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뮌스터시에 한 한국인 소녀가 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김수연이다.
아직 만으로 13살이 되지 않은, 김나지움 8학년생(한국의 중학교 2학년에 해당)이다. 매일 학교 공부와 숙제에 시달리고 있고, 허름한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입는다. 사춘기로 서서히 접어들어가고 있는 수연이에게 도대체 어떤 특별한 점이 있어서, 뮌스터시의 유명인사이자 자랑거리가 되었을까?
수연이는 바이얼린을 잘 연주한다. 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한다. 이 어린 나이에 불구하고 벌써 여러 차례 음악콩쿨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이미 수십차례의 협연 및 독주회를 가졌다. 수연이의 연주가 있을 때마다 언론을 통해 집중보도된 것은 물론이고, 독일 공영방송에 "문화계 인물"로 소개된 적도 있다. 늘상 수연이를 따라 다니는 "신동"이나 "천재"라는 말(수연이는 그런 이야기 듣는 것을 무척 싫어 한다)은 전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수연이에게는, 이런 "바이얼린 천재"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사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한국인 음악인들 - 바이얼린 쪽만 보더라도, 정경화, 강동석, 장영주 등 - 과 비교한다면, 이 12살짜리 소녀 바이얼리니스트는 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또 아직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천재적"인 기교의 연주를 한다고는 하지만, 음악 전반에 대한 보다 깊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해석이나, 오랜 연주 경험에서 나오는 원숙함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수연이에게는 정말로 특별한 것이 있다. 수연이의 연주는 음악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음악 자체를 뛰어넘는 보다 심오한 어떤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연이가 바이얼린을 시작하게 된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한다.
수연이가 87년 겨울에 이곳 뮌스터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아버지인 김동욱 씨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이곳 뮌스터로 유학을 왔기 때문이었다(이곳 대학의 신학부는 국제적인 명성이 있다). 수연이는 아주 어린 꼬마일 때부터 어려운 곡조도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를 수 있었고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수연이의 재능을 눈여겨 본 수연이 부모님(두 분 모두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전공으로 한 것은 아니다)은 5살이 조금 넘은 수연이를 뮌스터 시립 음악학교에서 바이얼린을 배우도록 하였다.
좀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한국인인 수연이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바이얼린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평범한 학생 부부인 수연이 부모님이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수연이가 사설교습을 받게 하거나 비싼 악기를 구입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의 음악교육이 사설교습이나 학원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교육비를 당사자의 부모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이것을 공교육기관인 음악학교가 담당하므로,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양질의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은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 방과 후인 오후나 저녁에 이곳 음악학교에 가서 별도로 음악교육을 받는다. 비용을 국가에서 대부분 부담하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도 좋은 선생님으로부터 음악을 배울 수 있고, 악기 역시 아주 적은 비용으로 빌려서 쓸 수 있다.
5살의 수연이를 처음 가르쳤던 마야스 선생은 금세 이 어린이의 재능에 놀라게 된다. 바이얼린을 시작한 지 겨우 8개월이 지난 후, 수연이는 청소년 음악콩쿨(Jugend Musiziert)의 지역대회에 나갔다. 이 대회에서 25점 만점에 21점 이상을 맞기만 해도 우수상에 해당하고, 23점 이상을 맞는 경우는 상급 대회(주 대회, 전국 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수연이는 가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25점 만점을 받게 된다. 당시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었던 슬라아토 교수는 당시 이 아이의 재능에 크게 감명을 받고, 그는 나중에 수연이의 지도교수가 된다.
이렇게 수연이의 기량이 급성장함에 따라 수연이가 연주하는 악기가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린이용의 작은 악기를 음악학교에서 빌려서 썼지만, 수연이의 체격이 커지면서 정상적인 바이얼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야스 선생은 수연이를 데리고 한 바이얼린 제작자를 찾아가서 직접 원하는 바이얼린을 고르도록 하였다. 그는 이 바이얼린을 자기 돈으로 구입하여 수연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너는 언젠가는 스트라디바리(최고의 명품인 바이얼린으로,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중에서도 소수만이 이 악기로 연주함)를 가지고 연주하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좀 아쉽더라도 이 악기로 연주해 다오."
이때 마야스 선생은 수연이에게 그 바이얼린을 선물한 것은 아니고 상당한 고가의 것이었기 때문에 빌려주는 것으로 하였다. 악기를 빌려 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인데, 가령 스트라디바리의 경우에도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악기를 구입하여 소유하게 되고, 특정한 연주자에게 대여하는 식으로 하여 그 사람이 연주를 하게 된다. 아울러 마야스 선생은 수연이 가족의 자존심도 고려했던 것 같다. 나중에 수연이가 98년 청소년 음악콩쿨에서 또 다시 1등을 하였을 때 그 연주에 너무나 감명을 받은 마야스 선생은 이 악기를 아예 수연이에게 선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의 첫 번째 바이얼린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대단한 영예로 생각한다. 네가 재능을 꾸준히 발전시켜 훌륭한 바이얼리니스트가 되는 것은 단순히 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연이의 이 바이얼린은 특별히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래서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이 악기가 대단히 고가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악기는 (상당히 고가이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비싸지는 않다. 아마도 그 첫 스승의 따뜻한 마음, 이 바이얼린을 만들었던 80대 장인의 평생의 기량과 정성, 그리고 이 소중한 악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음색을 다듬은 수연이의 노력이 좋은 악기를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수연이의 두 번째 바이얼린 스승이 된 사람은 뮌스터 음악대학의 슬라아토 교수이다. 청소년 음악콩쿨에서 심사를 맡았던 인연을 통해 수연이를 알게 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연이를 사적으로 지도하였다. 물론 아무런 교습료를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수연이는 9살이 되던 97년 2월 뮌스터 음악대학에 당당히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그의 지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수연이의 든든한 스승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슬라아토 교수는 선발시험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날 수연이는 엄마와 함께 왔어요. 연주를 하기 전에 잠깐 엄마를 쳐다 보면서 눈을 찡긋 하며 웃더라구요. 보통 학생들은 그런 중요한 시험장에서는 덜덜 떨면서 긴장해 있는데, 수연이는 전혀 달랐어요. 마치 이 시험은 내게 별로 겁나는 일이 아니고,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는 투로 말이죠."
9살짜리 초등학생이 어떻게 벌써 음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의 음악대학이나 다른 예술대학들은 일종의 영재교육 차원에서 아직 고등학교과정을 마치지 않은 학생이라 할지라도 별도의 시험을 거쳐 선발할 수 있다. 이러한 학생들은 현재의 초등 혹은 중등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동시에 대학생의 자격을 가지고 된다.
그래서 방과 후에 음악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수연이는 9살이 나이로 대학생이 됨으로써, 독일에서 가장 나이 어린 대학생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현재 뮌스터 음악대학에는 수연이 말고도 6명의 학생이 이런 특별선발을 거쳐 음악교육을 받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교육제도를 한국의 레슨제도와 비교해 본다면 많은 시사점을 얻게 된다.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서는 벌써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자기가 지망하는 대학 혹은 다른 대학의 교수들에게 거액의 과외비를 지출하면서 레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시청에서의 연주를 마치고 나서 엄마, 피아노 반주자, 그리고 음악학교의 교장선생님과 함께ⓒ서을오
반면 독일의 음악학교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음악교육을 제공하고, 음악대학에서도 교수가 재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레슨의 경우 완전히 무료이다. 그리고 이처럼 특별히 재능이 있는 영재들은 특별선발제도를 통해 대학생 자격을 줌으로써 역시 무료로 가르칠 수 있게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음대에 입학하여 보다 본격적인 지도를 받게 된 수연이의 기량은 급성장하게 되고, 여러 개의 콩쿨(청소년 음악콩쿨에서 통산 4회, 코펜하겐 고전음악콩쿨 통산 2회)에서 우승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문화사업지원회가 주최한 장학생 선발콩쿨에서도 역시 최연소로 우승하였다.
아울러 수연이는 그 동안 수십 차례의 연주활동을 벌였다. 최근에 있었던 중요한 연주만 보더라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음악축제(랄로의 스페인 교향협주곡 연주), 베스트팔렌조약 350주년 기념행사(모차르트 소나타 G장조 연주), 브레멘 시 초청 독주회(베에토벤의 로망스 G장조 및 여러 곡 연주), 카펜베르크 성 초청 "젊은 거장" 연주회(타르티니, 그리그, 드뷔시, 생상의 곡 연주)에서 연주하였다.
이처럼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수연이에게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모든 환경이 잘 갖추어진 부유한 가정에서 그렇게 훌륭한 신동 소녀가 나왔다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연이 가족의 경제적 형편은 정말로 무척 어렵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는 점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수연이의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서 직접 수연이네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가족은 15평 정도의 학생용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조그마한 거실과 방 한 개, 욕실과 부엌이 있을 뿐인 이 곳에서 따로 수연이가 연습할 방은 없었다. 수연이가 거실에서 연습을 할 때면, 두 동생은 그 옆을 왔다갔다 하면서 장난을 친다. 연습실은 고사하고 수연이에게는 자기 만의 방조차도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역시 가난한 학생인 이웃들이 바이얼린 연습이 시끄럽다고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런 넉넉치 못한 환경에도 수연이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수연이는 이 조그마한 거실 한 편에 보면대를 펼치고 악기를 꺼낸 후 마치 대가가 연습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집중하여 연습을 했다.
어린 수연이에게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충격은 아버지 김동욱 씨가 지난 95년에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던 일이었다. 신학박사논문을 쓰는 동시에 틈틈히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까지 짊어졌던 가장이 거동조차 불편할 지경이 되자, 수연이 가족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은 물론이고 당장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수연이를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계유지마저도 어려운 상황에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힘든 고비를 넘겨나갔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재활치료를 받음과 동시에 다시 일을 시작한 수연 아버지는 작년에 두 번째 뇌출혈을 겪고 말았다. 겨우 생명의 위기는 넘겼지만, 아직까지도 거동이 힘들고 언어장애까지 수반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다. 뮌스터의 교민과 학생들은 모금활동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함께 어려움을 나누었다. 이에 관해 수연이 엄마 지경순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갑자기 그 일을 당했을 때에는 너무도 막막하게 느껴져서 마치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기적처럼 도움의 손길들이 나타났어요. 우리 가정의 경제적 형편으로는 사실 수연이가 바이얼린을 한다는 것, 계속 연주자로 성장한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지금까지 버텨오면서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수연이에게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다만 수연이가 그런 고마운 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서, 자기의 음악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뭔가 기쁨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자기의 처지를 잊지 않는다는 뜻도 되고, 또 지금까지 받은 도움에 보답한다는 뜻도 되겠지요. 부자들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수연이가 할 수 있길 바라고 있어요. 우리보다 더 어려운 분들을 수연이가 나중에 도울 수 있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죠."
수연이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기교의 뛰어남에도 놀라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감정이 풍부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지 감탄을 하곤 한다. 일단 악기를 잡기만 하면 수연이는 원래 나이보다 열 살 쯤은 더 성숙해 보이고, 마치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처럼, 자기 음악에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 역시 함께 담아서 연주를 하는 것 같다. 한 가지 나쁜 일이 있으면 한 가지 좋은 일이 있다고나 해야 할까. 아버지가 그렇게 쓰러지셨던 일을 이 어린 소녀는 자기 음악이 한 차원 더 승화되는 계기로 삼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만큼 더 피눈물 나게 열심히 연습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연이는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오전에는 김나지움에 다녀야 하고 오후에는 숙제도 해야 하는 와중에서, 매일 최소한 3시간은 바이얼린 연습을 한다. 학교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물론 더 많이 연습을 한다. 연주회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행사에 자주 초청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더욱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바쁜 일정에 시달리는 수연이는 이제 겨우 12살짜리 소녀일 뿐이다. 어떻게 그녀가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일까?
수연이는 "연습이 늘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수연이는 정말로 열심히 연습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부지런히 연습하여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이, 자기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를 지금까지 도와준 많은 분들을 위해,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가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연이가 유명한 바이얼리니스트가 되어 대단한 명성을 누리거나 많은 수입을 올리거나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연이의 이름이 한문으로는 "물 수"에 "그럴 연"을 쓰니, "물과 같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수연이의 음악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흐르기를, 부자들을 위한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런 음악, 삶의 복되고 행복한 면 뿐만 아니라, 고달프고 슬픈 면까지도 함께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하고 따뜻한 음악이 되기를 수연이의 가족은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3일, 독일 통일기념일에 뮌스터 시청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고, 수연이는 이 행사에서 타르티니, 그리그, 생상의 곡을 연주하였다. 이 행사의 주최자이기도 했던 뮌스터 시장은 다음날 수연이의 집에 감사의 화환을 보냈다. 좋은 음악을 통해 그 행사를 빛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대가다운" 연주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을, 그렇게 뛰어난 음악인(아직 12살짜리 소녀이지만)이 뮌스터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경의를 표한 것이다.
수연이가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훌륭한 음악인으로 성장하기를, 언젠가는 스트라디바리를 연주할 수 있기를, 그렇게 유명하게 되어서도 가난했던 자기의 처지를 잊지 않고 음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기를 수연이의 가족과 함께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