 느낌을 던져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가하시고 ‘님의 침묵’을 쓰신 만해 스님도 함께 겹쳐져 그 생각이 더욱 묘해진다. 마치 풀리지 않는 역사의 현장에 있는 듯 하다. 모두들 역사에 맡긴다고 하는데, 역사는 훗날 무엇이라고 말할까. 법당 뒤에 있는 산령각으로 간다. 조그마한 공간, 불단에 여러 공양물과 함께 소주 한 병이 놓여 있는 것이 재미있다. 그곳에 들어가 예를 올리고 절을 내려다본다. 오른쪽으로 기도객들의 숙소가 보이고 왼쪽으로 법당과 화엄실, 범종각이 보인다. 그리고 거대한 산세가 온 도량을 감싸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옛 모습(?)과 사격을 갖추기 위해 여기 저기 불사한 오늘날의 백담사, 세월이 흘러 제자리를 찾으면 좀더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들이 되겠지. (계속)
불교 용품 판매점을 지나 계곡에 이른다. 소원을 빌며 세운 돌탑들이 계곡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 큰물이 한번 지나면 무너질 돌탑. 마음에 새긴 서원만큼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계곡을 건넌다. 산길을 들어서자 곧 백담산장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몇 년만에 와 본 길이지만, 변한 것이 거의 없다. 이제 5시를 훨씬 넘어가고 있지만 수렴동산장까지만 가면 되니, 오히려 마음은 느긋하다. 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가는 기분. 괜히 바쁜 척 한 삶에 대한 반성이 든다. 익숙한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길을 걸으니, 곧 영시암이 나온다. ‘문수도량 영시암’. 영시암은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이다. 그것도 절 마당이 길이고 길이 절 마당이기 때문에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바쁘면 바쁜 대로 물 한 모금 먹고 가게 되어 있는 곳이 영시암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법당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반 배의 예를 올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몇 년 전, 이곳은 같이 불교 공부하던 후배가 행자 생활을 하며 지내던 곳이다. 언젠가 그 후배가 행자 생활을 할 때 이 시간 무렵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혹시 행자 생활에 누가 될까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 행자의 뒷모습만 멀리서 보고 길을 떠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저 멀리 강원에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으니. 가을에 그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 때 한 번 올까 마음을 낸다.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물이 있는 곳으로 가니 ‘세심수(洗心水)?’라고 적혀 있다. 마음을 씻는다. 만약 이 물 한 모금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낼 수 있다면, 그런데 이 몸은 배가 터지도록 마셔도 아직은 그 때를 씻어내지 못할 것 같으니. 그 자비하신 가르침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그곳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조그마한 물방아이다. 한 쪽에 물이 차면 내려갔다가 곧 물이 쏟아진다. 그러면 다른 쪽이 무거워져 그 힘으로 방아를 찧는다. 크기는 두 뼘 정도 되는 것이 앙증맞다. 누구의 손재주인지 모르지만, 길가는 나그네에게 잠시나마 미소를 짓게 해준다. 다시 길을 떠난다. 곧 오르막이 나타나고 이어서 갈림길이 나온다. 계속 올라가면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비스듬이 빠지면 수렴동을 통해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다. 당연히 오른쪽 길을 택한 우리는 계곡이 나오자 또 휴식을 취한다. 여름이라 아직도 날이 밝다. 계곡에는 중지(中指)보다 큰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보살이 과자를 던져주자 수십 마리가 모여든다. 보살은 어린이 마냥 신나는 표정이다. 나도 덩달아 어린아이가 된다. 나 비록 죽은 고기를 먹고 산 고기를 배설할 능력은 없으나 이처럼 산 고기와 함께 할 수 있는 여유는 있으니. 함께 동행한 보살이 고맙다. …. 간밤에는 제대로 잠을 잔 것 같지 않다. 평소와 달리 산장이 다소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찍 아침 식사를 한 뒤 7시 경 구곡담 계곡을 따라 봉정암으로 향한다.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반짝거리고 계곡은 그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시고 반짝거린다. 그 광경은 길가는 나그네를 또 한번 쉬게 만든다. 계곡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앉으니 눈이 부신다. 정토세계는 이보다 더 찬란할 터인데. 이 몸으로 정토에 가더라도 눈이 부셔 제대로 있지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저렇게 2시간 정도 걸어 드디어 깔딱 고개에 이르렀다. 보통 신도들이 봉정암을 찾을 때는 용대리에서 하룻만에 봉정암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깔딱 고개 앞까지 최소 7시간을 계속 걸어온 셈이다. 그래서 거의 체력은 바닥이 난 상태이고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또 급경사의 고개를 만나니, 그곳을 오를라치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고 마음도 깔딱깔딱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개만 넘으면 거의 목적지는 다 온 셈이니. 참으로 적당한 곳에 있는 고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곳에서는 온 길이 아까워서라도 그리고 다시 돌아가자니 아득하기 때문에 고개를 넘게 되지만, 세상에서는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나그네 역시 힘을 다해 고개를 오른다. 저 번과 다르게 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곧 고개 마루에 선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자바위에 오른다. 이곳은 그 동안 힘든 여정이라 알아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내가 걸어온 계곡을 가운데 두고 서북능과 용아능이 눈앞에 펼쳐진다. 잠시 천계(天界)의 감흥을 느끼고 다시 길을 떠난다. ‘봉정암’ 드디어 봉정암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도 나그네를 먼저 맞이하는 것은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와 또 다른 불사 현장이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늘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부처님 계신 곳은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리라는 생각에 비록 힘든 길을 오느라고 피곤하지만, 단숨에 보궁으로 향한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한 곳, 봉정암 적멸보궁. 이곳 사리탑은 별도의 기단부가 없고 산 전체를 기단부로 하였다. 나그네가 처음 경주 남산에 갔을 때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안내하던 선배가 용장사지 석탑은 별도의 기단부가 없고 산 전체를 기단부로 하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탑(해발400미터정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런 논리로 하자면 이 봉정암의 사리탑(해발1,244미터)이 더 높다. 그것도 3배나 높다. 또 이런 논리대로라면 더 높은 탑이 있으니 그것은 지리산 법계사 삼층석탑(해발1,400미터)이다. 산 전체를 기단부로 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불국토사상이 재미있다. 처음 왔을 때는 그냥 자연석만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주위에 대리석으로 장엄하여 신도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뜨거운 햇볕에 바닥이 따뜻하다. 방석을 가지고 와서 삼배의 예를 올리고 잠시 자리에 앉는다. 탁 트인 곳에 위치한 적멸보궁. 저 멀리 산능선이 부처님께 예를 올리며 달려오고, 바람과 구름이 우요삼잡의 예를 올리며 사리탑 주위를 맴돈다. 역시 마음이 평온하다. 이 한 순간을 위해 나그네는 그 멀리서 무거운 짐을 지고 왔는가 보다. 왜 늘 멀리서 이곳까지 와야 하는지. 그리고 늘 이곳에서 생각하는 것 하나. 보름달 휘영청 뜨는 날 이곳에서 기도하리라. 오늘도 그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처럼 적멸보궁에서 와서도 생각이 많으니, 나라는 놈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그래도 조오타. 카아.
(법사회보 2003년 7,8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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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보관하고파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