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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22-24절 말씀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의 사역과 능력 행함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사역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기독교인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산상수훈이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설명하시면서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언급하신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눈”을 비유로 들고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22절)라는 말씀에 대해 송영목 교수님께서는 눈은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셨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는 앞절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눈이 온 몸을 밝게 한다”는 비유에는 마음이 담긴 자선금이 우리의 베품을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디럭스 매튜헨리 주석에서는 “눈은 곧 목적이며 의도이다.”라는 해석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눈이 성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고 눈이 나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눈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하게 되는 것 같이, 인생에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이상을 정하게 된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떠있는 배가 하나의 목적지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추구하는 목표가 여러 갈래로 갈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우리의 눈으로 정한 목적에 따라 향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자기 명예와 자기 이익을 구하지 말고, 오직 순수한 의도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고 우리 마음의 촛점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절해 나간다면, 즉 눈이 성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극히 단순해 질 것이며, 세상에 대해 초연해질 것이며,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표본인 것이다. 즉 우리가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온 몸은 밝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하나님께로 집중될 때,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균형이 잡힐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은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본문 말씀의 뒤에 이어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므로 근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즉 하나님을 영광만 구하며 하나님의 평가에만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즉 우리 말 속담에서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도 구하고, 자신의 명예도 위하면서 적당하게 자기 일도 도모한다면 이는 모든 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눈을 들어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디럭스 메튜헨리 주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외식하는 자란 한 쪽을 바라보면서 다른 쪽으로 노를 젓는 사공과 같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여행의 목적지를 바라보는 여행자와 같다. 외식하는 자는 마치 솔개처럼 눈으로 아래에 있는 먹이를 보면서 높이 난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마치 종달새처럼 밑에 있는 것들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높이 난다.” 쉽게 말해서 눈이 성하다는 말은 눈의 초점이 한 곳에 집중된 것을 의미하고, 눈이 나쁘다거나 성치 못하다는 말은 눈의 초점이 둘로 갈린 것을 의미한다. “디럭스 마이어 강해”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눈이 정상이 아닌 경우, 이중으로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사팔눈이다.” 우리의 눈이 만일 사팔눈이 되면 한 번에 두 방향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의 눈이 사팔눈이 되면 한쪽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쪽 눈으로는 땅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라 23절의 말씀을 24절의 문맥에 비추어 쉽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눈이 만일 사팔뜨기여서 한쪽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 재물을 본다면 우리의 온몸은 참된 것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 어두울 것이다.” 만일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면 두 눈으로 제각기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의 눈이 건강하다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눈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재물이 보이지 않을 것이며, 재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보편적인 이치에 따른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유에 유머와 익살이 숨겨져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을 쓰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려고 하셨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를 탐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언급하시기 전에 “눈”에 대해 언급하셨을까? “디럭스 미전풍 강해”에 의하면 “부를 탐하는 자는 본심이 흐려지므로(어두워지므로), 이 경고를 삽입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눈이 흐려진다는 표현은 마음이 흐려지는 것에 대한 좋은 비유가 되는 것이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송영목 교수님의 “신약주석 I”에 의하면 “예수님은 돈(맘몬)을 주인처럼 의인화 시켰다”고 했다. 이는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현대의 사회를 “금전만능의 사회”라고 말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팽배했던 우상이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가나안의 신상이었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팽배한 우상은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오직 예수님이어야만 한다. 만일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고백에 대해 다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윗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했을 때, 다윗의 힘은 왕으로서의 군사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은 오직 예수님만이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하인에게 두 주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주인이 “나에게 밥상을 차려오너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 주인도 “가서 장보고 오너라”고 심부름을 시킨다면, 그 하인은 어쩔 수 없이 두 주인의 요구 중에 어느 한 가지만 만족시키고 다른 한 가지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돈을 따르든지, 아니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고 말씀하셨을 때, 그 부자 청년도 이 갈림길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다가 결국 주님을 등 뒤로 하고 세상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가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그의 속에 있는 세상사랑 때문이었다. 즉 그의 눈은 건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꼭 세상의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고 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3-1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은 하나님도 보고 재물도 보는 가치관에서 안일함에 빠져있다.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즉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신앙에 대해 우리는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이 기복주의 신앙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순종이 불가능하다. 기복주의 신앙에서는 다만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한계 내에서 순종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선별적인 순종은 완전한 불순종과 동일하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사무엘상 15장을 통해 알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고 자기 명예도 높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자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다. 우리는 사울왕의 이야기를 교훈 삼아서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 재물에 대한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가야 할 것이다. 산상수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다(마 7:13-27).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좋은 나무가 될 것인가, 나쁜 나무가 될 것인가? 집을 반석위에 지을 것인가, 모래 위에 지을 것인가? 이러한 결단은 당연히 본문 말씀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눈을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든지 아니면 롯의 아내와 같이 세상 재물을 바라보든지 선택하고 결단해야만 할 것이다.
참고 문헌: 송영목 교수님. 2009년. 신약 주석 I 디럭스 매튜헨리 주석- 컴퓨터 디럭스 마이어 강해- 컴퓨터 디럭스 미전풍 강해- 컴퓨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