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Title("http://www.boseong51.net/user/ftp/Java/", "viewTitle.swf", 426, 40,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 이상 · 김해경 · 99 주년", "/88", "left", "0xFFF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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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로 시작해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로 막을 내리는 소설 ‘날개’의 소설가이자 ‘권태’의 수필가, ‘오감도’와 ‘거울’의 시인 이상(李箱), 김해경이 1937년 오늘(4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결핵 으로 콜록콜록 피를 토하고 숨졌습니다. 경찰에 의해 거동수상자로 체포돼 돌보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조선의 천재’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李箱, 1910년 9월 14일 - 1937년 4월 17일)은 한국의 근대 작가이다. 강릉 김씨이고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절벽- 이상(1910~37)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시인 이상. 그를 말할때는 항상 앞에 '천재'라는 단어가 붙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는데는 대체로, 그의 파격적이며 난해한 시들과 괴짜에 가까운 삶(+요절)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곤 한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음력 8월 20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린 김연창(金演昌)씨였다. 해경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렇게 백부의 양자가 된 것은 해경이 태어날 무렵부터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이었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지만, 백모는 이와 달리 증오와 소외를 맛보게 했다. 그는 권위적인 양부모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 저변에 나타나는 불안의식의 뿌리이다. 이상은 시대의 불행과 환멸을 자양분으로 초현실주의 문학을 키워나갔다.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技手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근무시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1933년 3월 결핵의 객혈로 건축技手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에 들어가 요양했다. 이때부터 그는 결핵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듯한 봉두난발, 짙은 갈색 나비 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중산모를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스틱을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대다가 느닷없이 "카카카.!"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그들이 백천 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에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李箱.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이상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파는 고학을 하며 어렵게 보성고보를 졸업한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 (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 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이상이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 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다. 이상은 폐결핵 요양 차 구본웅과 함께 백천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술집 여급 금홍을 만난다. "몇 살인구?" "스물 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이는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세, 마흔? 서른 아홉?" 이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히고,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이상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이상은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었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들인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단골이었다.
친구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식에 사회자로 참석한 이상. (동그라미 아래) 이들 부부는 이상과 더불어 <환시기> 삼각관계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 P군은 소설가 박태원이다. 금홍의 문란한 남자 관계를 방임. 방조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사흘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그렇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금홍이는 집에 없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린 것이다. "제비"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았다.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이상이 20년을 살았던 집. 4년 전에는 이 집이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김수근 문화재단’이 어렵게 매입했다. 김원 재단 이사장(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은 이 집을 원상 복원해서 ‘이상 기념관’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가정(家庭)
문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나는 우리집 내문패 앞에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멸해간다. 식구야 봉한 창호 어데라도 한구석 터놓아다고 내가 수입되어 들어가야 하지않나.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뾰족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우리집이 앓나 보다. 그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도다. 수명을 헐어서 전당 접히나 보다. 나는 그냥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 달렸다.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1936년2월<카톨릭청년>에 발표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을 결행했다. 1937년 2월, 사상이 불온하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리고 그해 4월 17일 오전 4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6년 7개월...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귀국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돌보는 이 없어 훗날 유실되고 말았다.
“5월 돌아온 유해는 다시 한 달쯤 뒤에 미아리 공동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어머니께서 이따금 다니며 술도 한잔씩 부어놓고 했던 것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 한줌 뼈나마 안주할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삼촌 석비 앞에 주과가 없는 석상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던 오빠 자신은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으니 남은 우리들의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김옥희 ‘오빠 이상’-이상 전집에서)
서울 송파구 보성고교에 설치되어 있는 이상 문학비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이상의 마지막 말 한마디.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卞東琳) 여사(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상과 아내 변동림 즉 김향안(金鄕岸 1916~2004), 김환기 화백의 가계도를 발견하고 수수께끼 한가지를 풀었다. 오래전 김환기 화백의 부인이자, 환기 미술관을 설립한 김향안여사가 이상의 아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이복 이모인 김향안을 구본웅이 소개하여 이상의 부인이 되었다. 이상이 죽은 후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였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구본웅의 외손녀이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자 이모부인 이상의 초상화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金鄕岸 1916~2004)
구본웅은 2살 때 척추를 다치고 곱추가 된 화가로 별명은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렸다. 변동림(卞東琳)은 서양화가 具本雄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동생으로 그 시대에 경성여자보통고등학교(경기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문학활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1936년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3개월 만에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4월 도쿄[東京]에서 뇌출혈로 사망한 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하였다. 그녀는 이상, 김환기라는 두 천재의 동반자였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결혼 하면서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저서로는 수필집 《파리》 《우리끼리의 얘기》 《카페와 참종이》와 김환기의 전기(傳記)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가 있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이상(李箱)'이라는 필명 유래
이상에게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생인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구본웅(具本雄).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학교에 꾸준히 나가지 못해 나이는 이상보다 4살이나 위지만 같은 학년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꼽추이고 4살이나 나이가 많은 구본웅과 아무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상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상은 구본웅을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렇게 그들은 특별하고도 아주 진지한 우정을 쌓아갔다.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입학의 축하선물로 구본웅은 사생상(寫生箱)을 선물했다. 사생상이란 스케치박스를 말한다. 그간 사생상을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던 이상이 사생상을 선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구본웅에게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필명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箱자를 넣겠다고 흥분했다.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구본웅도 흔쾌히 동의하자 김해경은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그 성씨를 찾기로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楊)씨, 양(梁)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했다. 김해경은 그 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라 생각했고 구본웅도 그 절묘한 배합에 감탄했다.
이상의 연애에 관해
<금홍및 이상의 애인들의 공통점>
그를 키워준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자 그는 적선동의 가난을 정리한 후 효자동으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 그러나 그의 한량기질이 가만히 잠들어 있을 리 없었다. 사흘을 못 참고 장고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인 금홍을 만났다. 그는 금홍에 대해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 잔느 뒤발을 닮은 데다가, 모든 남자들이 한 번 정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여자'라 찬사를 늘어 놓았다. 여자에 대한 호평에 박한 그가 금홍에 대해 이 정도로 평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예쁜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녀의 매력에 금새 도취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금홍을 비롯해 이상은 전생애를 통해 여러 여급과 사랑을 나누었다. 금홍과 헤어진 다음 만났던 권순희 역시 미모를 자랑하는 여급이었고, 또 유일한 정식 아내였던 변동림도 이상의 묵인 하에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켰고, 후에 여급으로 일했다. 이상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이들은 그에게 잠시 동안 위안을 주는 여급일 뿐, 그를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반려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급하고만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애인과 다른 남자들과이 관계를 방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대한 답은 그가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말해 그는 여자를 가지려고도,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통남자들이 바라는 열녀형의 양처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바랬던 것은 생활의 안정이나, 안정된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자들에게 문학 소재 혹은 아이디어를 원했다. 이들은 실행활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그가 문학 속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소설과 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금홍은 '날개', '봉별기', '지주회시' 등에, 또 마지막 여자였던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 정상적인 직업의 여성들을 택했고, 또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던 그는 그녀들의 외도를 묵인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상의 여자들은 그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할정도로 너그러웠고 그중에서도 금홍은 그와 이러한 성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그의 사랑을 비교적 오랫동안 독차지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금홍과 문학에서 권순희와 술로>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조선 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 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 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서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아내를 맞아들인 방탕아, 이상>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어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봉별기 (逢別記) 全文 - 이상 (李箱)
1
스물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新開地)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여관 한등(寒燈)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장고 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錦紅)이다. "몇 살인고?" 체대(體大)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 살? 많아야 열아홉 살이지 하고 있자내까. "스물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쎄 마흔? 서른아홉?" 나는 그저 흥! 그래 버렸다. 그리고 팔짱을 떡 끼고 앉아서는 더욱더욱 점잖은 체 했다. 그냥 그날은 무사히 헤어졌건만――― 이튿날 화우(畵友) K군이 왔다. 이 사람인즉 나와 농(弄)하는 친구다. 나는 어쩌는 수 없이 그 나비 같다면서 달고 다니던 코밑 수염을 아주 밀어버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가 급하게 금홍이를 만나러 갔다. "어디서 뵌 어른 같은데." "엊저녁에 왔던 수염 난 양반 내가 바루 아들이지. 목소리꺼지 닮었지?" 하고 익살을 부렸다. 주석이 어느덧 파하고 마당에 내려서다가 K군의 귀에 대이고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어때? 괜찮지? 자네 한번 얼러보게." "관두게, 자네가 한번 얼러 보게." "어쨌든 여관으로 거고 가서 짱껭뽕을 해서 정허기루 허세나." "거 좋지." 그랬는데 K군은 측간에 가는 체하고 피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부전승으로 금홍이를 이겼다. 그날 밤에 금홍이는 금홍이가 경산부(經産婦)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언제?" "열여섯 살에 머리 앉어서 열일곱 살에 낳았지." "아들?" "딸." "어딨나?" "돌만에 죽었어." 지어 가지고 온 약은 집어치우고 나는 전혀 금홍이를 사랑하는 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하나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금홍이에게 노름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금홍이가 내 방에 있거나 내가 금홍이 방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대신――― '우'(禹)라는 불란서 유학생의 유야랑(遊冶郞)을 나는 금홍이에게 권하였다. 금홍이는 내말대로 우씨와 더불어 '독탕'에 들어갔다. 이 '독탕'이라는 것은 좀 음란한 설비였다. 나는 이 음란한 설비 문간에 나란히 벗어 놓은 우씨와 금홍이 신발을 보고 언짢아하지 않았다. 나는 또 내 곁방에 묵고 있는 C라는 변호사에게도 금홍이를 권하였다. C는 내 열성에 감동되어 하는 수 없이 금홍이 방을 범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금홍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우(禹), C 등등에게서 받은 십 원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놓고 어리광 섞어 내게 자랑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백부님 소상 때문에 귀경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정자 곁으로 석간수가 졸졸 흐르는 좋은 터전을 한군데 찾아가서 우리는 석별의 하루를 즐겼다. 정거장에서 나는 금홍이에게 십 원 지폐 한장을 쥐어 주었다. 금홍이는 이것으로 전당잡힌 시계를 찾겠다고 그러면서 울었다.
2
금홍이가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 과거를 묻지 안하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 금홍이는 겨우 스물한 살인데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 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금홍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 살 먹은 소녀로만 보이고 금홍이 눈에 마흔 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기실 스물세 살이오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남은 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현란(絢爛)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세월이――― 1년이 지나고 팔월,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 금홍이에게는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왔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잠만 자니까 금홍이에게 대하여 심심하다. 그래서 금홍이는 밖에 나가 심심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심심치 않게 놀고 돌아오는――― 즉 금홍이의 협착한 생활이 금홍이의 향수를 향하여 발전하고 비약하기 시작하였다는 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게 자랑을 하지 않는다. 않을 뿐만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금홍이로서 금홍이답지 않은 일일밖에 없다. 숨길 것이 있나? 숨기지 않아도 좋지. 자랑을 해도 좋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금홍이 오락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 P군은 나를 불쌍하다고 그랬던가시피 지금 기억된다. 나는 또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즉 남의 아내라는 것은 정조를 지켜야 하느니라고! 금홍이는 나를 내 나태한 생활에서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우정 간음하였다고 나는 호의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흔히 있는 아내다운 예의를 지키는 체해 본 것은 금홍이로서 말하자면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실없는 정조를 간판 삼자니까 자연 나는 외출이 잦았고 금홍이 사업에 편의를 돕기 위하여 내 방까지도 개방하여 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웃목에다 벗어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 이렇게도 못나게 홀아비가 된 내게 몇 사람의 친구가 금홍이에 관한 불미한 꼬심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종시 나는 그런 취미를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금홍이와 남자는 멀리 과천 관악산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내가 쫓아가서 야단이나 칠까봐 무서워서 그런 모양이니까 퍽 겁쟁이다.
3
인간이라는 것은 임시 거부하기로 한 내 생활이 기억력이라는 민첩한 작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달 후에는 나는 금홍이라는 성명 삼 자까지도 말쑥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두절된 세월 가운데 하루 길일을 복하여 금홍이가 왕복엽서처럼 돌아왔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랬다 금홍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초췌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맥주와 붕어과자와 장국밥을 사 먹여 가면서 금홍이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금홍이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고 울면서 나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나도 그만 울어 버렸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 달 지간이나 되지 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한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한에도 위로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양의 아래 금홍이와 이별했더니라. 갈 때 금홍이는 선물로 내게 베개를 주고 갔다. 그런데 이 베개 말이다. 이 베개는 2인용(二人用)이다. 싫대도 자꾸 떠맡기고 간 이 베개를 나는 2주일동안 혼자 베어 보았다. 너무 길어서 안 됐다. 안 됐을 뿐 아니라 내 머리에서는 나지 않는 묘한 머릿기름 땟내 때문에 안면이 적이 방해된다. 나는 하루 금홍이에게 엽서를 띄웠다.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고. 금홍이는 와서 보니까 내가 참 딱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역시 며칠이 못가서 굶어 죽을 것 같이만 보였던가보다. 두 팔을 부르걷고 그날부터 나서 벌어다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오케이." 인간천국――― 그러나 날이 좀 추웠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안일하였기 때문에 재채기도 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두 달? 아니 다섯 달이나 되나보다. 금홍이는 홀연히 외출했다. 달포를 두고 금홍이 '홈씩(향수병)'을 기대하다가 진력이 나서 나는 기명집물을 두들겨 팔아 버리고 21년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와 보니 우리 집은 노쇠했다. 이어 불초 이상은 이 노쇠한 가정을 아주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 동안 이태 가량――― 어언간 나도 노쇠해 버렸다. 나는 스물일곱 살이나 먹어 버렸다. 천하의 여성은 단소간 매춘부의 요소를 품었느니라고 나 혼자는 굳이 신념한다. 그 대신 내가 매춘부에게 은화를 지불 하면서는 한번도 그네들을 매춘부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이것은 내 금홍이와의 생활에서 얻은 체험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이론같이 생각되나 기실 내 진담이다.
4
나는 몇 편의 소설과 몇 줄의 시를 써서 내 쇠망해 가는 심신 위에 치욕을 배가하였다. 이 이상 내가 이 땅에서의 생존을 계속하기가 자못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여하간 허울 좋게 말하자면 망명해야겠다. 어디로 갈까.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동경으로 가겠다고 호언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에 관한 전문공부를 하려 간다는 등 학교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 단식인쇄술(單式印刷術)을 연구하겠다는 등 친한 친구에게는 내 오개 국어에 능통할 작정일세 어쩌구 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까지 험담을 탕탕 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보다 그러나 이 헛선전을 안 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여하간 이것은 영영 빈 털털이가 뵈어 버린 이상(李箱)의 마지막 공포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겠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여전히 공포를 놓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자니까 내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다. '긴상'이라는 이다. "긴상(이상도 사실은 긴상이다) 참 오래간만이슈. 건데 긴상 꼭 긴상 한 번 만나 뵙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긴상 어떡허려우." "거 누군구. 남자야? 여자야?" "여자니까 일이 재미있지 않느냐 그런 말야." "여자라?" "긴상 옛날 옥상." 금홍이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나타났으면 나타났지 나를 왜 찾누? 나는 긴상에서 금홍이의 숙소를 알아 가지고 어쩔 것인가 망설였다. 숙소는 동생 일심(一心)이의 집이다. 드디어 나는 만나보기로 결심하고 일심이 집을 찾아가서 "언니가 왔다지?" "어유―――아제두, 돌아가신 줄 알았구려! 그래 자그만치 인제 온단 말씀유, 어서 오슈." 금홍이는 역시 초췌하다. 생활 전선에서의 피로의 빛이 그 얼굴에 여실하였다. "네눔 하나 보구져서 서울 왔지 내 서울 뭘 허려 왔다디?" "그리게 또 난 이렇게 널 찾어오지 않었니?" "너 장가 갔다더구나." "얘, 디끼 싫다. 그 육모초 겉은 소리." "안 갔단 말이냐, 그럼?" "그럼." 당장에 목침이 내 면상을 향하여 날라 들어왔다. 나는 예나 다름이 없이 못나게 웃어 주었다. 술상을 보아왔다. 나도 한잔 먹고 금홍이도 한잔 먹었다. 나는 영변가(寧邊歌)를 한마디하고 금홍이를 육자백이를 한마디했다. 밤이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의 은수저로 소반 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해설】 이상(李箱)의 자전적 일인칭 단편소설. 1936년 12월호 [여성]지에 발표되었다. 작자는 1936년에 이르러 창작 경향이 시에서 소설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이 해에 <날개> <종생기(終生記)> <봉별기> <지주회시(蜘蛛會豕)> <실화(失花)> 등의 대표적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로 제목 ‘봉별기(逢別記)’는 첫 여인인 금홍(錦紅)과의 ‘만남(逢)에서 헤어지기(別) 까지의 기록’이란 뜻을 갖는다. 23세 3개월인 ‘나’ 이상(李箱)이 폐병 요양차 B온천장으로 가서 작부 금홍(錦紅)을 만나 동거하고, 이별과 동거를 거듭하면서 끝내는 다시 “작부가 된 그녀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영원히 헤어지기로 서로 합의를 본다”는 그의 첫 아내 금홍과의 생활 경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이상이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난 후,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 구본웅(具本雄)과 요양차 백천(白川) 온천에 가서 기생 금홍(본명 蓮心)과의 만남에서부터 헤어지기까지의 전말을 그리고 있다. 결핵과, 금홍과의 결혼 생활 3년은 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으므로, 이것을 다룬 <봉별기> 역시 이상 문학의 현실적 측면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개관】 ▶배경 : 1930년대 한적한 온천 도시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 : 자의식의 과잉으로 인한 지식인의 자학적 삶. 【등장인물】 ▶금홍 : ‘나’와 결혼한 비도덕적인 기생 ▶나 : 폐병에 걸린 매우 무기력하고 연약한, 자의식에 빠진 남자
【줄거리】 『23세 3개월인 ‘나’ 이상(李箱)은 폐병 요양차 B온천장으로 가서 작부 금홍(錦紅)을 만나 동거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금홍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 때문에 현재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더니, 외출이 잦아지고 마침내 종적을 감춘다. 2개월 후 금홍이 뜻밖에 집에 돌아오더니 합의 이별 선물로 2인용 베개를 주고 또 나간다. 나는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와달라는 엽서를 금홍에게 보내고 금홍은 다시 돌아온다. 그 후 금홍은 나를 5개월 동안 먹여 살리다가 또 집을 나간다. 집에 돌아 온 나는 금홍을 잊고 지내는데, 술자리에서 긴상이 금홍의 소식을 전해준다. 나는 망설이다가 금홍을 찾아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놀다가 다시 헤어지기로 합의를 본다.』
『스물세 살인 나는 폐결핵 약을 지어 들고 요양차 온천으로 간다. 거기에서 금홍(錦紅)이를 만난다. 금홍이는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으나, 나는 금홍이를 사랑하는 데 열중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불란서 유학생 우(寓)를 금홍이에게 권하여 ‘독탕’에 같이 들게 하고, C라는 변호사에게도 권한다. 금홍이는 우(寓), C에게서 받은 십 원 지폐를 자랑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다. 나는 금홍이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1년 8개월 뒤에 금홍이는 다시 외도를 한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정조를 지키지 않는 것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이해한다. 금홍이는 이런 남편 주위에서 왕복 엽서처럼 왔다갔다 한다. 나는 젤제를 잃은 삶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고 중태에 빠진다. 그 소식을 듣고 금홍이가 와서 병구완을 한다. 그리고는 금홍이는 집을 나가고 둘이는 마침내 헤어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뒤 금홍이가 서울로 찾아오고 나는 술상 앞에서 영변가를, 금홍이는 육자배기를 부르면서 이별을 한다.』
【감상】 이 작품은 이상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실제로 한때 폐병을 앓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천 온천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 연심이를 알게 되어 애정을 갖는다. 그녀는 뒤에 이상이 경영하는 다방 ‘제비’의 마담이 되었고, 그 밖에도 상당한 이야기를 뿌린 바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연심이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다. <봉별기>는 이상의 소설 가운데 가장 쉽게 읽혀지는 작품으로, 대체로 평범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잠재의식을 표출시킨 부분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지문과 대화도 아주 명쾌하게 구별되어 있다. <날개>와 함께 기생 연심과의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이긴 하지만, <날개>가 ‘나’와 ‘아내’의 자의식의 갈등을 그린 것이라면 이 <봉별기>는 작품 속의 금홍과의 만나고 헤어짐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금홍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성(常識性)에 지배된 인간이어서 수시로 거짓말을 하고, 간음(姦淫)을 하고, 출분(出奔)을 한다. 그러나 이 부정하고 불성실한 금홍을 ‘나’는 너그럽고 따뜻한 관용의 태도로 맞는 것이다. ‘금홍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초췌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맥주와 붕어과자와 장국밥을 사 먹여 가면서 금홍이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금홍을 측은하게 보는 ‘나’는 일단 헤어진 금홍이가 다시 돌아올 때에도 너그럽게 맞아준다. ‘금홍이는 역시 초췌하다. 생활 전선에서의 피로의 빛이 그 얼굴에 여실하였다.’ 라면서 아내의 고독과 피로를 이해한다. 혐오할 만한 존재인 금홍, 그러나 ‘나’는 그 존재를 차분하고 정답게 대해 주는 것이다. 출분(出奔)한 금홍이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깊은 밤에 술을 마신다. 금홍은 육자배기를 부르고, 나는 영변가를 한마디 한다. 구슬프면서도 괴로운 대좌(對坐)이다. 삶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 앞에서 떠는 약하디약한 두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의 따뜻함과 차분함은 그렇다고 간음한 아내를 용서하는 관용은 아니다. 나와 전연 별개로 구분되는 금홍에 대한 동정과 유화(宥和)의 상태, 이해의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이상 : 소설 <봉별기(逢別記)> | http://bluefilm75.egloos.com/16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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