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風景 ㆍ 5
Ⅰ
4월 봄비가 나린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폭설이 쏟아지고, 서울에서는 종일을 봄비가 세차게 나리고, 폭풍우가 거세다. 제주도에서는 노란 유채꽃이 피어 북상을 한다는 화신花信이 전해진다. 이렇게 촉촉히 봄비가 나리면, 발길은 또 누 마중을 가자는지 밖으로 가자고 가자고 보챈다.
여인의 눈물과 같은 빗물이 감정을 부축이나 보다. 간단한 배낭을 꾸려 춘천행 전차에 몸을 싣는다. 아직 날씨가 제법 쌀쌀 한데도, 상봉역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가득하다. 작년 11월 춘천행 전차가 생긴후, 마땅히 갈곳이 없으시던 분들이 꿈의 도시 춘천으로 몰려든다.
김유정문학촌의 촌장인 전상국 소설가의 글을 보니,「‘春川’은 ‘봄이 흐르는 시냇물이다’.」라고 쓰고 있다. 지금의 전차가 생기기 전, 춘천행 열차는 40여년간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과 예술을 싣고 달리던 공간이었다.답답한 서울 아파트 숲을 벗어 나서, 미사리를 지나게 되면 열차는 양쪽에 산으로 둘러쳐진 북한강변을 달리게 된다.
완행열차가 강변을 따라 서서히 지나갈 때, 차창으로 보이는 풍광은 어느 이국적 異國的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형형색색의 카페와 호텔, 유유히 떠다니는 하얀 보트들. 청평과 가평은 지명상 경기도라지만 산세山勢는 강원도에 속한다. 제법 산세가 험해지고, 북한강의 물살도 깊어지고 급해진다.
지난 겨울이 그리도 혹독했 듯, 지난 여름도 짜증스런 폭염과 비바람으로 심신은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 여름내내 거의 비가 내렸다. 무더위와 습기가 도심을 무슨 유령처럼 짓 눌렀다.
그날도 비는 쏟아지고 주체할 수 없는 심사를 달래려, 무작정 춘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도심을 빠져 나와, 북한강변으로 접어 서자 극도의 우울속에 숨어 있던 마음이란 놈이 차장밖의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
계절은 늦여름과 가을의 초입인데, 그 놈의 짜증스런 무더위는 물러 설 기색이 없다. 아하, 열차가 가평에 이르자 산자락엔 가을의 전령사인 키 큰노란 마타리꽃 몇송이가 비바람에 흔들 거렸다. 가평에 내렸다.
천지가 뿌옇게 소낙비는 계속 퍼 붇고 있었다. 마음이란 놈이 사선으로 쏟아지는 비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도 날 우울하게 하며 속을 썩이던 놈이 꽤심하기도 했다. 비속을 뚫고, 가평읍을 빠져 나와 북한 강물속에 자라처럼 빠져있는「자라섬」으로 걸어갔다.
강변길을 따라 걸었다. 시골길은 연이어 길로 연결되고, 마음이 가자는 방향으로 발길은 따랐다. 강변길이 끝나면 논길이 이어지고 그 길이 끊어지면 다시 길은 마을로 이어지고, 시야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는 퍼 붙었다. 산하山河가 오직 소낙비속에 빠져 들었다.
다시 발길은 이어지고, 먼 강변에서인지 아님 산속에서인지 뻐꾸기 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인적 끊인 시골버스 정류장 한켠에 검붉은「엉겅퀴꽃」한 송이 피어 있었다. 얼굴에는 빗물인지 아님 크낙한 아름다움에 대한 슬픔의 눈물인지가 흘러 내렸다.
〈 엉ㆍ겅ㆍ퀴ㆍ꽃 〉
- 김 동 태
청평댐 지나
가평마을
늦여름 소낙비가
사선斜線으로 쏟아지고
뻐ㆍ꾹
뻑ㆍ뻑ㆍ꾹
뻐~어~꾹
뻐꾸기 울음
초록산골 타고 내리는데
시골버스 정류장
길섶에 핀
검붉은 엉겅퀴꽃 한 송이
첫사랑
죽은
그녀의 입술 같다.
Ⅱ
비안개속에 빠진「자라섬」은 인적이 드물었다. 강건너「남이섬」은 비속에서도 일본관광객으로 분산했지만, 「자라섬」은 아직 처녀지로 자연의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 있어 좋았다. 아득한 그 섬을 그저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비속에 빠진 아름드리 버드나무숲이 한폭의 영화장면이었다.
대충「자라섬」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가니, 남춘천행 버스가 막 출발 할려고 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버스에 몸을 싣고 남춘천에 도착하니, 바로「김유정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다시 그 버스에 몸을 맡겼다.
버스가 남춘천역을 벗어나자 길들은 강원도 시골길이 이어졌다. 도로변에는 아직 시퍼런 나락들이 무성하고,밭에는 무더기 무더기 노란 호박꽃이 피고 때론 애호박이 달려 있다. 며칠간 계속된 폭우로 시골길들이 패이고 끊어져, 버스가 좌충우돌하며 겨우 달렸다. 황토 빗물이 길을 실종시켜 버스 기사가 애를 먹기도 했다.
「 차장으로 보이는 빗속 풍경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초가집 마당에 핀 봉숭화 꽃, 꽐~꽐 거리며 흐르는 황토물 소리, 한길이 넘게 자란 토란대잎에 뒤뚱거리는 하얀 빗방울들, 먹기와집 토담에 피어난 연붉은 원추리꽃과 그리고 밭둑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짙푸른 옥수수 대궁 대궁들ㆍㆍㆍ.
남춘천역을 출발한 버스가 한 시간 정도 지나「김유정역」에 도착했다. 열차역이름이 한 소설가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역사驛舍가 처음이라고 한 다. 일제시대에 만든 이 역은 처음 「신남역」이라 불려졌으나, 소설가 전상국 강원대 교수님이 오랫동안 춘천시청 그리고 철도청과 이야기를 하여 2004년 12월 1일부터「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비를 맞고 있는 역사가 조촐하고 아담했다. 점심시간이 한참을 지나서인지 배속에서는 난리였다. 역사 맞은편에 보니「장터」라고 허름한 간판을 붙인 토담집이 보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줄기차게 억수로 쏟아진탓인지, 허기도 졌지만 온몸이 한기로 어슬어슬 했다.
작고 허름한 식당안은 생각과는 달리「김유정문학촌」에 구경 온 가족단위 손님들로 가득했다. 가까스로 한쪽켠에 자리를 잡고 막국수와 동동주 시켰다. 손수 만든 메밀막국수와 동동주가 일품이었다. 대충 허기를 채우고, 한 오분정도 걸어가니「김유정 문학촌」이 한 눈에 들어왔다.
Ⅲ
〈김유정〉
김유정은 1908년 2월,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서 김춘식과 청송 심씨의 2남 6년중 차남(일곱째)으로 태어났다.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유아기에 서울 종로로 이사한 뒤 일 곱살에 어머니를, 아 홉살에 아버지를 여윈뒤 모성결핍으로 말을 더듬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재동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당대 명창 박록주를 열렬히 구애求愛하느라 학교 결석이 잦아 두달만에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록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록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 본, 그나마 잘 낫으면 모르거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생의 반려〉에서
박록주는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출생으로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다시 지정된 그야말로 당대의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었다.
실연失戀과 학교 제적이라는 상처를 안고 귀향한 김유정은 학교가 없는 실레마을(옴팍한 떡시루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지어 야학등 농촌계몽활동을 약 2년간 벌이는 가운데 일제치하의 30년대 궁핍한 농촌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된다. 1933년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신여성〉에「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게 된다.
1935년 소설「소나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선 입작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벌이는 한편,〈구인회〉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김유정은 등단 이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속에서도 글쓰기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1937년 다 섯째 누이 유흥의 과수원집 토방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편지쓰기를 끝으로 3월 29일 39세에, 새벽 달빛속에 하얗게 핀 배꽃을 바라보며 삶을 마감한다.
김유정이 남긴 30여편의 단편 소설은 탁월한 언어 감각에 의한 독특한 채취로 오늘날 까지도 그 재미, 그 감동은 잃지 않고 있다. 이는 김유정이야말로 소설의 언어에서나 내용은 물론 진술방식에서 우리 문학사에 다시 없는 진정한 이야기꾼으로서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음을 뜻한다.
〈김유정문학관〉
김유정문학촌 뜰에 서면, 금병산 자락에 푹 안긴 마을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금병산자락 아래 잣나무숲 뒤쪽은「동백꽃」의 배경이다.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움막을 짓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야학터(「안해」)가 있다.
마을 가운데 잣자무숲으로 들어서면 실존인물이었던 「봄ㆍ봄」의 봉필이 영감이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점순이와 혼례는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 먹는데 불만을 느낀 주인공이 봉필영감과 드잡이를 하며 싸우는 모습이 막 눈앞에 그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금병산〉
그 옆으로 김유정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이 있다. 건물 옆에는 당시 김유정이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다. 그리고 김유정이 코다리찌개로 술을 마시던 주막터도 남아 있다.
멀리 들판의 팔미천에는 산골 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 두었던 물레방앗간(「산골 나그네」)터가 있다. 이들 작품과 함께「총각과 맹꽁이」「소낙비」 「노다지」「금따는 꽁밭」 「산골」「만무방」「솥」「가을」등 12편이 모두 이 곳 실레마을에 살았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한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실레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금병산(해발 652m)에는 김유정 소설 제목을 딴 등산로가 산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을 소설속으로 이끈다. 실레 마을은 작가의 생가와 기념전시관은 물론 금병의숙이 있고,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인 소중한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다.
그럼 여기에서 잠깐 김유정의 소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몽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빠져버렸다. 알싸한,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듯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에서
〈생강꽃〉
김유정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을 말한다고 한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꽃을 동백꽃 또는 산동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그전날 내가 사실 새고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있지 않았느냐. 밭 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붕 소리를 친다. 바위 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봄ㆍ봄〉에서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낯선 여인이 덕돌이네 집앞에 허기져서 쓰러진다. 덕돌이는 그녀를 구해 한 가족처럼 산다. 그러나 그녀는 밤만 되면 물레방아에 숨겨둔 남편을 위해 몰래 밥을 나른다. 그는 바로 문화재인 대금의 명인인곽파람이었다. 덕돌이는 가희를 사랑하게 되나, 가희는 곽파람이 부는 대금소리에 끌려 남편을 찾는다.」〈산골 나그네〉에서
「건달인 남편 덕희와 아들 용이를 위해 소작일을 하는 점례에게 동리남자들의 빈번한 유혹이 따른다. 상전의 유혹을 거절한 것이 오히려 마님의 오해를 사게 되어 점례는 소작지를 빼앗긴다. 점례를 짝사랑한 머슴삼수는 덕희에게 돈을 빌려준 댓가로 점례를 원한다.
덕희는 거액에 아내를 팔아버리나 점례의 의지로 인신매매 사기죄로 고발된다. 점례의 진실을 안 삼수의 고소 취하로 풀려난 덕희는 병을 얻어 뒤늦은 참회를 하며 세상을 떠난다. 어린 용이마저 떡에 체해 죽자 점례는 정신이상이 되고 만다.」 <떡>에서
「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 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한 줄기 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짓궂은 햇별은 겹겹 산 속에 묻힌 외진 마을을 통째로 달구고 있었다. (생략) 밖에서는 모진 빗방울이 배춧잎에 부닥치는 소리, 바람에 나무 떠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끔 양철통을 내려 굴리는 듯 거푸진 천둥소리가 방고래를 울리며 날은 점점 침침하였다.」〈소낙비〉에서
김유정의 문학세계는 본질적으로 희화적戱畵的 이어서, 냉철하고 이지적인 현실감각이나 비극적인 진지성보다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 흐르는 게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의 우직하고 순진한 모습,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의 구사 등으로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었다. 어리숭한 사람들을 해학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애상적 哀傷的인 성격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독특한 문체가 특징적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토속어와 직설적으로 토해내는 비속어, 갖가지 비유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조사법 등은 김유정 특유의 문체이다. 이러한 문체는 주로 우직하고 가난한 농민이나 무식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보여 주었다.
「소낙비」에서는 '안말·싸리문·제누리·봉당' 등이 나오고,「산골」에서는 '떡머구리·버덩·지게·작대기' 등이 나오는데, 이 작품들은 방언· 토속어·비속어의 보고寶庫라 해도 좋을 것이다.
강원도 농민의 속어와 방언을 쓴 구어체는 작중 인물들의 생활 실체를 보여주는 주요수단으로 쓰이고 있으며, 나아가 이런 문체는 도시가 갖는 세련미가 아닌 평범하고 속된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비속미卑俗美를 낳는다.
비속미는 그의 소설에서 또 하나의 특징인 웃음의 철학, 웃음의 심리학을 시도한 것과 관계가 깊다. 그의 문학세계는 본질적으로 희화적이며 익살미가 있다. 이런 점은 대표작「동백꽃」에 잘 나타나 있고, 그 밖에 「봄봄」·「아내」등에서도 해학諧謔(익살스럽고 품위있는 농담,유머)이 자연스런 즐거움보다 슬픔과 어처구니없음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은 상당히 비극적이면서도 해학적인데, 이때의 해학은 극단적 상황이나 조건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덮어두는 역할을 한다.「아내」에서처럼 작중의 농민들은 속으로는 통곡을 삼키면서도 그 통곡을 웃음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여기서 해학의 미적 효과는 숭고미의 엄숙성을 부정하면서 생활의 중압감이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문단에서 최인호 소설가라면 부富ㆍ명예를 얻은 최고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 분도 지금 어려운 암투병중이라고 한다. 저작년 신문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자가 최인호 작가에게 지금 가장 하고픈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소설가 김유정씨가 살아 있다면, 그와 함께 밤지새워 강원도 막국수와 막걸리를 먹고 싶소.”라고 말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 * * *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김유정문학촌〉을 처음 찾은 그날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이 뿌옇게 비가 쏟아 졌다. 그 비속에서도 문학관 입구 토담옆 덩굴에는 진한 황토빛「능소화」가 폭우속에 처량하게 피어 있었다.
〈김유정문학촌〉의 뜰에는 철마다 꽃들이 피어난다고 한다. 겨울을 앞두고 묻어두었던 감자(봄감자)를 꺼낼 즈음 「동백꽃」의 생강나무 노란꽃을 시작으로 하여 양지꽃,제비꽃,할미꽃 등 앙증맞은 꽃들이 피어난다.
〈금낭화〉
김유정문학제를 치르고 얼마 안 있어 5월이 되면 붓꽃, 꿀풀꽃,금낭화ㆍ매발톱이 피기 시작하다. 어느듯 초여름,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흰 초롱꽃과 보랏빛 초롱꽃 그리고 노란 기린초꽃도 피어 난다.
본격적인 여름이 되었다 싶으면 막 나리꽃, 원추리꽃이 핀다. 나 여기 있음을 알리려는 듯 뜰 후미진 곳에서 피기 시작하는 벌개미치. 이젠 가을, 들국화의 계절. 산국ㆍ감국, 개미취, 구절초의 세계가 펼쳐진다.
사철 내내 꽃들이 축제를 벌이는 곳, 김유정문학촌. 김유정문학촌에서는 김유정도, 들꽃들도 만날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우리를 옛날 시골의 들길이나 산자락으로 데려가는 들꽃들.
「 이 봄날 왠지 맘이 쓸쓸하신 분은「김유정문학촌」으로 가서
허전한 강원도 메밀막국수와 막걸리를 한잔 드시고
하루날쯤 보냄도 좋으리라.」
東 坡
|
첫댓글 어떤 표헌을 해야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