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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아이
문화 인류학 수업을 통해 과제로 읽게 된 "화해의 아이"는 '선교'와 '선교사'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좋은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여 질 수 없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지닌 여러 나라와 민족들이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충성"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문제를 그의 간증을 통해 다루면서 선교 사역에 대해 정의하려고 하였다. 사위족의 경우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이미 그 문화 안에 구속의 유비로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3부로 거쳐 전개 되는데, 제 1부에서 돈 리처드슨은 사위족의 세계관과 문화에 대해 정의하려고 했고, 제 2부에서는 사위족과 현대인의 세계관과 문화의 충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 3부에서는 그가 선교의 장벽을 이루는 세계관과 문화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사위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제 1부. 사위족의 세계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는 사위족이라는 식인종 마을들이 있다. 사위족의 문화적 특성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들은 사람 보다는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야 할 양심을 상실한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살인은 범죄라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배반하고 살인한 자는 오히려 그들 중에서 영웅으로 추대 받게 된다. 그들의 삶의 구호를 한 마디로 간략하여 표현한다면 "투위 아소나이 마카에린, 즉 살해를 위해 우정으로 살찌운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우정을 쌓아간 후 그 이웃을 배반하고 죽여 그의 머리를 자르고 "인육 축제"를 벌이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오늘 날의 지성인들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들은 어쩌면 성경 중에서 자기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취급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도 복음 전도가 가능한 것일까...... 사위족 야에는 마우로 마을에서 생활하는 부족으로서 사냥에도 익숙하고 아내와 귀여운 막내 아들을 두고 있었다. 해골 바가지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다가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는 아들을 집에 두고 이웃 마을인 해남 마을로 행하는 야에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는 7개월 전에 해남 마을과 동맹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그는 가끔 씩 그 마을의 초대를 받게 되었고 매번 마다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열한 번째로 친목을 위해 그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전과 다름 없이 그들과의 우정에 대해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을 옴겼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반과 살인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7개월 동안 열번이나 왕래하며 이웃 마을과의 화목을 이룩하기 위해 우정을 쌓아 왔던 젊은이 야에의 호의는 결국 사위족의 전통에 의해서 흔적도 없이 짖밟히게 된다. 그는 결국 자기 동생 카우완에게 배반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식인종들의 축제가 벌어지게 된다. 7개월 동안 이루어왔던 동맹을 저버리고 배반하여 죽이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위족의 세계는 얼마나 끔찍한가...... 야에는 결국 해남 마을의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해남 마을 부족들의 위선적인 호의에 살쪄온 격이 되었다. 야에가 올무에 걸려든 것은 해남 마을 사람들에게 긍지를 주는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선호하는 미덕이란 자신을 믿어오던 친구를 가장 교묘한 수법으로 배반하여 죽이는 것이었다. 죽임을 당한 친구의 잘려진 머리를 그들은 면류관 처럼 생각하고 있다. 해남 마을에 자신의 남편을 빼앗긴 카우탑(야에의 아내)는 통곡을 하게 된다. 그녀는 배반하여 죽이는 자기 민족의 문화에 대해 전율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민족 고유의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휘말려 들 수 밖에 없는 딜레마는 무엇일까? 마루오 마을에서는 결국 복수 극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축제에 해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는 네 사람의 인명을 끊어버리는 사건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해남 마을에서는 또 다시 그 마을 부족 중 카니를 통해 같은 방법으로 복수 극을 벌이게 된다. 카니의 속임수와 살인 계획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잔인함이 오히려 그를 부족들 중에서 추앙 받는 인물로 세워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카니의 속임수와 살인 방법에 대해 경탄을 보내면서 그를 이상적인 영웅 인물로 떠받들게 된다. 사위족 내부에는 이러한 집단적인 살인 죄가 그들의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야만 민족을 향해 오늘 날의 지성인은 어떤 자세로 다가가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언제 부터인가 현대인은 외계인 처럼 취급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대인 백인들을 "뚜안족"이라고 불렀다. "뚜안족"은 그들 사위족에게 있어서 새로운 화제 거리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현대인이 사용하는 도구나 힘 그리고 이상한 능력들-불을 뿜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거나, 이상한 생김새-로 인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교로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살해를 위해 우정으로 살찌운다"는 비양심적인 추행을 삶의 철칙으로 삼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이며, 원한과 미움, 보복으로 숨 막히고 탱탱한 긴장감만이 감도는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2. 두 세계가 서로 만날 때 사위족을 비롯한 뉴기니아의 부족들은 현대인(뚜안족)이 사용하는 현대의 기기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현대인에 대해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도끼나 낚시대나 깡통들은 더없는 보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지 선교 연합회의 필라델피아 지부 총무인 에벤에셀 바인이 프레리 성경학교의 학생들에게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의 현황과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사위족에 대한 선교의 불씨는 시작된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 사명자들이 살인과 인두 사냥이 비일비재한 선교지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 후 네덜란드 정부에 청구서를 보낸다. 네덜란드 정부에서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사랑으로 인해 문을 열게 된다. 이 선교지를 위한 사역에 많은 후원자들이 나타났으니 북미, 영국,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의 기독교 학교에서 지원자들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헌신에 대한 결실을 먼저 말한다면, 십여년 동안을 거쳐 선교한 결과 화살에 맞아 순교한 선교사도 있었으며, 그들의 사역을 통해 뉴기니아의 30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 가운데 12만5천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돈 리처드슨과 그의 아내 캐롤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젖먹이 아들 스티븐을 데리고 1962년 4월 13일에 선교지에 도착한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자신들이 사역해야 할 대상이 사위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카야가르 종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에벤에셀 호를 타고 사위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 선교 사역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위족 마을인 해남과 요휘에 사는 40명의 부족들을 만날 수 있게끔 섭리하셨던 것이었다. "코나하리오"라는 인사말을 통해 돈 리처드슨은 자신의 사역의 대상인 그들을 만나면서 기뻐하게 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 만남은 고립 시대의 종막과 현대 문명 시대와의 상호 교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서 양 측에게는 서로에게 있어서 모험을 하는 것이었다." 돈 리처드슨이 새로운 선교지를 확보하는 복음화를 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면, 사위족들은 보다 나은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부족들 중에서 그에게 사위족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인도한 사람은 하디라는 부족이었다. 돈 리처드슨이 사위족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기 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는 하루에 10시간을 사위족 언어를 배우기 위해 공책을 가지고 공부하였던 것이다. 나는 모든 선교사들이 선교 지역에서 돈 리처드슨 처럼 사역을 위해 언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 리처드슨에게 있어서 선교의 장벽은 언어 뿐이 아니었다. 언어 보다도 더 큰 장벽은 사위족의 세계관과 그가 성장해온 사회의 세계관의 차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위족이 거주하는 근처인 카무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생활하면서 점차 사위족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세계관을 접하게 된다. 사위족 부족들의 마을들은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존재했으며, 가족 안에서의 싸움 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날마다 싸움이 있었다. 부족들 끼리는 항상 경직된 분위기로 서로를 경계하며 생활하였다. 어느 날 돈 리처드슨의 집 마당에서 부족들 간의 싸움이 벌어질 때,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성찰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로 부터 소명을 받고 선교지에서 생활하게 된 그가 부족들의 싸움을 방관하고만 있어서는 되겠는가, 그렇다고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화살이 빗발치는 곳으로 몸을 던질 것인가...... 이러한 한계에 부딛치자 돈 리처드슨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돈 리처드슨을 통해 그들이 싸움을 멈추게끔 역사하셨다. 그는 담대하게 화살이 빗발치는 곳으로 달려가며 화해를 외쳤던 것이다. 후일 사위족들은 "뚜안에게는 죽음이 없으니 사위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는데, 이는 부족들이 선교 사역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품음에 있어 목숨 까지 아끼지 않았던 돈 리처드슨의 모습을 기억하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돈 리처드슨은 앞으로 그들 사이를 화목케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러한 화평케 하는 사역이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선교에 대한 한계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곧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일어섰다. 돈 리처드슨은 사위족 언어를 공부해 나가면서 결국 "남자들의 집"이라고 불리는 사위족 어른들의 집을 복음의 요충지로 계획하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을 사위족의 언어로 "미아오 코돈"이라고 소개 하며 복음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사위족 언어로 사위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복음은 사위 부족들에게 인끼를 얻지 못했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성경의 이야기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 하는 이야기였다. 이는 돈 리처드슨이 복음을 잘 전해주지 못 했거나 복음의 권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위인들의 문화와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의 충돌 때문이었다. 사위족이 가장 선호하는 미덕이란 배반과 살인이었으므로, 가룟 유다의 배반 이야기가 오히려 그들에게 호감을 주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가룟 유다에게 오히려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돈 리처드슨은 결국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 이르러서 자신의 세계관과 사위 부족들의 세계관의 충돌 때문에 선교의 사역에 있어서 또 다시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살인이 죄이고 가룟 유다는 범죄한 자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그들을 인식시킬 것인가......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많은 구속의 유비들을 많이 언급할 수 있었지만, 돈 리처드슨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배반과 살인과 복수를 삶의 정신으로 삼았던 사위족의 세계관 가운데는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는 한 치의 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돈 리처드슨을 대접하는 것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베푸는 대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돈 리처드슨이 자기들의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공급해 준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에 토착화 시킬 방법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돈 리처드슨은 보살펴야 할 아내와 말라리아에 걸린 아들 스티븐을 집에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이 "열쇠"를 찾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돈 리처드슨은 이러한 한계 앞에서 자신의 사역을 돌이켜 보았다. 사위족 마을 내에서의 불화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던 사위족들 사이의 거처는 돈 리처드슨이 거주하면서 부터 거리가 가까워졌으며 마을들 끼리 서로 가까워진 만큼 싸움도 잦아지게 된 것이었다. 돈 리처드슨은 사위족 간의 끊임 없는 불화가 자신이 이 부족들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 후 이 부족을 떠나야 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자 사위족들은 자신에게 유익을 제공하던 뚜안이었던 그가 떠난다는 말에 싸움을 중단하게 되었고, 사위족 마을들은 서로 화해의 예식을 행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들의 화해의 예식은 어떤 것이었던가? 이는 자기 마을의 한 아기를 상대 마을의 아기와 서로 교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화해의 아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투위 아소나이 만"과 "와네스 줄"의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 조차 신실성을 증명하고 평화를 세우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두 마을이 서로 화해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마을 중 한 가정에서는 자기 아들을 상대방 마을의 아이와 서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마을의 부족들은 이 화해의 아이 위에 손을 얹고 아이가 살아 있을 동안은 모든 것을 참으며 화목하게 지내겠다는 선서하게 된다. 그 후 그들은 이 화해의 아이를 둘러싸고 화해의 축제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면 다음과 같았다. "만일 누가 실제로 그의 아들을 적에게 준다면 그 사람 만큼은 신뢰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적이 준 아들에게 손을 얹은 자는 누구나 그 아들을 준 적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었으며, 그들을 죽이기 위해 와네스줄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돈 리처드슨은 그들의 이런 민족 풍습을 목격하면서 마침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3. 변화된 세계 돈 리처드슨은 이제 사위족의 여러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3개 월 동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의 복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들이 마을지간의 싸움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여러분과 적대 관계로 있던 마을에 화해의 아이를 주어야 했고, 그 아이는 여러분의 아이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화해는 아이가 살아있을 동안만 효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죄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과 화해하기 원하셔서 자신의 타로프 아이, 즉 화해의 아이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화해의 아이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인류를 사랑하셨기에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이신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는 하나님 본체이시기에 죽으시지 않고 다시 사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를 마음에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화해의 아이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시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영을 받아들여야 하며, 여러분이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인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우와트, 즉 ‘이름을 교환’한 관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거 화해의 의식에서 평화의 춤을 출 때, 해남인이 카무르인 가운데 있고, 카무르인이 해남인 가운데 있게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고 여러분은 그분 안에 있을 것이다.” 돈 리처드슨은 이제 사위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를 소개하려고 그들 가운데 온 것이었음을 선언하게 된다. 돈 리처드슨의 이 메시지는 사위 부족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를 심어주게 되었다. 그가 이 메시지를 카무르 마을에 전해줄 때, 하토라는 부족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의 아들을 카야가로인에게 준 적이 있었소. 그런데 그 자들은 내 화해의 아이를 잡아먹었소. 미야오 코돈(하나님)께서도 나 처럼 슬펐을 것임에 틀림없소.” 히브리서 9장 13-14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이 말씀에서 바울이 구약의 제사 의식의 유비를 언급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듯이 돈 리처드슨은 사위족의 “화해의 아이”라는 풍습을 통해 구속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던 것이다. “약하기 그지없는 여러분의 타로프 아이들이 여러분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타로프가 얼마나 더 큰 평화를 여러분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 리처드슨은 이와 같이 사위족 문화 가운데서 구속의 유비를 끌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의 구속의 유비와 복음 전도에 대해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의 여러 문화를 여는 열쇠인 구속의 유비는 다른 문화권을 상대로 하는 복음 전도의 방법으로 신약이 인정하는 접근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 안에서만 구속의 유비들을 식별해 내고 적용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패턴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돈 리처드슨은 “게팜 아손”이라는 죽은 자를 애도한다는 의미의 사위족 풍습을 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위족의 문화를 정의하게 된다. “무력이나 보통의 설득력을 가지고는 획득할 수 없는 목적이 있을 때, 다른 문화에서는 이 같은 심리가 사고를 일으키려는 성향이나 고행이나 단식 농성이나 종교적 채찍질이나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행위로 표현되지만, 사위족에게서는 자신을 극도의 수치심이나 치욕 앞에 굴복시킴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신앙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신앙에서 사위족의 문화가 출현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문화의 색채를 띄고 나타나는 “게팜 아손”의 의식 속에서 “레몬의 말들이여 오소서.”라는 구절을 통해 사위족들이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는 종교심리를 파악하게 된다. 그는 부족들 속에 있는 “레몬의 말들”에 대한 신앙을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으로 바로잡아 주게 된다. 그는 사위인들을 향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레몬의 말"이 곧 다시 오실 부활의 구주 예수님이심을 선언하였다. 돈 리처드슨은 사위족의 문화에 숨겨진 구속의 유비들을 발견한 후,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셨던 구속의 예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나의 아버지여! 이 백성들을 위한 우리의 사역에 미리 기초를 놓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나이다. 사위족은 우리가 가진 유대교와 기독교 유산에 대해 문외한이며,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섭리로 오래전 옛날에 이 같은 구속의 유비들을 작정하시고, 때가 되매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보내시는 일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문화를 준비시키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심을 우리가 알았나이다.” 그가 사위인과 아토화엠인들의 모임에서 “우리의 죄를 지신 그리스도”에 대해 복음을 전했을 때, 아토화엠 청년 요다이를 비롯하여 마보 등이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이른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부족 중 와라하이라는 아이를 죽음의 그늘에서 건져주심으로 더욱 활성화되기에 이른다. 와라하이의 소생은 하나님의 권능이 사위족 마을의 최고 술사인 아함이 믿고 있는 신을 이기셨다는 것을 부족들에게 보여주신 표적이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사위족의 추장들 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나서게 되었다. 돈 리처드슨이 복음을 사위족의 문화에 토착화 시키는 사역에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부터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위인은 이방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의 최고 정수를 완성하신 분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돈 리처드슨의 선교 사역이 이렇게 확장될 무렵, 네덜란드 정부는 뉴기니아의 사위족 마을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넘겨주게 되며, 인도네시아 정부에서는 사위족의 식인 풍습을 진압하는 등 사위족 마을을 새롭게 정화하는 작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돈 리처드슨을 통해 복음을 접한 사위인들에게는 정부가 다른 그 어떤 기준을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사위인들은 복음을 통해 그들의 삶과 가치관이 이미 성화되어 칭찬 받는 시민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 리처드슨의 사역에 대해 본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만일 선교사들이 부족들로 하여금 현대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예비 작업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위족과 그 밖의 미리 준비하지 못 한 부족들은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하고 방향을 잃고 반감을 느끼다가 심지어는 멸종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위족 내에서 복음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사위족의 문화를 억압 가운데 있게 하였던 분노와 속임수와 살인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일부다처제가 팽배하였던 과거의 문화에서 떠나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선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1972년에 이르러 사위인들 속에는 기독교세계관이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사위족 마을들은 성탄절 날 함께 친교의 모임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하토는 자기가 화해의 아이로 준 아들을 잡아먹은 후립에게도 용서의 은혜를 베풀게 된다. 결국 미움과 분노의 두터운 벽을 깨고 사랑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이 모든 것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사위족 구도자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사위족 마을은 큰 교회의 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때, 돈 리처드슨은 눈물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위족 교회의 장로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던 것이다. “뚜안 돈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일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뚜안족(현대인)의 도움으로 사위돔(사위족 교회당)을 지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힘을 모아 우리 사위족이 예배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이 건물은 전에 적대 관계에 있었던 적들 까지도 함께 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평화의 전이 될 것이며,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주변 종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입니다.” 돈 리처드슨은 이제 사위족 설교자인 이사이의 집회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돌이켜 보는 감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의 사역에 이어 존과 에스더라 불리는 한 쌍의 부부가 이 사역지에 들어오게 된다. 존은 사위어로 된 성경을 개정하여 출간하게 되고 에스더는 마지막 까지 남아 사위족 가운데 진료실을 세워 의료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그들의 사역은 돈 리처드슨의 선교 사역에 후속 조치로 작용하게 되었다.
"화해의 아이"를 읽으면서 나는 위험한 선교지에 두려움 없이 자신을 헌신하는 돈 리처드슨의 삶의 모습으로 인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나도 과거에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북한을 위해 사역하려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북한에 대한 마음이 식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솔찍히 온전히 헌신되지 못 했기 때문이었으며, 내 속에는 언제 부터인가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에 안주하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 리처드슨에 비해 볼 때,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자아가 죽지 않은 채로 살아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돈 리처드슨의 삶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규정지어 보았다. 그의 삶의 구석 구석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삶에 실재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지난 날의 자신을 돌이켜볼 때, 이론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알 뿐, 삶에서는 그러한 가치관이 전혀 실재가 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왜 내 삶에 실재가 되지 못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게 되었다. 둘째로, 나는 돈 리처드슨의 삶에 대한 자세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학업에 임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돈 리처드슨이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민족에 대해 관용을 베풀며, 그 민족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에 함께 참여하고 그 민족의 언어를 배우는 것에 열심을 다하였다.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닌 호주로서 공책을 펼쳐가며 하루 열 시간 동안이나 사위족 언어를 공부하는 돈 리처드슨의 모습을 볼 때, 나는 과거 영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기를 게을리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셋째로, 이 책을 통해 나는 그 어떤 미개한 민족의 문화라고 할찌라도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유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조국 중국의 문화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유비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이제서야 깨닫게 된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생각되며, 한편 이러한 구속의 유비들을 중화의 문화 가운데서 캐어내서, 복음의 진리가 중화 민족의 문화에 토착화 되고 기독교 세계관이 중국인의 삶과 문화에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나의 사역임을 깨닫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