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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同行)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까지...
임창선(11분회), 박상조(48분회), 오예준(51분회) 3인의 러시아 여행기
#1 2014년 8월 7일 10:10 AM 인천공항
세 남자는 동쪽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자 동쪽으로. 이는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의 말뜻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긴 여정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한국을 출발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 간 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5시간을 달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Irkutsk)에 도착, 자동차로 반나절을 달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바이칼 호수, 그 속의 알혼 섬에 다녀오는 일정이다. 일정만 상기해도 압도가 되고 가슴이 떨리는 준비과정이었는데, 그 여행의 첫 걸음은 어떠했으랴.
#2 세 선후배
여행을 기획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우리 돌아오는 여름에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우리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 관악구에 위치한 신림 복지관에서 어르신 목욕과 빨래 등의 일손을 덜어드리는 송우회 봉사활동을 해오며 돈독해진 사이였다. (송우회 봉사활동은 2008년 3월 태안 기름유출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올 8월로 72차를 맞는다.) 나이로는 아버지-아들들 뻘인 선후배지간이지만, 몸으로 함께 부대끼며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온 동료가 되었다. 여느 날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점심을 함께 먹던 어느 토요일, 우리는 돌아오는 여름에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는 거야. 무엇이 있을까 떠오르지 않지만, 한번 떠나보는 거야. 인생에서 한 번 뿐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3 블라디보스톡(Vladibostok)
인천에서 떠난 비행기는 4시간을 날아 안착했다. 블라디보스톡은 한국보다 서늘하고, 습하지도 않은 날씨였다. 우선 한인 민박집에 여정을 풀었다. 그곳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평양관이라는 북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처음 북한 직원들을 만난 순간은 설렘과 호기심이 뒤섞인 마음이었지만, 이내 생김새와 말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바다 너머로 자취를 감춘 자정 무렵, 민박집 차창 밖으로 블라디보스톡의 항구가 색색의 불을 켜고 있었다.
이튿날, 블라디보스톡 시내 구경을 했다. 오후 7시 이르쿠츠크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전까지 우리에겐 하루 동안의 시간이 있었다. 처음 들른 곳은 블라디보스톡의 항구. 그곳을 보노라면, 양쪽의 육지를 잇는 거대한 다리 밑으로 수많은 컨테이너와 크레인 그리고 선박들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는 모양이다. 그 사이로 빠른 유속의 물이 흐르는데, 그래서 섭씨 30도 이하에서도 얼지 않는 이 부동항(不凍港)에는 연시 움직임이 활발했다. 항구 앞에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 그리고 그 앞에 이들을 기리는 1년 365일 밤낮으로도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 100년 전, 우리 민족 슬픈 역사의 현장
블라디보스톡 중심에 모여 살았던 한인들의 마을. 신한촌. 이곳은 이제 비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곳이 신한촌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903년 이곳에 거주했던 우리 동포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영문도 모른 채 열차에 올라 중앙아시아에 짐짝처럼 내동댕이쳐졌다. 오늘날, 우리 동포들이 거주했던 곳에 남아있는 작은 공원과 비석을, 한 고려인의 후손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영화 <왕과 너>의 배우 율 브리너가 태어난 집을 들렀다. 까까머리 멋쟁이. 그리고 극동 연방대학에 갔다. 이곳은 2012 APEC 개최를 위해 조성된 곳으로, 모든 건물이 크고 화려했다. 그 규모에 압도가 될 정도였다. 학교 한편에 해변이 있다니.
#4 19:10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9288.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의 한 켠에 자리한 동상에 새겨진 이 숫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길이다. ‘92세까지 팔팔하게 살자.’ 라고 한국 사람들은 쉽게 외운다고. 가늠하기 어려운 그 거대한 기찻길의 시작점에 우리가 섰다. 비록 우리는 거리상으로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이르쿠츠크까지 까는 일정이지만, 이만해도 73시간 20분에 이르는 기나긴 일정이었다. 슈퍼에서 3박 4일간 필요한 물과 간식을 구매하고, 우리는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창밖으로는 끝없는 초지와 산림, 강이 보였다. 흰 옷을 입은 자작나무. 푸른 들판. 그 거대한 땅을 보며 러시아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진 나라인지 짐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넓은 땅 속에서 무엇이 있을지조차 모를 정도니. 열차는 계속 달렸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우리의 공간은 정지한 듯 고요했다.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상황, 고민, 꿈, 학창시절 이야기, 갖가지 무용담에서부터 오늘날의 정치, 역사 그리고 연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었다. 단언컨대, 이번 여행의 정수는 시베리아를 가로지는 열차 속의 3박 4일간의 동행이리라.
#5 바이칼
어느덧 오른쪽으로 차창 밖으로 푸른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개를 내어보니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 순간, 머릿속의 그것과 눈으로 보는 것이 만나며 뇌리를 스친다. 아 바이칼. 뜬 눈으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이칼 호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이르쿠츠크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지나간 3박 4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6. 이르쿠츠크 역
드디어 기차에서 내렸다. 73시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그 기분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이동 시간이 3시간 정도만 넘어가도 지겹고,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 정도는 가볍게 여행할 수 있다는 여유도 생겼다. 기차에서 내려 지하 통로를 나오니 그린 애플 아이스크림처럼, 진하진 않지만 은은한 녹색으로 칠해져있는 이르쿠츠크 역이 우리를 반긴다. 동시에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 줄 가이드까지 있다. 내일은 또 어떤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니 잔뜩 기다려졌다.
#7. 델타호텔
이름은 비록 델타이지만, 우리에게는 알파처럼 느껴졌던 호텔이다. 이르쿠츠크의 대표적인 호텔은 앙가라 호텔이라고 따로 있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집처럼 느껴진 호텔이었다. 우리를 반겨주는 데스크 직원의 미소를 당분간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미숙한 영어로 반기는 그녀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앞으로 우리가 즐길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시간이 재밌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깨끗한 화장실, 푹신한 침대, 따뜻한 물. 우리의 여독을 풀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와이파이까지 잘 터진다! 깨끗이 씻고 침대에 누워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으니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8. 평양식당
블라디보스톡에서 먹었던 북한 음식의 담백한 맛을 잊지 못해 우리 세 사람은 이르쿠츠크에서도 북한 식당을 찾았다. 알록달록 한복을 입은 북한 직원들의 옷차림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북한 여인들만의 순수함이랄까. 음식 맛도 맛있었다. 특히 만두와 김치찌개가 일품이었는데, 심심했던 블라디보스톡의 북한 식당과는 다르게 간이 조금 더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 짜지 않았고, 심심하게 간이 배인 담백한 맛이었다. 7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와서 그랬는지 우리 일행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먹어치웠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에너지를 앞으로 남은 일정에 모조리 쏟아 붓는 것이다!
#9. 알혼 섬으로 가는 길
그러나, 알혼 섬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예정 시간에 오기로 했던 차가 늦게 온데다가 차 자체가 좁아서 다리를 거의 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알혼 섬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넓은 초원과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알혼 섬 선착장까지 도착하는데 약 6시간 정도 걸렸는데,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보고 있자니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늘 빽빽한 일상에 치이거나, 작은 글씨를 읽는 것에 익숙해있던 우리에게, 특별한 무언가는 없지만 나무들과 풀을 뜯는 소들이 있는 초원은 훌륭한 위로가 되었다.
#10. 알혼 섬 도착 그리도 디마's 하우스
6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우리는 마침내 우리 민족의 발원지인 알혼 섬에 도착했다. 간간히 나무 몇 그루와 바위더미가 보이는 알혼 섬의 경치는 딱히 다른 꾸밈이 필요도 없었고, 그것을 묘사해줄 특별한 말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 자체로 원시적인 자연을 담고 있었으며, 그저 알혼 섬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듯이, 러시아인들에게 알혼 섬의 자연도 마치 힘들 때마다 찾아 그 고요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소위 “힐링”하며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다시 돌로 뒤덮여있는 거친 비포장도로를 1시간 반 정도 가자 드디어 우리가 묵을 숙소가 나왔다. 우리가 묵을 숙소에서는 한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이들은 매우 친절했다. 러시아에서는 영어가 통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이드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여행하는 본인이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야 편한 곳이라 우리들도 그동안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디마라는 이름을 가진 18살 소년이 영어를 하면서 우리를 맞아주어 정말 반가웠다. 이 디마라는 소년은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디마 덕분에 맛있는 저녁도 먹고 그의 어머니에게 필요한 이것저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딜 가도 좋은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는 것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11. 알혼 섬 구석구석
디마의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과 우리가 챙겨간 여러 반찬으로 배를 채운 우리는 드디어 본격적인 알혼 섬 투어에 나섰다. 우리는 10명 정도 탈 수 있는 승합차에 다른 러시아인들과 함께 타게 되었는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갈 곳에 대해 그들이 설명을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우리 앞에 있던 한 금발의 남자 외국인에게 “Do you speak English?”라고 묻자, 이게 왠일인가! “Yes, I do."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 분은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었는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인 친구 ”세르게이“와 함께 알혼 섬에 여행을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인 가이드가 먼저 이야기를 하면, 세르게이가 데이빗에게 독일어로 이야기를 하고 이후에 데이빗이 영어로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려서 설명을 듣곤 했다. 이 장면은 꽤 재밌었는데, 같이 온 러시아 사람들도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데이빗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줄 때마다 키득키득 웃고는 했다.
본격적인 알혼 섬 투어를 시작하자 우리는 알혼 섬의 광활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군데군데 있는 나무들,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까지 정말 있는 그대로 자연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알혼 섬이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와 큰 바위, 바다와 절벽밖에 보이지 않는 알혼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자연을 믿고, 숭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건이나 끈을 매며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나무들이 많이 보였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서낭당을 방불케 했다. 알혼 섬에는 실제로 샤먼(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간 날은 그 행사가 없는 날이라 아쉽게도 볼 수는 없었다. 알혼 섬의 자연은 모든 곳이 아름답고 기억에 남지만,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면 아들과 딸을 낳게 해준다는 절벽이었다. 두 갈래로 나뉜 이 절벽은 왼쪽으로 가면 딸을, 오른쪽으로 가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었다. 아직 아빠가 되지 않은 상조형과 나는 모두 첫째를 아들, 둘째를 딸로 낳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처음에는 오른쪽 절벽, 두 번째로는 왼쪽 절벽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이 절벽이 진짜 효험이 있는지는 나중에 아빠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
#12. 알찬 여행 뒤의 반야(Banya)
여행을 오기 전에 우리가 조사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러시아식 사우나인 반야(banya)였다. 여행을 한 뒤에 피곤한 몸을 반야에서 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마침 디마하우스에 반야가 있었다. 9시간에 걸친 알혼섬 투어와 장시간의 이동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고 노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야를 체험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우나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 반야는 말 그대로 정말 뜨거웠다. 공간이 좁기도 했지만, 나무의 화력을 무시하고 너무 높은 온도를 요청해버린 탓에 우리는 “짧고 굵게” 들어갔다가 나왔다. 짧은 시간 안에 있었지만 반야 안에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고, 그동안 여행을 하며 쌓였던 피로감이 싹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가 워낙 영토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여행의 많은 시간을 이동하는 데 사용했던 우리들에게는 꿀같은 휴식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디마가 선물로 준 맥주 한 병은 화룡정점이었다. 뜨거운 사우나 속에 있다가 먹는 맥주 한 잔은 그 어느 때 먹었던 맥주의 맛보다 맛있었고, 디마의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식사를 배부르게 먹었는데, 이 둘의 조합은 수면제만큼이나 강력했다. 지친 몸을 회복한 우리일행은 바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13 알혼 섬에서의 마지막 날, 이르쿠츠크의 신사동 가로수길
디마네 식구들과 아쉬운 이별을 한 우리 일행은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사람들이 있는 알혼 섬을 떠나려니 괜히 아쉽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여운이 남는 걸 보면 알혼 섬이 우리에게 주었던 감동이 크긴 컸던 것 같다.
선착장에서 다른 한국인분들과 이야기를 만났는데, 괜히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에서 한국인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분들과 그간 러시아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우리를 본토로 실어준 배가 도착했고, 선 건너 편에 도착한 우리들은 차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덜컹거리더니 도로 변에 멈추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차가 고장난 것이었다. 하지만 운전 기사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지 본인이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지나자 우리와 함께 차에 탔던 러시아 여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급한 일이 있었는지 러시아 여인들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한 여자아이는 화를 내는 엄마를 말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보다 못한 한 남성이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와 차를 살펴보더니만 시동이 걸렸다.
6시간 정도 지나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호텔에 얼른 짐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그동안의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르쿠츠크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임창선 선배님의 호의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서 시원한 맥주와 스테이크를 먹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화도 시킬 겸, 이르쿠츠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이르쿠츠크 시내는 우리가 봤던 이르쿠츠크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머물었던 호텔이 있던 곳은 조금은 시골 느낌이 나는 곳이었는데, 이르쿠츠크의 시내는 카페도 많고 백화점도 있고, 여느 나라 도시만큼이나 발달되고 즐거운 젊음의 열기가 불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카스트로라는 카페가 눈에 띠었는데 우리들은 더위를 피하고자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디자인이 눈에 띄는 이 카페에서 우리는 시원한 과일 스무디를 먹으며, 알혼섬에서의 추억을 되새겼다.
#14.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투어, 그리고 인천으로
전날 이르쿠츠크의 젊은 열기를 느낀 우리는 부푼 가슴을 안은 채 이르쿠츠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여행을 가면 멋진 자연환경도 좋고, 멋진 건물도 좋지만 가장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매번 느끼는데, 이르쿠츠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르쿠츠크의 시내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봤던 여러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전화를 하면서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들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하게 보였고, 그런 모습들이 나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블라디보스톡에 이어 들린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말 그대로 감동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서유럽이나 이탈리아, 프랑스에 있는 성당들처럼 장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들의 신앙심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성당 내부를 빼곡하게 채운 성모자상과 여러 성인들의 초상화, 성당을 밝힌 촛불 등의 모습은 비신자들이 봐도 감동할 정도로 은은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어려움과 소망을 고백하고, 가족과 친구들 등 주변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봤던 그들의 모습 역시 마음 한 켠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비록 거대한 교회가 많지 않고, 성대한 예배나 미사가 없어도 소박하게 자신들의 종교 생활을 영위해나가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성당 관람에 이어 간단하게 기념품을 산 후 우리는 유람선 관광에 나섰다. 이르쿠츠크의 경치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아보자는 취지에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유람선 위에 서서 이르쿠츠크의 전경을 보고 있자니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은 피해갈 수 없었다. 한식당으로 들어간 우리는 점심에 중국음식을 맛있게 먹었는데도, 반가운 한국음식을 먹으니 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다. 많이 걸어다녀서 그랬는지 먹고 또 먹었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후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우리는 이르쿠츠크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8월 16일 아침 7시 우리는 다시 인천에 있었다.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번 동행은 여러모로 의미가 많다. 세대를 뛰어넘은 선후배 간의 이번 여행은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선후배 간의 정을 다시 한 번 돈독하게 할 수 있었고, 여행을 다니면서 가슴 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소위 말하는 “힐링”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선배들과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내게는 여름이 그 어느 여름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