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이 만난 사람, 강화의 농민 씨알 최형찬
강화도로 이사와 이곳 사람들과 사귀면서 숨어 있는 씨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그 중에서도 최형찬씨는 강화도의 미래를 꿈꾸는 꿈사모 모임에서 알게 되었는데 첫만남에서 참씨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숨어있는 씨알을 찾아 실을거라며 인터뷰 요청을 하자 완강히 거부하신다. 내세울 것도 없고 아직 삶의 한 과정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기가 부끄럽고 두렵다며 한사코 사양하시는걸 우린 누구나 과정에 있고 씨알은 미완성인체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라고 간신히 설득을 했다 (아래의 대담에서 최형찬씨는 최로 저는 홍으로 표시한다.)
홍 : 먼저 강화에 귀농하시기 전에 살아온 얘기를 잠시 해주시지요
최 :84년 대우조선에 입사해서 87년 민주화투쟁을 겪으면서 노조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89년 인천 대우자동차에 사간전보되어 대우자동차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세 번 해직되고 세 번 복직하고 구속 기소되기도 했지요. 수배 중에 도피 생활을 하다 지금 아내를 만나기도 했고요
2000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과정에서 해고가 되었고, 조합원들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과 저의 원직복직 싸움을 병행하게 되었어요. 당시 저는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에서 승소하여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으나 회사가 불복하여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청구를 한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노사 간의 협의를 통해 저를 포함한 조합간부 몇명을 복직 시킨다는 합의서를 쓰게 됬어요. 저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정리해고 무효를 외치며 싸우고 있는 조합원들을 두고 조합간부가 특히 내가 먼저 복직할 수는 없다고 싸웠지만 결국 노사 합의를 되돌릴 수 없었어요. 해고된 조합원들이 다 복직한 후 나는 마지막으로 복직하겠다고 공언하며 투쟁을 독려했었는데, 이렇게 되자 회사에 복직되는날 조합원들에게 인사만 드리고 사표를 내고 나왔지요
홍:강화로 귀농할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최:전북 남원에서 소작농인 조부모 슬하에서 농사짓는걸 보고 도우며 살아선지 회사다닐 때도 언젠가는 시골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지요. 남과 경쟁하며 살기가 싫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마에 땀흘리며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는 일이 무언가 생각해보니 농사밖에 없더라구요
홍:가족들이 찬성하던가요?
최: 너무 고마운건 아내가 흔쾌히 찬성을 했어요.그래서
가족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아 보며 귀농지를 찾아 다녔고 결국 강화도에 터를 잡게 되었지요.
홍: 농지 살 돈은 있었나요?
최;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논이든 밭이든 다 빌려서 짓지요
홍:그럼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지 않나요?
최:처음 강화도에 들어와 소비를 줄이며 생활하니 한달 생활비가 80만원정도 들었어요. 차를 바꾸고, 아이들 학원을 안보내고, 의료비를 안쓰고, 통신료를 줄이고, 텔레비전은 오래전 부터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당시 우리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 반에서 휴대폰 없는 사람은 자기들 밖에 없다'는 거에요.
주식이나 부식은 다 해결되니 농촌에 사는 여러 즐거움을 생각하면 불편할 것도 없어요 . 그렇게 살아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난 요즘은 점점 생활비가 늘긴해요. 현재는 100만원을 훨씬 더 드려야 생활이 가능해 졌어요. 물가가 너무 올랐어요. 특히 차량 운행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기름값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렇다고 시골에서 차없이 사는 것은 너무 어렵고...쩝쩝.
홍; 농사는 어떻게 지셨어요?
최;밭 농사든 논 농사든 다 유기농법으로 짓지요. 신성한 먹거리에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주는 것은 사람은 물론 생태계를 파괴하고 죽이는 것과 같아요. 힘도 더 들고 수확량도 적지만 이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갈 길이지요
홍: 논농사는 어떻게 지어요?
최: 처음엔 오리 농법으로 지었어요. 아이들과 김매기를 하러 논에 들어가면 오리들이 따라다니며 장딴지를 쪼으며 먹을 것을 달라고 그래요. 그러면 아이들은 간지러워 까르르 거리며 즐거워 하지요. 한번은 논에 갔는데 오리들 뒤로 작은 새끼 한 마리가 '삑삑' 거리며 따라 다니는거에요. 너무 귀여워 집안에 데려와 키웠는데 아들 준형이가 먹이도 주고 놀기도 하고 잘 땐 자기 배 위에서 재우기도 했어요. 그렇게 어느 정도 키운 후 논에 오리들과 함께 있게 했지요 . 그런데 커가면서 그 놈은 다른 오리들과 생김새도 크기도 달랐어요.
나중에 조류전문가에게 알아보니 기러기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오리를 거두어 드리고 추수를 했어요. 그 다음해에 다시 모내기를 하고 오리새끼를 넣어주고 나중에 기러기도 함께 넣어 주었지요. 그런데 몇일 후 논에 가보니 없어진거에요. 집에서 길러서 날아가지 못할거 라고 생각했는데 날아가 버린거에요.얼마나 가슴이 아팟던지--- 특히 아들이 너무 슬퍼해서 힘들었어요. 지금도 가족들이 그때를 떠올리면 아쉽기도 하지만 즐거운 한때를 추억하곤 하지요
오리 농법은 사료비도 많이 들고 또 매일 오리 사료를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요즘은 우렁이 농법으로 짓지요. 재작년엔 강화도 이외의 지역에 사는분들에게 자기 먹을건 자기가 경작 해서 먹는게 좋겠다고 하여 1600평 논농사를 지어 자기 먹을 것 세가마씩 가져가고 함께 농사를 지은 다섯 가정이 마음을 모아 나머지 다섯가마는 북한 어린이 돕기에 보냈지요. 쌀을 직접 현물로 보낼 수는 없다 하여 쌀을 팔아 보냈어요
홍:말씀 들으니 부끄럽네요. 가진건 제가 더 많은 것 같은데 베푸는건 최형이 훨씬 부자네요
밭농사는 어때요?
최: 밭을 빌려 강화도 특산물인 속노란 고구마 농사를 짓지요.농약을 안쓰니 우리 부부가 김메고 돌아서면 또 풀이 나요.5월부터 10월까지 천평쯤 심으면 2-3백 만원 수입이 되니 시골에선 큰 목돈이지요
홍: 농사 이외에 하시는 일들은 무었인가요?
최: 동학사상을 기초로 하여 세운 마리학교란 대안학교에서 2년반 동안 농사와 자연건강법을 가르첬지요. 그후 여러분들과 함께 콩세알 농장이라는 사회적 기업도 했고요. 콩세알이란 한알은 새가 먹고 한알은 짐승이 먹고 한알은 사람이 먹는다는 뜻으로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지요. 여기서는 20여 가정이 국산콩을 유기농으로 재배하여 된장 간장 두부등을 만들지요. 사회적 기업이라 장애인,실업자,노약자등 사회적 소외계층이 모여 한 식구처럼 삽니다.
홍: 마리학교와 콩세알농장에 대해서는 저도 관심이 많아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또 몸살림운동도 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떤 것이지요?
최:정확히 말하면 자연건강요법입니다. 저희 식구들이 병원에도 안가고 건강하게 사는건 운동요법,식이요법,생활요법을 잘 지키기 때문이지요. 자기 몸의 주인이 되면 병원이나 약물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요. 선생님이 주신 씨알사상 씨알누리에 나오는 유영모 선생님 체조법이 제가 하는 몸살림 운동과 닮은 점이 많은 거 같네요. 몸살림운동을 꾸준히 하면 병원에 의지하지 않고도 누구나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강화여성복지회관, 재가노인복지회나 산마을고등학교,강화읍사무소등에서 가르치고 있지요
홍:강화도는 강화나들길도 유명하고 문화적 자원도 풍부하고 세계적인 갯벌도 있고 자연생태적으로도 엄청난 보고인데 무슨 또 다른 활동을 하고 계신건 없으신지요?
최:어울림이란 생태교육연대가 있는데 제가 강화 어울림 지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연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요. 뱀눈이나 곤충눈으로 자연보기,나무,풀,곤충,새등 자연과 친해지기등 여러 가지가 있지요
홍: 요즘 학교폭력등 아이들의 교육이 심각한데 자연을 가까이 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이런 교육은 너무도 필요한 것 같네요. 서울이나 인천등 도시에서 많은 학생들이 와서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겟네요.
최: 강화도는 역사유적은 물론이고 생태적으로도 중요하고 다양한 공부거리가 많은 땅입니다. 마리산을 비롯하여 생태적으로 건강한 숲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갯벌등 , 그속에 깃들어 살아가고 있는 귀하고 소중한 다양한 생명들 그러한 공부거리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홍:강화도는 북한과 제일 가까워 민통선도 있고 한데 평화와 통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2009년 양사면에 평화 전망대가 생겼는데 전에는 그곳 이름이 제적봉(붉은 적을 제압한다는 뜻)전망대였어요. 지금도 전망대 앞에 탱크가 있고 그곳을 안보교육장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이제 북한을 더 이상 적으로 보지 말고
민족 공동운명체로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면 좋겠어요. 새들은 언제든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데 우린 같은 동포인데도 땅에는 물론이고 마치 바다에도 하늘에도 철조망을 친듯 왕래를 못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요
평화전망대에서 보면 앞에 흐르는 물줄기를 조강이라고 합니다. 이 조강은 정전협정당시 유엔사와 북한군의 협의를 통해 중립지역으로 설정되고 중립지역 활용과 관련된 협약에 의하면 쌍방이 100m를 자체 관할지로 갖되 나머지 공간은 군사적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으나 민간차원의 활용은 가능하도록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엔사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들어가기는 어렵고 해서 강화도에서는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라고 해서 중립지역인 조강의 물길을 열어보자는 의미로 외포리 앞 바다에서 교동앞 바다까지 배 띄우기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전망대 우측으로 유도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그 유도는 원래 머물 유 자를 써 유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왜 유도라고 하냐면 예전에 삼남지방에서 쌀을 실고 강화도를 거쳐서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가려면 물때르 맞춰야 하는데 물이 빠지는 썰물때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도에 머물면서 잠시 머물러 있는 섬이라는 뜻의 유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섬인데요. 유도는 1996년 8월에 홍수로 북한에서 소 한 마리가 떠내려와 중립지역인 작은섬 유도에 상육 했는데 앞다리를 발목지뢰에 다친 황소였답니다. 그 황소를 김포 주민들이 구해 치료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후 구출 1주년 기념으로 제주도 우도에 사는 암소와 살게 하여 새끼를 낳았는데 북에서 온 황소 이름은 평화라 하고 제주도 우도에서 온 암 소 이름은 통일이라 했습니다. 그후 송아지를 낳아 기르고 있는데 그 새끼 소들이 평화통일의 염원을 안고 평화통일 소라는 이름으로 길러지고 있다고 하니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저는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면 강화에서 애쓰는 여러분들과 함께 작은 일이나마 늘 마음과 힘을 모아 함께 하려합니다
홍; 지금 말씀을 들으니 최형은 씨알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고 계신 참씨알이라 느꼈습니다. 씨알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적이 있나요?
최; 함석헌 평전 등 함선생님 책 두권을 읽은 것이 전부지만 씨알사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더 배우고 싶네요.홍형이 씨알사상 전하는 일에 결실이 있으면 좋겠구요
홍;장시간 시간 내주셔서 고맙구요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최; 드러낼 것 없는 삶인데 이렇게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가 쉽지 않을텐데 다행히 저는 한발 물러나 이렇게 시골에 내려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감사할뿐입니다.. 도시에서 힘들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만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도 있어요. 최근에 집을 넓혀 민박 펜션도 하게됬는데 저희 집에 오시면 시골 생활과 저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평소 함선생님을 존경하며 살았는데 잡지를 통해서라도 이렇게 씨알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스럽습니다 .
홍; 앞으로 함께 씨알 운동을 하시지요. 종종 씨알님들 모시고 댁에 찾아 뵙고 귀찮게 하겠습니다(이 대화는 나를 강화도에 정착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계신 오성기형댁에서 막걸리 한잔하며 나눈 것입니다. 평생 동지로 함께 살고 싶은 최형과 오형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