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白頭大幹) 종주기(웅석봉→진부령)
「힘들게 마친 만큼 가슴 뿌듯하더라!」
1996년 1월 1일 조카(조덕현)와 함께 북한산 백운대(836.5m)에 다녀온 것을 필두로 산행노트(산행일지)를 적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울근교인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수락산, 불암산 등을 다니다가 처음으로 서울 이외의 산으로 소백산을 가게 되었는데 물론 처음으로 가보는 무박산행이라 모든 게 두렵고 어떻게 준비도 해야 할지 모른 체 무작정 따라나선(1996.06.08~09) 소백산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연출했는데 운해와 일출의 그 황홀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무박산행의 맛을 본 나는 이어 속리산도 무박으로 갔다가(1996.07.16~17) 야간산행 출입금지를 당해 후배(박상수) 차(프라이드)에서 새우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안개 낀 속리산을 접했다. 점 점 산행에 깊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욕심이 생겨 지리산 종주(1996.07.28~31/ 3박4일)를 후배(박상수)와 함께 종주했는데 처음 해보는 종주라 너무 크고 무거운 배낭(아마 80리터로 기억)으로 결국은 노고단까지 가보지 못하고 뱀사골로 하산하고, 곧바로 설악산 종주(1996.08.01~04/ 2무2박4일)를 마쳤다. 너무 무거운 배낭과 처음해보는 종주산행으로 입이 부러 터서 한동안 고생했는데 그 이후로도 조금만 힘이 들면 자주 입이 부러 튼다. 이때까지도 백두대간이란 명칭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백두대간이란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단독종주하기엔 시간이 없고 산악회를 물색하던 중 때마침 거인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종주(2차)를 하고 있어서 백두대간을 접하게 되었다.
1996년 10월 12일 토요일 무박으로 백두대간 종주하기 위에 시간 맞추어 동대문에 나갔다. 밤 10시 10분에 출발하여 다음날 일요일 새벽 수안보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여 취침을 하고 4시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고 5시에 들머리인 이화령에 도착했다(내가 백두대간을 처음으로 접한 구간은 이화령~조령산~문경새재~월항삼봉~하늘재 구간이고, 거인산악회 2차 20회차 산행이다). 5시 8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그 당시엔 헤드랜턴도 없어서 손전등을 가지고 산행을 했다. 어두컴컴한 조령산에서 기념사진(아나로그 카메라)을 찍고 바위구간을 지나갈 때 쯤 날이 새기 시작하면서 일출을 보지 못했지만 너무나 멋진 암릉 길을 지나가면서 이것이 바로 백두대간이로구나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본격적으로 등산에 입문한지 10개월 정도 지나서 산행속도가 빠를 때였고, 또한 오버페이스가 뭔지도 몰라 젊은 혈기로 처음엔 가이드 바로 뒤에 섰다가 날이 새면서 선두로 진행을 했다. 무엇보다도 가이드 뒤에 따라 가다가는 남의 히프만 보고 산행을 마친 격이 되고 독도실력도 늘지 않을 것 같아 선두로 진행을 했는데….
치마바위봉(깃대봉)을 지나 안부에서 이정표가 있었는데 이정표의 방향이 묘하게 설치되어 있어서 우측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데 좌측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뚜렷하던 길이 어느 정도 진행하니 갑자기 수풀지대가 나오더니 길이 희미해진다. 이거 아니다 싶었을 땐 이미 너무나 많이 진행된 상태라 할 수 없이 갈 때 까지 가보자 하며 없는 길 무작정 진행하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좌우를 두리번거려도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잠시 아래로 내려가니 다행히 아주머니를 만나 물어보니 고사리라 한다. 그러면 문경새재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어보니 위쪽으로 올라가야한다고 해서 다시 되돌아간다.
한참을 진행하니 조령산자연휴양림 입구가 나오더니 이내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를 해야 한다고 한다. 길을 잊어 버려서 이쪽으로 하산하게 됐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그냥 지나가라고 해서 무사통과를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가니 힘이 든다. 오버페이스 한 후유증이 나타난 것이다.
문경새재를 통과하고(그 당시엔 문경새재 도립공원 매표소가 없었는데 2001.07.15 답사 할 때는 매표소가 세워져있음) 약수터에 다다르니 거인산악회 이구대장과 후미가 막 내려 오는 게 보이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자초지종을 예기하고 셋이서 함께 마폐봉을 향해 성벽 길을 오르는데 발이 천근만근이다. 이를 악다물며 힘겹게 올라간다.
부봉 앞에 이르렀을 때 많이 망설였다. 부봉(대간에서 약간 벗어남)을 다녀오려면 그만큼 힘이 더 드는데 지금도 지쳐있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여길 언제 다시 지나가나 생각하면 부봉을 다녀와야 하고….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가 부봉을 다녀왔다. 지금도 그때 판단은 잘 한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부봉은 지금까지 두 번을 더 답사했다.
월항삼봉(일명 탄항산. 그 당시엔 정상석이 없어서 어디가 월항삼봉 인지 몰랐다)을 지날 때는 너무나 힘이 들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백두대간이라는 게 결코 만만한 게 아니 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쉬면서 하늘재에 도착을 했다. 양쪽 모두 비포장도로인 하늘재는 지금은 문경 쪽은 포장이 되어 있다. 왼쪽 미륵리로 하산을 해야 하는데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기면서 미륵사지에 도착을 했다. 그러면서도 미륵사지의 미륵불을 아나로그 카메라에 담았다. 미륵사지에서 조금 더 진행하니(실제 느끼는 감정은 무진장 멀어 보였다) 개울에서 신선노름을 하는 회원님이 보이면서 관광버스가 보인다. 이를 갈며 완주를 마쳤다.
잠시 식당에 들어가서 뒤풀이하는 회원님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귀경을 했다. 처음 접한 대간은 나에게 무한한 도전을 만들게 했다.
고생고생하며 완주한 대간 후유증은 일주일 내내 꼼짝을 못하게 만들었다. 일요일이 돼서야 다리가 풀렸다.
그해 연말(1996.12.31) 새싹산악회에 후배 따라 설악산 새해 일출산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새싹산악회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이다.
1박3일의 일정으로 설악산 등산에 나섰는데 악천후(눈, 비, 강풍)의 기상조건으로 13시간 30분 산행(한계령~대청봉~천불동계곡~설악동)을 해서야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난 후배하고 선두그룹이었다. 후미는 상당시간 지체해서 늦은 밤 택시타고 민박집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양양의 민박집에서 들은 청천병력의 소리는 거인산악회 소속 3사람이 악천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가 거인산악회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서 마음에 와 닿았는데 가슴이 아프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어느덧 고인들의 11주기가 다가오네요.
이렇게 새싹산악회에 인연이 되어 새싹산악회 정기산행에 짬짬이 참석을 했다. 새싹산악회에 처음 인연이 됐을 때는 노형수씨가 회장이었다. 1997년 시산제(귀목봉)때 여친 데리고 갔는데 넘어져서 얼굴에 타박상을 입었는데 참으로 난감했었다.
1998년도에도 노형수씨가 회장이 됐고 총무로는 차민지씨 이었는데 차 누나하고는 개인 산행도 많이 해서 인연이 각별했다. 그동안 새싹에서도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았는데 연말에 다음해 산행계획을 짤 때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자고 건의를 했다. 만장일치(차민지씨 만 반대)가까운 지지로 내년(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대간을 종주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웅석봉에서 대간을 시작했다.
드디어 1999년 3월 13일 대단원의 첫발(1구간: 내리→웅석봉→밤머리재)을 내딛었다. 무박산행으로 출발을 했는데 참가인원은 16명 이었지만 얼마나 고대했던 백두대간 종주였던가?
힘들게 총무(1999년 초에 차민지씨가 물러나고 남중희씨가 이어받음)님이 떡을 지고 올라오고 여러 회원님들이 일치단결해서 한 가지씩 힘들게 들고 올라와서 웅석봉 정상에서 백두대간 무사완주 기원 산제를 드리고 1구간 날머리인 밤머리재에 무사히 종주했다. 그 당시 매니아들이라면 백두대간 출발지인 천왕봉(중산리)보다 산줄기가 긴 내리에서 웅석봉을 거치는 종주를 했다. 그래서 매니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새싹산악회도 웅석봉부터 종주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무박으로 종주를 시작한 대간은 2회(1999.4.10~11. 밤머리재→왕등재→새재→대원사)째 장춘상씨가 산청휴게소에서 합류하여 때 이른 수박을 들고 오셔서 하산 후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3번째 구간(1999.05.08~09. 새재→하봉→중봉→천왕봉→장터목→중산리)은 원래 천왕봉 직전에서 마칠 예정이었는데(산불예방기간이라) 다행히 산불예방기간이 일찍 해제(5월 8일)돼서 지리산 천왕봉을 지나 장터목에서 하산을 했다. 대원사에서 대간 들머리인 새재마을까지 걸어가는 게 부담스러워 트럭을 수배해서 트럭타고 새재마을까지 진행해서(요금\20,000) 시간을 단축시켰다. 역시 천왕봉이라는 호재가 있어 회원도 37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지리산 천왕봉
4번째 구간(1999.06.12~13. 백무동→장터목→연하봉→영신봉→구벽소령→삼정리)은 백무동에서 올라가서 구벽소령에서 하산했는데 지리산자연휴양림을 거쳐 내려오는 비포장도로가 너무 길어서 힘들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5번째 구간(1999.07.17~18. 삼정리→연하천대피소→삼도봉→노고단→성삼재)은 오랜만에 32명의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처음 삼정리에서 지리산자연휴양림을 거쳐 비포장도로 올라갈 일이 끔찍했는데 어두컴컴한 밤에 그래도 지름길로(벽소령으로 안가고 연하천으로 감)진행하니 그리 힘든 기억이 없다. 성삼재휴게소까지 마쳤다.
6번째 구간(1999.08.14~15. 성삼재→고리봉→만복대→정령치→고기리)은 23명이 참석했는데 만복대 억새밭에서의 일출장면과 아침햇살에 비쳐지는 억새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짧은 산행(5시간 5분)을 마치고 다음 들머리인 가재마을까지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귀경했다.
7번째 구간(1999.09.18~19. 가재마을→고남산→여원재→매요리)은 17명이 참석했는데 횟수가 진행될수록 점차 참석하는 회원들이 적어져서 고민이 생긴다. 앞전 산행 때 미리 가재마을까지 와서 답사를 했는데 가재마을 입구인줄 알고 버스를 주차시키고 라면까지 맛있게 끓여 먹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보여야 할 우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매우 당황스럽게 우물을 찾았으나 우물은 어디에도 없고, 주위의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어두운 새벽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고 참으로 난감하다. 별수 없이 가정집에 들어가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 보려는 찰라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난다. 여기가 가재마을이 아니라 회덕마을이란다!
「오 마이 갓! 어쩜 지형이 이리도 똑같이 생겼더란 말인가?」
순간 버스기사님에게 급하게 전화를 건다. 버스가 제발 떠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다행히 아직 버스가 떠나지 않아 회원님들을 다시 태우고 가재마을에 도착해서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가재마을인줄 알고 자리 잡고 라면도 끓여 먹고 보무도 당당히 여기가 맞다고 앞장서서 진행하는데 나와야 할 우물은 나오지 않는데 그 황당함이란?….
8번째 구간(1999.10.16~17. 매요삼거리→이실재→복성이재→봉화산→송리)도 7번째 구간처럼 17명이 참석했다. 지금은 억새축제도 열고 있는 봉화산의 억새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9번째 구간(1999.11.20~21. 구상리→봉화산임도→중재→백운산→영취산→무령고개)은 20명이 참석했는데 백운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이 퍽 인상적이었다.
10번째 구간(1999.12.18~19. 무령고개→깃대봉→육십령→남덕유산→영각사)은 다시 17명이 참석했는데 이외로 적설량이 많아 많은 시간이 지체되고 지친 회원님들이 많아 육십령에서 마쳤는데 전순기 고문님과 쌍둥이 아빠(오래돼서 이름이 기억이 안나…), 이연순씨와 함께 남덕유산에서 영각사로 하산했는데 그때 너무 무리를 해서 한동안(5년 세월) 고생 많이 했다. 하지만 남덕유산의 설경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감동으로 남아있다.
11번째 구간(2000.01.15~16. 육십령→남덕유산→삿갓골재→죽천리)은 26명의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처음부터 많은 적설량으로 원래 예정했던 곳으로 하산 못하고 삿갓골재에서 하산을 했다. 처음 나온 김명광씨가 무척 고생했는데 지금은 산매니아로써 활발하게 산행하고 있다. 남덕유산의 설경이 첫 번째 본 광경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너무나 멋지다.
12번째 구간(2000.02.19~20. 황점→삿갓골재→무룡산→횡경재→송계사)은 24명이 참석했다. 산악회 전세버스(대원관광)가 황점에 도착해서 뒤로 후진하다 한쪽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나서 한바탕 소란이 난 기억이 생생하다.
이른 새벽시간 황점마을에 도착한 대원관광버스는 주차장에서 뒤쪽으로 후진하다가 오른쪽 바퀴가 빠져 나오지 않자 삽으로 땅을 파고(겨울철 땅이 얼어서 파지지 않음), 돌을 나르고, 뒤에서 회원 모두가 밀고(이때 버스가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사실을 알음. 꿈적도 하지 않음)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어찌할 바 모른 체 시간이 계속 흘러 나를 애태우게 만들었다. 결국 자키로 바퀴를 들어 올려 바퀴가 겨우 빠져나와 산행을 시작했다. 불과 30여분이 흘렀지만 엄청 춥고 고생한 기억이 생생하다. 횡경재에서 송계사로 하산하면서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13번째 구간(2000.03.18~19. 송계사→횡경재→신풍령→소사고개)은 17명이 참석했다. 특별하게 기억이 나는게 없다.
14번째 구간(2000.04.15~16. 소사고개→덕산재→삼도봉 전 안부→미천리)은 18명이 참석했는데 삼도봉에서의 운해와 일출이 기억이 많이 난다.
삼도봉
15번째 구간(2000.05.20~21. 삼도봉→화주봉→우두령→삼성산→바람재)은 22명이 참석했다. 삼성산에서 바람재로 하산했는데 길이 희미해서 조금 애를 먹었으나 더덕이 많은 것이 기억이 많이 난다.
16번째 구간(2000.06.17~18. 운수리→바람재→형제봉→황악산→괘방산→가성산→눌의산→추풍령)은 19명이 참석했다.
웅석봉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이제 추풍령까지 진도가 나갔다. 무박으로 진행을 하니(지금이야 교통이 많이 좋아져서 당일로도 가능하지만)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매번 적자를 감수해야하는데(영리산악회가 아니고 친목산악회이지만 운영자금이 필요함) 집행부(산행대장)의 한사람으로 도저히 이끌고 갈수가 없어 추풍령부터는 당일 산행으로 변경을 했다.
17번째 구간(2000.08.20. 추풍령→용문산→용문산 안부→용문산기도원)은 대간 시작한지 처음으로 불참해서 몇 명이 참석했는지, 몇 시간을 산행했는지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개인적으론 5년 뒤인 2005년 1월 23일에 이진숙씨하고 종주(추풍령→용문산→국수봉→큰재)를 해서 빠진 구간을 채웠다.
18번째 구간(2000.10.15. 용문산기도원→국수봉→큰재→윗왕실 임도)은 대간 시작한지 가장 적은 인원인 11명이 참석했다. 관광버스회사를 운영하는 신석열씨가 처음으로 참가한 것이 기억이 난다.
19번째 구간(2000.11.19. 윗왕실임도→백학산→개머리재→지기재→신의터재)은 22명이 참석했다. 백두대간 길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구간을 지나서그런지 기억도 희미한데 지기재의 꿀 사과 따먹은 게 기억이 생생하다. 까치밥으로 남겨둔 사과를 따 먹는데 무지 맛있게 먹었다.
20번째 구간(2000.12.17. 신의터재→무지개산갈림길→윤지미산→화령재)은 17명이 참석했다. 새싹산악회는 17명이 한계선인가? 하는 회의감이 몰려온다. 타 산악회에서 온 세 사람이 귀경길 버스 안에서 신나게 놀던 생각이 떠오른다.
21번째 구간(2001.01.14. 화령재→봉황산→비재→무명봉→49번도로)은 12명이 참가했는데 대간 최소인원 참가 신기록을 세웠다.
눈 쌓인 능선과 결빙구간이 자주 나타나서 무척 힘든 산행을 했는데 일부 회원님은 비재(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비포장도로였음)에서 마치고, 나와 몇 명의 회원은 갈령까지 산행하기로 하고 계속 진행을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쪽으로 하산을 하다가 결국 겨울철 짧은 해에 어두컴컴할 때 하산을 해서 미리 하산을 해서 오래 기다린 회원들 님께 누를 끼쳤다.
22번째 구간(2001.02.17~18. 비재→형제봉→속리산(천황봉)→법주사→주차장)은 19명이 참석을 했다.
속리산 구간을 지나가야하기에 당일에서 무박산행으로 돌려 산행했는데 많은 적설량과 천황봉과 문장대 사이 통제를 해서 결국 천황봉에서 법주사로 하산을 했다. 12시간 산행을 했는데 천황봉 오름길이 무척 힘이 들었다. 문병희씨 사모님과 함께 산행을 했는데 힘들어 하면서도 끝까지 종주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와 닿는다.
23번째 구간(2001.03.11. 장암리(시어동)→문장대→밤티재→늘재)은 27명이 참석을 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원래는 천황봉에서 문장대 거쳐 늘재까지 산행을 해야 하는데 통제구간이고 새싹산악회에서 속리산 구간(천황봉~문장대)은 많이 산행을 해서 그 구간은 생략을 하고 시어동에서 문장대로 올라 늘재까지 산행을 했다.
문장대~밤티재 구간의 암릉 길을 재미있게 산행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24번째 구간(2001.03.17. 늘재→청화산→갓바위재→의상동(옥양동))은 원래 무박으로 버리미기재까지 진행을 해야 하는데 무박으로 정했더니 참가 회원님들이 너무 적어서 할 수없이 당일산행으로(늘재~버리미기재 구간을 세 번으로 나눠 산행을 함) 돌렸는데도 11명이 참가했다(최소인원 갱신).
25번째 구간(2001.04.01. 옥양동→의상저수지→조항산→밀재→삼송리)은 20명이 참가해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옥양동에서 의상저수지 거쳐 갓바위재로 올라가야 하는데 봉우리 하나를 지나쳐서 다시 빽하여 갓바위재를 찍고 조항산 거쳐 밀재에서 삼송리로 하산을 했다. 6시간 20분 걸렸다.
26번째 구간(2001.05.06. 삼송리→밀재→대야산→버리미기재)은 25명이 참석했는데 회원들에게 드릴 점심을 준비 못해서(항상 동대문에서 주문하는데 식당주인이 깜박하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문경에 곽이사 부인(신영옥씨)이 있어서 급하게 문경 방앗간 밥을 먹게 된 것이 기억이 생생하다.
27번째 구간(2001.05.20. 버리미기재→장성봉→은치재→은티마을)은 14명이 참석을 했다.
개인적으로 이 구간은 신영옥씨와 한번 산행(1998.12.20 신영옥, 손경미씨 동행)을 해서 두 번째 똑 같은 코스라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28번째 구간(2001.06.03. 은티마을→주치봉안부→주치봉→구왕봉→지름티재→은티마을)은 23명이 참가를 했다.
원래 희양산을 거쳐 성곽갈림길에서 하산할 예정이었다.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데 지름티재에서 텐트치고 주둔하고 있는 봉암사 중(그 당시 지름티재에 근무한 중은 스님이 아니고 완전히 땡 중 이었다)을 만났는데 막무가내로 올라갈 수 없다고 버티는 것이다. 이유인즉 아래에 있는 사찰(봉암사)까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스님들이 공부를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올라가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막는다. 회원 중에 한 사람이 올라가려고 시도하는데 중이 하는 말 「시팔, 올라가지 말라니까 왜 올라가 새끼야?」
욕하는 소리에 격분한 회원님들이 스님에게 왜 욕 하냐고 항의하니 중이 하는 말 「그러니까 올라가지 않으면 욕을 안 할 것 아냐?」하는 반말에 흥분한 일부 회원님들이 중에게 손가락질하며 같이 욕을 해대니 중은 위기위식을 느꼈는지 무전기에 대고 응원군을 요청하고, 잡고 있는 긴 나무작대기로 마구 휘둘러 대는데 마치 조직패거리의 깡패 같은 생각이 들어 할 수 없이 희양산 구간을 포기하고 은티마을로 하산을 했다.
나중에 괴산군청에 문의하니 은치재에서 희양산 구간은 봉암사 사찰 땅이라 우리(괴산군)로써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 해낸 것이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에는 봉암사가 개방(일 년에 한 번 석가탄신일에 일반인에게 개방됨)되기 때문에 이날 빼먹은 희양산을 종주하기로 하고, 29번째 구간을 2002년 5월 19일(음력4.8) 은티마을→성곽갈림길→희양산→지름티재→홍문정→봉암사 코스로 산행을 했는데 나는 개인적인 사유가 있어서 불참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2003년 5월 8일, 역시 석가탄신일에 이진숙씨하고 산행(은티마을→주치봉안부→희양산→성곽갈림길→봉암사)에 나섰는데 동서울터미널에서 연풍 가는 버스를 놓쳐서 수안보 가는 버스를 타고 수안보터미널에 도착한 후, 택시를 이용해서 은티마을에 도착한 후 은치재를 향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 주치봉 안부에 올라섰다. 그 바람에 봉우리 하나(주치봉)를 더 넘었다. 드디어 지름티재에 도착을 하니 이번에도 스님이 텐트치고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스님에게 조용히 그리곤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1/25,000 지형도를 보여주며 이번구간(희양산)이 빠진 구간이라 특별히 날 잡아서(석탄일) 왔고,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이라고 사정을 하니, 스님이 흔쾌히 승낙을 하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희양산을 향해 올라간다.
암릉 구간이라 매우 조심스럽게 올라가 희양산 정상을 향해 진행을 하는데 이거 왠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정상(희양산)에 도착을 해서 즐거운 휴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성곽 쪽에서는 통제를 안 한다는 것이다.
희양산 정상에서 잠시 쉬다 성곽 쪽으로 하산을 한다. 역시 성곽 쪽에는 철망 만 설치되어 있고 스님은 보이질 않는다. 성곽갈림길에서 봉암사 쪽으로 하산을 한다.
봉암사 구경을 하고 마을로 내려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서서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을 보니 백담사에서 마을버스 기다리는 생각이 나서 마을버스 타고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내 포장도로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삼거리에 닿고, 여기에서 지나가는 차 히치하이크하여 가은터미널에 도착해서 서울행버스 타고 무사 귀가하여 산행하기 힘든 구간을 마쳤다.
30번째 구간(2001.06.17. 은티마을→성곽갈림길→시루봉→이만봉→곰틀봉→사다리재→분지교)은 그리 유명한 산도 지나가지 않는 것에 비해 많은 인원인 30명이 참석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사다리재에서 분지리 안말로 하산을 했는데 안말까지는 도로 폭이 좁아 대형버스는 진입을 못해 분지교까지 한참을 내려가야 했던 것이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길을 넓혔는지 궁금하다.
31번째 구간(2001.07.01. 분지교→안말→사다리재→백화산→황학산→이화령)은 24명이 참석을 했다. 드디어 이화령까지 진입을 했는데, 분지교에서 안말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트럭을 수배해서 시간을 단축한 것이 기억이 남는다.
32번째 구간(2001.07.15. 이화령→조령산→제3관문(문경새재, 조령)→고사리)은 서울지방에 37년만의 폭우가 쏟아져 13명이 참가를 해서 우중산행에 대비해 출발을 했으나 괴산, 문경지방은 날씨가 뜻밖에도 무척이나 맑았다.
이 구간도 예전에 답사한 구간(내가 대간을 처음으로 접한 구간[1996.10.12~13. 이화령→조령산→조령→월항삼봉→하늘재])이라 재미를 못 느꼈다.
문경새재(조령)에서 고사리로 하산하는데 예전에 과외한 생각이 나서 쓴 웃음을 웃었다. 고사리에 하산을 하니 주차장이 생기고 버스 노선도 생긴 것과 문경새재에도 매표소가 새롭게 생긴 것이 기억이 난다.
33번째 구간(2001.08.19. 고사리→제3관문→마폐봉→월항삼봉→하늘재→미륵사지주차장)은 32명이 참가를 했다.
예전에 없던 매표소(문경새재 도립공원 매표소)가 생겨서 매표소 가기 전에 적당한 곳에서 치고 올라간 것이 생각이 난다.
34번째 구간(2001.09.02. 하늘재→포암산→꼭두바위봉→부리기재→밖마을)은 22명이 참석했다.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게 없다.
35번째 구간(2001.09.16. 밖마을→부리기재→대미산→차갓재→안산다리)은 12명이 참석을 해서 차갓재까지 진행을 했는데 전순기 고문님 혼자는 작은 차갓재까지 진행을 하고 대중교통을 타고 귀가했다.
36번째 구간(2001.10.21. 안산다리→차갓재→작은차갓재→황장산→벌재)은 19명이 참석을 해서 벌재까지 진행을 했다.
37번째 구간(2001.11.04. 벌재→문봉재→저수재→시루봉→싸리재→남조리)은 15명이 참석했다. 싸리재에서 남조리 단양유황온천으로 하산을 했는데 온천은 영업중지중이었다.
38번째 구간(2001.11.18. 남조리→싸리재→묘적봉→도솔봉→사동리)은 22명이 참석을 했는데 처음 참가한 신혜정씨가 산행 중 부상으로 많이 지체해서 결국 어두울 때 하산을 했는데 사동리 거의 다 와서 임도(비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바리게이트에 넘어져서 무전기를 분실한 것이 기억이 생생하다. 박정호씨가 개울 홈통에 빠져서 타박상을 입은 것도 기억에 생생하다.
39번째 구간(2001.12.02. 창락초교→양장봉→도솔봉→삼형제봉→죽령)은 14명이 참석을 했는데 들머리에서 사과를 따 먹던 기억과 도솔봉의 웅장함이 가슴 벅차다. 드디어 죽령까지 진도가 나갔다.
40번째 구간(2001.12.15~16. 죽령→소백산→고치령→좌석리)은 소백산 종주라 당일산행으로 하면 어프로치 구간이 길어서 무박으로 산행에 나섰는데 그래도 18명이나 참석을 했다.
높은 산봉우리에만 눈이 조금 있을 뿐 그 밖의 산봉우리는 낙엽만 수북이 쌓여있어 종주하기 쉬워서 선두팀은 10시간 걸렸다. 지금은 고치령(풍기방향)이 포장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좌석리까지 걸어 내려가야 했다.
백두대간 산행에 참가하는 회원 수가 너무 적어 적자를 면하기 힘들어 결국 잠시 중단됐다가 대형버스(관광버스) 대신 전재윤씨 봉고 승합차(이스타나)로 41번째 대간을 이어갔다.
41번째 구간(2002.05.04~05. 고치령→마구령→선달산→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은 봉고승합차로 운영했는데 10명이 참가했다.
11시간 10분의 산행을 마치고 귀경길에 부석사 근처에서 사람(아줌마)이 우리 차에 달려드는 바람에 차량 앞 유리가 파손되고 아줌마가 부상(경미해서 천만다행이었다)당하는 사건이 기억이 생생하다.
42번째 구간(2002.09.28~29. 도래기재→구룡산→신선봉→태백산→화방재)도 봉고 승합차로 운영을 했고, 6명이 참석했다.
비가 내리는 우중산행으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전순기 고문님과 처음 나오신 연세 드신 아저씨의 젊은 사람 못지않은 체력에 고개를 저은 생각이 절로난다.
43번째 백두대간은 2003년 새해 일출 산행으로 잡아서 대형버스(관광버스)로 함백산 일출산행으로 계획해서 시행했다.
2002.12.31~2003.01.01 무박으로 대간 코스(화방재→함백산→싸리재→피재)로 진행을 했다. B팀은 싸리재에서 하산을 했고, 별도로 모집한 관광팀은 추암일출을 보고 덕구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피재에서 합류하여 귀경했다. 실로 오랜만에 만차(44명)여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9시간 산행했는데 함백산 7부 능선에서 새해 일출을 봤는데 너무나 장엄했다.
어렵게 피재까지 진도를 나간 백두대간은 이후 중단되었다. 난, 하루빨리 대간을 완주하기위해 이후 대중교통과 자가용을 이용하여 남은 구간을 완주했다. 2005년 12월 11일 대간을 시작한지 9년 2개월, 75회 만에(몇 군데 제외하고는 거의 두세 번씩 종주함) 마무리 지었다.
개인적으로 백두대간을 완주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으나 이제 산악회가 문제였다. 내가 새싹산악회 산행대장(2001년~2006년) 시절 백두대간을 시작했으니 결자해지 차원에서 마무리 하는 게 도리이고 대장시절에 끝을 보고 싶어 다시 대간 종주를 추진했다.
그래서 4년 3개월 만에 다시 대간을 재개했다.
44번째 구간(06.03.25~26. 피재→덕항산→댓재)은 대형버스로 진행했는데도 불구하고 16명이 참가하여 또 다시 적자산행을 해서 다음 구간부턴 다시 봉고승합차로 진행을 했다.
난, 이 구간을 두 번씩이나 종주를 해서 관광팀을 이끌고 추암해변과 삼척온천 환선굴 관광코스를 진행했는데 추암해변 찾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45번째 구간(06.04.22~23. 댓재→두타산→청옥산→백봉령)은 봉고승합차로 진행을 해서 8명이 참석을 했다.
난, 이 구간 역시 두 번을 종주해서 B팀(댓재→ 추암→ 천은사→ 쌍용채석장(저시고개)→ 쉰움산→ 두타산→ 박달령→ 무릉계곡)을 진행했다. 다행히 하산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46번째 구간(06.04.29~30. 백봉령→석병산→닭목재) 역시 봉고승합차로 7명이 참석을 했다.
전순기 고문님과 전회장님 형님이신 전재복님이 종주하고 나머지는 괘방산(안인진리→삼우봉→괘방산→정동진역)산행을 했는데 날머리에서 산불감시원의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전을 벌렸다. 이후 강릉 가서 회를 사다가 닭목재로 이동해서 대간 종주하신 두 분과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귀경했다.
47번째 구간(06.05.27~28. 닭목재→대관령→소황병산→진고개)도 전재윤 회장님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봉고승합차로 왕복 운전하시며 먹거리까지 챙기고 손수 요리까지 하심에 늘 감사드립니다. 비 예보에도 불구하고 8명이 참석을 했다.
이번엔 고문님 혼자 종주하시고, 나머지는 나물산행하려고 닭목재에서 전후치로 이동을 했다. 전후치 들머리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약한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나물산행(철갑령)을 강행을 했는데, 내가 엉뚱한 곳으로 하산한 것은 상관이 별로 없는데 전회장님이 반대쪽으로 하산하는 바람에 일찍 하산한 나머지 분들이 추위에 엄청 떨었는데 결국 곽이사가 실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그나마 고생을 덜했다. 그 실력이란 잠긴 자동차 문, 철사로 여는 방법이다.
진고개로 이동을 하니(그제 서야 비가 그침) 도착 하실 줄 알았던 고문님도 아직 도착을 안 하고 있어 조금은 불안했는데 결국 노인봉 근처에서 잠시 안개 빗속에서 헤맸다는 것이다.
귀경길에 홍천 내면 소재지인 창촌리에서 닭갈비를 먹고 귀경했다.
48번째 구간(06.06.24~25. 진고개→두로봉→구룡령)도 봉고승합차로 운영을 했는데 8명이 참석을 했는데, 늘 참석해주시는 곽이사, 진희씨, 고문님, 회장님, 최승철 부회장님, 이진숙 감사님, 이용석님께 감사드립니다.
역시 고문님 혼자 종주하시고, 지원조는 조봉 나물산행을 하려고 미천골자연휴양림으로 이동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더덕 몇 뿌리 수확을 했는데 난 구경도 못했으니 실력의 차이인가?
49번째 구간(06.08.26~27. 구룡령→갈전곡봉→조침령→단목령)은 윤명규 명예회장님과 유춘식씨(처음 참가)가 참가해서 고문님과 함께 대간 종주를 했다. 두 분은 조침령까지 종주를 하고, 고문님은 단목령까지 진행을 했다.
지원조는 조침령에서 더덕을 수확하려고 근처를 수색했는데 조금 캔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난 허탕만 쳤다.
단목령에서 점봉산 거쳐 한계령까지는 자연휴식년제 출입금지 지역이고, 새싹산악회에서 산행을 한 구간이라 생략을 하고 다음 구간은 한계령부터 이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름철 집중호우로 한계령 도로가 물폭탄을 맞아 유실되어 한계령부터 산행이 불가능하여 오색부터 산행을 했다. 역시 한계령~대청봉 구간은 새싹산악회에서 몇 번씩 가본 구간이다. 50번째부터는 설악산 구간이라 대형버스로 진행을 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50번째 구간(06.09.02~03. 오색→대청봉→공룡능선→마등령→설악동)은 무박으로 29명이 참석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많은 인원이 함께 했다.
개인적으로 수확이라면 대청봉에서 소청으로 우회 하지 않고 대간 길로 진행을 해서 수렴동대피소로 진행을 한 것이 큰 수확이다.
51번째 구간(06.10.14~15. 미시령→황철봉→마등령→오세암→백담사→용대리)은 35명이 참석을 했다.
예전에 황철봉 갈 때 생각을 해서 선두지휘를 해야 하는 나로써 어두울 때 황철봉 너덜길을 통과하는 것이 심적 부담이 컸는데 다행히 형광막대를 설치되어 있어서 어두울 때 쉽고 빠르게 황철봉 너덜구간을 통과했다.
진부령
진부령
진부령
드디어 종착 구간인 52번째 구간(06.12.02~03. 미시령→신선봉→마산→진부령)은 30명이 참석을 했다.
전날 일기예보로는 매서운 한파와 바람이 매우 세다고 예보가 되어있었는데 역시 미시령에 도착을 하니 바람세기로 유명한 소백산 바람이 울고 갈 지경이었다. 결국 몇 사람은 중도 포기를 하고 되돌아갔고 남은 사람도 화암재에서 화암사로 탈출을 하고, 6명만이 종주를 했다.
나 역시 화암사로 탈출을 해서 척산온천에서 온천하고 진부령에 합류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잠시 쉬고 있으니 종주한 6명이 도착을 한다. 축하해준다. 이날 새싹산악회 700회 정기산행과 겹쳐 산행 후 서울 노유동에서 대간 쫑 파피를 행복하게 한 후 대간을 완결 지었다.
대간을 완주하신 이진숙 감사님, 전순기 고문님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으로 84번째 만에 대간을 개인적으로, 단체로 마무리 지웠다.
새싹산악회 백두대간 종주 기록표
1999.03.13~2006.12.03[총5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