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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군 장 교 1 7 기 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borame48
회 장 최 병 준 : 151-801서울 관악구 남현동 1134번지 예성아파트 201동 610호
010-2415-1378 02-584-1378 E-mail : bjchoi39@hanmail.net
부회장/총무 손 동 현 : 463-827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317-9 , 202호
010-5287-0024 031-708-3250 E-mail : ddhson@hanmail.net
2007년 4월 통신문
1. 2007년 4월 월례회는 양평의 정 웅 농원에서 야유회로 개최됨을 안내합니다.
우리 17기회의 4월 월례회 모임을 다음과 같이 양평의「정 웅 농원」에서 야외행사로 부부동반 하여 개최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으니 빠짐없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 웅 회원은 자기가 손수 개척한 양평의「정 웅 농원」으로 4월 월례회 모임을 초대하면서, 부부가 동반하여 가능한 많이 내방하셔서 즐거운 우정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정 웅 회원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약이 잡히지 않도록 미리 4월17일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 두셨다가 즐거운 동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일시 : 2007년 4월 17일 (화) 8:00 ~ 17:30
★2. 장소 : 양평 「정 웅 농원」
★3. 회비 : 회원1인당 10.000원. 특별 찬조도 접수합니다.
★4. 일정 : 아래에 별항으로 일정표를 게재함
★4. 연사 : 정 웅 연제 : 용문산과 공군과 그리고 나
연사 연제라는 말을 썼지만, 그날 현지에서의 안내는 정 웅 회원 내외분께서 전적으로 맡아 주실 것인데, 안내의 말씀 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용문산의 설화나 관광 휴양적 가치, 공군 사이트의 전설, 그리고 이곳에 인연을 맺게 된 사연, 지역사회에 적응과 위상, 농촌 생활의 취향 등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펼쳐 주실 것입니다.
2. 2007년 4월 17일 월례회 양평의 정 웅 농원 야유회 일정표
08:00 ~08:50 3호선 양재역 7번 출구 서초구민회관 집합, 인원점검 및 출발
08:50 ~10:30 설매재 자연휴양림 도착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10:30 ~12:30 가벼운 등산 또는 산책
12:30 ~14:00 야외에서 식사(정 웅 회원 제공)
14:50 ~15:50 정 웅 농원 구경
15:50 ~17:30 서울로 귀환
3. 야유회 참가 신청 : 4월 10일까지 필히 손동현 부회장에게 전화로 신청요망
이 4월 통신문을 받아 보시고 즉시 참가여부를 결정하시여, 4월 10일까지는 참가신청을 손동현 부회장에게 전화로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 웅 회원께서 농원을 가꾸며 전원생활 하시는 모습도 살피시고, 좋은 봄날, 명승지 용문산에 하루의 나들이를 위하여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버스와 식당의 예약 등 준비사항이 많아서 사전에 필히 인원을 파악하여야 하므로 4월 10일까지 신청마감 기한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4. 2007년 3월 월례회 보고
★1. 2월 월례회는 2월 22일 (목) 12시에 사당역 근처의 참배나무골오리집에서, 18명의 회원 이 모였으며 별미의 오리요리를 시식하면서 즐거운 만남과 담소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2. 참석순서대로 18명 회원은 윤성로 최영식 김상길 이희수 손동현 김만식 김학광 강홍주 공진묵 김상기 이형국 신효순 한경수 이주형 박찬운 차맹진 조창근 김병철 등이었습니다.
★3. 스피치는 윤성로 회원이「공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45분간 특강을 하였는데 회원들이 폭소와 함께 경청을 하였습니다. 아래의 특기사항에 소개하고 내용을 별쇄 하였습니다.
5. 최병준 회장 강남성모병원 입원 수술 및 퇴원
최병준 회장이 갑작스런 뇌출혈 중태로 지난 2월 26일 강남 성모병원 중환자 응급실에 입원하였고, 정밀 진단 후에 3월 7일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3월 13일 병실 4016호로 옮겼습니다. 손동현 부회장이 최병준 회장의 소식을 전화와 인터넷으로 회원에게 통지하여 드렸고 많은 회원들이 병실로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3월 31일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면서 외래로 치료 중입니다. 최병준 회장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합니다.
6. 2007년도 연회비를 접수합니다. (연회비 50,000원)
윤성로 이근성 최병준 김학광 김병태 이장춘 유동옥 서항룡 홍기호 정현만 전경환 한상명
김영배 정 웅 한경수 우인성 조철제 이우석 이교선 강홍주 김만식 이희수 신효순 김상기
강창언 김상길 이주형 김광희 김형효 차맹진 공진묵 손동현 홍석환 신 홍 이상범 김효준
박흥종 최영식 김병철 김동열 조성모 김병남 이교훈 이형국 이환복 현영록 전재순 유완재
양현승 배창입 정주화 이성호 김명열 박상순 박찬운 조창근 이태환 신태수
(납부순서로 기재, 2007년 3월26일 현재 58명)
★1. 연회비 납부계좌 : 농협 096-12-272847 손동현.
★2. 회원들께서 보내주시는 연회비와 특성금과 협찬은 우리회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귀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유념할 사항은 17기회 이름으로 나가는 경조사의 부조금은 당해년도 단 위로 연회비를 납부한 회원에게만 해당됨을 알려드립니다. 연회비 납부는 가급적 전반기 안에 완결이 되도록 정성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7. 특기 사항
우리 회의 5대 회장이었던 윤성로 회원께서「공군 이야기」특강한 내용을 원고로 손수 써 주셨기에 별쇄 하여 동봉 송부 합니다. 옛날 사진을 보듯이 추억의 자료로 삼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공군장교 전역 후에, 17기 동기생회를 창립하여 돈독하게 결속하고 발전시켜 왔던 발자취를 더듬어 피력하였고, 공군 내에서 우리 48기 즉 17회의 위상이 매우 높아 존경과 선망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되도록 많은 회원들이 우정에 넘치는 적극적인 참여와 실무진 회장단의 노고가 많았다는 이야기 등을 시작으로 후보생 시절에 겪었던 군사훈련과정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우리가 공감하며 웃음을 자아내겟금 유머와 특유의 입심으로 전개하여 회원들이 재미있게 경청하는 중에, 45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스피치의 내용을 요약하여 글로 써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바 뒤에 수록한 문장으로 작성하여 보내왔습니다. 그 날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께서도 소식을 접할 수 있게 하는 뜻으로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는 장절을 나누고 글을 다듬어 읽기에 편하도록 편집만을 했습니다.
지난 3월 통신문에는 김형효 박사의 강연초록이 나갔고, 이번 4월 통신문에는 윤성로 회원의 글을 싣습니다. 특별히 4페이지 분량으로 작업량이 많아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우리의 교양을 높이고, 또 돈독한 결속을 맺어주는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혹시 다른 기수나 대외적으로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보아, 이해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군 이야기
공군장교 17기회 윤성로 특강 : 2007. 3. 19 (월) 12:00~ 십칠회 3월 월례회 오찬에서
1. 공군각종장교 17기로 지원 입대할 무렵의 시대상황
금년으로 우리가 공군장교로 지원 입대하여 임관한지 어언 45주년이 됩니다. 이제 우리 동기생들은 이미 70세를 넘었거나 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거나, 직장에 취업 중이거나, 아니면 졸업을 앞두고, 미래를 향한 꿈의 설계를 구상하고 있을 2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 이 무렵에 돌발적인 516군사혁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60년대 초,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정부패, 419혁명으로 급조된 과도기적 민주당 정권의 무능 속에 이른바 “빽”만능주의가 통용하던 시절 우리들 상당수는 이른바 “빽”을 써서 입영신체검사에서 “병”종이나 “무”종을 허위로 판정받아 병역의무를 영구면제 받고, 학창에서 사회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을 즈음에,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국법을 세우고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등의 5대 공약을 내건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 후에 신체검사에서 병역면제 받은 자에 대한 재검을 실시한 결과 특갑종의 신검판정을 받고 육군 논산훈련소 입영소집 영장을 받았거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당시 육군 쫄병3년(36개월)을 썩느냐? 아니면 공군장교 임기4년(48개월)을 때우느냐? 하는 운명적인 기로에서 어렵게 선택한 카드가 공군이었을 것입니다. 논산훈련소를 통한 육군 쫄병으로 병역의무를 필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예측된 “필연”의 선택이었건만, 516혁명으로 당시의 우리들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공군장교라고 하는 “우연”의 운명을 선택토록 강요받았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니 45년 전,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커다란 군대조직에서의 우리의 만남은 한마디로 “필연적인 우연”이었고, 역으로 “우연적인 필연”이었음을 상기케 합니다.
2. 공군각종장교 17기 동기회 창립과 결속 발전의 자취, 그리고 공군 내에서의 위상
후보생 4개월간의 훈련기간과 장교로써의 임기 4년, 이 기간은 70세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우리에게는 짧고도 긴 여정이었고,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 속에 공군이야기로 채워진 지난날 공군시절이 인생의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반추케 합니다.
전역 후 오랜 기간 뒤에 우리 공군장교 17기 동기회가 구성되어 점차적인 조직화 활성화를 기하여 공고한 결속을 이룩해 냄으로서 오늘날은 공군장교 선후배 어떤 기수에도 비할 바 없이 존경과 선망과 격찬을 받는, 공군장교 17기 동기회(공군사관후보 48기)로 돈독하고 알차게 발전해 있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기회 모임이 이렇게 인정받기까지는 동기생 여러분의 깊은 관심, 동참의식, 자긍심의 결집과, 우정을 기초로 한 활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만, 숨은 수고와 봉사 정신으로 책임을 다한 역대 총무(나는 이들을 일명 본부사령이라 칭함)들의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10명의 회장으로 이어 온 <1.신용한 - 2.김효준 - 3.신선 - 4.정웅 - 5.윤성로 - 6.신갑철 - 7.김상기 - 8.신수열 - 9.차맹진 - 10.최병준(현)> 모두의 탁월한 식견과 능력발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입니다
3. 공군장교 17기회 5대 회장을 세 번 연임하였던 보람
여러모로 부족한 저 윤성로가 1991년 말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돼서 1997년 말까지 2년 임기를 3번이나 연임하여 6년의 봉사직을 수행하면서, 처음 세웠던 몇 가지 원칙이 오늘까지 변경 없이 그대로 지속 시행되고 있음은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17기이기에 매월 17일 정오를 월례회 모임 일시로 정하고 당일이 공휴일일 때에는 그 다음날로 하고, 토요일일 때에는 다음 주 월요일로 한다는 원칙
둘째, 년회비를 5만원으로 정한 것 ; 1992년부터 시행된 5만원의 년회비가 15년이 경과한 현재까지 한 푼의 증액도 없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 (끝날까지 그대로 갈 것을 강력 주장합니다. )
셋째, 가정의 경사(혼사)가 있는 회원은 많은 회원의 참석에 대한 보답으로 월례회 오찬을 스폰서 한다는 원칙이 성실하게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
넷째, 회원의 월례회 참석 시에 참가비 명목으로 만원씩 징수하는 것 ; 이는 최소한 점심회식에서 식사비의 절반에 못 미치는 금액임.
다섯 째, 가정의 혼례 시에 동기회 명의로 10만원에 해당되는 축하 화환 또는 현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
여섯 째, 동기회 출범 당시 한 동안은 전화로 월례회 소집을 통보하던 것이 우편엽서제로 이어지고, 지난 92년부터는 매월 한 번도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봉함봉투에 안내통신문을 넣어서 회원가정으로 배달하고 있다는 사실.
현재 이를 위해 수고하는 손동현 총무/부회장과, 통신문을 통해 회원의 동정과 생활정보 특강내용 등을 시인다운 문필력으로 정성스럽게 기술 작성하고 편집하여 보내주는 김학광 부회장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일곱째는, 일찍이 제가 농담처럼 제안했던 미래적 사항이지만 “농”이 “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다시 제안합니다. 우리 동기회의 회비기금은 장차 동기회 해체여부 내지는 잔고의 액수 고하를 떠나 정회원 중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최종의 마라톤 코스까지를 골인하는 회원에게 시상되어야 마땅할 것임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원칙이 15년이 경과한 지금까지 변절 없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자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생활비 수지도 급등하고 물가도 엄청나게 뛰었는데, 15년 전에 정한 년회비와 월례회비(오찬참가비)를 한 푼 증액 없이도 오늘날까지 우리 동기회의 살림을 꾸려갈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저력이 곧 우리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공군장교 후보생 시절의 이야기
이제 지난 공군 현역시절의 추억 그것도 4년 4개월 중의 첫 4개월, 장교 임관 전 후보생 시절의 추억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각기 대학 4년 시절의 추억보다도 아니 40년 인생사의 추억보다도 너무나 진하고 감동적이어서 뇌리에서 지워지지도 않고 지워질 수도 없는 한 편의 짧고도 긴 여정의 인생스토리임에 틀림없습니다.
1) 공군장교 선발시험
45년 전 바로 이때 쯤 지금은 서울의 보라매공원이라고 불리는 공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헤아리기 힘든 수천 명의 덥수룩한 청년늙은이(?)들이 모여 “양팔 벌려 좌우로 나란히!” 라는 모병관의 구령(호령이었음)에 맞추어 정해진 모래땅 바닥에 앉아 공군장교 17기생 모집을 위한 필기시험을 치루고 합격통지를 받고 입영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워낙 응시자가 많아 시험장소 교실 구하기와 시험 관리를 하기 어려워 아예 연병장을 시험장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필기시험 보기 전에 먼저 신체검사를 통해서 수천 명이 불합격 판정을 받고 퇴출된 뒤에도 아직 수천 명이 남았는데 그 중에서, 필기고사(국어, 영어, 논술)를 합격한 것이니, 그 보람과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것입니다.
2) 공군기교단 입대 첫날
대전의 공군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에 모여, 합격자 소집일정에 따라 우리는 짐 보자기를 하나씩 메고 “우연적인 필연”의 장소인 공군 기지에서 서로가 낯선 얼굴로 “필연적인 우연”의 만남을 시작했습니다. 첫 인상들이 논산훈련소 입소하는 육군쫄병 입소자들보다는 훨씬 늙은 청년들처럼 보였습니다. 상고머리, 장발, 돋보기, 구두, 운동화, 잠바차림 등 각양각색인데, 곧 경험하게 될 미지의 공군생활에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기가 죽어 어깨가 축 처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입영절차에 따라 제일 먼저 삭발을 당하고, 훈련복 훈련모 군화 등을 지급받고, 각기 1구대에서 4구대까지 배정된 구대별로 나뉘었고, 구대내의 내무반 편성은 신장순에 의하여 구분 배치하였으므로, 키다리 제1내무반에서부터 난쟁이 제6내무반으로 나뉘었습니다.
3) 선글라스 낀 교관단의 푸싱 및 폭격훈련
입대당일 첫날에 “입대신고 점호”라 칭하는 첫 일석점호가 시작 되었습니다. 첫 일석점호! 우리에게는 참으로 경천동지의 새 경험이었습니다. 야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공군소위 계급장을 붙인 구대장들이 각기 맡은 구대의 내무반별로 들어가서 침상 위에 로봇트처럼 부동자세로 서있는 후보생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풋싱(pushing)세례를 퍼붓는 동안, 앞 옆 내무반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분별 못할 고성/ 괴성/ 고통/ 신음/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잘했나? 잘 못했습니다/ 눈앞에 무엇이 보이나?/ 예, 천정만 보입니다/ 무엇이? 아니! /기압 훈련받는 후보생이 보입니다/ 등등의 겁에 질려 놀랜 토끼와 같은 모습의 후보생! 바로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사방에서 풋싱의 열도가 가열되면 생각은 “멍-” 해지고 머리는 “핑-” 돌고 몸 전체는 “찡-” 하고, 스며드는 공포의 전율을 느껴보지 않은 우리 후보생 누가 있었겠는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부동자세로 서서 귓싸대기로 시작된 풋싱 세례, 엎드려뻗쳐에서 엉덩이 뭇매(빳다)를 맞아야 했던 우리들! 이렇게 우리는 공군조직에 입문의 시작부터 특별한 공유경험으로 인연을 맺은 우정(동기애)의 동기생들입니다.
4) 하루 훈련의 일과는 점호로 시작 점호로 마무리
이러한 점호를 통한 군사훈련과정은 4개월 동안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 두 번씩 빠짐없이 실시되었는데, 인상에 깊이 남은 그 일조점호 일석점호는 가장 괴롭고 피하고 싶은 기압적인 행사였습니다. 아직도 귀에 쟁쟁히 들리는 듯 하는 구령이 있습니다. “대대장 후보생 일석점호 인원보고, 총원 OO명, 사고 OO명, 현재원 OO명, 사고내용 OOOO, 이상 일석점호 준비 끝!” 참으로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점호 보고 구령이었습니다.
5) 수양록의 추억
일석점호 후 수양록 노트에 자기반성과 결의를 다지는 수양의 글이 거짓과 과장과 위선의 마음을 그대로 표출하는 문장으로 대체하지 않았는가? 반성보다는 분노, 애정보다는 증오, 솔선보다는 요령, 남보다는 내가 먼저라는 본성을 미사여구적 표현으로, 반성 애정 솔선 결의 등의 단어를 써서 미화시키지 않았는가? 특히 인상에 강하게 남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어느 주말 구대별로 대전시에 외출을 하였습니다. 그때 역전다방에서 만난 제1구대장(이규삼 중위 나의 고교선배)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야! 너의 2구대 철학인가 무언가하는 후보생 하나 있지? 그 친구 때문에 너희 2구대 특별훈련이 많은 줄 알라! 그 친구 수양록 쓸 때마다 민주군대에 폭력이 있을 수 있느냐, 인권이 어떻고 철학적 각설만 늘어놓고 있으니, 그것이 군대에서 통할 줄 아느냐?”
라고 신랄하게 지적받았는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후에 확인하니 그가 바로 오늘의 유명한 철학박사 김형효 교수인데, 당시는 심각한 문제의 후보생이었던 것입니다.
6) 비오는 깊은 야밤에 야간특별훈련
수양록을 쓰는 밤 시간, 배가 얼마나 고팠던지 취침점호 밤 10시 끝내고 내무반 수면시간에 용기 있는 특파공작 후보생 1명을 비밀리에 병동 끝 철조망 근처에 보내어 빵 건빵 과자 등을 사가지고 오게 해서 침낭 속에서 잠자는 척하면서 숨죽이며 먹다가, 과자 깨물어 먹는 소리에 들켜서 당직 주번사관(구대장)의 불호령으로, 깊은 야밤에 팬티바람에 끈적거리는 우비만 입고, 맨발에 워커신고 “5분 내에 선착순 집합!” 호령에 따라 번개 치는 암흑의 연병장에 집합하여 특별훈련으로 뛰고 달리고, 엎드려 포복으로 몇 번이고 기지 않았던가? 온몸이 비와 땀과 진흙투성이로 코팅 되었으니!
과자 깨물어 먹는 소리를 들킨 것은 트집에 불과하고, 이미 계획된 군사훈련 교육스케줄에 맞추어 특별훈련을 비바람 치거나, 음산한 날을 골라 어김없이 시행했던 것입니다.
7) 고된 훈련으로 배고픔과 허기짐
그 시절의 배고픔! 오늘의 풍요 속에서 다시 한 번 체험하고 싶을 정도의 추억이 아닌가? 오전의 교육장 실내교육을 마치고 점심식당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 기쁘고도 괴로운지, “1구대 1번 기준 집합”(1구대 1번은 강홍주 후보생) 이란 구령에 맞춰 우리 모두는 구대별로 집합 정렬하여 식당을 향해 발맞춰 행진해가면서 배는 쪼들었는데 그 놈의 군가복창 “더 크게!” 구령이 떨어지면 “폭음도 우렁차게 흰 구름 뚫고.... 원수의 무리 쫓아 하늘 끝가지....” 목청을 돋구어 악을 쓰며 불렀습니다. 그러나 훈련의 강도 때문인지 배는 그렇게 허기를 느껴서, 폭음이 우렁찬게 아니라 뱃속이 비어서 울렁거리는 것 같고, 흰 구름이 뚫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고, 원수의 무리 쫓는 것이 아니라 한 주걱 푹 담아 미식기에 얹어주는 군대밥덩이를 쫓아 식당 끝까지 찾아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던 순간들.... 아! 그 시절이 언제였던고!
8) 삼복폭양에 대전 유성 간 완전무장 행군 및 구보 훈련
대전역과 유성 간을 완전무장을 하고 왕복으로 행군과 구보를 했던 일, 삼복폭양에 녹아버린 아스팔트 위를 군화자국을 내면서 앞과 옆 사람의 땀 냄새와 피로에 지친 체취를 맡으면서 길 옆 논두렁 올챙이 실개구리가 득실거리는 옹달의 논물을 두 손으로 퍼마시며 갈증을 달랬던 일, 유성천 도강 훈련, 신탄진 근교의 심심산속의 심야암흑 속에서 귀영하기까지의 생환훈련, 직지사에서 종합 훈련 등의 추억은 우리가 그 혹독한 훈련을 이겨냈구나 하는 회상으로 아직도 용기와 자신과 희망을 속삭여 주는 듯합니다.
9) 신세타령을 하게 만들었던 거룩한 행사
한 가지 무척이나 질투하고 증오스러웠던 그리고 괴롭고 한심스럽고 처량한 신세타령을 하게 만들었던 거룩한(?) 행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별동구대(특수병과 : 법무관 군의관) 후보생들의 임관식이었습니다. 우리는 4개월의 고된 훈련에, 그 끝은 소위계급장이지만, 그들은 2개월의 단기 신사훈련에 그리고도 중위계급장을 다는 그들의 임관식, 이 행사를 위하여 불쌍한 우리 일반 후보생들은 며칠간의 고단한 행사예행연습을 마치고 이들의 중위임관 뒷대열에 서서 마음에 없는 질투의 박수를 보내면서 축하해야만 했던, 지난날 너무나 허전하고 씁쓸했던 한 토막의 추억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5. 결어 : 공군 추억과 노년의 우정, 전역 후의 생활과 나의 좌우명
공군 이야기를 하자들면 넓게는 한도 끝도 없고, 좁게는 구석진 추억들이 옹기종기 칠순의 연륜을 윤택하고 젊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추억을 공유하는 동기생 회원 간의 우정, 군사용어로 “전우애”를 각별히 느끼며 노년의 우리 회원들을 더욱 돈독하고 끈끈하게 묶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나 개인적으로는 전역 후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의 국위선양을 위한 국제문화교류홍보에 전념하면서 지난 94년 씨름의 천하장사를 주관하는 “한국씨름연맹” 사무총장직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보건 복지부 산하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본부” 사무총장 직을 경험하면서 얻어진 좌우명이 있으니, 그것은 곧 “어울리며<調和의 삶> - 나누며<同苦同樂의 삶> - 누리자<享有의 삶>” 라는 것이요, 이것이 다시 “인생(여생)은 멋지게 즐기고 맛있게 살자!“ 로 이것을 다시 축소해서 ”젊게 늙자!“ 라는 것으로 나의 여생의 좌표로 정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의 공군 이야기를 피력하여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통신문 편집책임 : 김학광 시인..... 교정이나 개선 및 요망 사항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