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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클라이머의 삶] 8,000m 고산에서 3m 인공벽으로 산인생 바꾼 유석재씨
“기회가 오면 벽을 통해 높이 더 올릴 터”
▲ 소 속
성균관대 OB
▲ 등반경력
1991년 가셔브룸2봉 등정 1995년 엘캐피탄 조디악 등반 1996년 충모강리-릉보강리 연속 등정 1997년 안나푸르나-캉첸중가 원정 1997년 가셔브룸1봉(등정)-2봉 원정 1997년 초오유 한 시즌 2회 등정 1997년 마나슬루 동계 원정
등산의 세계는 다양하다. 고산원정, 암벽등반, 빙벽등반, 평범한 육산 보행에 인공벽 오르기까지 그 세계에 속한다. 대개는 한 쪽에 치우치거나 시간과 체력이 허락지 않아 점점 수준을 낮추면서 다른 부문에는 등한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고산등반을 추구하는 산악인들은 인위적인 시설물에서 행해지는 인공등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보편적인 경향이다.
그런데 유석재씨(兪錫在·35·더탑 대표)는 8,000m 높이의 고산에서 3m 높이의 인공벽으로 대상을 바꾸었다. 91년 대학 3학년 시절 가셔브룸2봉(8,035m)을 한국 초등정하고, 이후 충모강리(7,048m)-릉보강리(7,095m) 세계 초등, 초오유(8,201m) 한 시즌 2회 등정 및 최단시간 등하산이란 기록으로까지 이어진 그의 등반대상이 이제 실내인공암장 더탑(The Top)의 3m 높이 인공벽으로 바뀌었다. 그의 새로운 산(山)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진짜 대학 산악부원’ 되려고 입대 늦춰
그가 97년 가을 초오유(8,201m)에서 세운 두 개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한 시즌 2회 등정에, 두번째 시도에서 19시간50분 최단시간 등하산 기록을 낸 것이다. 8,000m급 고산은 경험자일지라도 온몸의 진을 다 짜내야하는데 불과 며칠 뒤에 또다시 올랐고, 고소적응이 완전히 이루어진 뒤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하더라도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데 적어도 사흘 이상 걸린다.
그러나 이후 그는 산악계에 모습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지난 7월 인공암장을 만들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동네 뒷산에서 히말라야 고산까지 높이를 올린 그는 경기도 안성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나무하러 다니던 길을 따르거나 가시덤불 헤치며 뒷산을 올라야 했는데, 산꼭대기에 올라 산 너머를 바라보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가 모르고 지내온 세상을 본다는 게 즐거웠다.
중고등학생 시절, 볼 만한 책이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친구집이건 동네 어른집이건 가리지 않고 찾아다닐 정도로 책을 좋아한 그는 도서관에 취직하면 평생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89년 성균관대학 도서관학과(현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했다. 재수생 시절 곧바로 진학한 친구들을 통해 ‘대학생활의 꽃은 서클활동’이란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그는 입학하자마자 여러 서클을 기웃거렸다.
그중 사진 동아리와 산악부에 관심이 쏠렸다. 한데, 설레는 마음으로 먼저 찾아간 산악부에서 만난 산악부원이 기껏 한다는 말이 “아무나 할 수 없는 활동인데, 네가 해낼 수 있겠냐?”였다. 깡촌에서 힘 좀 쓴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라온 석재로서는 자존심이 상해 도전적으로 산악부에 가입했다.
산악부 시절 장기산행을 마치고나면 늘 석재만 남고 다른 동기생들은 모두 탈퇴하곤 했다. 춘계등반 때도 그랬고, 새로운 동기가 들어오더라도 하계나 동계 등반을 마치고나면 늘 혼자나 아니면 두 명만 남았다. 선배들이 워낙 강하게 몰아치고, 산악부 분위기 또한 엄격한 탓이었다.
그 역시 탈퇴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농번기 때면 당연히 시골집으로 돌아가 부모님들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선배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달력에 빨간 색으로 표시된 날에는 무조건 산행에 참가해야했다.
그럴 때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산악부 생활을 해야 하나 갈등을 느끼곤 했다. 그렇지만, 대학 3학년 때 주장을 맡은 다음 입대해야 진정한 대학 산악부 출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군입대까지 미루면서 산악부 생활에 충실했다.
그렇게 열심히 산악부 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선배들은 대학 3학년인 석재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가셔브룸2봉(8,035m) 원정이었다.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한상국씨와 당시 국내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꼽히는 김창선 선배 등 4명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원정대였다.
“저로서는 군입대를 미루어야한다는 고민이 있었고, 선배들은 원정 나갔다 만의 하나라도 다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선뜻 다녀오란 얘기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는가 싶어 마음을 굳혔던 겁니다.”
어린 나이에 8,000m 고산을 등반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원정은 시련의 과정이었다. 히말라야를 간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게 생각하던 시절인지라 등정은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가셔브룸2봉 역시 초행자를 순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툭하면 날씨가 변하고,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런 상황에서 등반을 강행, 캠프를 구축한 다음 고소적응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내려서만 묘하게도 눈보라가 멈추고 두터운 구름이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나타나 기운을 빼곤 했다.
“요즘에는 마지막 캠프 설치 후 이튿날 곧장 정상공격에 나서지만, 그때만 해도 철저하게 고소적응을 하면서 등반해야 안전하고 등정확률도 높다는 생각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한 다음 베이스캠프로 일단 내려왔죠. 그런데 그 이튿날 날씨가 그렇게 좋을 수 없더군요. 그리곤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1주일간이나 폭설이 퍼부었고요.”
성균관대로서는 89년 실패 이후 재도전이었기에 대원들에게는 부담이 많았다. 때문에 힘든 캐러밴에 이어 한 달이라는 긴 기간이 지나가는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베이스캠프 도착 45일만에 대원 4명 전원 한국 초등의 기록을 세우면서 막을 내렸지만, 마지막 등정 길까지 순탄치 않았다. 등반속도가 맞지 않는 선배와 한 조를 이루어 오르다 결국 해발 7,600m 지점의 콜에서 헤어지고, 이후 한 시간 이상 추위에 떨면서 기다린 끝에 뒤따라 올라오는 조와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엉뚱한 면도 많은 유석재는 94년 4월 특전사 사병으로 군복무를 끝내자마자 말레이시아에서 5개월간 지냈다. 여행사 직원으로서 현지에 근무하면서 학비도 벌고, 어학 실력도 키우려는 생각에서였다. 현지가이드 생활로 그는 동남아시아 최고봉인 키나발루(4,101m) 정상을 40여 회나 오르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95년 복학하자 이번에는 거벽등반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해 마침 한국대학산악연맹이 구조대를 조직, 이를 기념하고 대원들에게 큰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자는 의도에서 미국 요세미티 엘캐피탄 원정을 꾸렸고, 그 원정에 동참을 제의해왔다. 암벽등반에 심혈을 기울이며 산악부 활동을 해왔던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원조로 올랐다 내친김에 세계 초등
거벽등반에 경험이 없는 대원 12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당시 한국 산악인들이 등반해본 적이 없는 루트를 선택했다. 16피치 길이의 인공등반루트인 조디악이 그 대상이었다. 선배들은 첫 피치의 좁은 크랙에 큰 프렌드를 어거지로 끼워 넣으며 오르려 했으니 그게 먹힐 리 없었다.
첫날에 이어 둘째 날에도 등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유석재가 나섰다. 산악부에 갖춰진 다양한 장비 덕분에 이미 너트에 익숙했던 그에게 좁은 크랙은 그리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너트를 이용해 선배들이 헤맨 첫 피치 크랙 구간을 쉽게 넘어서고, 이어 미국에 도착해 구입한 카퍼헤드와 같은 첨단장비도 곧 능숙하게 다루자 선배들은 아예 그를 16피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앞장세웠다.
“전 구간이 오버행을 이루고 있어 제7피치 위로 올라서면 후퇴할 수도 없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습니다. 벽상 비박장비도 처음 사용해보는 거였고요. 그런 상황에서 한 피치 한 피치 넘어섰는데 제16피치에서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다시 제15피치로 되돌아와 하룻밤 더 지낸 뒤 정상까지 올랐습니다. 그 바람에 먹을 것은 물론 마실 물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등반을 마치고 나니 뿌듯하더군요. 해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을 진하게 맛보았습니다.”
요세미티 등반을 무사히 끝내고나자 이듬해부터 그에게는 고산등반 기회가 줄을 이어 왔다. 그 첫번째가 95년 한중 우호등반협정을 기념하여 나선 충모강리-릉보강리 합동원정이었다. 중국 내 미답봉에 도전한 그 등반에서 유석재의 등반속도는 눈에 두드러졌다. 캠프 하나를 구축한 다음 1차 공격대원으로 충모강리 등정길에 나섰던 그는 예상보다 정상까지 거리가 너무 멀자 도중에 포기하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서야했다. 때문에 2차 공격은 다른 대원들에게 넘어가고, 유석재 조는 2차 공격조 지원을 맡아야했다.
2차 공격조가 제2캠프에서 정상공격에 나선 날, 베이스캠프에서 제2캠프에 올라선 그는 ‘언제나 내려오려나’ 하는 조바심에 캠프에서 100여m 위로 올라섰다가 아직도 정상에 도착하지 못한 2차 공격조를 보곤 뒤쫓아가 결국 그들과 함께 충모강리 세계 초등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어 등반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선 릉보강리 등반은 짧은 기간 안에 끝내려고 속도가 빠른 대원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그 등반에서도 두 대원과 함께 제2캠프를 출발, 급경사 설벽을 올려친 다음 커니스를 이룬 릉보강리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97년은 고산등반 복이 터진 해였다. 충모강리-릉보강리 원정에서 고산등반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봄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자인 엄홍길씨가 등반대장을 맡은 대산련 안나푸르나(8,091m)-캉첸중가(8,586m) 원정대에 발탁됐다. 그러나 그는 대자연의 비정함을 맛보고, 고산의 험난함만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와야했다.
안나푸르나 등반에서는 동료 셰르파가 크레바스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사고 수습 후 정상을 향했으나 마지막 캠프에서 이틀간이나 폭설에 갇혀 꼼짝 못하고 겨우 탈출해야했다. 캉첸중가 북벽 등반 역시 어렵게 정상 200여m 아래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했으나, 공격 대원 모두 바닥난 체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홍길이형이나 저나 마지막 캠프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체력을 워낙 많이 소모한 데다 캉첸중가 등반에서는 짐을 무겁게 메고 오르내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체력이 바닥나고 만 거죠.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 캠프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는데, 정상공격에 나서기로 한 이튿날 새벽이 되니까 저나 홍길이 형이나 컨디션이 엉망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베이스캠프에서 왜 정상공격에 나서지 않느냐고 하는데 정말 답답하더군요. 정말 너무나도 아쉬운 등반이었습니다.”
그렇게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귀국하자 이번에는 카라코룸 등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대학산악연맹 가셔브룸1봉(8,068m)-2봉(8,035m) 원정이 그것이었다. 귀국하자마자 나선 등반이었기에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른 원정에 비해 평소 돈독하게 지내온 대원들도 많고, 마음 편히 지내다보니 곧 체력을 회복하고 즐겁게 해냈던 등반이었다.
그 원정에서 가셔브룸1봉 등정에 성공한 유석재는 귀국한 지 20일만에 성균관대 초오유 원정에 나서 앞서 든 2개 기록을 세운 것이다. 초오유 등반에서 뛰어난 등반력을 과시하자 또 다른 기회가 왔다.
“전대원 등정을 목표로 나선 1차 공격 때 너무 빠른 속도로 오르다보니 등정을 마치고 1시간쯤 내려서서야 다른 대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안개가 몰려오는 등 날씨가 나빠져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선배들을 설득해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습니다. 그리곤 두번째 공격에서는 선후배들 먼저 등반을 시작하라 하고, 저는 이틀 후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던 겁니다. 물론 속으로는 며칠 전 가보았기에 길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욕심도 있었죠. 당일에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던 거죠.”
그 꿈 같은 도전에 성공하자 베이스캠프에서 머물던 슬로베니아팀에게서 엉뚱한 제의가 왔다. 대원은 3명에 불과하지만 시샤팡마(8,027m)와 에베레스트(8,850m) 입산허가도 받아놓고 있던 그 팀이 나머지 2개봉을 함께 등반하자고 여러 차례에 걸쳐 제의해왔다.
8,000m 2개봉을 연이어 등반한다는 데 욕심이 생겼다. 다시 얻기도 힘들고, 거저 얻은 거나 다름없는 기회였건만 선배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함께 원정을 떠났으니 귀국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 세 번 말을 꺼내보아도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이제 기회가 온다면 거벽으로 향할 것”
귀국 후 초오유 등반에 앞서 이미 약속돼 있던 박영석씨의 마나슬루(8,156m)팀에 합류, 동계등반에 나섰으나 연이은 폭설로 등반보다는 툭하면 눈사태를 피해 도망치다시피 하는 등반의 연속으로 원정이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97년 한 해 동안 네 차례의 해외원정에 나서 8,000m급 6개봉을 등반하자 성대산악회뿐 아니라 그의 앞날을 기대하는 산악인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유석재씨는 이후 산에서 모습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초오유 등반에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 등반을 마치고 나서 열정이 식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슬로베니아팀의 제의가 제게 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면 선배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한창 달아오른 쇠붙이에 얼음물을 끼얹은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선배 위치에 있었더라도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당시로선 그런 제의에 대해 쉽게 판단내릴 수 있을 만한 경험도 없었고, 또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게 당시 저희 산악회의 철칙이었으니까요.”
이후 유석재씨는 산과 거의 인연을 끊고 먹고사는 일에만 주력했다. 98년은 IMF 시절을 맞아 취업 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취업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98년 가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산악가이드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금강산 가이드로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듬해 99년 봄 요세미티에서 인연 맺은 강세원씨(35)와 결혼하고나자 떨어져 지내는 생활이 좋을 리 없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일 저 일에 손을 대보다 2002년 초 증권회사에 입사, 안정을 얻을 수 있었지만, 모든 게 돈으로 결말지어지는 일을 하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산이 그리워졌다. 그렇지만 직장을 팽개치고 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집 가까이 실내인공암장으로 눈길이 갔다. 학창시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만큼 바위에 자신이 있었지만, 인공암벽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흥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인공암장을 직접 운영하면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구상을 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전문산악인보다는 어린이나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계획하고 있고요. 아직 기대했던 만큼 이루지 못했지만 잘 되리라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운동 프로그램 같은 것은 인공암벽등반을 오래 해온 선후배들을 통해 배워야할 거고요.”
유석재씨는 지난 7월5일 석촌호수 부근에 80평 규모의 실내암장을 개장했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구상을 하면서 지낸다. 물론 취미가 아닌 생업으로 시작한 일이기에 수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3m 높이의 인공벽, 80평 넓이의 공간에서 그의 꿈을 가둬놓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암장 식구들과 1년에 한두 번씩 해외 트레킹도 나가고, 함께 해외등반을 해보고픈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멀루트 등반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시 고산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빤빤한 벽에 붙어볼 겁니다. 훈자에 있는 스판틱 같은 봉 말입니다.”
<한필석 기자>
첫댓글 와우 대단하세요! 선생님 화이팅! =)
ㅉㅉㅉ 신념과 철학이 있어시는 분이네요
이렇게 훌륭한 전문산악인을 늘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우와~ 완전 멋찌세요... ㅎㅎ
처음엔 못봤는데 출근길에 이걸보고나니 일단은 대단해요
그래도 샘에대해 조금알고나니 왠지 가까워지는듯한느낌이드네요
친근감 100%충족 저만그런가여ㅋㅋ
이제야봤어요. 대단하신분이란건 알았지만 무한존경 폭발!!! 영광입니다.
와~ 선생님 카리스마는 엄청나 보이셨는데 역쉬ㅎㅎ 저도 너무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