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누워 있었다. 옆에 잇는 아내에게 물어보니 병원이라고 했다. 아니 목사가 무슨 병원이냐며 그것도 여러 명이 같이 있는 병실에 누워있는 나를 보며 놀랜 나는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창피했다. 독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막무가내로 아내에게 보채며 재촉했다. 나의 보채는 것에 견디지 못한 아내는 간호사실에 가서 사정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병원 측에 서는 머리를 다쳐서 위험하니까 지금 당장 독방으로 옮길 수 없고 회복되는 걸 봐서 옮겨주겠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도 듣지 않고 창피한 마음에 계속 보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병원에서는 아내에게 위험한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말하면서 독방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995년 12월 7일 첫눈이 내린날, 아직도 사고 당시의 기억은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그때 당시 나는 목회(이리노회 송산교회)를 하며 원광대 교육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들어서안 일이지만 3학기 종강을 하고 대전에 사는 학우의 초청을 받고 다른 학우들은 먼저 가고 나는 잠깐 집에 들렀다가 대전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논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국도인 신도안 고개 마루턱에 있는 3군 사령부 초소를 100여 미터 지나서 당한 사고였다.
빙판 길에 봉고차가 미끄러져 우측 배수로에 걸쳐있었고, 나는 차를 살피며 친구 목사님에게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때 뒤에 달려온 승용차가 봉고차를 들이 받았는데 봉고차가 한 바뀌를 돌면서 앞에 있는 나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나는 배수로에 나동그라졌다. 승용차 운전자는 나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하며 겨우 대전 어느 작은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위험하다고 을지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아내는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장로님들과 선배 목사님과 함께 병원에 왔는데 아무 의식 없이 누워있는 나를 보고 눈물만 나왔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턱도 부러졌지만 머리를 다쳐서 위험하다며 식구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 뒤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머리는 한없이 부어가고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 되어 움직이질 않으며 의식없는 나를 서울로 옮기려고 했으나 병원측에서는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뒤 연고지로 옮겨야 되겠다는 식구들의 의견에 병원측에서 허락이 되어 사고난 지 한달 여만에 예수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여기저기 검사를 한 의사들의 판단은 최소한6개월 정도 지나봐야 의식이 제대로 돌아올지 알 것이라느 ㄴ진단이 나왔고 중환자실에 입원이 되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20여일 만에 아내가 숫자로 두 번만 눈을 깜박여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여러번 하다가 어느 순간 딱 두 번을 깜박였다는데, 그러자 이제는 의식이 돌아오는가 보다고 행각했고 집사람은 늘 내 머리맡에 성경책을 펼쳐 놓았고 휠체어를 태우고 다닐때 찬송가를 부르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증병실에서 독방으로 옮겨졌고 어느 정도 의식이 회복되어 일반병실로, 일반병실에서 재활병동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면회 오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왔다가시면서 뼈에 가죽만 남은 나를 보고 '사람구실 제대로 하겠나'며 혀를 끌끌 찼다는데 그 당시에 어떤 사람은 알아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몰라보았는데 그런 상황에 대한 기억은 아무 것도 없다. 중환자실에서 몸 속에 있는 ㄱ덧을 앋 쏟아놓기라도 한양, 설사 같은 물똥을 얼마나 배설했는지 김익신목사님과 집사라밍 그걸 치우느라 애를 쓴 일... 검사 받으러 가는데 이동침데에서 소변으로 온 몸이 다 젖어 면회 오셨던 김영보복사님과 사모님이 에 쓰신 일... 물리치료를 받으며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 병동을 시쓰럽게 하던일... 호흡곤란으로 기도 절개 수술을 하였고 기도를 통해 가래를 빼내는데 가끔 재채기를 하면 기도를 통해 가래가 앞에 있는 환자에게 튀어나가 시비가 생긴일 등등 참으로 울고 웃는 일들이 맣았던가보다.
또한 사고로 오래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나타난다는 가골(엉덩이뼈에서 칼슘이 빠져나와 형성된 가짜 뼈)이 나에게 생겼는데 여기에서 오는 현상은 무릎이 굽어 져서 펴지질 않는 것이다. 이 증상이 나타나 다리를 펴는 물리지쵸를 하면서 통증으로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모른다. 나의 담당 주치의는 방사선치료를 하며 다리에 기브스를 하여 굽어지는 걸 조금이라도 방지해보고자 애를 쓰셨다. 덕분에 나의 다리는 곧게 펴졌고 지금은 힘들게라도 워커를 의지해서 걷고있다. 오른 팔에도 문제가 있다. 머리 쪽에만 신경을 쓰다가 팔이 부러진 사실도 문제가 있다. 머리 쪽에만 신경을 쓰다가 팔이 부러진 사실을 예수병우너으로 옮긴 뒤에야 알게 되었다는데, 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으니까 저절로 붙긴 했다는데 제대로 붙질 않아 기브스를 해서 다시 치료했기에 아직도 후유증이 있다. 부러진 턱도 교정하는데 힘이 들었다. 턱이 제대로 맞지 않으니 치아도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가. 그래서 치아를 교정하려고 고무줄로 일일이 엮어 위아래를 같이 묶어 놓았다. 의사선생님이 엮어놓은 것을 나는 답답하여 하나씩 톡톡 떼어버리고 또 엮어놓으면 떼어버리고 하여 나는 의사들에게 골치 아픈 환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고난지 6개월, 그러니까 1996년 6월 1일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퇴원을 했다. 그동안 재활병동에서 기브스를 하고 있을때 병원에 그냥 있으면 좋겠다느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주말에 외출을 허락 받고 집에 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교인들은 찾아와서 위로해주었고 정말 오랜만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느 것이 가슴 벅찬 감동이었다. 퇴원하게 되자 이제는 날마다 집에 있으면서 통원치료 한다는 게 좋았다. 가끔 혼자 걸어보겠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걷다가 그냥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일이 많았는데 온 몸의 관절이 풀리지 않아 몸이 뒤로 뻗치는 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식사할때도 휠체어에 식탁을 만들어 떼었다 붙였다 하여 병원생활의 연속으로 집사람이 떠 먹여 주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조금씩 내가 떠먹으면서 식탁에 앉기 시작했고, 바닥에는 앉기가 힘들었는데 무릎을 꿇고 벽에 기대어 앉다가 이제는 양반다리를 하고 조금은 앉을수 있다. 퇴원 후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되고 싶은 마음에 수지침이나 한방 등을 해 보았지만 나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해보느라 돈은 돈대로 들어가면서 식구들은 지쳐갔다.
퇴원할 즈음, 주치의는 나의 장애 때문에 목회를 못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언어까지 되질 않아 현실적으로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전주 덕진 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익산 용안의 송산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1989년) 위임식(1992년)을 한지 3년 만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이제는 그 모든 서약을 뒤로하고 목회를 사임해야 했다. 1996년 11월 스산한 초겨울의 날씨 속에 전주로 이사를 왔다. 이사 온 뒤로도 예수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다가 전북대학병원에서 언어치료도 받아보기도 했지만 치료비부담으로 전북도립장애인 복지회관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좋았던 눈도 사고로 인하여 초점이 맞지 않아 오른쪽 눈을 수술했으나 수술한 뒤로는 아예 보이지 않아 재수술까지 했지만 허사였다. 안과 과장님도 1년이면 300여명씩을 수술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보자는 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기억의 말살, 사고를 전후한 기억은 없고 과거의 기억도 희미해져서 기억들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을 귀찮게 했다. 이리노회 목회자들에게 팩스를 놓아준다는 소식에 목회는 못하지만 이리노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팩스를 놓아달라고 하여 조금만 연관이 있으면 글을 써서 보내면서 읽어보고 답장을 주라며 귀찮게 했다. 그때 귀찮게 했던 모든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거의 매일 일기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이 일은 그날 일을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살리기에도 아주 좋기 때문인데, 이일로 안해 머리를 다친 후유증의 한 증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수다를 떠는 말쟁이 꼴이 되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있었다. 언어는 불편하지만 의사표현에는 문제가 없다는 억눌린 감정이 글로 표현되면서 어쩌면 그런 오해들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98년 가을에 내가 속해 있는 이리노회 익산동부시찰에서 문경새재로 야유회를 갔었는데 그때 왠지 운전을 해보고 싶어서 한가한 길에서 운전을 해보았다. 다행히 운전하는데 큰 지장이 없어서 그 뒤로 운전을 하며 여러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전주에서 가까운 대아리 저수지에서부터 용담댐, 변산반도, 충청도 청주, 내 고향 전남 영광, 지리산을 다녀왔다. 몇 년 전에는 경상도 남해대교와 부산 영도다리를 지나 태종대에서 놀다 왔으며 지난해 여름에는 친구집이 있는 강원도 춘천까지 다녀왔다.
지난 8월에는 전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선교여행을 중국으로 갔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그것뿐인가, 지난 11월에는 다니고 있는 대학원 졸업여행으로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장애의 형편으론 갈수없었지만 교수님과 학우들의 도움을 입어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온 것이다.
사고 전에 원광대 교육대학원에 다녔었는데, 사고 후에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하여 공부했고 학우의 도움으로 논문도 쓰면서 간신히 졸업을 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아 소속감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에게 집사람은 다시 공부를 해보라며 전두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소개했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진학했고 지금은 5학기 논문학기를 하고 있다. 지난 해 8월에는 학교에서 행한 중국 선교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으며 다음은 그 선교여행 때 백두산 정상에 올라천지를 바라보며 쓴 글이다.
백두산 천지.... 수없이 들어오던 천지... 우리민족의 성산이라는 백두산.... 이 나라 삼천리의 대동맥 백두대간의 출발지 백두산.... 이 나라 삼천리의 대동맥 백두대간의 출발지 백두산.... 그 정상에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천지... 13개의 봉우리중 제일 높은 봉우리 장군봉... 그러나 그곳은 아직 갈 수 없는 곳 북한 땅에 있었다.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민족의 영봉 이곳 백두산 천지에 왔습니다. 하루속히 하나님이 섭리속에 통일되어 장군봉에서 이 천지를 우리 민족 모두가 바라불 수 있는 그날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지난해 7월에 장애진단서를 떼기 위해 예수병원엘 다녀왔다. 96년도에 퇴원할 때는 여러가지 복합장애와 함께 지체장애 1급이었는데, 운전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워커에 의지해 걸어다닌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되었는지 2급으로 조정이 되었다. 장애명을 하나로 묶자면 '뇌병변장애'이다. 두뇌충격부상으로 인한 장애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중추신경이 바로 잡히지 않아 워커에 의지하여 걷고 있다. 이만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때로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낄때가 많지만 육신 건강한 사람들도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살고 있다. 여러 이웃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3년 전부터 나의 홈페이지를 개설해 이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요즘은 인터넷상의 교제가 많다. 거기에 올려진 나의 글을 보고 은혜를 받았다며 식사 대접하겠다고 멀리 경기도에서 내려와 만나기도 하고, 가까이는 전주나 익산에 사시는 분들의 따뜻한 온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다시 만난 중고 동창들의 따뜻한 배려에 내가 살아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이 형편이 되어 목회를 은퇴하게 되니 당장 먹고 살 일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지금은 집사람이 직장생활에 뛰어들어 가정경제에 보탬을 주고 있다. 사고 전 우리 총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은급제도에 가입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약간의 은급비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 있다.
만 8년 전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는데 우리 장애인들에게 바라기는 어떠한 장애를 입었다 하더라도 힘과 용기를 잃지 말기를 바라며,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그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오늘의 나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어느 낯선 날의 기억이 나에게는 아픔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면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펼쳐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