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거지 -위의 것을 걷어 내어 '웃걷이'- "나 우거지국 하나 주이소." 음식점에서 이렇게 주문을 해서 나온 상에 국그릇을 보면 진짜 우거지 인상을 쓰게 된다. 이건 우거지국이라기보다는 배추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거지국을 시켜서 먹는 이들은 그것이 진짜 우거지국이든 아니든 그렇게 신경쓰질 않는다. 맛이 있으면 그만이다. 아마 그들은 그 우거지국 속의 양념맛에 취해 그것을 우거지맛으로 알고 먹을지도 모른다. '우거지국'이란 우거지를 끓여서 내는 국을 말한다. 이것은 별식도 아니고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먹던 음식은 더욱 아니다. 우거지. 이 말은 원래 '위에 있는 것을 걷어 낸다'고 해서 '웃걷이'라고 했던 것이 변한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말로는 '우거지'가 표준말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푸성귀를 다듬을 때에 골라 놓은 겉대' 또는 '새우젓 따위의 위에 있는 품질이 낮은 것'이라고 풀이해 놓고 있다. 김치를 담글 때, 양념을 잘 한 진짜 김치는 안에다 차곡차곡 담고 그 위에 배추같은 것의 겉대(우거지)를 적당한 두께로 얹어 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나중에 항아리 속의 김치가 우거지 밑에서 아주 맛있게 익는다. 그야말로 매우 과학적(?)인 발효 음식이 되는 것이다. 항아리 속의 김치를 잘 익게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 그 위에 덮은 우거지. 바깥의 찬 공기를 막아주어 주인공(김치)의 연기(발효)가 기차게 되도록 엑스트라 구실을 아주 단단히 하는 것이다. 이 우거지는 김치가 다 먹어 없어질 때까지 항아리를 지켜준다. 그리고 나선 그냥 버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쯤이면 곰팡이옷을 잔뜩 뒤집어 쓰고 말라 비틀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는 우거지. 그러나 배고픈 시절엔 이것도 좋은 국거리가 되었다. 곰팡이를 헹궈내고 물에 담가 조금 썩은내 비슷한 냄새를 빨아 낸 뒤 이것을 된장 등의 양념과 섞어 끓이면 그런대로 먹을 만했던 것이다. 조금은 퀴퀴하고 조금은 쌉쌀했지만 그 문들문들하는 채소 줄거리를 씹을 때의 맛을 지금도 옛 어른들은 잊질 못한다. 그래서, 지금의 음식점에서도 우거지국이 차림표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에 먹던 그 진짜 우거지국을 팔고 있는 음식점이 몇이나 될지? ==================================================== □ 도로묵 -은어로 격상되었던 기구한 고기이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여나믄 날을 피난지 광주 남한산성에서 갇혀 지내던 인조 임금에게 어느 날 이상한 물고기가 신하에 의해 바쳐졌다. 이 물고기는 잘 요리되어 임금 상에 올려졌다. "꽤 맛있는 물고기로구나! 이 물고기 이름이 뭐냐?" 질문을 받은 신하는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 "묵이라고 합니다." '묵'은 그 당시에 불리던 그 물고기의 이름이었다. "묵이라? 거 이름이 과히 좋지 않구나. 이렇게 맛도 좋고 모양도 괜찮은 고기가 '묵'이라니?" 이렇게 해서 임금의 뜻에 따라 '묵'이란 이름의 이 물고기는 다른 새 이름으로 바뀌어졌는데, 새 이름은 '은어'였다. 은백색의 배를 가진 물고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청나라와의 화해에 의해 병자호란이 끝나, 청나라 군대가 모두 물러가고, 다시 서울 대궐로 들어와 정사(나랏일)를 보게 된 임금은 피난지 남한산성에서 먹던 그 물고기 생각이 나서 그것을 구해 상에 올리라 하였다. 상에 올려진 그 '은어'라는 물고기를 들고 난 임금이 피난지에서 먹던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게 정말 그 '은어'라는 물고기냐?" "예, 틀림없사옵니다." "정말 전에 '묵'이라 했던 그 물고기가 틀림없는가?" "예,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어째 이리도 맛이 없느냐? 옛날 산성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닌데 ." 임금은 과연 맛이 없는 고기라면서 새 지시를 했다. "아무래도 '은어'라는 이름은 맛으로 봐서도 마땅치 않구나.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이 말을 들은 신하는 임금이 그 물고기 이름을 '도로묵'이라고 한 줄 알고 나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했다. 이래서 이 물고기 이름은 '묵'도 아니고, '은어'도 아닌 '도로묵'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도루묵'이란 표준말로 정해졌다. * 도루묵: 도루묵과에 딸린 바닷물고기. 비늘이 없고 입과 눈이 크며, 몸의 길이는 15cm쯤 되고, 황갈색에 불규칙한 회갈색의 얼룩무늬를 한 등에, 은백색의 배를 가졌다. 동해에서 많이 난다. □ 개장국 -개고기를 된장국에 끓여 뚝배기에 담아낸 게 원형- 보신탕, 영양탕, 사철탕, 멍멍탕, 삼복탕, 한 음식을 두고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요즘에 와서 많이 찾고 있는 보신탕. 이젠 그 많은 이름만큼이나 요리 방법도 다양해졌고 먹는 이의 층도 늘어났다. 한때는 외국인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해서 이 보신탕 영업을 단속하는바람에 숨어서 영업을 했던 음식점들 그들은 '보신탕' 간판을 달 수 없게 되자 '사철탕'이나 '영양탕' 같은, 국어 사전엔 있지도 않은 말로 간판을 바꿔 달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즐기는 이들은 간판이 바뀌어도 그런 곳을 잘도 찾아들었다. 이래서 사전에도 없는 새 낱말이 생기게 되었다. 전에는 이를 '개장국'이라 했다. 개의 고기가 주된 재료인데도 이를 '개고기국' 또는 '개국'이라고 하지 않고 '개장국'이라 했다. 지금은 요리 방법이 많이 달라졌지만, 전에는 개고기를 된장국에 넣어 끓였다. 즉 개고기를 슬쩍 삶아내어 된장국에 고춧가루, 파, 마늘, 새앙 등의 양념을 넣어 푹 끓여 뚝배기에 담아 내는 것이 개장국이었다. 주된 재료가 개고기이지만 된장국에 넣어 끓였기 때문에 '개'와 '장'이 들어간 '개장국'이다. 더 쉽게 얘기해서 장국은 장국인데 개고기가 들어간 장국이란 뜻이다. 그래서 한자로는 구장(狗醬)이라고도 했다. 예부터 초여름 삼복 때 이를 즐겨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특히 원기가 부족한 병자에겐 좋은 보약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이를 보신탕(補身湯)이라 한 것이다. 또 지양탕(地羊湯)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누런개(黃狗)를 상등품으로 여겨 와서 개고기를 즐기는 이들은 이런 개들을 길가에서 보기만 해도 침을 질질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개장국. 이젠 이런 간판을 단 영업집이 없다. 이 말을 쓰는 사람도 없다. 또, 옛날처럼 된장국에 끓여내는 집도 별로 없고, 이를 뚝배기에 담아 올리는 집도 보기 어렵다. 지금의 멍멍탕은 그 옛날의 된장 냄새 풍기는, 투박한 뚝배기 속의 '개장국'은 아닌 것이다. 개장국. 진짜 그 '개장국'은 이젠 맛도 잃었고 이름도 잃었다. ==================================================== □ 갈매기살 -돼지의 한 부위 '가로막살'이 변해 갈매기고기를 먹으러 가자 했더니 갈매기의 고기도 먹느냐고 했다. 이건 몇년 전 얘기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 이젠 갈매기고기가 돼지 내장의 한 부위의 고기임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그러나, 돼지의 어느 부위가 갈매기냐 하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사람이나 짐승의 뱃속엔 횡격막(橫膈膜)이란 것이 있다. 이 횡격막은 아래위로 움직여 호흡 운동을 돕는 구실을 한다. 뱃속의 가운데를 막고 있다고 해서 한자말로 횡격막인데, 배와 가슴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이 횡격막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 '간막이' 또는 '가로막'이다. 간막이는 간 아래를 막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가로막은 뱃속을 가로(橫)로 막은 막이라 해서 붙여진 말이다. 허파 아래로 비스듬히 휘어걸친, 숨쉬기 운동에 따라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힘살막. 옛날 교과서를 보면 이 부위가 '가로막'으로 표기돼 있다. 이 '가로막'과 '살'자가 합쳐져 '가로막살' 또는 '가로막의살'이 되었는데, '가로막의살'은 이어 '가로마기살' '가로매기살'로 불리다가 결국은 '갈매기살'이 되고 말았다. '간막이살' 역시 '간마기살', '간매기살'로 되다가 역시 '갈매기살'로 된다. 이 고기는 처음엔 누구도 알아 주지 않던 것이었다. 질긴 껍질로 뒤덮인 얇은 근육질의 것을 누가 고기라고 즐겨 먹었겠는가? 그러나, 누군가가 도살장에서 버려지다시피하는 이것을 갖다가 껍질을 벗기고 불에 익혀 팔기 시작하면서 그 독특한 맛에 갑자기 인기가 붙어 이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경기도 성남시 여수동 일대와 마포 등에 전문 요리집들이 많다. '갈매기 원조' '본토 갈매기' 등의 간판을 크게 달고. 이 '갈매기살'은 앞으로 새로 펴낼 모든 국어사전에 정식 낱말로 올라야 할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새로 펴내게 될 큰사전에는 '가로막살'을 표준말로 올리고 '갈매기살'도 올려서 '가로막살의 변한 말'이라고 풀이해 놓을 것이라 한다. 바다 위의 갈매기들이 이젠 좀 안심을 하고 날 수 있을 것이다. ==================================================== □ 설렁탕 -선농단의 '선농탕'이 바뀐 말 '설렁탕집'의 차림표들을 보면 가지각색이다. 어떤 집은 '설렁탕' 또 어떤 집은 '설롱탕'이다. '설농탕'이나 '설넝탕'이라고 써 놓은 집도 있다. 그러나, 이 중의 바른 표기는 '설렁탕'이다. 전에는 이 설렁탕을 한자로 '설농탕(雪濃湯)'으로 적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탕을 한자 뜻 그대로 '눈(설)을 녹여 만든 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설렁탕. 왜 이름이 붙었을까? 밥을 설렁설렁 말아 먹는다고 해서 설렁탕일까? 아니면 설렁설렁 대강 끓여서 내는 탕이라고 해서 설렁탕일까? '설렁탕'이란 낱말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근거가 있고 확실성이 있는 것은 다음의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엔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 해마다 나라에서 제사지냈다. 경칩 절기 후에 돼지날(亥日)을 가려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지냈는데, 이를 '적전지례'(籍田之禮)라 했다. 선농단은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전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자리에 마련했던 단이다. 성종 6년(1475) 음력 정월에 왕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지내고 친경(親耕)을 했으며, 종친 월산대군, 재상 신숙주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함께 밭을 갈았다. ',친경'이란 왕이 몸소 밭을 가는 일을 말한다. 왕은 이 행사가 끝난 후, 소의 내장, 가죽, 뼈 등을 삶아 국말이밥을 만들어 술과 함께 내었는데,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국말이 밥을 '선농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선농단에서 낸 탕의 뜻으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그 다음 해에는 선농단의 남쪽 10걸음 지점에 임금의 밭갈이 구경을 할 수 있는 관경대(觀耕臺)를 쌓고, 선농단에 제사지낸 후에 이 예를 행하였다. 그 후로도 왕의 친경은 가끔 있었고, 순종 황제도 융희 2년 4월 5일에 친경을 하였다. 이 국말이 밥은 그 뒤로 민간 사이에 펴져 나가 좋은 음식으로 자리잡아 갔다. 이 '선농탕'은 그 뒤로 '설농탕'이 되고 다시 '설렁탕'으로 바뀌면서 표준말로 정해졌다. ==================================================== □ 김치 -침채(浸菜)라는 한자말에서 나와 짐채 짐치 김치로 변해 최근 추사 김정희가 그 부인에게 보낸 친필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약식과 인절미가 아깝습니다. 쉽게 온다 하더라도 성히 오기 어려운데 일곱 달 만에도 오고 쉬워야 두어 달 만에 오는 것이 어찌 성히 오기를 바라겠습니까? 서울서 보낸 침채는 워낙 소금을 많이 친 것이라 많이 변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침채에 주린 입이라 참고 먹습니다. " 내용 속에 '침채'라는 말이 나온다. 침채. 어떤 음식일까? '소금을 많이 친 것이라'는 구절로 반찬임을 알 수 있고 '침채에 주린 입이라'는 구절로 늘 먹는 일상 음식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침채. 한자로 쓰면 '침채(浸菜)'이다. 즉 채소를 절였다는 뜻이 되는데, 지금의 '김치'이다. 김치는 지금은 고춧가루.마늘 등의 양념과 새우젓.굴 같은 젓갈을 버무려 고급스럽게(?) 만들었지만, 옛날엔 아주 단순히 만들던 음식이었다. 배추를 잘 씻어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담아 적당히 익은 후에 먹은 것이 바로 김치의 시초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잘것없는 음식으로 생각되지만 겨울철에 채소의 생산이 어려웠던 시절에 있어선 그 철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비타민 공급 음식이었다. 각종 양념이 생산되고, 특히 조선 중기에 고추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이 김치는 지금의 것과 비슷한 음식으로 되었다. 그 때까지도 이름은 여전히 '침채'였다. '침채'는 '짐채'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짐치'로 되었다가 '김치'라는 음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김치는 원래 한자어에서 출발한 음식 이름인 것이다. 한자어에서 출발한 먹거리는 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나온 것이고, '고추'는 '고초(苦草)'에서, '가지'는 '가자(茄子)'에서, '상추'는 '상채(裳菜)'에서 나온 것이다. 또 '김장'은 '침장(浸藏)'이 변한 것이다. 지금도 남부 지방이나 북한 일부 지방에서 김치를 '짐치', '짐채'라고 하고 있어, 김치의 어원이 '침채'임을 짐작하게 한다. 단순히 소금에 절여 먹던 음식인 '침채'는 오늘날에 와선 갖은 양념이 들어가고 그 담그는 방법도 현대화되어서 이젠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좋은 영양 음식 '김치'가 되었다. ==================================================== □ 술 -'수블'이라는 원래의 음. 알타이어·일본어에도 비슷한 말 많아 우리 겨레는 일찍부터 술 만드는 일에 능숙했다. 술밥에 누룩을 섞어 온도만 맞춰 주면 술이 돼 나왔다. 발효 음식에 특별한 재주를 가져서 '누룩'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필요에 따라 술을 빚어 냈다. 곡식으로만 술을 만든 것이 아니다. 포도나 머루 같은 열매로도, 인삼이나 칡뿌리 같은 뿌리로도, 매화나 국화 같은 꽃으로도 술을 만들었다. 심지어 뱀, 개구리도 술의 재료로 이용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술의 재료는 역시 쌀이나 밀과 같은 곡식이다. 그래서 절에 가면 술을 '곡차(穀茶)'라고도 한다. '하늘은 만물을 창조했지만 사람은 술을 만들어 냈다.' 당나라의 두보 시인은 술을 만들어낸 인간을 이렇게 예찬했다. 아니, 술의 예찬이었다. '주신(酒神)은 군신(軍神)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서양의 이 속담은 과음을 경고하고도 있다. 고려의 이규보 문인은 우리의 양조기술이 매우 다양해서 백주(白酒), 청주(淸酒), 탁주(濁酒), 춘주(春酒), 이화주(梨花酒), 천일주(千日酒), 녹피주(綠皮酒) 등 갖가지 술이 있다고 했다. '술'의 오랜 옛날 말은 '수블'이다. 고려시대에 나온 〈계림유사〉에는 술이 '수발'로, 그 뒤의 중국 문헌에는 '수본(數本)'으로 표기돼 있다. 다시 그 뒤의 문헌들에는 '수을' 또는 '술'로 바뀌어 표기됨을 본다. '수을 고기 먹디 마름과'〈석보상절〉 '술 아니 먹고 '(不飮酒)〈능엄경언해〉 따라서 '술'은 다음과 같이 음이 변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블>수을>술 '술'은 우리말의 친족어 중에서도 비슷한 음의 것이 많다. 술을 알타이어로는 '시라'라고 하고 있고, 길기스어로는 '스라', 헝가리어나 위글어로는 '솔'이라고 하고 있다. 또 볼가·다다르어로는 '세라'라고 하고 있다. ==================================================== □ 총각김치 -'총각'이 아닌 '청각'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총각무우로 담근 김치를 '총각김치'라고 한다. '총각무우'란, 김장 빼 뿌리가 난 무우에 무우청이 달린 채 김치를 담그는 무우를 말한다. 우리말에는 총각보다는 처녀란 말이 들어간 복합어가 훨씬 많다. '처녀'란 말이 총각보다 훨씬 더 신선감이 나서일까? 그 예를 들어 보자. ·처녀림: 사람이 도무지 개개지 않은 원시림 ·처녀지: 사람의 발자국이 미치지 아니하여 외계와 접촉이 없는 땅 ·처녀작: 첫솜씨로 지은 문예 작품. 또는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처녀출판: 저작물을 모아서 첫 번으로 낸 출판 ·처녀연설: 처음으로 하는 연설 ·처녀항해: 새로 만든 배의 처음으로 하는 항해 '처음'의 뜻을 가진 말을 이처럼 '처녀'란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들에서 '처녀' 대신 '총각'을 넣는다면 어떻겠는가? 총각작, 총각출판, 총각항해? 아무래도 '처녀'란 말이 들어간 것보다 부드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한 번도 입에 올려 본 말이 아니어서일까? '총각'이란 말이 이런 식의 말로 쓰인 것으로는 '총각무우'가 있고 '총각김치'가 있다. '총각미역'이란 것도 있다. 그런데, 총각김치의 '총각'은 '처녀'의 상대되는 말로서의 총각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총각김치'는 '총각'과 '김치'가 합쳐 이루어진 말이 아닌, '청각'과 '김치'가 합쳐 된 말인 '청각김치'가 변음·정착된 낱말로 보이기 때문이다. 청각은 붉은말무리의 바다풀이다. 밀물과 썰물 지역의 바위에 붙어서 번식되는데, 이것을 '청각채(靑角菜)'라고도 한다. 김장 때에 김치의 모양을 좋게 하고 나중에 섞어서 맛있게 하기 위하여 김치 위에 얹는 데에 이 청각채가 쓰였고, 따로 무쳐 먹기도 했다. 전에는 김치 위에 얹어 놓는 청각채를 '청각김치'라고도 불렀다. 이 청각김치를 어느 때부터인가 '총각'을 연상하는 '총각김치'로 불렀고, 이것이 더러는 덜 자란 총각무우의 무우청으로 대용되기도 하면서, 그것은 더욱 확실한 이름으로 되어 갔다. 총각무우가 총각에서 나왔건 청각에서 나왔건 성인(큰 무우)이 되기도 전에 밭에서 뽑혀 나오니 역시 총각은 총각이다. 그것으로 담근 김치를 우둑우둑 깨물어 먹으면서 많은 이들은 총각의 어떤 것을 연상할까? ==================================================== □ 빈대떡 -가난한 이들이 부쳐 먹어 '빈자떡'이라 하기도-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옛 유행가에 나오듯이 빈대떡은 옛날부터 가난한 사람이나 부쳐 먹는 음식으로 쳐 왔다. 그러나 지금은 제법 고급화해서 별식으로 여겨질 만큼 귀한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장안에는 지금 이것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늘어가고 그 인기도 높아가고 있다. 빈대떡. 빈대처럼 납작한 떡이라고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이것의 원래 이름은 '병저떡'으로 한자말에서 온 것이다. 전병처럼 부쳐 먹는 떡이기에 원래 '병저(餠藷)'라 했던 것이었다. 병저(떡)>빙자떡>빈자떡>빈대떡 빈대떡은 보통 녹두를 갈아 부쳐 만들지만 가난했던 시절엔 수수가 주재료였다. 수수를 맷돌에 대강 갈아 껍질채 물에 풀어 채소 줄기 같은 것을 섞어 놓고, 불 위에 거꾸로 얹은 소댕(솥뚜껑) 위에 납작하게 펼쳐서 익혀 먹던 음식. 그야말로 배고픈 시절엔 돈 없어도 부쳐 먹을 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막 부쳐 먹는다고 '막부치'나 '부침개'라고도 했고, 지져 먹는다고 '지짐이'나 '지짐개'라고도 했다. 이래서, 이 떡은 가난한 이들이 주로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빈자(가난한 사람)떡'이란 이름으로 굳혀져 있다. 그 뒤로 수수대신 녹두가 주로 씌었고, 그것도 아무렇게나 맷돌에 갈아 부친 것이 아니라 먼저 맷돌에 대강 타서 물에 불리고 껍질을 버린 뒤에 맷돌에 다시 갈아 멀건 죽처럼 만들어서 부쳤다. 소댕이 아닌 '번철'이라고 하는, 지금의 프라이팬 모양의 무쇠 그릇을 써서 기름을 알맞게 제겨 부쳤다. 김치 외에 온갖 나물과 쇠고기, 돼지고기를 섞어서 만들기도 한다. 떡이라고 하지만 실상 떡인지 적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잔치 때에는 고배(高排)할 때 밑받침과 속받침으로 이 빈자떡을 이용해 굄질을 했다. '고배'란, 과일·과자·음식 따위를 높이 괴어 올려서 담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굄새는 이 음식이 아니고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빈자떡을 황해도, 평안도 등의 서북 지방에선 집에서 상식(常食)으로 했고, 손님을 대접할 때에 특히 이 음식을 많이 냈다. 빈자떡이 중국어에서 왔음을 알 수 있지만, 광복 뒤에 서울 거리가 갑자기 늘어난 빈자떡집들이 한자로 '빈자(賓者)떡'으로 쓴 외에도 '빈대(賓待)떡'이라고 쓴 예도 있었다. 요즘에 와서 빈대떡은 애주가들의 술 안주로 이용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결코 빈자의 떡도 아니고 빈대(賓待) 목적의 특별한 떡도 아니다. ==================================================== □ 송편 -'솔잎의 떡'이라는 뜻의 송병(松餠)이 변한 말 우리 속담 중에는 '떡'에 관한 것이 무척 많다. ·누워서 떡먹기(매우 쉬운 일) ·떡 본 김에 제사(본김에 해결해 버린다는 뜻)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상대편은 생각하지도 않는데자기가 지레짐작으로 된 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말) ·떡방아 소리 듣고 김칫국 마신다.(위와 비슷한 뜻. 또는 '성급함'을 꼬집는 말) ·얻은 떡이 두 되 반이다.(조금씩 얻은 것이 모여서 상당히 된다.) ·자던 중도 떡 다섯 개(공로는 적어도 이익 분배는 공평히 하자.) ·밥 위에 떡(마음에 흡족했는데 더주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떡을 별식으로 생각해 온 우리 조상들은 위의 속담에서와 같이 항상 이를 '좋은 일'에 비유해 왔다. 떡은 곡물로 만들기에 그것을 거두는 풍요의 가을철은 떡의 계절이라 할 만했다. 이 때에는 고사떡, 물호박떡, 인절미 등을 이웃에 돌리며 가을걷이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래서 떡을 통한 인정이 마을마다 넘쳐 흘렀다. 떡을 많이 해 먹어 '여름엔 잠비, 가을엔 떡비'란 말까지 생겨났다. 여름엔 비가 오면 잠이나 자지만 가을엔 비가 와도 추수한 곡식으로 떡을 해 먹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 가을도 좋지만 그 가을 속의 명절인 한가위는 더욱 좋았다. 그래서 이 명절의 떡은 다른 계절의 것보다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바로 송편이 그러했다. 멥쌀가루를 잘 반죽하여 콩, 깨, 밤 등을 속에 넣고 두 손으로 조개처럼 정성껏 빚어서 시루에 솔잎을 넣고 켜켜로 깔로 쪄 냈다. 쪄 낸 다음에는 냉수에 헹구어 소쿠리에 건져 물기가 빠진 후 거죽에 참기름을 발라 윤을 냈다. 더러는 그 속에 대추가 들어가기도 하고 팥이 쓰이기도 했다. 추석에는 빠지지 않는 떡이지만 예전에는 2월 노비일에도 만들어 노비들의 나이만큼 먹이던 풍습도 있었다. 쌀가루에 쑥이나 송기를 섞어서 색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송편'의 원래 이름은 '송병(松餠)'이다. '솔잎을 이용해 만든 떡'이란 뜻이다. 이 송병은 뒤에 '송평'으로 변했고, 그것은 다시 '송편'이라는 지금의 말로 정착되었다. 솔잎 자국이 나 있고 솔 내음이 은근히 풍기는 송편. 한가위날 밤, 마루에 앉아 소나무에 걸린 둥근 달을 보면서 이 떡을 먹으며 시상(詩想)에 잠겼을 조상들의 멋스러움을 새삼 연출해 보고 싶다. ==================================================== □ 고추 -'쓴 풀'의 뜻인 고초(苦草)에서 나온 말 '… 백설같은 면화 송이 산호같은 고추다래.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 볕 명랑하다. …' <농가월령가> 8월령의 일부이다. '고추다래'는 '고추 열매'의 뜻이다. 고추를 처마에 널어 놓은 모양을 보고 '가을 볕이 환하게 밝다'고 했으니, 파란 가을 아래 고추가 빠알갛게 널린 모습은 예나 오늘이나 가을 풍경의 대명사였던가.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고추건만 맛은 그 빛깔처럼 아름답지가 못하다. 맛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어폐일지 모르지만, 하여튼 고추는 그 좋은 빛깔값을 못하고 있다. 그런, 고추는 다른 것이 갖지 못한 맛을 혼자 갖고 있다. 매운 맛을 혼자 독점(?)하고 있어서 이 맛을 필요로 하는 음식에 좋은 양념으로 들어가 주고 있다. 달고 고소한 것만 '맛'이 아니다. 혀를 놀라게 하는 자극적인 맛도 '맛'이다. 자극적인 맛에는 짠 맛, 신 맛, 쓴 맛 등이 있지만 매운 맛은 더없이 자극적인 맛이다. 고추가 이 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조상들은 그 맛을 맵다고 하질 않고 쓰다(苦)고 했다. '맵다'는 말은 원래 '맛'의 개념으로 쓰인 말이 아니라 '심하다'나 '독하다'는 뜻으로나 썼던 말이었다. 고추가 원래 고초(苦草)였던 점을 생각하면 고추의 맛을 쓰다(苦)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고추가 우리 음식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심하다는 뜻의 '맵다'는 말이 '쓰다'는 말 대신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초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 비길쏘냐.' 고추의 매운 맛은 이처럼 '심한 고생'에 비유되기도 했다. '고초당초'에서 당초(唐椒) 역시 고추를 가리킨다. 고추가 중국(唐)으로부터 들어와 이런 이름으로도 불렸던 것. 고추의 옛말이 '고쵸'임은 훈몽자회에도 나와 있다. 초(椒)자를 풀어 '당쵸쵸'라고 했다. '고추는 작아도 맵다', '고추바람'(매우 쌀쌀한 바람)처럼 고추는 '지독함'을 나타내는 데 잘 이용되지만, 고추처럼 작고 그 모양도 비슷한 것은 모두 '고추'자로 붙였다. '고추자지', '고추상투', '고추감'(작고 끝이 뾰족한 감) 등에서의 고추가 바로 그런 예. 그런가 하면 남성의 상징을 이 고추로 대신하고도 있다. "사내로 태어나 고추 값도 못해?" "자네, 고추(신생아 아들) 얻었다며? 한턱 하게나." 천한 여자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고추박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도 같은 예에 해당한다. '쓰디쓴 풀'의 뜻인 '고초'는 '고추'가 되고, 이제 그 고추는 다시 '꼬추'로 돼 가고 있다. ==================================================== □ 갈비탕 -전에는 '가릿국'. '가리'는 소의 갈비를 식용으로 일컫던 말 '갈빗대가 부러지도록'이라는 말을 더러 듣는다. 우리 몸의 여러 뼈 중에서 갈비뼈는 그만큼 아주 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실제가 그렇다. 갈비뼈는 한자말로 늑골(肋骨)인데, 가슴통(흉관)을 이루는 뼈대의 한 부분이다. 흉곽은 갈비뼈, 가슴뼈, 검상돌기, 등심대(척주골) 등으로 되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갈비뼈로 가슴속의 장기(염통, 허파 등)를 보호한다. 갈비뼈는 12쌍이 있는데, 그 중 7쌍은 등심대에서 시작하여 양쪽으로 구부러지면서 쌍을 지어 뒤에서 앞으로 뻗어 가슴뼈와 연결, 새장 모양을 이루고 있다. 5쌍은 그 아래 등심대에서 양쪽으로 뻗어 갈퀴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장 모양의 갈비뼈를 '진늑골'이라 하고, 갈퀴 모양으로 따로 벌리고 있는 뼈를 '가늑골'이라고 한다. 갈비뼈가 가슴뼈와 이어진 부분은 연한 뼈로 되어 있어 가슴통을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다. 갈비뼈의 안쪽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이 '늑막'이다. 이것이 그 안의 내장과의 경계를 이루는데 이 부분에 염증이 생기는 병이 늑막염이다. '갈비뼈'에서 '뼈'는 덧들어간 말이고 '갈비'가 원말이다. 즉 '갈비'라는 말만 가지고도 '갈비뼈'와 같은 뜻이 된다. 따라서, 갈비뼈는 '약수물', '역전앞', '유기(鍮器)그릇'과 같은 중복식 어휘이다. '갈비'에서 '갈'은 '갈라짐'(派,分)을 의미하고, '비'는 뼈를 뜻하는 옛말이다. 따라서 '갈비'는 '갈라진 뼈'라는 뜻이 된다. '갈라짐'을 뜻하는 '갈'은 지금의 말에 '갈대', '갈고리', '갈이질'(논밭을 가는 일), '갈퀴', '갈피', '가리마', '가랑이', '가랑머리', '가루', '가래' 등의 말을 이루게 했다. 쌍둥이의 옛말이 '갈아기'인 것은 아기가 갈라져 나왔다는 데서 나온 말. '가리마'는 이마로부터 정수리까지의 머리털을 양쪽으로 갈라 붙이어 생긴 금을 뜻하는데 '가림자' 또는 '가림'이라고도 했다. 고기잡는 기구의 하나로 '가리'라는 것도 있다. 통발 비슷이 대로 엮어 만든 것으로 사람의 갈비뼈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갈비를 토막쳐서 푹 삶아 맑은 장을 친 국을 '갈비탕'이라고 한다. 전에는 이를 '가릿국'이라고 했다. '가리탕'이라고도 하는데 '가리'는 소의 가리를 식용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가리의 뼈대(갈빗대)는 '가릿대'인데 이것을 구우면 '가리구이'(갈비구이)가 된다. 지금은 음식점에 가서도 '갈비'를 '가리'라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가리'(갈비)로 만든 '가릿국', '가리탕', '가리찜', '가리구이' 같은 말이 사라져 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 □ 곶감 -꽂아 말린 감의 뜻으로 나온 말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이란 속담이 있다. 애써 모아 둔 것을 힘들이지 않고 갖다 먹어 없애 버린다는 뜻이다. 이 속담에는 '꽂는다'에서 나온 말이 둘이나 들어가 있다. 하나는 '곶감'이고 다른 하나는 '꼬치'이다. '곶감'은 감을 막대기에 꽂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고, 꼬치는 '꽂는 것'의 뜻인 '꽂이'가 변한 말이다. '꽂다'의 옛말은 '곶다'이다. <훈몽자회>에도 삽입한다는 뜻의 '삽(揷)'자를 '곶다'로 풀어 놓고 있다. '중생을 곶에 깨여 굽고' <월인석보>에 나와 있는 말이다. '짐승을 꽂이(꼬창이)에 꿰어 굽는다'는 뜻의 말이다. '곶'은 원래 불쑥 튀어나간 곳을 뜻했던 말이다. 이 말은 지금도 살아 '장산곶', '개곶', '달곶(달고지)'처럼 육지가 바다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간 곳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즉 '반도'의 뜻으로 쓰였던 말이다. '곶'에서 받침이 떨어져 나간 말이 '고'이고 그것이 격음화한 것이 '코'이다. 따라서 사람 얼굴의 '코'도 원래는 '뾰족하게 튀어나간 곳'의 의미로 쓰였던 말이다. '곶'은 동사화해서 '곶다'란 말을 낳았다. 그 '곶다'는 '꽂다'로 경음화하면서 여러 낱말을 파생시켰다. '꼬집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고, '꼬창이', '꼬치(꼬창이에 꿴 음식물)' 같은 말도 여기서 나왔다. '꼬치안주'란 말도 있는데, 이것은 꼬치에 꿰어 삶거나 구운 안주를 뜻한다. 감을 말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감을 깎아서 싸릿대로 만든 감꽂이에 꿰어서 말리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꼭지를 따지 않고 깎아서 그 꼭지에 끈을 달아 말리는 방법이다. 원래는 감꽂이에 꿰어서 말린 감만을 곶감이라고 해 왔으나 지금은 달리 말린 감도 곶감으로 부르고 있다. 끈을 달아 말려 만든 감을 따로 '준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자말이다. 감을 말릴 때는 처음엔 볕에 대강 말렸다가 또다시 응달에다 말려 단맛이 더 나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정성이 덜 들어간 곶감들이 나온다. 곶감은 한자로 관시(串枾)라고도 한다. 역시 '꽂은 감'의 뜻을 담은 말이다. 말린 감이라는 뜻의 건시(乾枾)라고도 하고, 말리면 겉에 흰 가루가 배어나와 하얗게 보여서 백시(白枾)라고도 한다. 겉에 배어 나오는 흰 가루를 시설(枾雪)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설이 많을수록 좋은 감으로 쳤다. 꽂은 감의 뜻인 곶감. '감나무골' 아낙네들도 요즘 한창 그 곶감을 만들고 있다. 늦가을 볕 아래서 행복을 꼬치에 꽂고 있다. ==================================================== □ 곱창전골 -곱창은 '곱은(굽은) 창자'의 뜻 찬바람이 싸늘하게 살갗을 스치면 어디 포장집이라도 들어가 따끈한 찌개나 국이 들고 싶어진다. 이런 때에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어 오던 음식이 있다. 전골이 바로 그것이다. 전골은 아무 것이나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을 하고 온갖 채소를 섞어서 국물을 조금 부어 끓이고 달걀을 푼 음식이다. 이것을 끓일 때도 틀별한 그릇을 썼다. 전골틀이나 벙거짓골을 썼다. 전골틀은 전골만을 주로 끓이는 특별한 그릇이다. 벙거짓골도 그와 비슷한 그릇인데, 무쇠나 곱돌 따위로 벙거지(갓모자)를 잦혀 놓은 것처럼 비슷이 만든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전골의 재료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전골의 재료였지만, 요즈음에는 해물, 국수까지가 전골의 재료가 도니다. 그 중에서도 곱창전골이 가장 잘 알려진 전골이 아닐까 한다. 곱창전골. 많이 알려진 전골이어서 그런지 그 준말까지도 나왔다. '곱전'이 그것이다. '곱전'이 '곱창전골'의 준말로 쓰이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곱창전골은 말할 것도 없이 곱창을 넣어 끓인 전골이다. 곱창. 곱창은 '곱은 창자'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곱은'은 '굽은'의 뜻이다. 지금은 굽은, 굽어, 굽이굽이, … 처럼 '굽다'(曲)는 말을 주로 '굽'으로 쓰고 있지만, 옛날엔 '굽다'와 '곱다'가 병용되었다. 그래서, '곱'이 '굽다'는 뜻으로 들어간 말이 많다. 지금의 국어사전에도 '굽다'의 작은말로 '곱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등골뼈가 고부라진 사람을 '곱사등이'라 하고,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자를 '곱자'라고 한다. 박이옷을 지을 때 한 번 꺾어서 혼 후에 그 뒤를 떼어버리고 또 접어서 박는 박음질을 '곱솔'이라고 한다. '곱은 솔기'의 준말이 '곱솔'이라 할 수 있다. '고수머리'는 술(머리칼)이 굽었다는 뜻의 '곱술머리'에서 나온 말이고, '곱장다리'는 굽어진 다리를 일컫는 말이다. 사물의 가장 요긴한 기회나 막다른 절정을 '고비'라고 하는데, 이것도 '곱이'(굽이=曲)가 그 원말이다. 이처럼 '곱'이 굽었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 무척 많다. 땅이름에서는 굽은 내가 '곱내', 굽은 다리가 '곱다리', 굽은 성이 '곱은성'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자로는 '곡천(曲川)', '곡교(曲橋)', '곡성(曲城)'이다. 곱창은 매우 긴 창자이다. 매우 길어서 뱃속에 여러 굽이 굽혀져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굽혀 있는 창자이기 때문에 '곱창'이다. 속에 융털돌기가 가득한데, 끓이면 그 질깃질깃한 맛이 우리 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곱창은 전골 음식이라야 진짜 제맛을 낸다. ==================================================== □ 나박김치 -무우를 얇게 저며 만든 김치여서 '납작'의 '납'이 근원- 얇고 네모지게 썬 무우를 소금에 절인 후에 고추, 파, 마늘, 새앙 등의 양념을 넣고, 국물을 부어 놓았다가 거의 익을 때에 미나리를 썰어 넣어 만드는 김치를 '나박김치'라 한다. 빡빡한 떡 같은 것을 먹을 때 목에 잘 넘어가도록 김치를 옆에 놓기도 하는데, 나박김치는 다른 김치와 달리 국물이 많아 떡잔치에 곁들이 음식으로 많이 쓰인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에서 '김칫국'은 보통 '나박김치의 국물'로 이해돼 왔다. 나박김치는 한자말로 '나복저'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한자어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납잡하다'는 뜻의 '납'과 '김치'의 합성어이다. 나박김치에 들어갈 무우는 칼로 납작납작하게 썬다. 그래서 '나박김치'이다. '납작하다'의 어근은 '납'인데, '납'과 '넙'은 '얇음'의 뜻을 가진 옛말이었다. 곤충의 이름인 '나비'는 원래 '얇음'의 뜻인 '납이'였다. 〈역어유해보〉에 보면 '나비'가 '납 '로 나온다. 납+이(접미사)=납이>나비 나비의 날개가 얇고 넓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납'이 '납작함'의 뜻을 가진 것에 '납가새'와 '납거미'가 있다. '납가새'는 바닷가 모래밭에 땅에 납작하게 붙어 덩굴로 벋는 풀이고, '납거미'는 벽에 동글납작한 집을 지어 놓고 그 속에서 사는 거미이다. '나박김치'란 말의 정착 과정을 유추하면 다음과 같다. ·납+김치=납 김치 ·납 김치>나 김치>나바김치>나박김치 한자말의 '나복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박김치'는 '나복김치'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붓하다'는 '너붓하다'의 작은말이다. 평평한(납작한) 것을 의미하는 '납' 또는 '넙'은 '나비(폭)', '너비(넓이)' 등의 말을 이루게 했다. '넙'을 뿌리로 한 말로는 '너부죽', '너벅지(자배기)', '너벅선(너비가 넓은 배)' 등이 있다. 납작한 바위를 '넉바위', '낙바위'라 하고, 넓거나 비탈이 늘어진 골짜리를 '넉골' 또는 '낙골'이라 한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관악산 한 골짜리 마을을 '낙골'이라 하는데 한자로는 '난곡(蘭谷)'이라 한다. 섬이 납작하거나 넓으면 '넙섬', '납섬'이라 하고 또 '낙섬'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이름들이 모두 납작하거나 넓다는 뜻의 '납(넙)'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넓다는 뜻이 '납'으로 많이 씌었음은 지금의 땅이름에 '나배', '나불' 같은 말이 들어간 것이 많은 것을 봐서도 알 수가 있따. 충남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전북 남원시 광치동의 '나분들'은 들이 넓어 붙여진 땅이름이다. 전남 진도군 조도면의 '나배섬(나배도)', 영암군 삼호면의 '나발섬(나불도)' 등도 섬이 납작하고 넓어 붙여진 땅이름이다. 이처럼 '납'이 '넓다', '얇다'의 뜻을 가지면서 많은 땅이름을 이루거나 낱말을 파생기켰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나박김치'이다. ==================================================== □ 아롱사태 -샅(사이)의 뭉치살이란 뜻 '소고기'냐 '쇠고기'냐. 맞춤법을 잘 아는 사람도 아리송했던 이 낱말이 최근의 새 맞춤법 통일에선 둘을 다 표준말로 정하여 그 어느 것을 써도 틀리지 않게 되었다. 쇠고기는 맛이 좋고 영양 가치도 크다. 그 맛은 고기 섬유 안의 즙액에 의한다고 하는데, 서양 소에 비하여 동양 소(특히 한국 소)의 맛은 훨씬 좋다. 육식을 많이 하는 유럽에서는 성서 시대부터 쇠고 ㄹ 상식으로 해 왔고, 특히 허리춤의 고기가 많이 애용되었다. 동양에 있어서도 일찌기 쇠고기를 먹었다. 보통 소의 48%가 고기(주로 힘살)인데, 지방이 적을수록 수분이 많다. 소화율은 95%에 이른다. 쇠고기. 말이 쇠고기지, 그 부위별로 따지면 참 이름도 많다. 등심, 안심, 양지육, 궁둥살(우둔육), 대접살, 채끝살, 아롱사태 등등. 그 이름마다 각각 뜻을 달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중 '아롱사태'를 두고 우리말 산책을 해 보자. 아롱사태는 쇠고기 뭉치사태의 한가운데에 붙은 살덩이를 가리킨다. 뭉치는 소의 뒷다리 윗볼기의 아래에 붙은 고깃덩이. 이 고기는 탕이나 조림용 또는 곰국거리로 많이 쓰인다. '아롱사태'란 말은 우선 '아롱'과 '사태'란 말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롱'은 여러 가지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덩어리'의 뜻으로 풀어 볼 만하다. 아롱사태는 다리를 움직이는 힘살로 한 뭉치의 살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아롱사태의 '아롱'은 원래 한 아름, 두 아름의 '아름'과 관련지어 생각해 봄 직하다. '아름'도 원래 '알'에서 나온 말로 이 '알'은 덩어리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음은 '사태'를 생각해 보자. '아롱사태'가 아닌 '사태'는 소의 다리 사이에 붙은 고깃덩이를 가리키고 있다. '사태'는 '샅'에서 나온 말이다. '샅'은 말할 것도 없이 두 다리의 사이나 두 물건의 틈을 가리킨다. 그래서 씨름을 할 때에 다리를 걸어서 손잡이로 쓰는 무명 바를 '샅바'라 하고, 바지 따위의 샅에 대는 좁은 폭을 '샅폭'이라 한다. 지금은 쓰고 있는 말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기저귀'를 '샅갖'이라 했다. '사이'의 뜻인 '샅'이 뒤에 '사타귀', '사태' 등의 말을 낳았다. '사타귀'는 '샅'과 '아귀'가 합쳐 이루어진 말로 역시 두 다리 사이를 가리킨다. '아귀'는 물건의 갈라진 곳을 말한다. '사타귀'는 '사타구니'라고도 한다. '샅'은 땅이름에서도 '사이'의 뜻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사이의 들'은 '삿들', '삿달', '삿다리'가 되어 지금의 충남 예산의 '삽교'라는 땅이름을 이루게 했고 '사이의 재'는 '삽재'가 되어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의 '삽현' 같은 고개이름을 이루게 했다. 고기이름의 '사태'나 땅이름의 '삽'은 결국 다 같이 '사이'의 뜻인 '샅'에서 나온 것이다. ==================================================== □ 수정과 -물로 바른 맛을 낸다는 뜻의 '수정(水正)'- 새앙을 달인 물에 곶감을 담가서 만든 음식을 '수정과'라고 한다. 계피(桂皮)와 새앙을 썰어 물을 붓고 끓여서 설탕이나 꿀을 타서 식힌 다음 여기에 곶감을 담가서 하루 정도 지난 후 곶감을 적당히 익혀 내는 음식이다. 계피를 고운 가루로 내어 넣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끓인 다음에 넣는 것이 보통이다. 이 음식은 대개 화채그릇에 담아 잣알을 띄워 내는데, 자수정(紫水晶)처럼 곱고 은은해서 그 빛깔부터 우리 입맛을 끈다. 계피와 새앙이 재료로 들어갔기 때문에 톡 쏘면서도 그 시원한 맛은 요즘 가게에서 흔히 파는 어떤 음료와도 비길 수가 없다. 마시고 나서도 입 안 가득히 은은한 향기가 남아 뒷맛이 개운하다. 특히 계피 국물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말랑말랑한 곶감, 짙은 국물 위에 날 보아란 듯이 하얗고 야무지게 떠 있는 흰 잣 알갱이가 수정과의 멋을 한껏 더해 준다. '수정과'라고 하면 우선 수정(水晶)을 머리에 떠올린다. 수정은 석영(石英)의 한 가지를 순수한 것은 무색 투명하다. 함유된 불순물에 의해 빛을 내는데, 빛깔이 아름다운 것은 도장, 장신구 등에 이용한다. 빛깔에 따라 자수정, 장미수정, 황수정, 유색수정(젖빛수정) 등이 있다. 그런, 앞의 수정과를 이 수정이라는 광물과 관련지어서 그 어휘의 뜻을 생각함은 잘못이다. 왜냐 하면 수정과는 수정과(水晶果)가 아니라 수정과(水正果)이기 때문이다. 수정과를 수정(水晶)처럼 은은한 빛깔을 가진 과일 음료란 뜻에서 이루어진 한자말로 보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은 수정과를 화채그릇에 담아 낼 때 그 빛깔이 자수정의 빛깔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수정과는 물수(水)자, 바를정(正)자가 들어간 그대로 물로 바른 맛을 나게 만든 과일 음료라는 뜻으로 나온 이름일 것이다. 그 바른 맛은 결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만의 맛'임에 틀림없다. ==================================================== □ 약주와 약식 -여기서의 '약'은 약(藥)이 아니고 '고급'의 뜻- 우리네 음식 중에는 '약(藥)'자가 들어간 음식들도 적지 않다. 약주, 약식, 약과, 약포 등. 약으로 만들어 '약'자가 붙은 것이 아니다. 또 약이 되는 음식이어서 그런 이름이 나온 것도 아니다. 이들 음식은 모두 정성을 요하는 것들이다. 재료도 귀한 것이 들어간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들에서의 '약'은 '고급(아주 좋은)'의 뜻을 갖는다. 예를 들어 '약과(藥果)'라고 하면 '고급 과자'의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약과는 다른 말로 '과줄'이라고도 하는데, 유밀과의 한 가지로 밀가루를 기름과 꿀에 반죽하여 기름에 띄워 지진 것이다. 기름과 꿀 등의 고급 재료가 들어가고, 반죽하고 지지고 하는 정성까지 들어가야 한다. '약포'도 고급 음식이다. 포의 한 종류인데, 쇠고기를 얇게 저민 다음에 진간장, 기름, 설탕, 후춧가루를 넣고 주물러서 채반에 펴서 말린 음식이다. 상에 놓을 때는 또 참기름을 바르고 잣가루를 뿌리기까지 했다. 살짝 구워서 두들기면 연하고 더욱 맛이 좋다. 노루포나 생치포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약'자가 들어간 음식 중 그래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약식'과 '약주'일 것이다. 역시 둘 다 고급 음식이다. 약식은 전에는 '약밥'이라고 해 왔다. 찹쌀을 물레 불리어 시루에 찐 뒤에 꿀이나 흑설탕, 참기름, 대추를 쳐서 거른 것들을 섞어 가지고 진간장, 밤, 대추, 황밤을 넣어서 다시 시루에 찐 밥이다. 재료도 재료려니와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음식이다. 약주는 다 익은 술을 용수(술 거르는 데 쓰는, 싸리로 만든 통)를 박아서 떠내거나 술주자(술 짜는 틀)에 짜낸 술을 말한다. 술이 맑아서 '맑은 술'이라고도 불러 왔다. '약술'이라고도 했다. 약이 되는 술이라 해서 약주, 약술이 아니라 고급 술이라 약주, 약술이다. 이에 반하여 막 걸러서 찌꺼기가 남는 술은 '막걸리'라 했다. 조선 선조 때 약밥, 약주를 잘 만드는 여인이 있었다. 당시, 아들을 훌륭한 재상으로 키운, 서성의 어머니 이씨였다. 이씨 부인은 청상과부였을 때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 약현으로 올라와 맑은 술과 약밥을 만들어 팔았다. 약현은 지금의 서울 만리동 2가에 있었던 옛 마을인데, 근처에 약밭재 또는 약현(藥峴)이라고 하는 고개가 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씨 부인이 만들어 파는 술과 약밥은 이 일대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묘하게도 이씨 부인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곳의 땅이름까지 약현이어서 당시의 이곳에서 나는 술과 약밥을 '약주', '약식'으로 널리 통했다. '맑은 술', '약밥'으로도 불렸던 약주와 약식. 이름은 달라졌지만 그 맛, 그 정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 □ 장국밥 -고기 장국에 밥 들어간 전통 음식- 토장국이 아닌 국물을 통틀어 '장국'이라 한다. 열구자, 전골 따위의 국물로 쓰는 간장을 탄 물도 장국이라 했다. 쇠고기를 잘게 썰어 고명해서 맑은 장에 끓인 국은 '맑은장국'이라 했는데, 이것도 줄여서는 장국이라 했다. (※ 고명=음식의 모양을 보기 좋게 하고 나중에 섞어서 맛있게 하기 위하여 음식에 뿌리는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 장국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음식이지만 이것을 이용한 음식도 여러 가지다. 국수에도 이용되었다. 여염집에서는 잔치를 치를 때 장국을 미리 뜨끈뜨끈하게 준비해 두었다가 국수를 말아 대접했다. 국수는 대개 국수집에서 사다 삶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국죽'이란 것도 있다. 맑은장국에 심쌀(죽에 넣는 쌀)을 넣고 끓이다가 재로 썬 표고와 잘 다진 쇠고기를 납작납작하게 판대기를 지어 넣고, 다음에 불린 것을 쌀에 참기름을 넣고 갈아서 채에 거른 후 한데 넣고 한번 끓여 간장을 간을 맞춘 음식인데, 그 구수한 맛이 아주 일품이다. 장국을 이용한 음식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장국밥'이다. 즉, 장국에 밥을 만 음식이라 해서 장국밥이다. 이 음식은 좋은 양지머리 고기를 푹 끓이고 고기를 건져 가늘게 찢어 넣고, 연한 고기를 길쭉길쭉 썰어 갖은 양념에 쟁였다가 꼬치에 꿰어 구운 산적을 얹어 내는데, 밥은 말아 내기도 하고 따로 내기도 한다. 기름기가 없어 그리 느끼하지 않으면서 맛이 구수해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즐겨 온 음식이다. 조선시대엔 이 장국밥이 임금에까지 진상되었다고 한다. 옛날엔 서울 모전다리 앞에 '무교 탕반집'이란 음식점이 있었다. 한자로 무교(武橋)라 하기도 했던 모전다리는 지금의 서울 시청 옆 코오롱 빌딩 부근에 있었다. 여기선 주로 장국밥을 팔았는데 그 인기가 대단했다. 조선시대의 야사에 정조 임금이 이 집에 들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보면 이 음식점의 역사가 꽤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때는 맛을 찾는 식도락가들로 무교동 일대의 장국밥집들이 크게 붐볐다. 그러나, 일제 말의 물자 부족으로 음식 재료를 제대로 구할 수가 없게 되자 장국밥은 그 옛날의 장국밥이 아니었다. 재료가 덜 들어가니 아무래도 그 옛날의 장국밥의 원형을 그대로 지녀 올 수가 없었던 것. 이에 따라 손님이 줄어들게 되고 하나하나 문을 닫는 집들이 늘어났다. 해방을 맞아 많은 집들이 그 옛날의 장국밥을 만들어 다시 영업을 했으나 이미 많은 이들이 다른 음식에 맛들여 차츰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가고, 결국 장국밥 전문의 음식점은 나래를 펴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문교 탕반집도 해방 직후에 없어졌다. 임금에까지 진상되었던 우리의 전통 음식 장국밥. 이젠 거의 사라져 간 것 같고 그 이름도 우리 머리에서 멀어져 갔다. ==================================================== □ 가락국수 -'가락'은 '가늘고 길다'는 뜻- '우동'이란 말은 일본말이다. 일본식 가락국수를 일컬어 '우동'이라 하지만 '가락국수'란 말로도 충분하니 이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가락국수'란 말은 '가락'과 '국수'가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를 알아보려면 두 낱말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락'이란 말은 '가늘고 길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지금의 우리말에서 손가락, 발가락, 엿가락, 젓가락 같은 말들이 있는데, 여기서의 '가락'이 모두 '가늘고 길다'는 뜻을 지녔다. '가락'에서 어근은 '갈'이 된다. 이 말은 원래 '갈라짐'의 뜻을 가졌으리라 짐작된다. 아주 오랜 옛날엔 '가랄'이란 말이 있었는데, 이 말도 '갈'에서 나온 것으로 '가닥진(가락진) 것'의 의미를 지녔다. 이 말은 우리 몸의 다리를 일컬을 때도 씌었다. 다리는 우리 몸체에서 갈라진 곳이기 때문. 지금의 말에서 '가랑이'란 말을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워진다. "드러 내 자리를 보니 가 리 네히 로섀라."(들어와서 내 방을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가>의 일부이다. 여기서 '가 리'는 '가 이'의 연철로 '다리가'의 뜻이다. '갈'에서 나온 말은 무척 많다. '가락', '가래', '가리', '갈래', '가랑', '가로' 등. 이들은 '갈라짐'의 뜻 외에 '가느다란'의 뜻으로도 옮겨갔다. '갈비'의 옛말이 '가리'인 것은 그것이 가느다란 뼈이기 때문. 떡가래, 엿가래 등의 '가래'도 '가늘다'는 뜻을 지녔다. 쌍동이의 옛말이 '갈오기'인데 여기서 '갈'자가 들어간 것은 갈라져 나온 아기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가락국수'에서 '국수'란 말을 생각해 보자. '국수'는 원래 '국시'가 그 본말이다. 지금도 남부 지방에선 '국수'라 하지 않고 '국시'라 한다. 이 말은 ''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은 지금의 말의 '국'(장국, 국물 등의 )에 해당한다. 즉 조선시대의 말인 ''은 '국'으로 옮겨가 오늘날의 국물, 장국, 곰국 등의 '국'이 되고, '국시'로 옮겨가선 오늘날의 '국수'와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음식점 중엔 '국시'란 말을 '국수' 대신에 쓰는 곳이 꽤 많아졌다. 옛말을 찾아 쓰고자 하는 배려(?)에설까? 국수는 지금의 밀가루가 주재료이지만, 옛날에는 메밀이 주재료였다. 또, 사람들은 가락국수를 일반 국수와 달리 발이 굵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원적으로 풀면 도리어 '가는 국수'의 뜻이 된다. '가락' 자체가 '가늘고 긴'의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가락'이란 말은 국어 사전에 다음과 같은 풀이로 나와 있다. 가락: 가느스름하고 기름하게 토막진 물건의 낱개. 국수를 한자로는 '면'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국수의 사리를 뜨거운 장국에 말면 '온면', 찬 국에 말면 '냉면'이 된다. 라면도 묘하게 '면'자가 들어갔는데, 어떻게 해서 이 말이 처음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출처...맛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