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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지 - 창원 팔용동 공구거리, 가구거리
박미영
거리로 들어서다
옛날 골목은 없다
‘골목’ 하면 슬레이트 지붕과 칠이 벗겨져 부끄러운 듯 마주보고 있는 대문들, 골목만큼 나이를 먹어 ‘청춘을 돌려다오’ 노래하는 듯한 담벼락이 생각난다. 골목 안 어느 집 변소 풀 때면 큰길까지 길게 누워 꾸럭꾸럭 거리는 파란 고무호스와 그 향기를 피해 숨을 멈춘 채 빠른 걸음을 떼곤 했다.
낮 동안 조용했던 골목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경기장이 된다. 자전거타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등. 골목이 터질 듯 뻥뻥 소리를 내며 배치기를 해대던 왕딱지가 그립다. 해가 지면서 저녁밥 준비를 끝낸 엄마들이 ‘선수’들을 퇴장시킨다. ‘00야, 밥 먹자’, ‘빨리 안 오나?’, ‘내일 또 놀고, 숙제는 했나’, ‘아이고, 좀 씻어라’ 등등. 어머니들의 잔소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후렴구처럼 되풀이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두운 가로등 아래로 초라한 삶의 흔적인 쓰레기봉투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온다. 방에 누워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들을 때면 어서 커서 멋있는 아가씨가 되는 꿈을 꾸었다. 얼큰하게 취해 하룻밤 가수가 된 아저씨는 음정 박자 무시한 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똑같은 소절을 되풀이한다. ‘그래, 죽여라 죽여!’ 하는 악다구니와 함께 공중 부양했던 살림살이들이 떨어지며 와장창 내는 비명소리들이 이상하게도 자장가같이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창원에서 이런 풍경을 머릿속에 담고 찾아볼 만한 골목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나마 그런 골목이 있는 동네도 철거대상이 됐다.
반듯반듯하게 블록이 지정되어 있는 주택가 골목들은 신호를 피해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찻길이 되어버렸다. 이제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 노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되었다. 밤이 되면 골목들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한다. 낮이나 밤이나 골목은 사람보다 차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보다는 돈의 가치대로 집을 헐고 새로 짓는다. 활주로처럼 넓은 새 길을 뚫는다. 그렇게 새로 지은 집과 광장 같은 대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제 골목이란 향수나 추억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하여, 과거에서 뛰쳐나오기로 했다.
옛날 골목 말고 다른 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때 팔용동 가구거리와 공구거리가 다가왔다.
아직은 새 것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있는 거리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거리다. 앞장세울 추억도 없다. ‘지금 현재 거기’를 망설이지 않고 쫓아가 보았다. 그 길에서 무르익어 가는 삶들을 뒤따라 가보기로 했다.
두려움 반, 설레임 반, 발걸음이 마냥 조심스럽고 떨렸다.
팔용동 공구거리와 가구거리는 어디?
(주* 여기서는 편의상 대로변을 앞길이라 부르고 상가의 뒤쪽을 뒷길이라 부르기로 한다.)
창원 고속버스 터미널 맞은편은 유통단지이다.
그 단지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은 옥외 파란 광고판이 있는 지상 5층짜리 창원기계공구 상가다. 직사각형 본 건물 왼쪽에 나선형으로 된 건물이 붙어있어 기이하게 보인다. 흔히 보는 평범한 건물 모양이 아니다.
이 창원기계공구상가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는데 대부분 공구나 차 부품과 관련된 상가들이다.
반대로 창원기계공구상가 건물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가구매장들이 늘어서 있다. 단층보다는 2층 건물이 많고 간혹 3층 건물도 끼어 있다.
뒷길은 2차선 도로만하다. 도로 양 편에는 또 다른 상가 건물들이 즐비하게 마주보고 이어져 있다. 상가는 대부분 기계공구, 산업안전, 건축자재 관련 매장이나 차 정비공장, 물류창고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가구거리는 대로변 앞길 한 방향만 차지하고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기계공구 관련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홈플러스 사거리부터 유남주유소까지는 약 1km에 달한다. 그 일대가 공구거리와 가구거리이다. 그 거리 사이 안쪽에 신창원역이 자리를 잡고 있다.
늘 지나쳤던 가구 거리
1993년을 전후로 유남주유소 바로 옆 건물에 가구 매장이 들어섰다. 그 뒤 큰길가에 가구점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어느새 가구거리가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은 팔용동 가구거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대한민국 명품가구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이태리, 프랑스 등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수입 가구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총망라되어 있다.
매장들은 공구상점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산뜻하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소품까지 곁들여서 꾸며놓은 매장은 행인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산?창원 인근에서는 가구를 사려고 맘을 먹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한번쯤 들르는 거리이기도 하다.
간판들도 울긋불긋하다. 저마다 다양하고 개성 있는 크기나 모양, 색깔을 뽐낸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1층에서 3층까지, 혹은 가로 세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서로 고개를 내밀며 ‘지금 들어와 구경 하세요’라며 행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하지만 키 큰 가로수와 잔디밭에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 때문에 매장 안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때문에 너도 나도 자꾸만 간판을 더 크게 키우고 화려하게 꾸미게 되나 보다.
가구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 보면 양복을 쫙 빼입은 남자들이 점잖게 말을 걸어온다. 손님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벌이는 매장들의 유치경쟁이 그 길 공기를 꽉 채우고 있다. 영업하는 사람들의 말솜씨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가구를 안사고 나가면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다. 그 가구의 장점, 합리적인 가격, 철저한 AS를 강조하면서 갈팡질팡하는 손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루한 흥정에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손님들 입장에서 봐도 50여개나 되는 매장을 다 들를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니 꼭 계약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어도, 손님을 앉혀 놓고 흥정도 할 수 있고 또 잘되면 다시 오는 경우도 있으니, 어쨌든 손님 한 명이라도 그냥 지나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치열함이 가구에게도 주인에게도 손님에게도 행복한 기회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구거리 뒤편에도 가구와 관련된 가게들은 없다. 엉뚱하게도 기계공구나 유리, 기계제작하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가건물로 된 가구 매장이 단 하나 있을 뿐이다.
뒤편의 건물은 대부분 단층이고, 중간에 띄엄띄엄 2층짜리 건물이 삐죽 올라있다. 개축중인 건물도 간혹 보인다.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빈터에 조립식 건물을 앉혀놓고 그 옆에 물건을 쌓아 놓는 창고나 작업장으로 쓰는 곳도 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철강, 고철, 차정비소, 물류 관련이거나 정화조같이 부피가 큰 제품들을 파는 곳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공업단지 공장들에서 필요로 하는 기계 부품들을 파는 가게들이다.
바퀴, 전기, 펌프, 소방기구, 베어링, 볼트, 안전작업복, 열쇠 도장, 고압호스, 정밀, 유리가공, 사무용 문구류 등 종류도 많다. 간판이나 유리창에 썬팅된 부품이름이나 작업과정들은 하나같이 관련 업종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전문용어들이다.
재미있는 건 여기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일만 하면서 살 수가 없다. 우체국, 슈퍼, 식당, 다방 등의 간판이 자연스럽게 주위에 포진되어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또 하나,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와 수입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다니는 것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처음 가 본 공구거리
창원기계공구 상가는 이 거리의 터줏대감 격이다.
1993년 7월, 140여 평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큰 길 건너 파비뉴21과 홈플러스 건물이 생겨서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창원대로변 우뚝 솟은 건물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건물 바깥에 다닥다닥 붙은 가지각색의 수십 개 간판들이 아직도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지하 1층에는 관리사무실과 공구매장, 슈퍼 하나, 그리고 식당 여섯 군데가 나란히 붙어있다. 나머지 공간은 창고처럼 쓰이고 있다. 옥상은 전용주차장이다. 2층부터 5층까지 공간은 한 층을 가로로 나눠서 각각 복도를 내고 그 복도를 따라 다시 양쪽에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실 이 상가는 이름 그대로, 무거운 쇳덩이 공구들을 싣고 내리기에 편하도록 모든 층 복도에 차가 다닐 수 있게 설계했다. 그 복도에 차를 주차하여 물건을 싣고 내리는 것이다. 차가 가게 앞까지 갈 수 있으니 사람이 덜 고생해서 좋긴 하지만 그 좁은 복도 공간에서 차가 내뿜는 매연과 열기가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처음 이 건물에 들어가서 1층 복도로 차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어떻게 복도로 차를 끌고 들어 오냐, 정말 상식도 없는 인간이라며 얼마나 손가락질을 해댔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한테 열 내며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1층은 주로 공구와 문구, 야금, 계측기, 작업복, 이런 품목을 파는 가게들이다. 2층 위로는 컴퓨터를 비롯해 재고를 두지 않고 중간납품을 하는 가게나 오피스텔 사무실들이 차지하고 있다. 1층은 한 군데도 빈 점포가 없지만 2~5층까지는 제법 임대광고를 내놓은 곳이 많다. 한 층에 3~4군데씩은 나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썰렁하다.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 대부분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이다.
창원기계공구 상가 왼쪽 옆으로는 00차 유리, 00볼트, 카 오디오, H사 차 대리점 외 여러 매장이 있다. 보통 한 상가에 간판이 2~3개씩은 기본으로 붙어있고 입간판을 또 세워 놓았다.
뒷길로 가보면, 상가 건물을 지나 왼쪽에 5층짜리 공구마트건물과 단층건물이 쭉 늘어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창원자동차운전면허학원 건물과 연습장, 창원공구 상가, 팔용기계공구 상가, 툴플러스 상가가 나란히 서 있다. 모두 2층 건물이지만 꽤 크다.
‘00용접’, ‘00강철볼트’, ‘00홀딩스’, ‘00산업연마재’, ‘00정공’ 같은 간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간판들도 간혹 끼어있다.
‘00어음할인’, ‘00부동산’, ‘00세무’, ‘00회계사무소’ 와 같은 상호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돈이 도는 곳에 그런 사무실이 있는 게 아주 당연하다. 돈이 한두 푼 아닐 터이니 더욱 그렇다.
공구거리와 가구거리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차들의 전쟁터다. 취급하는 물량들이 하나같이 무겁고 부피가 큰 것들이라서 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매장 앞마다 주차한 차들로 꽉 차 있다. 도로를 통과하려는 차들은 주차된 차들 때문에 거의 대부분 거북이가 된다. 간신히 곡예 하듯 빠져나가는가 하면 뒤엉켜 꼼짝달싹 못할 때도 있다. 그 사이로 다방아가씨들의 오토바이가 멈춰 서있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유유히 빠져 나간다. 점심 때나 저녁 때가 되면 오토바이들의 행렬은 더욱 많아지고 분주하다. 다른 식당끼리 경주라도 하듯이 달린다. 배달의 생명은 ‘신속, 정확’이다. 그래서 배달의 기수들 또한 이 거리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뒷길 맨 끝에서 멀리 안쪽을 들여다보면 입간판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열병식장을 보듯 들쭉날쭉 줄을 서 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밥줄이 달려 있을까를 생각하니, 일하는 사람들의 땀내가 훅 풍겨져 나오는 듯하다. 아니, 입에서 단내가 도는 듯하다.
해가 지면 간판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한다. 빨강, 노랑, 파랑 같은 천연색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거리를 수놓는다. 앞길은 큰 대로변이라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밤새도록 불을 켜놓기도 한다. 하지만 뒷길은 다르다. 늦은 밤, 사람 발길이 뜸해지면 간판의 네온사인도 드문드문 꺼져 있다. 이따금 경비업체 차량의 사이렌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휙휙 지나다닐 뿐이다.
거리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
모자라지 않는 인생
― 김정혜(가명), 55세, 상가 관리 및 청소
가구거리에서 만나다
요즘 들어서 가구거리에 조명, 페인트 같은 건축 관련 가게가 들어서고 공구부품가게가 큰길로 나오기도 한다.
사실 이 가구거리가 생기기 시작할 때도 ‘0000자재타운’이라고, 집 짓는 자재에 필요한 것들을 파는 매장이 있었다. 지금도 상가이름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매장은 자재가 아닌 가구를 팔고 있다. 그 상가 가구매장 중 00가구에 들러 가구거리에 대해서 물어보니 바로 옆 건물과 이 건물을 관리해오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이 일을 한지 꽤 오래됐다고 한다. 3층짜리 상가 2동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아주머니를 찾아간 날은 비바람이 몹시 불었다. 밖에서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하는 내 속내를 눈치 챘는지 아주머니는 어느 가구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 앉아 있다가 손님 오면 나가면 된다.”
그리곤 매장에 있는 이모(여직원)에게 눈 허락을 받는다. 우리는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미용실에 다녀온 지 오래된 듯 날리는 퍼머 머리, 화장기 없이 기미와 주근깨가 그대로 드러난 얼굴에 크게 쌍꺼풀 진 눈이 선해 보였다. 매장 안이라 말씨는 조용했으나 목소리는 힘이 있어 보였다.
“1993년 6월 1일이 첫 출근날이야.”
처음 이 거리에 왔을 때 보이는 거라곤 창원기계공구 상가, 주유소, 주유소 옆 작은 가구 매장이 전부였고, 뒷길에는 오리온제과물류, 고철상, 신창원역이 있었고 나머지는 벌판뿐이었다. 그리고 큰 길 맞은편에도 지금처럼 시에서 운영하는 산업단지들도 없었고 오로지 창원시외버스주차장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0000자재타운은 원래는 1층 건물이었고 두 상가 모두를 건축자재 매장으로 쓰고 있었다. 그때는 오전에만 일을 하고 30만 원을 받아갔다. 94년도 2,3층을 올리면서 건설회사와 다른 사무실이 들어오고 1층도 자재타운이 나가고 가구매장들이 들어와 새 단장을 하게 됐다. 1994년 5월부터 9시 출근, 5시 퇴근하고 정식 월급 70만 원을 받게 되었다. 2년이 지나고부터 받기 시작한 80만원이 지금까지 그대로이다.
이혼이 큰 숭이가?
1992년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사를 왔다.
여기 일을 하기 전에는 파출부를 나갔다. 주인은 세탁기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돈 주고 사람 쓸 바에야 놀리지 않고 확실히 쓰겠다는 것이었다. 김정혜 씨는 주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다른 일을 하면 될 것을 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입장일 뿐, 주인으로서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당 같은 데 일하러 가면 주인 눈치만 보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게 아니라 할 일은 후다닥 해놓고 눈치 안보고 쉬었다.
여기 와서 일을 할 때도 5시에 일마치고 나서 다른 데 일을 하러 다녔다.
일당 1만5천 원 하는 목욕탕 청소도 설, 추석 빼고 6년 동안 매일매일 다녔다. 그리고 여관에서 당번으로 일하는 친구 덕에 짬짬이 여관 이불빨래도 했다. 새벽 우유배달, 밤 포장마차도 해봤다. 술 먹고 남자들이 다 때려 부수고 하는 게 겁이 나 포장마차를 접고 떡볶이, 튀김장사를 했다.
새벽 4시 반이나 5시에 일어나서 12시에 자면 빨리 자는 것이었고 보통 1시가 넘어서 잤다. 부족한 잠을 이겨내려고 하루에 커피를 열 몇 잔씩 마셨다. 이렇게 커피를 잠 대신 마셔가며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다니면서 했다.
“그러니까 아 둘을 혼자서 벌어갖고 대학공부 다 시켰지. 그리고 지금 3천만 원도 안 나가는 집이지만 그 집 살 때 졌던 빚도 다 갚았지.”
3대째나 집안에는 딸이 없었다. 그 때문에 태어나서 귀하게 자랐다. 결혼도 사진 한번 보고 날 잡아놓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했다. 남편은 그릇가게 하는 삼촌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가 결혼을 하자 옆에서 장사를 해보라고 해서 그릇가게를 시작했다. 가게 근처에 집을 얻어 밥도 해다 나르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게일도 거들었다. 아이가 연년생이고 어리다보니 집안일도 힘에 부쳤다.
“그때는 일회용 기저귀가 있나, 세탁기가 있나, 우유를 사다 먹였나, 그저 손으로 빨래하고 때 맞춰 탄불 갈고 하던 때였으니 가게 일을 많이 봐주지는 못했지.”
하지만 남편도 장사는 뒷전이고 여기저기서 ‘사장님’하고 불러주니까 붕 떠서 매일 술 마시고 돈 생기면 다 놀고 그러다가 3년 만에 싹 다 말아먹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내 자식들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 크다가 내 딸들도 나 같은 인생을 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남이야 뭐라고 하던 간에 이혼을 결심했다.
“그때는 이혼이 큰 숭(흉)인 걸로 생각했지. 그런데 난 그게 아니었지. 내 자식 장래를 위해서. 그 사람하고 살았다 하모 우리 아이들 대학도 못 보냈지.”
이혼을 해주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4년 동안 숨어서 살았다.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소송을 해서 아무 것도 안 받고 아이를 엄마 호적 앞으로 하고 엄마가 키울 수 있는 조건만 해서 힘겹게 이혼을 했다.
물론 친정부모한테는 죄스러웠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내 자신과 자식을 희생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식들 때문에 산다고는 하지만 아바이가 어마이 때리는 거 보모 그 자식들이 너무 불행한데, 자식은 핑계고 자식들 데리고 나와서 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산다는 말이 맞지.”
여자는 뭐하면 안 된다, 못한다가 있는 게 아니니 자식들 배 안 곯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두 딸
큰 딸은 고등학교 때까지 부산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지냈다. 공부도 잘 안하고 거짓말까지 해서 돈을 많이 타갔다. 그걸 알았지만 모른 체 했다. 한번 따지고 들면 아이들은 어떤 거짓말을 할까 하는 것에만 자꾸 머리를 쓸 것 같아서다. 그 방법이 적중했던 것 같다. 한창 그러던 때가 지나고 나자 자연스럽게 그때 잘못한 이야기를 하고, 그때 다른 아이들이 삥땅치는 절묘한 거짓말까지 여담삼아 들려주어 같이 웃기도 했다.
여자 혼자 두 아이를 공부시키다보니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없는 형편에 학원도 보내봤지만 그걸로 공부가 되지는 않았어. 난 공부하라는 소리 안했어. 그 대신에 엄마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 않느냐, 난 니들이 나보다는 조금 더 편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당부하곤 했지.”
항상 돈에 쪼달렸을 텐데, 두 딸도 힘들었을 것이다.
“불평 많았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왜 안 해주냐고 툴툴거렸어. 그런 소리 들으면 아이들이 내가 얼마를 벌어 어디에다 쓰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가계부를 맡기면서 딱 한 달만 써보라고 했지. 20일 쓰고 나더니 가계부를 돌려주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대. 생활비가 모자라면 반찬과 과일을 줄였고. 요즘에도 좀 부실하다 싶으면 아이들이 물어. 엄마, 벌써 거지됐냐고. 그럼 내가 그러지. 그래 거지됐다. 그라모 딸아이들이 알아서 사오곤 해.”
두 딸은 잘 자라주었다. 벌써 27살, 28살로 다 컸다.
“물려줄 것도 없으니 딸아이들이 버는 건 각자 관리하고 있어.”
지금까지 아이들 위해서 해주는 건 딱 하나 있는데 큰딸은 2개, 작은딸은 1개, 각각 보험을 들어주고 있다. 병원에서 일하는 작은딸은 언니보다 혜택을 더 볼 수 있으니 하나만 들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 아니고 딸인 게 천만다행인 듯싶다. 아마도 아들이었음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딸아이들이 자기들을 위해 고생하고 사는 거 알고 속 안 썩이고 커준 걸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갑다 싶어 굳이 하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아. 내가 결혼에 실패를 했으니 혹시 딸아들도 독한 놈을 만나 고생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야. 딸아이들도 엄마처럼 힘들게 자식 기를 자신이 없다고 해.”
이렇게 세 식구 걱정 없이 살면 좋지 않냐고 한다. 그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어쩌랴.
“작은 딸아이는 파티마병원 수술실에 있는데 어디가 아프다 하면 이거 먹지마라, 또 어디가 아프다 하면 저거 먹지마라 잔소리를 해. 그래서 요즘 커피도 남들이 말하는 아메리카 스타일로 연하게 마시지. 그래도 꼭 하루에 술 한두 잔은 마시고 자. 집에 가서 씻고 잠자리 들기 전 한 잔 할 때가 제일로 행복해.”
여름이면 두 딸이 사온 시원한 맥주와 통닭 한 마리로 엄마의 고단한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 지어주곤 한다고 한다. 행복해 보인다.
관리할매
사람들은 그녀를 다들 ‘관리할매’라고 부른다. 매일 3층짜리 두 건물을 청소한다. 한 층에 남녀 2개씩 해서 화장실 12개와 계단을 청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월급은 건물 주인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매장의 주인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매달 공동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에다가 받아야할 월급 80만원을 더한 다음, 이 총액을 각 매장 평수대로 나누어 각 매장별 관리비 명목으로 거두는 것이다. 그렇게 거둔 돈으로 먼저 전기와 수도 요금을 납부한 다음에 남는 돈을 월급 명목으로 챙겨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몇 달씩 관리비를 안 내고 계속 미루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돈이 없어서 안주는 게 아니고 인간성이 그래서 주기 싫어서 안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 사고방식이 그렇게 돼 있으니까 도리가 없어.”
그래서 월급을 푼돈으로 받아가는 경우도 있다. 식비, 보너스도 없다.
일하는 공간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따로 쉬는 공간은 없고 안 쓰는 화장실 한 군데다가 일회용 가스버너와 작은 냉장고 하나 갖다 놓았다. 반찬은 집에서 해 와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밥은 직접 해서 일 층에 있는 매장으로 내려와서 같이 먹기도 한다.
여름에도 그렇고 겨울에도 전기세 올라갈까 싶어 몇 천 원이라도 아끼려고 2층 사무실이나 1층 매장에 가서 커피 마시면서 쉬기도 한다.
“나도 살림하잖아. 내 꺼는 아끼면서 넘 꺼라고 함부로 쓰는 것은 양심상 하느님께 죄를 사해야 하거든. 그 앞에 가서 이야기하는 거 얼마나 쪽 팔리노? 나중에 고해성사 해야 되는데 그런 생각 하게 되면 안해져.”
돈 욕심이 있었으면 벌써 딴 데로 가서 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이 번다고 가서 몸이라도 덜컥 아프면 그 돈 벌어 뭐하겠는가? 몸 안 아프고 쓸 만큼 벌어서 남들한테 나쁜 소리 안 듣고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는데 사람들은 다 자기 십자가만 무겁고 큰 걸로 알거든. 하지만 나는 축복, 은총 받은 사람이다 생각하면 행복하지. 이렇게 80만 원 받는 것도 감사하지. 뭘 더 달라고 할 거여? 욕심이 많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
그 80만 원 받아서 매달 성당에 기부금을 포함해서 13만 원씩 내고 남들이 다 떼인다고 넣지 말라고 말리는 국민연금도 꼬박꼬박 통장에서 5만 원 넘게 빠져나간다.
13년 일하는 동안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가느라고 일을 나오지 않은 두 번을 제외하고는 조금 아프더라도 나와서 누워 있지 안 나오는 일은 없다.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오면 평일에 보충근무를 한다. 그러니 다들 믿고 잘해준다.
손바닥에 못이 박혀 노랗고 딱딱하다.
“거칠제? 손바닥 보면 남자손이지 뭐.”
미소 속에 한숨이 묻어나온다.
“욕심이 많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 법이야.”
뇌리에 남는 한마디다. 같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매주 신부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고해성사 한단다. 특히 누구하고 싸웠을 때는 더 열심히.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한다.
“더 이상 뭘 달라고 할 거여?”
김정혜 씨의 반문 속에서 모자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앞으로 주어질 행복은 인생의 덤인 셈이다. 힘들게 살아왔던 딱 그 만큼만 덤이 주어지길. 더 이상 바라면 주께 고해성사를 하러 가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가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람
― 조원재, 43세, 가구용달
00가구매장 앞, 노란 번호판을 단 트럭에 비닐로 포장된 가구들이 실려 있다. 서너 명의 젊은 남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차에서 가구를 내려 매장 안으로 들여간다. 물건을 새로 들여오는 중이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하다. 물건을 다 내릴 밥상이 차려졌다. 매장 바깥에 전시되어 있는 테이블 위가 밥상이다. 매장에서 새어나오는 조명만으로도 밥상 위가 환하다.
이성현 씨는 밥상 위로 허겁지겁 달려든다. 그는 가구점 직원은 아니다. 가구점에서 바빠 일손이 모자랄 때 간혹 부르는 사람이다. 그는 영업용 트럭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구를 배송할 뿐만 아니라 진열할 자리에 설치해 주기도 한다. 짐을 싣고 내리기만 하는 일반화물하고는 다르다. 이 직업은 무거운 가구를 옮기고 반듯하게 설치하는 이른바 ‘기술’까지 필요한 것이다.
언제나 화려한 불빛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구만 집중했다. 그 가구를 신주단지 모시듯 나르고 설치하는 사람들의 수고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그동안 몰랐던 그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성현 씨의 연락처를 받고 두 번 통화를 했다. 한번은 안전교육을 받는 중이었고 두 번째는 일을 하고 있는 터라 약속을 잡지 못했다. 며칠 후 그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나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전 9시, 팔용동 가구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특별히 다른 곳 일을 받아놓은 게 없으면 매일 아침 팔용동 가구거리로 출근을 한다.
이성현 씨의 처음 직장은 1987년 4월에 입사한 창원LG 2공장이었다. 7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3교대 부서로 옮겨달라고 했지만 그게 되지 않자 설마 여기 나간다고 밥 굶으랴 싶어 아내의 반대도 못 들은 체하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나와서 얼마 안 있어 가구 일을 시작했다.
“어디 빽도 없고 하니까 임시로 한다고 한 게 지금까지 하고 있네. 팔용동 뒷길에 있던 가구점에 직원으로 들어갔지. 처음 시작할 때 받은 월급이 75만 원이야. 도시락 싸다니고 한 달에 두 번밖에 못 쉬었지. 그러다가 한 달 지나니까 80만 원, 두 달 지나니까 90만 원 주대. 내가 제일 많이 받아 본 게 130만 원이야.”
지금 뒷길에는 가구점이 없지만 그가 일할 적에는 메이커 없는 가구를 파는 곳이 3군데 정도는 있었다.
한 가구점에 직원으로 들어가서 오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배달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옮기고 설치하는 걸 배우고 마지막으로 매장에서 영업을 하는 게 이 업계 사람들의 승진 코스이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자본까지 준비가 되면 독립해서 가구매장을 차리게 되지만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성현 씨도 마산에서 조그만 가구소품가게를 했지만 2년이 채 안돼서 손을 들고 나왔다.
이제 가구용달을 한지는 만 3년이 됐다. 이 일은 건수로 돈을 받는다. 한번 실어다주면 3만 원이고 장롱같이 제법 큰 것은 기본이 4만 원, 그리고 시외로 나가게 되면 돈을 더 받는다. 주로 가구배송을 하기는 하지만 1톤 트럭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다한다.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벌어서 아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돈이 안 돼. 마지못해 하는 거지. 나이 들어서 어디 공장도 갈 데도 마땅치 않더라구. 많이 버는 사람은 150~180인데 7, 8월에는 100만 원도 못 번 것 같아. 밖에 나와서 일 하모 밥이라도 얻어먹지만 일거리가 없어 그냥 이렇게 앉아 있으면 밥 사먹어야 되지, 담배 사 피워야 되지, 기본적으로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기름 값까지 하모 기본이 만 원이예요.”
마산, 창원에서 가구용달 하는 사람이 채 100명이 되지 않는데 아무리 많이 벌어도 300만 원이 넘는 사람은 한 두 명뿐이다. 다른 부업을 할까도 해봤지만 다음날 일하는 데도 지장이 있고, 일이 꼭 낮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저녁때라도 뭐 하나 옮겨달라는 전화가 오면 총알같이 뛰어가야 하고, 한 번씩 장거리를 다녀오면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힘들다.
“골병이 드는 거지. 아파트 같은 데는 수월한데 주택 2층, 이런데 사다리차도 안 쓰고 그냥 계단 타고 그 무거운 거 들고 올라간다 생각해 봐요. 그리고 가구를 자리에 놓을 때 수평 잡는 게 중요하지. 주택은 가면 완전 삐딱한 데가 많거든. 그럼 그 놈 맞춰질 때까지 들었다 놨다해야 해.”
일을 하면서 크게 다치거나 사고가 난 적은 없다. 만날 때 이런 일 하는 사람 치고는 체구가 참 왜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몸이 단단하고 커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 기사생활 할 때는 수고비를 따로 받기도 했다.
“많이 받으면 한 달에 20만 원 정도 받았지. 지금은 많으면 5만 원이야. 옛날에는 서너 집에 한번 꼴이었는데 요즘은 9~10번 가야 한 번 받을까 말까예요. 물도 안주는 사람도 있어. 그라모 우리가 달라 하잖아. 맛있는 거 좀 달라고 뻔대처럼 굴지.”
그 말투에 묻어나오는 웃음이 밉지 않다.
창원 동읍에 있는 무성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지금까지 한번도 무성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와 아내, 두 아이와 같이 살고 있다. 아내도 맞벌이를 하고 있지만 크게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 나오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는다. 이성현 씨는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아직도 그의 집 안방에는 15년 전 결혼할 때 샀던 장롱이 건재하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탄타나’ 상표를 붙인 채.
전화벨이 울린다.
“상남동에서 구암동으로? 냉장고 한 대라…… 삼만 원 받으모 되지 뭐. 지금 바로 나갈께.”
오늘 첫 일이다. 담배를 주섬주섬 챙기고 급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간다.
그가 점심 먹고 오후에도 이렇게 딱 한 건만 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 김성웅(가명), 40대, 00ENG 사장
그 곳이 궁금했다
퇴근하고 가구거리를 찾아갈 때는 언제나 어둠과 함께였다. 하루의 힘든 노동에 지쳐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듯 쌩- 하고 긴 길을 빠져나가는 차량들(주로 트럭), 그들과 교대근무라도 하듯 잠에서 깨어난 간판들이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깔려있었다. 그 배경 움직임이 잠잠해질 때까지 마치 어둠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일을 하고 있는 곳이 더러 몇 군데 있기도 했다. 그런데 평일에도 9~10시까지 일을 하면서 일요일에도 빨간색이 무안할 정도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잠긴 문에는 볼펜으로 대충 급하게 적은 ‘외출중입니다’, ‘밥 먹으러 갑니다’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사장이 누구인지 정말 독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0000자동화’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간판은 새 것처럼 반짝였다.
작업장은 별로 크지 않았다. 맨 안쪽에는 가로로 길쭉하고 폭이 좁은 탁자가 놓여 있고 칸막이가 그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 오른쪽 앞에 컴퓨터가 놓인 책상과 제법 두툼한 책들이 있는 책장, 왼쪽에는 여러 칸을 질러서 부품들을 담고 있는 수납장이 있다. 그리고 빨강, 노랑, 녹색으로 된 둥글고 길쭉한 경고봉을 머리에 꽂고 있는,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기계(덩치 좋은 남자만한) 5대가 순서 없이 서있고 기계 앞에는 3,4명이 서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업장 안에는 큰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기계제작을 하고 있는지 기계 아래에서 조이고 위로 올라와 작동을 해보곤 한다.
여름휴가가 한창이던 7월 말에 갔을 때도 역시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안경을 쓴 남자와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어려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장 김성웅 씨의 두 아들이었다. 직원들이 휴가간 사이에도 아들들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가면서까지 하루도 문을 닫지 않는 그 작업장이 너무나 궁금해서 그대로 지나쳐갈 수가 없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다
IMF태풍은 김성웅 씨라고 피해가지는 않았다. 사업이 부도가 나자 제로상태가 되었고, 길바닥에 나앉게 됐을 때 약 먹고 가는 것만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는 다 날아가고 없잖아요. 신용불량자에다가 친구들도 떨어져나가고 젊은 나이도 아니니 일할 데 찾기도 쉽지 않고, 이런 부분들을 말로 하자면 쉽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그 힘겨움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가지고 있던 차로 여러 가지 장사도 해 보았지만 뭐 하나 잘되는 게 없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부탁해도 써주지 않아 모르는 사람 밑에 들어가 3년간 열심히 일했다. 신용도 회복해야 하고 아이들도 크고 있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을 지켜본 친구가 지금 작업장 전세 1,000만 원을 대신 걸어줘서 2004년 10월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60만 원 월세는 직접 낸다. 다른데 설계사무실을 얻어 있는데 거기 월세만 120만 원이 들어가고 인터넷요금, 전화요금, 관리비까지 부담해야하니 더 좋은 데를 가고 싶어도 못 갈 형편이다.
“지금 작업장이 환경적으로는 엄청나게 열악합니다. 위 천장은 철판이에요. 뜨끈뜨끈해요. 비가 오면 비도 새요. 저번 겨울에는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우리 가게 뒤에는 더 한 데도 많을 거예요.”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처럼 고개가 잘래잘래 흔들어진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작 뒷길로 들어온 큰 이유는 작업장을 꾸려나가는 데 공구와 관련된 가게들이 모여 있는 가구거리 뒷길이 제격이었다.
“여기에는 내가 필요한 것은 1분 이내에 90%를 제공받을 수 있어요.”
처음에는 돈을 꼬박꼬박 주고 사와야 했는데 가게에서 기계를 만들어서 보내주고 또 다른 일거리를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불 켜놓고 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중에는 외상도 해주었다. 그것도 당장 밑천이 없는 때에는 큰 힘이 됐다.
“영업하려면 100만 원 가지고도 모자란데 지금 하나도 안 들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차려입고 비싼 기름을 때가며 뛰어다닐 형편이 못됐다. 거기다가 일을 딸지 어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찾아다닐 만한 여유도 없었다. 이 뒷길에는 기계를 다루면서 필요한 부품이나 공구를 사러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관심 있게 보다가 들리기도 한다.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고 부품 조달 받기 편하고 광고 저절로 되니 지금으로서는 고마운 자리이다.
말빨은 되는데 돈빨은 약해
함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자식에게 눈길 한번 줄 틈 없이 먹고 살기에 바빴다. 한번도 부모의 역할을 느껴보지 못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데 가족의 힘이라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갔다. 그때는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생활을 처음 할 때는 제법 자신이 잘난 줄 알았다. 그러다가 부대 지휘관 있는 데서 일을 하게 됐다.
“가서 보니까 ROTC, 육사 출신 뭐 다 있는데 결국 거기서는 제일 밑이다 아닙니까?”
밑자리가 하는 거라곤 매일매일 타자나 치고 청소하고 심부름 같은 잔일들이었다.
거기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듣고 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다. 그 당시 한국에 있는 대학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일본으로 가서 대학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군대를 다녀와서 일본어책을 사서 1년 동안 독학을 했다.
횟수를 적어가며 딱 100번을 읽었다. 처음 읽을 땐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횟수가 늘수록 속도가 붙어 100번을 읽어냈고 기초적인 회화와 단어들을 익혔다.
“다들 뭐가 겁나서 못하고 어쩌고 하는데 우리는 저질러요. 하나도 주저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밀항을 했지요.”
그렇게 일본으로 갔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비행기표 값은 없고 가고는 싶고 두 눈 볼끈 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묻혀 갔다. 가서도 돈이 없으니 낮에는 생활비를 벌고 학교는 야간밖에 다닐 수 없었다. 대학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와서 현대전자에 들어갔다.
기술 쪽 일을 하면서 외국을 몇 번 다녀오고 나니 회사 벌어주느니 내가 하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련 없이 직장을 나왔다. 좀 더 일찍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때가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 하면 돈을 가지고 인생의 척도를 정하는 건 아닌데 우리 세대 친구들을 보면 공부 더하고 덜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장의사 점원, 철공소 직공, 시장가게 잔심부름이나 하던 친구들이 지금 라이온스같이 내로라하는 사회단체 회장을 맡고 있다. 친척이 하는 장의사에 나가서 일하던 친구는 처음 잔심부름을 하다가 어깨 너머로 염을 배워서 하게 됐고 병원영안실까지 사업을 확장, 지금은 납골당까지 하고 있다. 그때 장의사 일을 누가 알아주기나 했던가. 지금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 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 뼈 묻을 집도 사야 하는 처지니 그 부가가치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그 가치 상승비율에 어디 회사원이나 공무원 월급 인상비율이 따라 갈 수나 있겠는가 말이다. 공부 좀 해서 한전, 보험공단, 적십자 이런 데 들어갔던 사람들은 지금 명퇴하고 별 볼일 없는데 그때 땅 산 사람들은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 다들 50억, 100억 재산가들이 됐다.
“동창회를 하면 한 4~50명 모이는데 말빨은 우리가 세요. 잘돼. 그런데 돈빨은 약해. 차이가 많이 나.”
쓴 웃음이 나온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지
사람들은 IMF 때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지금이 극히 정상적인 거라. 사람들이 너무 호황 때의 착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사람들 생활수준이 올라가 있는데 열악한 사업장에 그것도 7~80만 원 봉급 받아가면서 일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들 하이테크한 일만 하려하니, 기반이 다 그렇게 만든 거예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꾸준히 일을 받아서 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확장은 하지 못한다. 지금 일하는 사람들 중 한 명만 월급을 주고 있고 나머지는 일에 따라서 아르바이트를 구해 쓰면서 납기일을 맞춰나가고 있다.
“포기? 배추 셀 때나 쓰는 거지. 자기가 절박해서 하면 해요.”
떼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거한 재산을 물려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구겨진 자존심과 명예,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야. 확실한 거는 안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
아침 7시쯤 나와 밤 12시나 되면 작업 마무리하고 설계사무실에 들러 볼 일 보고 퇴근하면 하루에 3~4시간 잔다. 일할 때도 의자에 앉지 않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누가 전화해서 밖으로 불러내도 나가지 않는다. 스스로 때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생활하려고 한다.
“이렇게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해보는 게 얼마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의 생활은 그에게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고 싶은 것일 게다. 지난 실패가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묻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했다. 부도 이후 힘들었던 시간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곧 ‘YES'라는 자신감으로 길동무를 바꾸게 될 것이다.
분명 오늘 저녁에도 가구거리로 접어들면 환하게 비치고 있는 그의 작업장 불빛을 볼 수 있을 게다.
지게다리를 잘 놔야 한다
― 김진욱, 40대, 썬라인 단체복 사장
시장흐름이다
관리사무실을 찾았을 때 이 상가번영회장 김진욱 씨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는 <썬라인 단체복>을 찾았다. 작업복을 파는 가게다. 그곳은 1층 뒷길을 향해 나있는 가운데 입구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1층 다른 매장에는 영업사원이나 손님들이 드나들며 물건을 싣고 내리기도 하는데 이 매장 앞은 조용하다. 행거 4~5개에 윗도리와 바지를 걸어 점포 밖으로 내놓았고 가게 안에는 작업복들을 옷걸이에 보기 좋게 걸어놓았다. 작업복은 주로 회색과 남색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운데 줄로 매달아 놓은 얼음조끼 광고보드 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어떤 사업장에서 정규직 사원들에게만 얼음조끼를 지급했다가 비정규직 사원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얼음조끼 목 부분만 지급했다는 치사한 사업주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윗도리 소매를 주머니에 찔러 넣어 놓은 작업복 모양새가 제법 멋스럽다.
한 직원이 모니터 앞에 바짝 다가앉아 컴퓨터 고스톱에 열중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교차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야말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가 바로 사장 김진욱 씨다.
창원기계공구상가에서 10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1995년 처음에는 2층에 임대를 넣어 납품만 하였다. 처음 이 상가가 분양됐을 때 가격이 1억7천5백만 원이었다. 당시 32평형 아파트 2채 값이었다. 그 정도로 비쌌다. 그러니 당연히 20~30%밖에 분양이 되지 않았다.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 1층 매장은 경매를 통해서 사게 됐다. 경매 값도 1억이 넘었다.
큰 도로를 끼고 있는데다가 마산, 부산, 진주 시외로 쉽게 나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있다. 여기에다 공단을 좌우에 끼고 있으니 자리를 잘 잡은 셈이다. 아직도 그 장점들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작업복을 한국에서 만드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지고 온다. 사람들이 중국제품이라 하면 고개를 젓는 경우가 많은데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업체가 어떤 원단과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서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크다.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작업복 같은 경우 원단은 한국에서 가지고 들어가서 봉제만 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주머니 박음질 마무리작업(간돔이라고 표현했다)을 보면 아주 꼼꼼하게 잘 되어 있고 다른 곳 바느질도 마찬가지이다.
창원공단 내 대기업을 비롯한 여러 업체들이 구조조정을 하고 일을 외주로 돌리고 하면서 당연히 작업복 주문도 많이 줄었다. 그리고 큰 기업 같은 경우는 계열사에서 바로 주문을 받아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LG는 LG패션, 삼성은 SS패션, 그리고 효성은 원미로 주문을 하고, 작년까지만 해도 제일 큰 거래처였던 대구 희성전자도 올해는 반도패션에서 작업복을 맞추면서 떨어져 나갔다.
매 시즌마다 제법 크다는 업체에는 새로 나온 광고책자를 우편 발송하고 책자에 나와 있는 옷들 샘플도 제일 잘 나가는 사이즈는 40벌 그 외 사이즈는 20벌씩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옷 종류가 많다보니 그 재고만 해도 무시하지 못할 금액이다.
9~12월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다. 춘추복과 함께 동복도 같이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버지, 아내와 아이들, 식구들 모두가 총동원되어서 매장을 맡고 장부를 정리하고 배송을 나간다. 지금도 시청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해서 칠순을 넘긴 아버지가 나와서 장부정리를 해줄 때가 많다.
과거는 오늘의 힘
처음 이 길로 접어든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봉제임가공을 하는 처갓집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내수만 하다가 비수기를 잡아보려고 수출 쪽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전적으로 수출용 임가공만 하였다. 서울 무역부가 따로 있었는데 결재가 늦어지면서 원자재 물량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가 빠듯한 납기일을 급하게 맞추다 보니 불량으로 크레임 걸리기가 일쑤였다. 그게 한번 두번 쌓이다보니 결국 적자를 안게 됐다. 그런 환경에서 생전 처음 하는 영업과장 일은 쉽지가 않았다. 영업도 해야 하고 급하면 차에 물건을 싣고 나가기도 해야 하고 현장에 일손이 모자라면 뛰어가야 했다. 말이 영업과장이지 몸이 둘 셋이 되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결국 처가가 하던 공장은 문을 닫게 됐다.
그 공장을 받아서 수출이 아닌 이전처럼 내수를 해보기로 했다.
원단책자를 가지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주문을 받아왔다. 그래서 옷이 척척 만들어지면 좋으련만 재단사가 술 한잔 먹고 안 나오고 애 먹이면 집으로 ‘모시러’ 가는 게 일이었다.
그렇게 재단사가 와서 일을 하면 이제는 미싱사에서 또 걸린다.
"납기일이 걸리면 아줌마를 붙잡고 일할 수밖에 없어.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납품을 안 받는다 하고 그러면 거래처가 떨어져 나가게 되니 어떻게 미싱사들을 일찍 돌려보낼 수 있는가? 그럼 또 그 아줌마들 신랑이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다고 공장으로 찾아오는 거야. 그때마다 신랑들한테 빌기도 많이 빌고 술도 많이 받아줬어. 요즘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
그렇게 간신히 붙잡아 둔 미싱사들이 미싱 일로 바쁘면 당연히 단추 다는 것 같은 시다 일은 그와 그의 아내 몫이었고 그 일로 밤도 많이 지새웠다.
그렇게 해서 만든 옷을 처음에는 자전거로, 그 다음에는 오토바이로 그리고 나중엔 차로 배송하게 됐다.
“사람은 지게다리를 잘 놔야 하는데 부동산에 관심이 한창 있었을 때 처음부터 건설업을 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잘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알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아쉬움이 남은 듯 하지만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웃어 보인다.
“이 사업도 두 아들 중 한 명이 물려받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어디에서라도 경비를 줄여서 사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처럼 가족 위주로 가업을 이어받아서 나가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거예요.”
크게 돈 번 것이 없다고 하면서 지게다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걸 보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은가 보다. 경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보통사람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장부를, 거기다 꼼꼼하게 정리된 작년 장부까지 같이 보여주면서 차이가 나는 매출액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뿐인가. 멋진 모델들이 있는 책자를 펼쳐보여 주면서 작업복 종류에 대해 설명까지 해 주었다.
나이가 드니 직접 영업을 하러 다니는 것이 어려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매장 안에 울려 퍼지는 그의 거침없는 목소리만 들어도 아직도 그 성실함과 확신에 찬 에너지는 깎이지 않은 듯하다.
사업이 더 번창해서 지게다리를 잘 놨다고 할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쉬는 날이 없는 국밥집
― 남정태(가명), 39세, 국밥집 사장
국밥집을 찾은 건 저녁시간쯤이었다. 그러나 손님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작업복을 입은 손님들은 주로 잔업을 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이 거리에 있는 가게나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보통 2~3명 정도였다. 이들이 바로 이 국밥집을 이용하는 단골손님인 셈이다. 한쪽에서는 소주병을 앞에 두고 열심히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퇴근을 하고 한잔 걸치는 중인 것 같았다. 그 무리 옆에서 맞장구를 쳐가며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전화벨이 울리자 얼른 카운터로 뛰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사장 남정태 씨다.
“돼지국밥 둘요, 예, 고맙습니다.”
벌써 맘이 급하다. 주방으로 주문서를 밀어 넣고 반찬을 챙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 두 그릇을 배달통에 챙겨 넣는다. 오토바이 소리가 부릉부릉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가 배달에서 돌아왔다. 번개 같다.
이 길에서 장사를 한지 10년째다. 처음에는 장인 장모와 함께 하다가 이제는 직접 맡아서 하고 있다. 많이 바쁘거나 시간이 나면 장인 장모가 가끔씩 나와서 도와주기도 한다.
아침 8시30분에 문을 열고 점심준비를 한다. 고기와 생선은 거래하는 데서 직접 가져다준다. 뒤에 농산물공판장이 있으니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사가지고 온다.
뒷길에는 식당이 많다. 20여 군데나 된다. 거짓말이 아니라면서 남정태 씨는 식당 이름을 하나하나 대가며 손가락을 꼽아 보인다. 대충 세어 봐도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예사로 식당 간판을 보고 다녔는데 그렇게 세어보니 적은 수도 아니다. 그 중에는 장사가 안 되는지 문을 닫고 세를 내놓은 식당도 있었다.
“그 식당들이 여기 이 거리 사람한테만 주문 받는 게 아니고 저 위에 있는 차룡단지까지도 배달을 나가요. 나도 며칠 전 비 왔을 때 20그릇 가지고 배달 갔는데, 밥 먹는 데가 2층이라서 계단을 두 번 안타려고 배달 통 두 개를 양손에 한꺼번에 들고 올라갔는데, 그때 그만 허리가 삐꺽했지 뭐야. 지금까지도 아프다니까.”
주문수량이 많을 때는 차를 이용한다. 특히 차룡단지 주문 때문에 일요일 오전에도 가게 문을 연다. 일요일에는 회사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에 밖에서 밥을 시켜 먹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근데 다른 음식도 많은데 왜 국밥집을 할까?
“여기 공장사람들은 쇠 깎고, 밀링이나 선반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쇳가루를 많이 먹고 살거든. 그러니까 돼지고기나 비rPt살을 먹으면 그런 게 씻겨 내려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국밥 같은 국물 먹다보면 소주 한잔도 생각나고……”
국밥은 10월에서 4월까지 많이 팔린다. 날씨가 추워지면 따끈한 국물 앞으로 절로 몸이 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하루 매상은 얼마일까?
“그거까지는 이야기 못하지. 확실히 전보다 장사가 안 되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은 편이예요.”
요즘 창원에서는 최고 번화가로 상남동을 꼽는다. 먹는장사도 거기로 많이 몰리고 있다.
“그 동네는 가게 한번 내려면 돈이 몇 억은 있어야 되요. 그리고 옛날에는 먹는장사는 안 망한다 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제 주변에도 몇 천만 원씩 까먹고 손 털고 나온 사람이 있어요.”
명함 한 장을 부탁했더니 이것밖에 없다며 식당 스티커 한 장을 내민다. 역시 프로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수첩에다 그 스티커를 붙였다.
한 번씩 수첩을 뒤적일 때 그 스티커에 있는 차림표를 읊어가며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올 겨울에는 따끈한 국밥국물로 내 허한 속을 달래러 가야겠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왜 하필이면 이 거리일까?
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찾지 못해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쳤다. 그 길을 몇 번 다녀본 사람들도 외국인상담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열심히 1층만 쳐다봤고 길 건너 슈퍼에 외국인 이주노동자 몇 명이 나와 앉아 있었는데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는 체하며 지나가기에 바빴다. 마침내 찾았을 때 나는 한참이나 위를 올려봤다. 가구거리 뒷길 맨 끝 공터 허름한 상가 3층 창문에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1층 입구에는 이주노동자를 상대로 하는 식품점이 하나 있다. 그 식품점도 입구가 좁고 간판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처음에는 중국음식점인줄 알았다. 2층은 일반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내 3층으로 올라가니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당소가 나타났다. 왼쪽은 사무실과 강당이고 오른쪽은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쉼터와 숙소, 휴게실이었다. 휴게실을 살짝 엿보았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고, 컴퓨터 서너 대 앞에 앉아서 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7~8평정도 되는 공간을 둘로 나누어 쓰고 있다. 입구 방에는 복사기 한 대와 실무자들의 책상과 의자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자료를 찾으러 움직이려면 그 때마다 의자를 밀어 넣어 길을 만들어야 할 정도다. 실무자들은 닿을 듯 등을 지고 앉아 통화를 하거나 자료정리를 하거나 분주하게 각자 맡은 일에 빠져 있었다. 아무도 낯선 방문객에게 눈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한 여성 실무자가 앞에 서있는 중국인 이주노동자에게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전세기간이 안 끝나서 나갔고 아직 방에 다른 사람이 안 들어와서 지금 당장 돈을 줄 수가 없대요. 여기는 그래요.”
아마 외국인 노동자들의 생활 상담을 받는 중인 것 같았다. 중국인 이주노동자는 여성 상담원 손에 쥔 전세계약서를 내려다보며 말뜻을 이해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누구에게 말을 건넬까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고성현 사무장이 상담소 안으로 들어와 소장실로 들어간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처음 상담소를 찾았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상담소가 오게 됐어요?”
“2001년 7월에 경상남도로부터 이 상가 3층을 위탁받아서 왔어요. 원래는 도계동 한빛교회에 있었죠.”
이곳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우선 교통의 요충지였다. 길 건너에 창원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서 김해와 진영과 같은 주변 인근의 중소도시에서 오고가기가 수월했다. 또 무엇보다 생활에 편리함을 손꼽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장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기도 하는 홈 플러스가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상담소나 이주노동자들에게나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담소는 상담만 하는 곳이 아니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는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의 온전한 인간존엄성 확립과 인권수호를 위해 설립되었다. 처음 문을 연 것은 1998년 5월 1일이었다.
임금과 산재 상담 및 인권, 산업안전교육 뿐만 아니라 노동절, 여름캠프, 설날, 추석, 송년잔치 등 각종 행사를 통해서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이야기하고 낯선 서로의 문화를 나누고 이해하며 어울리고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말하자면 상당소라는 공간은 실업 및 도피 등으로 갈 곳이 없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용인원이 턱없이 적다. 기껏 20여 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장은 늘 자리가 부족해 노동자들이 오래 머물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곳은 정부에서도 단속을 하지 않지만, 그 외 지역에서 집중단속이 벌어질 때면 강제출국뿐만 아니라 도망을 가다 위험하게 뛰어내리거나 넘어져서 많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어, 초과 체류자들은 언제나 새가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인권사회, 언제까지 꿈만 꾸시렵니까.’
21세기 인권의 의미와 평등문화의 모델을 함께 생각하고 배우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 10월 개최한 ‘제2회 시민인권대학’의 구호다.
상담소가 이런 일도 하는 줄 꿈에도 몰랐다.
일요일 오전 상담소를 찾았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평일보다 많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상담소 입구에 삼삼오오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성들이 대부분이고 여성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소수였다. 그 중에는 꽤 멋을 부려 옷을 잘 차려입은 젊은 여성도 눈에 띄었다.
상담소 안에서는 ‘무료 이?미용 봉사’가 한창이었다. 무료로 머리를 자르거나 손질해주는 일이었다. 한 남자이용사가 중국인 청년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었다. 단골손님인지 이름까지 불러가며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 친구를 자랑하기도 한다. 옆에 있는 여자 미용사가 부럽다면서 농담을 건네자 중국인 청년이 수줍게 웃었다.
오후 2시에는 ‘한글학당’이 열렸다. 수업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상담소 안으로 들어왔다. 한 50여명 되는 듯하다. ‘한글학당’에서는 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일반인이 자원봉사를 나와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라별로 모임을 만들어서 수업을 하는 것이다.
창원대 법학과 2년생인 자원봉사자 배성진 씨를 만났다. 원래 꿈이 선생님이었다는 그는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마냥 흐뭇한 모양이다.
“노래도 가르치고 재밌게 하려고 노력 많이 해요. 너무 공부만 하면 지루하니까 율동도 하고 그래요…… 요즘에는 한국말을 조금 알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더 잘해서 좋은 직장 가지려고 그래요. 사장하고 말이 통하면 일하기도 훨씬 수월하죠.”
같은 시간에 휴게실에서는 ‘엔젤 클리닉’이란 의료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예방접종, 건강검진 등 무료진료를 해주고 있었다.
또한 옥상에서는 ‘문화카페’가 열리고 있었다. 상담소에서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제공한다. 이 카페를 통해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옥상 문 입구에는 오래된 담요가 낡은 의자 위에 놓여있다. 누가 여기서 자기도 하는 건가? 옥상으로 나아가니 회색페인트 칠한 컨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그 앞에 동네 슈퍼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색 플라스틱 테이블 3개와 의자가 놓여있다.
‘문화카페’라고 해서 여러 나라들의 사진이나 의상 같은 걸로 치장을 해서 제법 근사할 줄 알았는데 초라한 모습에 내 눈에는 실망과 안쓰러움이 같이 번졌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는 당구를 치는 팀과 노래방기계 반주에 맞춰 몇 명이 마이크에 한껏 감정을 실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깥에는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데 마침 비가 와서 앉아있는 사람은 없다. 한 모퉁이에서 비를 맞고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노동자의 뒷모습은 하늘의 먹구름을 지고 있는 것처럼 무거워 보인다.
(주* 11월 중순부터 상담소 사정으로 문화카페를 열지 않고 있다. 옥상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는 ‘무료 이?미용 봉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사업을 해나간다고 하니 운영의 어려움이 꽤 많을 듯하다.
김형진 실장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재정문제죠. 상근자들 임금은 노동부에서 열린 일자리창출 명목으로 60만 원대 임금을 지원받고 있어요. 하지만 그 나머지 재정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받는 지원금과 개인후원금으로 꾸려나가고 있거든요. 근데 대략 후원회원 수가 5~60명 선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서 적은 편이예요. 그리고 가끔씩 이주 노동자들이 기부를 하는데 그게 얼마이건 고맙죠.”
한국에서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담소의 해결사 중 한 사람인 김형진 실장은 주로 사건사고현장을 많이 뛰어다닌다.
지난 7월 2일에는 네팔 출신 산업연수생 산토스 다칼(31·사진)이 자신이 일하는 공장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김 실장은 무척 바빴다.
“사업주와 경찰 측에서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인권의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도의조차 회피하며 자살로 몰아가서 대충 넘어가려 했어요. 우리나라 노동자가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이렇게 했겠어요?”
산토스 다칼의 부검을 요청해 참관하고 경찰서와 언론사를 오가며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자살이 아니라 안전관리 소홀로 인해 일어난 사고임을 주장했다.
한편 죽은 산토스 다칼의 동생인 슈만 다칼 씨 역시 한국에 와서 일을 하다 발가락 두 개가 잘리는 산재를 당한 처지이다. 그는 한 달여 동안 1인 시위를 하면서 싸운 결과 장례비와 위로금 등을 합의하고 형 산토스 다칼의 유해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한 실례도 있다. 올봄에 단속에 걸려 강제출국 당한 방글라데시 한 노동자 친구가 도움을 구하러왔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사장에게 맡겨둔 400여만 원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상담소에서 사업주와 통화를 한 뒤, 보내주마 약속을 받은 바 있는데 두 달이 지났는데도 돈이 오지 않았단다. 김실장은 다시 통화를 해보겠다며 격려를 해준다. 하지만 한번만 찾아가서, 한통만 전화를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없다. 몇 번이나 찾아가고 확인하고 확답을 받아도 돌아서면 또 다른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이 줄을 이어 서있다.
문화카페에 들린 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발호드(35세)를 만났다.
그는 김해에서 일하는데, 친구들을 보러 상담소까지 찾아온다고 했다. 사출공장에서 일한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주야간으로 일을 하고 월급 120만 원을 받는다. 그 돈은 고향으로 모두 보내주고 자신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15만 원으로 생활해 나간다. 월급을 몽땅 보내주고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면서 왜 여기에 남아있는 걸까?
“우즈베키스탄에는 일자리가 없어요. 그럼 옷 어떻게 입고, 뭘 먹고 살아?”
우즈베키스탄에는 대부분 집을 지어서 살기 때문에 집세는 들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처럼 아파트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자신의 아버지 때는 아이를 7~8명씩 낳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호드도 아내와 아이가 3명 있다.
처음 한국에 와서 부산에서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만 했는데 그때 매달 받은 돈은 23만 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러시아사람들이 잘 가는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거기 사장에게서 지금 일자리를 소개받게 되었다. 70여명 일하는 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는 자기 한사람이다. 같이 일하는 여자노동자들이 대부분 아줌마들인데 모두 잘해준다.
발호드는 한국말도 잘하고 한글도 곧잘 썼다.
“일하다가 이게 뭐예요? 물으면 망치, 그러면 머릿속으로 망치모습을 떠올리면서 입으로 몇 번이나 망치, 망치, 망치 하면서 기억하려고 애쓰게 돼요. 내 이름을 한글로 적는 걸 배울 때 받침이 ㄹ이야 이러면, 받침이 뭐예요? 하고 물어봐요. 그러면 밑에 받치는 글자. 그럼 아~ 하고 그렇게 하면서 한자 한자 배우게 됐어요.”
그러나 발호드도 2006년 3월이면 비자기간이 끝난다. 그의 동생도 돈을 벌기 위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외국인노동자들은 보통 혼자만 오는 것이 아니다. 먼저 들어오고 고향에 있는 형제나 자매들이 뒤따라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코리아드림은 유효한 것일까?
경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창원에만 해도 올 상반기까지 외국인 노동자가 3,921명(남 2,736명, 여 1,185명)으로 집계됐으며, 마산·김해·함안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얼마 전 남양주 마석가구공단에 외국인 이주노동자 초과체류자를 대상으로 한 집중단속에서 100여명을 태우고 가는 버스와 마을 주민들이 대치하는 사건이 있었다. 업주들은 그들의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잡혀가는 그들은 그렇게 죄인처럼 취급받아야 하는 범죄자가 아니다.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창밖으로 절실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한 노동자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중국백화연쇄점과 외국인노동자들
이런 곳이 있었구나
‘中國百貨連鎖店’(중국백화연쇄점)
대문짝만한 상호 이름 아랫줄에는 영어로 나라이름들이 쭉 적혀있다.
VIETNAM, MALAYSIA, INDONESIA, JAPAN, RUSSIA 등 아시아계열 나라 이름들이다.
이 간판은 이 거리에서도 유난히 눈에 확 띈다. 그 뿐이 아니다. 그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도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중국이나 조선족들을 비롯해 간판에 적힌 나라 국적을 가진 이주노동자들의 피부색과 언어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외국인노동자들은 가구거리 바로 옆 블록인 차룡단지의 공장에서 일하고 공장 안의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볼 일이 있을 땐 걸어서 여기까지 오거나 혼자서 혹은 둘씩 짝지어(남녀가 한 쌍일 때도 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오기도 한다.
가끔은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고 올 때도 있다. 아직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걸 가지지 못할 이유가 또 뭐가 있으랴! 어쩌다 한 번씩 지나가는 그런 자동차를 유심히 보면 대개가 빈자리가 없이 꽉 차 있다. 물론 간혹 한자리가 비어있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가물에 콩 나기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동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버스나 택시를 타고서 멀리 창원 남산동이나 안민동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온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주야간으로 일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비슷하다. 따라서 출퇴근시간 즈음이면 손님들로 북적댄다. 주간조 근무자들은 더운 여름이면 목을 축이러 저녁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술자리를 가지곤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면 그동안 미뤄둔 볼일을 보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따라서 주말 연쇄점은 여간 붐비지 않는다.
왼쪽에 허리정도 높이에 사방이 유리로 된 진열장이 있다. 안에는 동방불패, 쟈스민, 토토 같은 이름을 가진 전화카드, 중고휴대전화, 중국담배와 여자가 요염하게 웃고 있는 중국잡지 몇 권이 놓여있다. 중고노트북을 판다는 그 주인이 직접 쓴 광고지가 붙어있을 때도 있다. 진열장 위에는 퉁실퉁실한 남자의 엉덩이가 누워있는 것처럼 청바지 2벌이 반으로 개켜져 있다. 가끔 오리 알을 팔기도 하는데 하나에 1,200원이나 하니 사먹는 이가 많지 않다. 수입식품류는 매장 왼쪽에, 고량주나 곡주 같은 종류의 술은 오른쪽에 진열되어 있고 입구 마주보는 벽에 수입냉동식품과 음료를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 사각테이블 하나와 의자 3개, 이것이 5평 남짓한 매장의 실내모습이다.
매장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언제나 열려있다.
조선족 또순이 정옥씨
― 이정옥, 34세, 중국백화연쇄점 점원
이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중국 길림성에서 온 조선족 이정옥 씨다. 조선족이라 그런지 연쇄점 테이블에 자리 잡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 중에는 중국 사람과 조선족이 많다. 혼자 와서 맥주 한 병과 땅콩 한 봉지를 뜯어 까먹으면서 텔레비전(그들은 유선에서 하는 무협영화를 주로 본다)을 보거나 잡지를 보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마치 자기고향 어디 점방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편하게 웃고 떠든다. 집에 갈 적에는 자신들이 마신 술 병와 안주 부스러기를 치우고 술 몇 통과 안주를 더 사가지고 간다.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정옥 씨는 생머리에 자그마한 체구를 갖고 있다. 누구를 봐도 생글생글 잘 웃는다.
이 중국백화연쇄점 창원지점이 개업할 때부터 지금까지 3년째 일하고 있다. 그 전에는 진영지점에서 1년 정도 일했다.
한 달에 두 번 쉬는데 그때는 사장님이 와서 직접 가게를 본다. 가게사정에 따라 한 달에 한 번만 쉬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여름휴가가 끼여 있는 7월이나 8월이 그런 경우이다.
정옥 씨는 중국말과 한국말 두 나라 말을 모두 잘한다. 베트남어나 방글라데시 말 같은 경우는 인사말이나 기본 숫자 정도는 할 줄 안다. 한국말과 생활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정옥 씨는 일차 상담사가 된다.
액정이 나간 휴대전화기를 들고 오기도 하며, 일거리가 없어 해고된 지 얼마 안 된 나이 든 중국노동자는 월급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정옥 씨가 대신 통화를 해준다. 작년에는 어떤 중국인 부부의 부탁으로 통역을 하기 위해 함께 산부인과를 다녀온 적도 있다.
“의사가 진료결과를 보더니 아기가 다운증후군일 확률이 좀 있으니 양수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그러는데 그게 어디 한두 푼 들어서 되는 건가요? 의료보험도 안 되는 거라면서요? 중국인 아내가 울고불고 그러더니 결국은 단속기간에 잡혀서 중국으로 쫓겨 갔어요.”
여자라서 그런지 부인의 심정을 알 것 같다며 정옥 씨는 혼자 중얼거린다.
“뭐니 뭐니 해도 그저 돈을 많이 벌어야 해요.”
정옥 씨는 중국에서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내년이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아직 아이는 없다. 앞으로 집 장만을 빨리 하려고 청약저축도 들고 있다. 우선 올 12월에 19평 아파트를 전세 얻어 이사 간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을 때는 길 건너 파비뉴 21로 가서 5천 원짜리 티 한 장으로 해결한다.
크게 불만은 없지만 안쓰럽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는 사람보다 잘 살려고 한국으로 왔으련만, 여기에서도 남들 사는 만큼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또순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에겐 아직 한국 친구보다 교포나 외국인 친구가 더 많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국문화가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일터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니 다른 곳에서 한국 사람을 사귀거나 할 시간이 없다.
지난 9월에는 운전면허시험도 단번에 합격했다. 그 축하도 할 겸 같이 저녁밥 한 번 먹기로 했는데 아직도 먹지 못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정옥 씨와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달게 먹고 싶다.
연변 청년 김양일 씨
― 김양일(가명), 27세, 연변에서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온지 13개월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농촌총각과 도시처녀를 짝 지우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한 상에 마주 앉은 두 남녀는 “나 한입, 자기 한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양일 씨가 한마디를 꺼냈다.
“아마 저것도 돈 줘야 될 끼야. 중국에서도 저거하고 비슷한 거 있는데 돈 주고 한다는 것 같던데……”
양일 씨는 시간 내서 대전구치소에 아는 형님 면회를 갈 작정이다. 그 형은 형수를 먼저 한국으로 내보낸 뒤에 따라 왔다. 그런데 한국으로 들어와서 보니 형수가 이미 다른 한국남자와 살고 있지 않는가. 형은 그걸 보자마자 분을 못 이겨 칼로 찔렀다. 15년 형을 받았다.
“조선족들은 한국에 오면 일밖에 안 해. 우리 공장에도 한 달에 160만 원 벌어서 5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다 중국으로 보내는 형님이 하나 있어. 휴가기간에는 회사 식당이 쉬니까, 회사에서 밥값 하라고 5만 원을 따로 주거든. 그런데 이 형님은 그 5만 원을 아낄려고 라면을, 그것도 끓이지도 않고 생으로 부셔 먹으면서 3박 4일을 때우는 거야. 참 어이가 없더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빗질도 않고 그냥 손으로 대충대충 쓸어 넘기고 말아. 여기 와서 술, 담배도 다 끊었댔거든. 그렇게 살면 뭐하냐고, 중국에 있는 형수는 그렇게 번 형님 돈 받아서 일요일이면 어디어디에 놀러 다니며 탱자탱자 놀러다니기 바쁘다는데…… 우리 고향동네 한 형님은 한국에 와서 뼈 빠지게 일하다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암 진단이 나왔대. 그래서 그동안 번 돈으로 수술까지 하고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결국 한 달을 살고 죽었다지 뭐야.”
그렇게 일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형님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양일 씨 역시 엄청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주야간으로 일을 하는데 일감만 있으면 주간 때도 11시 30분까지 일을 한다. 그리고 야간 마치는 일요일 새벽에 일 마치고 나와서도 한두 시간 자고 다시 아침 8시에 출근해 일할 때도 있다. 그렇게 해서 봉급은 한 달에 140만 원 정도 탄다고 한다.
양일 씨의 어머니와 형님은 양일 씨보다 먼저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형님은 얼마 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서울에서 일을 한다. “중국 가서 있으면 누가 한 달에 50만 원씩 주냐?” 면서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돈 벌 계획이다.
양일 씨는 정말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한다. 돈이라는 놈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지난 여름에 산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쐬거나 가끔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술 한 잔 하며 지내는 것이다.
부디 그가 몸과 마음 둘 다 다치지 않고 건강하길 바란다.
꿈꾸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공구거리와 가구거리는 1990년대 이전에는 모두 논이었고, 신창원역과 철도만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원은 계획도시다. 공구거리와 가구거리는 일찌기 도시계획상 유통지역으로 결정되면서 하나둘 모여들게 됐다. 최근 2~3년 사이에는 부쩍 상가들이 더 많이 들어서는 바람에 현재 빈 매장은 몇 되지 않는다. 때로는 있었던 가게를 허물고 새로 상가를 짓기도 한다.
이는 이곳이 아직은 투자할 가치가 있고 꾸준한 일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거리처럼 느껴진다.
늘 스치고 지나면서도 그저 도시의 한 풍경으로만 여겼다. 그 거리를 만나게 된 것은 참 잘된 일이다.
나와 상관없어 보이던 많은 간판들과 그 거리가 세상의 가장 기초되는 것들을 취급한다는 걸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거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덕에 내가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처음 이 거리를 찾았을 때 두려움 반, 설레임 반이었던 마음이 지금은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휴대전화에는 이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인연’이라는 그룹명에 묶여 저장되어 있다.
그동안 이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삶을 제대로 전부 다 글로 옮기지는 못했다.
거리에서 박스를 주우면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명서동 집까지 매일 걸어서 다니는 할아버지,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두 딸 얼굴에 몇 번이나 입맞춤을 퍼붓던 방글라데시인 이주노동자, 아내가 한국에 오고 싶어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오지 못하게 했다는 조선족 청년, 노동시간과 사업장 환경에 대해 자꾸 물어보았을 때, 근로공단에서 나왔냐며 이런데서 근로조건 다 지키면 일 못한다고 잘라 말하던 아저씨……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모두 그려보지 못했다.
화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게 낙원의 기쁨인 것이다! 이같은 기쁨 속에서 화가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즉, 창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화가마다 자신만의 낙원이 있다. 색깔을 조화시키는 걸 체득하게 된 사람은 확실히 한 세계의 화합을 말할 수 있으리라.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꿈꿀 권리> 중에서
이 거리에서 나는 여러 ‘화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봤다.’ 그것은 거리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힘이었다. 그들은 ‘꿈꿀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삶에 열중하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창조’한 삶의 색깔에서 위안을 얻고 다시 그 위에 덧칠을 하며 또 다른 ‘창조’를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하나하나의 색깔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 꿈틀거리는 그 거리에서 그들의 ‘낙원’이 멀지 않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