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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영원까지
시편 90:1-12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새해 첫주일에 예배하는 여러분과 같이 하시길 빈다.
예부터 우리는 새해맞이 덕담을 한다. 보기로 ‘새해에 손주 보셨다구요’, ‘새해에 부자되셨다지요’ 하는 식이다. 덕담은 앞으로 될 일을 바라는 데 머물지 않고, 이미 그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완료형을 사용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로 오늘 이룬 것으로 이해하고 축하하는 일, 이것이 바로 덕담의 매력이다.
여러분의 듣고 싶은 덕담은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를 말해보라.
그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복 많이 베푸시길 바란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불편할 것이다. 미래를 알게 된다면 오늘에 충실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 ‘1세기 칼렌더’가 있었다. 한마디로 100년 달력이다. 신문 두 배 크기에 36,500일이 빽빽하게 들어있다. 그런데 발매금지되었다. 이 달력을 보고 자살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자살한 사람은 100년 달력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도 저 가운데 하루 날 잡아 가겠구나!”내가 종이 한 장 가치도 안 되는가? 허무감..
새해 첫 설교 제목은 ‘지금부터 영원까지’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는 너무나 귀에 익숙한 표현이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마칠 때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라는 축도에 익숙하다.
본문 시편 90편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과 ‘영원’이다. 지금 삶은 고난으로 가득하나,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이 있다.
1)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1-6)
시인은 인간의 덧없음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까닭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가 깨달은 것은 맹목적인 운명이 아니라, 세계의 창조주와 인간의 창조주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90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시작한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
하나님의 영원성에 견주어 보면 인간의 삶이란 덧없는 순간일 따름이다.
시편 39편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내 일생은 겨우 한 뼘에 불과하다. 마치 없는 듯하다.“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본문은 인생의 운명을 이렇게 읊는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5-6).
올해는 호랑이해다. 이야기 선물 하나를 드린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태우던 시절,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가 오누이를 데리고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산 너무 마을에 떡을 팔러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다 아는 이야기니, 결말부분으로 넘어가자.)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드디어 오누이가 사는 집에 들이 닥쳤다. 오누이는 급해서 뒤뜰에 있는 대추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대추나무로 따라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무 꼭대기에 있는 오누이에게 어떻게 그 꼭대기까지 미끄러지지 않고 올라갔느냐고 물었다. 슬기로운 누이의 “부엌에 있는 들기름을 가져다가 나무에 바르면서 올라왔단다”는 말에 속은 호랑이는 아까보다 더 잘 미끄러졌다. 어리숙한 오빠가 웃으면서, “바보야, 기름을 바르면 더 잘 미끄러지지. 도끼로 찍으면서 올라오면 문제없는데…” 그러자 호랑이가 광에 가서 도끼를 꺼내다가 쾅쾅 찍으면서 올라왔다.
큰일났다. 위기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꼼짝없이 호랑이 밥이 될 상황에서 오누이는 눈을 감고 하늘에다 빌었다. 살려주시려면 성한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죽이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성한 동아줄이 내려와 오누이는 그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호랑이도 하늘에 대고 빌었는데 이번에는 썩은 동아줄이 내려와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옛날이야기는 지명도, 때도, 인물도 사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 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누이와 호랑이’ 이야기와 같은 민담이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누이가 하늘에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얘기는 우리에게만 있다고 한다.
민담은 사람 사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경험이 농축된 것이다.
인간의 한계상황은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이다. ‘오누이와 호랑이’ 이야기처럼 절망의 벼랑 끝에서 오만한 사람은 없다.
사실 호랑이는 얼마나 무서운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 호랑이를 얕잡아 본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는 토끼도 깔본다. 호랑이 입보다는 사람 입이 더 무섭다. 세 사람만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
올해에도 호랑이들이 우리 주변을 기웃거릴 것이다. 호시탐탐, 우리의 행복을 짓밟을지 모른다. 사실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가? 바라기는 믿음으로, 용기있게 우리 앞의 호랑이를 맘껏 골탕 먹이길 바란다.
신앙은 지금과 영원의 관계이다. 지금과 영원을 따로 생각하지도, 분리하지도 마라. 영원은 사후에 가는 세계로서 영원이 아니다. 보증수표, 약속어음, 성공에 대한 약속에 머물지도 않는다.
다름 아닌 영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 새로운 관계, 약속의 자녀, 역동적 변화를 살아가는 것이다.
2)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7-11)
허무한 인생의 근거는 무엇인가? 본문은 그 실체를 낱낱이 밝힌다. 바로 사람의 죄 때문이다. 이 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답하심을 시인은 알아차린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8).
아주 은밀한 죄, 우리 자신에게조차 숨겨진 죄악도 하나님 앞에서는 밝히 드러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죄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일식간”(9)에 그치고 만다. 문자적으로 ‘한숨 한번 쉼’을 뜻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70세란 수명은 평균 수명이 아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게 다다르는 상한선이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를 어찌 속일 수 있을까?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고하셨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우리는 죽을 때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 앞에 사람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조주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인류가 생겨나고 모든 인간이,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고백하였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본문은 인생의 허무함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인간의 왜소함을 비교한다.
그 하나는 인생의 수명이 지극히 짧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그 연약함을 인정할 때 부터이다.
신앙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자신의 죄 됨을 시인할 때이다.
인간의 성숙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의뢰할 때 가장 깊어진다.
시간은 지나가고, 청년의 때는 흘러가게 마련이다. 우리 생명은 일시적으로 대여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렇다고 무상함을 탓할 이유는 없다. 내게는 창조자가 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
인생의 반은 습관을 만드는 기간이고, 그 나머지 인생은 만들어진 습관에 의해 살아간다고 한다.
이 말씀은 삶의 길이는 하나님 마음대로이지만, 그 넓이와 깊이는 내가 힘쓴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5).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귀한 생명들이라는 뜻이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도 귀중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연히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 손으로 지으시고 축복하시고 주신 생명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상급이 있음을 믿기에, 언제나 마음에 자신감과 기쁨이 있다.
이것은 환경이 변한다고 상실되는 자신감도 기쁨도 아니다.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평안하거나,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한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다.
3)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12)
죽음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경솔함과 피상적인 것을 버린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선택한다.
죽음의 당위가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있다는 깨달음은 오히려 우울한 대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이 은혜로써 응답하신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신다.
시인은 인생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비록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베어지는 꽃과 같으나, 영원하신 하나님께 접붙힘을 받으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거처에 터를 잡는다면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영생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시편 90편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당신의 사랑이 지금 당신의 종들인 우리들에게 명백히 나타나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은총, 당신의 은혜, 당신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주사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해주소서.
목회를 시작하고 이듬해 봄에 동네에 살던 한씨 노인이 돌아가실 임박해서 예수를 믿었다.
자연스레 내가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전도사 이년차가 되어 처음 맞는 장례이니 얼마나 긴장이 되는가?
장례식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중요하다. 그 집의 경우 40대 중반의 맏딸이 호랑이와 같았다. 내게 대놓고 말하길.. “우리 아버지가 언제 예수를 믿었다고.. 이런 새파란 전도사가 장례식을 맡아서 하느냐”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26살의 나는 얼마나 위축되었을까? 차라리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빠지고 싶었다.
그래도 지혜롭게 버텼다. 난생 처음 염도 거들고, 삼일장을 무사히 끝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나 처럼 새파란 사람이 장례를 집례하는 것이 얼마나 복인가? 아니 낼 모레 돌아가실 노인 목사가 장례식을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때 장례 예배 본문이 시편 90편이었다.
깨달아라! 우리는 밤의 한 경점 같은 순간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기에, 깊은 밤에는 오래지 않아 아침이 올 것을 알고, 또 한 낮에는 겸손히 다시 어둠이 임함을 분명히 안다.
우리는 내일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다. 그 분의 다양한 모습과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의 화목함으로 하나님의 조화를 배우고, 건강한 일과 노동과 경영을 통해 하나님의 솜씨를 배우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불의를 멀리하고 진실에 헌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배우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됨을 배울 것이다.
이러한 창조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거두어 치우고, 헐어버리며, 뜯어내는 방식이 아니다.
그 분은 새로 일으키고, 다시 세우고, 인생의 허물을 수선하며,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 바로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새해 아침, 이불 속에서 신문을 읽다가 꺼억꺼억 울었다. 옆에 잠자는 아내가 눈치 못 채도록 속으로 우느라고 혼이 났다.
어느 사람의 인터뷰 기사였다. 사람 사는 모습이 너무 고난스러워서, 그렇지만 그 삶이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서 참 슬프고 또 재미있었다.
새해에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지, 그런 마음을 먹었다.
엘리 위젤은 <밤>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좋아하셔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이젠 그 속담을 바꾸어보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다.’ 아니 함께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 색동교회는 그런 희망의 이야기를 만들자. 뻔한 결론의 수목드라마가 아니라, 늘 새롭고 재미있고 진실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그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연출하자.
하나님께서 2010년에도 여러분의 아픔과 희망, 낮아짐과 깊어짐, 삶의 즐거움과 어우러짐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길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