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사 (圓通寺) 의 거눌 (居訥:1010∼1071, 운문종) 선사는 신주 ( 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 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 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 (仁宗) 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 (淨因寺) 에 주지하도록 하였 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 (懷璉:1009∼1090, 운문종)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 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 (大覺禪師)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 (英 宗) 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 (蘇東坡) 가 신규각 (宸奎閣) 의 비문 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 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요 (參寥:?∼1106, 운문종) 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 실 때 왕 〔英宗〕 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직 접 내리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전문 (全文) 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 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 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 목 (龍腦木) 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질그릇 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 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 밖 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 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12. 공덕(功德) / 보지 (寶誌) 선사
양 무제 (武帝) 가 보지 (寶誌) 선사에게 물었다. “짐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했는데,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은 공덕이나 진정한 공덕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공덕입니까?" “성품이 깨끗하여 마음이 밝으면 바탕이 저절로 비고 고요해지니 이것이 진정한 공덕입니 다." 무제는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보배탑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이룬다. 「통행록 (通行錄)」
13. 화엄경을 칭송함 / 손사막 (孫思邈)
도사 손사맥 (孫思邈) 은 경조 〔京兆〕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하루에 만 글자를 외웠다. 노장 (老莊) 을 잘하고 불전에 더욱 뜻을 두었다. 50세가 되자 종남산 (終南山) 에 숨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연홍 (鉛汞:송화 가루나 약초 등으로 만들어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먹은 음식) 만을 먹고 살았다. 도선율사 (道宣律師:596∼667, 智首율사의 법 을 이음. 남산 율종의 개조) 와 사이가 좋아서 하루종일 법담을 나누었으며, 「화엄경"을 베 껴 쓰기도 하였다. 그때 당 (唐) 태종 (太宗:627∼649) 이 불경을 읽고자 하여 손사맥에게 물었다. “어느 경이 가장 크고 높은 경입니까?" “화엄경은 부처님도 높이시던 경입니다." “요즈음 현장삼장 (玄台三藏) 이 대반야경 600권을 번역하였는데 (660년) , 그것을 큰 경이 라 하지 않고 오히려 80권 화엄경을 크다 합니까?" “화엄법계에는 모든 법문이 다 갖추어져 있고 한 법문이 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설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경은 화엄의 한 부분 〔法門〕 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알아듣고 그때부터 「화엄경」을 늘 독송 〔受持〕 하였다. 「석씨유설 (繹氏類說)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