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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다큐 - 7전 8기의 도전과 신념
『忍苦의 세월』
정 병 산 檢察事務官(58歲)
․1952년 5월 24일 전남 승주 황전 출생
․1978년 5급乙類(9급) 검찰사무직 합격
․1979년 서울지검 첫 발령(검찰서기보)
․1993년 법무부 검찰제2과 검찰주사보
․1996년대검찰청강력부 검찰주사(6급)
․2001년 서울중앙지검특수제2,3부근무
․2007년검찰사무관(5급)승진시험 합격
․2011년-, 대전지검 천안지청 수사과장
Ⅰ. 들어서기 전에
합격기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내는 일이라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아는 분들이 뒤를 따르는 후학들의 귀감이 될 거라며 권하는 바람에 용기를 얻어 필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기약도 보장도 없는 수험생활을 하시는 선배 또는 후배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제 보잘 것 없는 그리고 결코 자랑이랄 수 없는 7전 8기의 전적이나마 그 분들에게 용기와 마음의 휴식처라도 되었으면 하는 충정으로 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많은 이해를 구하면서 제 어려웠던 과거를 한 번 반추해 볼까 합니다.
Ⅱ. 들어서면서
저는 1952년 윤5월 24일 전남 승주군 황전면 외임선리에서 하늘을 이불로 삼고 산천을 울타리로 삼는 겨우 10여세대가 안되는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기도 없는 아주 첩첩산중인 두메산골에서 4남 1녀 중 쌍둥이 형으로 이 세상과 첫 인연을 맺었답니다.
여기서 잠시 당시 저의 가정형편을 돌이켜 볼까 합니다. 2대 독신인 저의 아버지께서는 3살 무렵에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할머니께서는 어린 아들을 버린 채 재가해 버려 몇 안 되는 정씨 문중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시골 깔담살이와 머슴살이를 전전하시며 동가식서가숙하셨답니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께서 스물아홉 살이라는 노총각 때 단지 착실하고 부지런하다는 이유 하나로 당시 유복한 집안의 셋째 딸인 저의 어머님을 만나 둥지를 틀고 저희 5남매를 낳아 그럭저럭 끼니를 이어 갔답니다.
그러나 가난은 숙명인지 저희 가업인 양 따라다녀 저희 쌍둥이 형제 외에는 아무도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한 지독히도 어려운 환경이었답니다.
Ⅲ. 유년기
1. 처절한 가난 기
너무나 먹지 못해 발육이 늦고 체구가 왜소해 9살이 되서야 약 4~5㎞ 떨어진 시골에 있는 황전북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답니다. 어쩌면 국민학교도 졸업을 하지 못했을 뻔 했던 저의 학창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동생과 함께 1~2등을 다투며 학교를 다니다 6학년이 되어 선생님께서 중학교 시험을 치러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시험을 치면 합격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시험을 못 치르게 하시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께서는 시험에 치르는데 필요한 돈과 구비서류 등을 준비하라고 하셔서 저희 형제는 아무도 몰래 하교 길에 부유한 집으로 보이는 집에 들러 보자기에 보리쌀을 동냥하여 팔아 돈을 마련하여 선생님께 갖다드릴 생각으로 이집 저집 다녔지만 어떤 집은 보리쌀을 주기도 했지만 어떤 집은 아예 문전박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리쌀을 동냥하여 시험 준비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시험을 포기하기로 하고 선생님께 돈도 없고 진학도 하지 못할 시험 보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일단 시험은 한 번 보자며 시험 준비에 따른 모든 것을 부담하시고 결국 순천시에 있는 매산중학교에 시험을 치렀습니다.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도 저희들은 잊고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입학하지도 못할 저희들을 데리고 순천 시내에 있는 매산중학교에 데려가 확인한 결과 저희 두 형제 모두 합격(수험번호 136번, 137번)을 하였습니다. 그때 겨울이라 날씨가 차가운데도 선생님께서 저희 두 형제를 무릎에 앉히고 내가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너희들을 진학시킬 수 있을 텐데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와 졸업을 한 달여 남겨두고 이번에는 졸업비를 낼 수 없어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자퇴를 하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하기 시작했는데, 새해가 되면 저희 집안의 가업인 양 아버지를 이어 시골 머슴살이를 갈 채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퇴 후 1주일 쯤 지났을까 선생님께서 옆집 애들을 통해 학교에 나오라는 전달을 받았지만 졸업비도 없을 뿐더러 어차피 진학도 못할 바에 졸업은 해서 무엇 하느냐는 것이 저희 집 분위기였고 당시 저의 동네에서도 소학교라도 나와 시골 머슴살이 하면서 부모님 잘 모시는 것이 최고의 아들이고 효자로 칭송받는 때라 저희가 학교를 가지 않고 땔나무를 하거나 시골 머슴살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흠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뉘 집 자식 참 잘 키웠다며 효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저희들은 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버리고 집에 없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저희 집을 직접 방문하셔서 무조건 내일 학교에 나오라고 하셨답니다. 저희들은 선생님의 간절한 부탁에 10여일 만에 부끄럽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교무실로 조용히 불러 너희들 집이 그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며 졸업비를 손에 꼭 쥐어주시며 국민학교 졸업장이 먼 훗날 너희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무학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던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라시며 내일 다른 애들 졸업비 낼 때 너희들 집에서 가져온 것처럼 그 틈에 끼어 내라고 해 결국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국민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되었고 결국 6년간의 정들었던 교문을 나서게 되었답니다(1967년 2월).
2. 촌놈 용트림하다
졸업 후 시골에서 땔 나무꾼으로 보내면서 지향 없이 그저 책이 좋아 책을 놓지 못하고 책을 벗 삼아 두서없이 책을 보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낮에 날품팔이를 하면서 너무 힘들게 일하다 저녁에 책을 보면 힘이 들고 졸음이 나와 어떻게 하면 좀 더 쉬운 일을 하면서 책을 볼 수 없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때마침 이웃마을 어떤 분이 이발소에 가면 이발 기술을 배우고 손님이 없을 때는 낮에도 책을 볼 수 있으며 일도 일찍 끝나니 저녁에는 밤 늦게까지 책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오로지 공부할 욕심으로 그리고 머슴살이를 피할 생각으로 이웃마을에 있는 동네 이발소에 취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으며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즉 순천시내에서 합숙하면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토요일 오후면 시골집으로 오는 길에 머리 깎으러 이발소에 들어와 그들의 머리를 감는 일이 어린 마음에 왜 그리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는지 엄청 마음이 괴로웠으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부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왜 나는 일류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고도 여기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가. 나도 어떻게 하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저는 도저히 이 시골에서는 내 장래의 꿈을 펼칠 수 없다는 생각과 여기서는 시골 머슴살이를 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무조건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모님 몰래 무조건 서울로 가기로 마음먹고, 이발소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왜 좋은데 취직했는데 집으로 돌아왔느냐는 부모님의 꾸중에 조금 있다가 차라리 부잣집 머슴살이를 나가겠다고 안심시켜 놓고 집에서 며칠 땔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며 산 속에서 제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기회를 엿보던 중 오로지 성공하여 금의환향하리라는 웅대한 꿈을 품고 상경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촌 닭 무작정 상경 기
가출할 기회를 엿보던 중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국민학교 졸업 때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도 교육감상 부상으로 받은 최신 국어사전, 옥편, 그리고 보던 책 몇 권을 보자기에 주섬주섬 싸 가지고 달랑 보자기 하나 챙겨들고 아무도 몰래 집을 나와 동네 사람들을 피해 시골 간이 열차역인 내구 역까지 약 6~7㎞를 걸어가 언덕바지 아래에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숨어 있다가 기차가 시커멓게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역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저는 열차승무원의 눈을 피해 잽싸게 몸을 날려 서울 행 완행열차에 올라탄 후 도둑차를 탔기 때문에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바깥에서 노크를 해도 열차승무원이 검표하러 온 것 같아 겁이 나 아예 문을 열어주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몇 시간을 지나 열차가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혹시나 하고 화장실을 나와 열차 안을 들여 다 보았더니 승객이 아무도 없어 바깥을 두리번거리다 서울 역이라는 간판을 보고, 야! 내가 드디어 서울에 왔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개찰구를 빠져 나갈 일이 걱정되었습니다.
열차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다 염천교 쪽으로 문이 열려 있고 리어카 짐꾼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을 보고 역 구내 역무원들의 눈을 피해 잽싸게 빠져나오는데 어떤 역무원이 ‘저 놈 잡아라!’고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저는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뛰어나와 대로의 많은 사람들 틈에 기어 드디어 대한민국 한양 땅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 서울에서 배고픔의 설움
꿈에도 그리던 서울 땅을 밟았지만 우선 배가 고파왔습니다. 그런데도 서울 역에서 바라보이는 아이디알 미싱과 드레스 미싱의 바느질하는 네온사인의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저를 현혹시키며 배고픔을 잠시 잊게 하였습니다. 책보자기를 들고 어딘가를 걸어가다가 육교를 올라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제가 힘겨워 보였는지 보자기를 들어주겠다며 낚아채듯 가지고 앞서 가더니 중앙우체국 앞에서 금방 들어갔다 오겠다는 사람이 그대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애지중지하던 책을 보자기채 잊어버려 서울이라는 곳이 점점 무섭고 사람들을 마주치면 겁이 났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넓은 서울 땅에서 제 꿈을 펼쳐야 하는데 당장 밥 한 끼조차 해결할 방법도 능력도 없는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갔지만, 밥 좀 달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오다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냥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면서 목적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마 그렇게 굶기를 3~4일쯤 지난 것 같습니다. 얼마만큼 걸었을까 길가에 무슨 작업을 하는데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에서는 물도 사먹는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어서 사실은 호주머니 속에 한 푼도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이 물 얼마에 파느냐고 물었더니 ‘야 이 놈아 누가 이런 물을 판다냐.’고 했습니다. ‘그럼 마셔도 되겠습니까?’고 물으니까 그 아저씨가 ‘실컷 마셔라.’고 하여 저는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그 물을 울컥울컥 실컷 마셨더니 우선 배가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굶은 탓에 금방 힘이 빠지고 눈앞이 흐려지며 어지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아마도 제가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막대기 같은 것으로 제 머리와 온 몸을 툭툭 치는 것을 느끼고 어렴풋이 눈을 떠 하늘을 쳐다보니 어떤 갓을 쓴 하얀 두루마기 차림새의 할아버지께서 지팡이로 저를 툭툭 건드리며 저를 깨우더니 왜 이런 곳에서 자느냐며 어서 빨리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야단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내가 배가 고파 허기를 못 이겨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저는 ‘내가 죽으려고 서울에 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공부하려고 성공하려고 출세하고 싶어 정든 고향을 부모형제를 버리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걷다가 문득 시골에서 잠시 이발소에 다니며 머리 감던 일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이발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차례 문을 두드렸지만 전라도 사람은 도둑놈이라며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 몇 번 더 문을 두드려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서울말을 흉내 낼 수가 없어 걱정도 됐지만 더 찾아다녔습니다. 아마도 6~7차례 문을 두드렸던 것 같습니다. 두드리면 열린다더니 마침내 한 곳에 들렀더니 머리 감는 애가 없었던지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한 번 들어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이발을 하고 머리를 감으려는 뚱뚱하게 사장님처럼 생긴 신체건장한 분이 머리를 감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3~4일을 굶어 곧 쓰러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나가라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것 같아 주인이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젖 먹던 힘을 다 내 죽으라고 머리를 감았더니 그 손님이 ‘주먹만 하게 생긴 쪼그만 한 놈이 머리 한 번 시원하게 잘 감는다.’며 일어났습니다. 저는 감시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주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습니다. 주인의 표정이 흡족해 보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너 우리 집에서 일 한 번 해 볼래?’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맙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주인은 ‘너 일당은 얼마나 주면되겠느냐?’고 물어 저는 일당이란 말조차 생소하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서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는 더욱 몰라 ‘그저 밥만 먹여주고 잠만 재워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럼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 집에서 한번 일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서울에서 취직이 된 것입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가 봅니다.
그런데 며칠을 굶어 너무나 기운이 없어 보였는지 주인아저씨와 직원들이 너 어디 아프냐고 물어 제가 가출소년이라는 것이 들통 나면 믿지 못해 쫓겨날까 겁이나 속이 안 좋아 아침을 먹지 못했다며 아픈데 없다고 얼버무렸는데도 안 되어 보였던지 이발소 앞 가게에서 우유와 빵을 사다주시는데 그 빵과 우유를 눈물이 앞을 가려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며칠 내로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한 통씩 떼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예, 하고 대답을 했지만 저는 성공하기 전에는 집에 연락을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집을 나왔기 때문에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나도 말씀을 하지 않아 저는 저를 믿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호적등본을 언제까지 떼어다 드리면 되느냐고 주인에게 슬쩍 물었더니 못 떼어오면 그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퇴근할 때에는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갔습니다. 그래도 저는 서울에서 취직했다는 생각에 너무나 마음 뿌듯하고 흐뭇했습니다.
5. 서울 남대문경찰서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저는 이발소 안에서 여름에는 바닥에 신문지를 여러 장을 깔고 자고, 겨울에는 의자를 돌려 마주보게 하고 아이들 이발할 때 사용하는 판 대기를 두개 마주 걸쳐놓고 수건을 여러 개 깔고 잤습니다. 하루는 저녁을 먹으려고 곤로에 라면 물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얹어 놓고 수건을 빨아 천정 빨래 줄에 널다가 발로 곤로를 잘못 건드려 곤로가 쓰러지는 바람에 불이 나버렸습니다.
불길이 시뻘겋게 타오르는데 바깥 출입문이 잠겨 있는 바람에 피할 수 없어 꼼짝 없이 죽게 되었는데, 마침 바깥에서 누군가 119신고를 해주어 이발소 안을 반 쯤 태우고 불은 꺼졌지만 저는 불을 냈다고 바로 남대문경찰서에 붙잡혀 가 조사를 받았습니다만 주인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당시 여경에게 조사를 받은 후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훈방 조치로 나왔습니다. 하마터면, 이승을 떠나거나 서울에서의 꿈이 사라질 뻔했던 지금도 생각해 보면 아찔한 순간이었으며 어쩌면 저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내였던 것 같습니다.
Ⅳ. 소년기
상경하여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으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지만 이발이 직업이 될까봐 머리 깎는 기술을 배우지 않고 머리만 감았더니 속도 모르는 주인은 이제 기술을 배워야지 언제까지 머리만 감을 셈이냐며 저의 장래를 걱정하시며 나무랐습니다. 저는 이발소에서 두서없이 이 책 저 책을 닥치는 대로 배우다 시골 면서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태평로에 있는 어떤 서점에 우연히 들어가 서점 주인에게 면서기 되는 책을 골라 달라고 했더니 5급 을류 행정직 책을 한 권 주시 길래 몇 장을 펼쳐보았는데 행정직, 세무직, 감사직, 법원직, 검찰직, 경찰직, 관세직 등 여러 직종이 있었는데 검찰직의 비율이 가장 높아 주인에게 검찰직에 합격하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데 이렇게 비율이 세냐고 물었더니 합격하면 검사 밑에서 일한다며 대학을 나와도 붙기가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시골에서 살 때 판, 검사가 최고 높은 벼슬인 줄 알았고 또 선망의 대상이라 그리고 비율이 높다는 것은 무언가 좋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그리고 영어, 법제대의, 경제대의가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어 한자는 자신이 있어 법제대의를 선택과목으로 해서 공부할 생각으로 서점 주인에게 검찰직에 맞는 책을 골라 달라고 하여 검찰직 시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검찰에 입문한 동기와 계기라고나 할까요.
Ⅴ. 5급 을류 검찰사무직 도전기(4전 5기)
1. 나라 머슴이 되기 위해
이제 제 인생은 오로지 검찰직에 목표를 두고 주경야독 즉 낮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고 저녁에는 검찰직에 합격하기 위하여 책을 벗 삼아 끝없는 기약 없는 어쩌면 무모하고 부질없는 제 인생의 긴 항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검찰직에 3번인가를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이제 이발기술도 배우지 못하고 나이는 들고, 말하자면 자꾸만 성공하겠다는 웅대한 꿈의 날개는 접어지고 가뜩이나 왜소한 제 자신이 초라해지기만 했습니다.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가출하여 서울에 온지도 어언 4~5년이 되어 갔지만 서울에서 제 혈육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놀라 누나도 울고 저도 울고 말하자면 이산가족의 상봉이었습니다. 그때 누나는 몇 년 전에 누가 말해주어 서울 영등포에 있는 삼립식빵 공장에 소위 공순이로 취직하였답니다.
이 모든 현실이 가난이 가져다 준 비극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제 처지가 참 가련하다는 생각을 하니 서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누나 말이 집에서 저를 찾기 위해 점을 치면 제가 어딘가 잘 살아 있다는데 연락이 없는걸 보니 점쟁이가 틀렸다며 살아 있다면 공부도 참 잘했는데 편지를 쓸 수도 있을 텐데 아마도 못된 사람에게 붙잡혀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다며 기다리가 지쳐서 이제는 제가 이미 죽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때문에 어머님께서 몸이 몹시 안 좋다는 말을 듣고는 성공이고 출세고 뭐고 더 이상 불효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제 뜻을 잠시 뒤로 접고 그해 추석명절 때 내려가 어머님께 몇 푼의 용돈을 드렸더니, 누가 너더러 돈벌어 오라고 했느냐며 저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고왔던 얼굴은 주름살로 얼룩져 버린 부모님을 만나 그간의 긴 세월을 돌이키며 못난 모습으로 뵙게 된 불효를 용서하여 달라며 집에서 며칠을 보내다, 엄마, 아빠랑 여기서 농사나 짓고 같이 살자는 부모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반드시 성공하여 다시 찾아뵙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서울 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은 다시 시작됐지만 더 나아지는 것은 없었으며 그러나 타성에 젖어 책은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보면 또 떨어지고 이제 떨어지는 연습을 하는 듯하고 마음도 자꾸만 흔들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영어가 필수과목으로 변경되는 바람에 저는 더욱 더 마음이 괴로워 진퇴양난의 고뇌에 빠졌습니다.
제 인생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무엇인가 한번쯤은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효도라도 한번 하고 삶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서울 구경이나 시켜드리고 세상을 하직할 생각으로 서울에 오시게 하여 남산 구경을 시켜드린 후 고향으로 가는 전라선 열차에 태워 보내드리고 나서 저는 서울 역 부근에 있는 약국을 여러 군데 다니면서 수면제를 사가지고 어떤 골목 여인숙으로 들어가 수면제를 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만, 모진 목숨은 질겨 어느 병원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는 놈은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구나, 아직 죽지 못하게 하는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남아 있는가 봐,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니야, 이게 아닌데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문자답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한참 후 저는 죽을 각오로 다시 한 번 더 잘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다시 낮에는 머리를 감고 저녁에는 책을 벗 삼아 갔습니다.
심신이 지쳐 살아가던 어느 날 충남 성환에서 고추방앗간을 하시는 둘째 형님이 집에 한번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고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잠시 모든 것을 접고 내려가 형님을 도우면서 병역문제를 해결코자 내려갔습니다.
낮에는 형님 일은 도우고 저녁에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책에 매달린 끝에 그 해 한 번 더 떨어지고 다시 도전하여 결국 그 다음 해에 꿈에도 그리던 5급 을류 검찰직(현재 9급)에 4전 5기의 전적 끝에 합격(대전 마 3624번)을 하였습니다. 이 검찰시험에 합격한 것이 어떻게 보면 제 인생항로에 대 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2. 면접시험장에서의 추억
검찰사무직 필기시험 1,2차를 합격하고 서울에서의 3차 면접시험장에서 면접관님이 궁금하셨는지 국민학교만 나왔는데 영어를 어떻게 배웠느냐 물어 당당하게 조리 있게 대답을 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서게 된 제 지나온 가시밭길 같은 긴 세월이 너무나 서러워 목이 메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먹였더니 면접관님이 그렇게 집안이 어려웠었느냐는 한마디 말만을 하고 더 이상 묻지 않고 나가보라 했습니다.
저는 면접실을 나와 화장실로 가 남몰래 많이 울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왜 내가 마지막 관문에서 실수를 했을까 하는 자책감과 제 자신이 불쌍하고 못나서 울었습니다. 나는 또 틀렸구나. 나는 역시 머리나 감거나 남의 집 머슴살이 그릇 밖에 안 되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에서 모든 것이 싫어지고 제 자신이 미웠습니다.
애를 태우며 그래도 길고 긴 합격자 발표 날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행운의 여신은 저에게 미소의 손길을 보냈습니다.
3. 채색 빛 검찰생활과 과거생활의 희비교감
1979. 9.12. 서울지방검찰청 집행과(덕수궁 옆 서소문동)에 첫 발령을 받고 하숙은 삼청동에서 하였습니다. 삼청동에서 버스를 타고 검찰청을 출퇴근하는데 그 기분은 어떻게 형용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근무할 때에는 자꾸만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는 꿈을 꾸거나 시골에서의 지게질하던 꿈을 꾸든지 했고, 제 자리도 어색하고 주변 분위기도 어색하여 내가 잠시 여기 있다가 언젠가 이발소 머리 감는 곳으로 다시 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어쩌다 잘못 들어온 것으로 착각되었습니다.
하루는 출근하는데 버스 안에서 옛날 이발소 주인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그 이발소 주인은 제가 시험을 보겠다며 하루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차라리 그만 두라고 하여, 무단결근을 하고 시험을 치른 후 그 이튿날 출근했더니 너만 생각하느냐며 화를 버럭 내며 갑자기 뺨을 몇 대 때려 그 이발소를 그만 둔 일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분을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출근길에 버스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 분은 ‘너 요새 어느 이발소에 있느냐.’며 그 때는 미안했다는 말을 하더군요. 아마도 그 분도 그 일을 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검찰청에 간다.’고 했더니 ‘너 무얼 잘못했기에 검찰청에 가느냐.’고 물어 ‘시험에 합격하여 취직에 되어 검찰공무원이 되었다.’도 대답했더니 ‘자네 그토록 책을 보더니 결국 좋은데 들어갔구나.’하시며 ‘정말 그때 미안했다.’며 ‘정군 그때 일 잊어 버렸지.’하였습니다. 저는 ‘그럼요 언제 적 일인데요, 마음 쓰지 마세요.’하면서 헤어지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 외에도 잊지 못할 추억들이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당시는 엄청난 시련이었던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이제 주마등처럼 제 머리를 맴돌곤 합니다.
아무쪼록 참 많이 울기도 하고 많이도 서러워하며 억세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Ⅵ. 국졸 만세! 드디어 검찰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하다(7전 8기)
1.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저에게는 왜 이리도 벅찬 기쁨으로 가슴 저려 올까요?
노심초사 검찰사무관 시험 준비를 해 온지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 버렸네요. 시험 시작할 때는 그래도 머리색깔이 검었는데 시험에 합격한 지금은 백발이 되어버렸네요. 과연 저는 무엇을 얻었으며, 남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마치 저 혼자만이 세상에도 없는 검찰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양 철없이 좋은 것은 왜일까요.
누가 저를 미친놈이라 해도 저는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가 검찰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며, 아직까지 저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 본 일이 없어 저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저 자신을 너무 혹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병산아 너 참 고생이 많았다.’라고 칭찬하고 싶고, 또 위로하고 싶습니다.
2. 오로지 堂上官이 되고자
당상관이란, 문관은 정3품 明善대부, 奉順대부, 通政대부, 무관은 折衝장군 이상의 벼슬계제를 칭하는 사전적 의미 외에 역사적 의미로는 吏隷의 상관의 칭호라고 합니다만 우리 검찰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5급 이상이 당상관이라 회자되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남들이 하니까 적당히 하면 남들처럼 쉽게 되는 것으로 안일하게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너무나 과대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출발부터가 남들과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렸나 봅니다. 1978년 11월에 제가 5급 을류 검찰사무직 시험에 합격하고 ‘불굴의 투지’란 의제로 합격수기를 쓴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수기를 보면 옛날이 생각나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가 봅니다.
그래서 진정 내가 누구이며 어느 선상에 있는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진인사대천명 심정으로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보겠노라고 제 자신과의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킨 것 같아 기쁩니다.
3. 시련의 연속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승진시험 준비하기에는 환경이 너무나 열악합니다. 사무실에서 일해야지요, 집에서는 경제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가장 노릇을 해야지요, 한편 승진시험 준비 때의 나이는 한참 사회활동을 해야 할 시기라서 수험준비에 전념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때라서 더욱 어렵습니다.
게다가 청 내 분위기는 어떤가요. 사무실에서 책을 보지 말라며 지적되면 본인은 물론 기관장까지 문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동료와 선후배 직원들의 곱지 않은 시선까지 고려하면 아예 시험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에 미칩니다. 따라서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승진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무관 승진시험 제도개선을 위해 부단한 연구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역시 뒤늦게나마 합격은 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부족하여 10여년이 걸렸습니다. 후배들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승진제도가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 수험생활을 회상하며
수험준비 기간에는 집안 경조사에 아예 열외 인물이 되어버렸고 처음에는 이해를 하나 거듭 실패하다 보니 무능한 존재로 낙인 찍혀 대인 기피증에 우울증까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모 선배님은 아예 사람이 타고 다니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는데, 그 분의 합격소식을 듣고 ‘선배님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드렸더니 ‘후배, 이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닐 수 있어 좋네!’라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를 아시는 지인들은 ‘너만은 시험에 될 줄 알았는데 왜 그리 안 되느냐.’며 안타까워하던 일, 아는 분들을 만나면 죄인처럼 피해서 다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갑니다.
한 번은 합격자 발표를 하여 제가 시험에 떨어진 것을 알았지만 장인어른 기일을 앞두고 아내에게 말할 수 없어 근 1주일을 감추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장인 기일을 무사히 마치고 낙방을 고백했을 때의 가슴 아픈 일 등 수많은 애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련히 저려 옵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에 근무할 때의 추억입니다. H부장님께서 북악산 정기를 받아 시험에 합격하라며 남산에 함께 올라가 북악산을 바라보고 제 양손을 붙잡고 펼쳐 기를 받아 주시던 일이 지금은 너무너무 고맙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의 따뜻한 인간애를 저는 영원히 간직하면서 다른 분들에게 배달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제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 할 때 그 부장님께서 전화로 때로는 E-메일로 격려와 용기를 주시며 ‘많이 기도하고 있으니 너무 상심 말고 열심히 하면 올해는 반드시 기쁜 소식이 있을 거다.’고 믿음을 주신 부장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격무에 애쓰시는 모습을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저에게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늘 좋은 일 많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5. 7전 8기 도전 끝에
제가 2000년도 시험을 보기 시작했으니 꼭 7번 쓰러지고 8번 만에 일어섰습니다. 마치 그 단어가 저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인 양... 이번에도 시험을 시원하게 보지를 못해 반신반의하면서 마음 졸이며 한달 여를 기다렸는데 신의 가호는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10여 년간의 수험생활의 애환을 어찌 다 다시 털어놓을 수 있을까요. 이제는 그저 한마디로 모든 분들에게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6. 합격의 순간
2007.11.2. 시험을 치르고 한달 여를 기다려 12.7일 공식 발표 예정일인데 앞당겨 12.4일 발표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 바짝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안하여 휴가를 내고 가버린다지만 저는 자리를 비울 처지도 안 되고 또 비울 수도 없어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그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근하여 9시 10분 쯤 되었을까, 따르릉 하고 저를 찾는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 전화 한 통화가 지금가지의 저의 고통을 마감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요?!
군산지청에 수사과장으로 있는 형제처럼 지내는 K라는 친구로부터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확실한지를 확인한 다음 저는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지금까지 노심초사 마음 졸이며 저를 지켜 준 저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여보! 됐어.’하고 전화해 주고 더 이상 어떤 말을 이을 수 없어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달려가 많이도 흐느꼈습니다.
10여년을 기다려 온 오늘이었기에 저에게는 너무나 가슴 벅차 올랐습니다. 사실은 이번에도 안 되면 계속 사무실을 다녀야 할 것인지 바깥 경기는 계속 좋지 않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가서 법무사를 개업할 것인지 도대체 장래의 일이 대책이 서지 않아 남몰래 엄청나게 마음 졸이며 입술이 타 다 불어 텄습니다.
이 기쁨은 아마도 대통령 당선자 기쁨보다 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시험의 굴레에서, 암흑 속에서 긴 터널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저는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저는 저를 사랑해 주신 분들이 그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 주위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존재로 알았습니다. 사실은 또 무척이나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전화로, E-메일로, 축전으로 너무너무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격려하여 주시고, 기뻐하시며 축하해 주셔서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늘 좋은 일 많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Ⅶ.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1. 아버지, 어머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왜소한 체구에 비록 초등학교만 마쳐 주셨지만 저에게 이렇게 끈질긴 투지와 건강을 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9급 검찰사무직 시험 합격은 살아생전에 보여드렸지만 5급 검찰사무관 시험 합격은 보여드릴 수 없이 세월이 원망스럽습니다. 막둥이에 너무 늦게 합격하여 이 가슴 벅찬 기쁨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가서 기쁜 소식 잘 알려 드리고 다녀왔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시며 편히 지내십시오. 이제 시험 핑계대고 산소에 기일에 빠질 일 없으니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2.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얼마나 마음 졸이며 오늘을 기다려 왔소. 드디어 결국 큰 일 해냈습니다. 모든 일을 전폐하고 당신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오로지 시험에만 매달려온 나를 한번도 불평불만 없이 늘 너그러운 미소로 대해 준 당신은 분명 히 세상에서 나의 유일무이한 천사일 것이오. 내가 26년 전 꿈속에서 당신을 처음 만난 후 어언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소. 그동안 못난 사내 거두느라 애 많았습니다. 이제 못 다한 사랑 듬뿍 안기며 당신에게 품 갚으며 살아가리라, 이제 편히 좀 쉬구려...
지웅아, 태웅아, 이제까지 한번도 속 썩이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준 너희들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10여년이란 긴 세월의 수험생활을 잘 마치고 영광의 합격을 손에 쥐었다. 참 기쁘구나, 너희들도 아버지처럼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라, 이제야 아버지 구실을 제대로 하며 살겠다. 너희들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잘 해 주리라 믿는다.
Ⅷ. 글을 맺으며
글을 마치고 보니 제 자랑만, 그리고 제 기쁨만 넋두리처럼 풀어 놓았습니다. 그저 동도제현님의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수험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 후배들에게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은 사필귀정이듯 시작은 반드시 끝이 있다고 믿습니다. 절대로 희망의 밧줄을 놓지 마시고 발버둥친다면 기필코 최후의 승자는 결국 당신의 몫입니다.
아무리 고통이 많았어도 합격 발표 후 집에 돌아와 검찰총장님의 ‘축 합격의 난(蘭)’을 바라본 순간 지나온 길고 긴 모든 고통이 모두 사라져 버리더군요. 수험생 여러분들에게도 반드시 그런 날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디 합격의 그날까지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
첫댓글 2008년 1월호 고시계에 실린 정병산 검찰사무관님의 사무관 승진시험 합격수기입니다. 고시계는 그간 비교적 연소자들의 고등고시 합격수기를 천편일률적으로 실어 왔었는데 반해 이 글은 특집형식으로 기고가 되었으며, 소견으로는 일반적인 고시합격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가는데 교훈을 줄 수 있는 가치가 훨씬 높은 감동적인 글인 것 같아 올려 봅니다. 저는 사실 겪어보지 못해 본 너무나 어려웠던 60~70년대에 입신과 명예를 위해 처절히 분투했던 기성세대 분들의 우직한 모습이 떠오르게 되네요. 역경에 굴하지 않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해 보면서, 조그만 일에도 좌절하곤 하는 우리 시대의 세태를 새삼 대오각성해 봅니다.-_-;;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도 지금부터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