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전화 통화를 마친 뒤 혼자 중얼거린 말이었다.
‘게다가 유례 없는 소설 불황이지 않은가. 일년 소설 농사 지어 봤자 적자가 뻔하니 손을 대기도 겁난다. 농부들이 수확철에 수확을 포기하고 밭을 갈아 엎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내 중얼거림은 쉽게 그치질 않았다. 친구가 자꾸 소설 어쩌고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였다. 마흔 살 넘어 시작된 초등학교 동창회에도 한 번 나오지 않은 친구였다. 아, 참, 걔는 뭐해? 어째서 한 번도 안 나오는 거지?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누군가가 걔 원주에 살아, 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며, 대답한 동창은 내게 그 친구의 5년 전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게 벌써 세 해 전이었으니 8년 된 전화번호였다.
지난 주에 횡성에 갈 일이 있어서 그 오래된 전화번호를 돌려 봤더니 친구가 받았다. 친구는 대뜸 내가 쓴 소설을 모두 읽었노라며 원주에 오면 꼭 연락을 하라고 했다. 소설가 선생과 밥 한 끼 함께 먹는 영광을 달라고 했다. 나도 물론 그와 밥이든 차든 함께할 작정이었다.
저녁 행사 때문에 횡성 숙소에서 자고 다음날 점심 때 원주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전화 통화 내내 소설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어쩌고 하면서.
마침내 그와 함께 원주의 한 식당에서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나는 난감하고 민망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소설가 선생과 밥 한 끼 함께 먹는 영광이라느니 소설가들을 대단하게 생각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아무래도 헛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에 한정식이라는 것도 그랬지만 반찬이 마흔 가지도 넘었다. 밥과 국을 빼고 꼭 마흔 두 가지였다. 너무 많아 눈으로 세 봤다. 누가 밥값을 내든 설렁탕이나 뭐 그런 것쯤을 염두에 두었던 나는 그가 내민 산해진미 앞에서 갑자기 주상전하라도 된 것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원주 근교에서 몇 마리 소를 먹인다는 친구의 겉늙은 모습으로 보건대 어쩌면 자신도 그런 밥상을 처음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젓가락을 집는 손등과 손톱만 봐도 우리는 대충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야, 뭘 이렇게나!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소설가라는 게 친구로부터 이 만큼의 대접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알고 보면 그거 다 허명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별볼일 없는 가난한 직업이라니까, 라고.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 진지함마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소설가 친구에 대한 터무니없는 존경과 대접이 낯설고 부담스러워 나는 식사 내내 허튼 웃음과 너스레로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친구는 요지부동, 말을 고르는 데 신중했고 몸가짐마저 삼갔다. 아, 이런 난센스, 이런 해프닝이라니. 복잡미묘한 심중을 감추느라 나는 음식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중엔 웃음마저 참아야 했다.
좋은 소설 많이 써라. 헤어지면서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원주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엉뚱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나도 모르게 혼자 실실 웃었다. 그러다 양평에 다다라서야 나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소설과 소설 쓰는 일에 대해, 그 친구만큼 경건했는가. 엄살과 교만과 비겁함으로 중년의 계절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건 아닌가.
나도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 양수리의 청명한 가을물빛 위로 친구의 마지막 말이 파문을 지으며 흩어졌다. 다시 원주로 돌아가 친구를 힘차게 부둥켜 안고 싶었다.
구효서(소설가)
첫댓글 그 친구분은 선생님이 무척 자랑스러웠을 거에요. 아름답네요. 그 친구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