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태항산근거지 싸움
중국조선족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2년 02월 17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태항산근거지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1941년 7월에 태항산근거지에 도착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된후 첫 1 년동안에 40여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29명 무장선전대는 대장 김세광의 인솔밑에 하 북성 형태부근의 원시현호가장에서 선전사업을 벌렸다. 300여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밤의 어둠을 타서 무장선전대를 포위하였다. 동틀무렵부터 시작된 포위돌파전투에서 의용대의 전사들은 적과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28세에 난 전사 손일봉은 탄알이 떨어져 몸에는 수류탄으로 옆에 있는 바위를 쳤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손일봉은 일본군 8명과 함께 쓰러졌다. 26세에 난 전사 박철동은 일본군 두놈과 육박전을 벌려 적 두놈을 쓸어눕혔다. 열 몇곳이나 부상을 입은 그는 전신이 피투정이로 되었으나 맨주먹으로 총창을 꼬나든 일 본놈과 싸우다가 영용히 희생되었다.
1942년 5월 19일, 일제침략군은 수만명의 병력으로 태항산근거지에 대한 《5월소탕》을 시 작하였다. 팔로군 129사 389려와 지방부대 및 민병들은 전선으로 나가고 후방의 팔로군 총 부기관 및 그 가족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비전투인원 도합 4,000여명이 6월 2일에 마전 의 하청구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싸울수 있는 전투력은 오직 경위패와 조선의 용대 화북지대 100여명뿐이었다. 화북지대는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밑에 우박처럼 쏟아지는 일본군의 총탄을 무릅쓰고 남산을 점령한후 적과 치렬한 싸움을 벌렸다.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끝내 기관간부와 가족들의 안전한 이동을 엄호하였다. 전투에서 10 여명 조선족용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진광화(陳光華)는 중상을 입고 적에게 생포되지 않기 위해 높은 적벽 에서 뛰여내려 장령히 희생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도자의 한사람인 석정(石鼎) 도 중상을 입고 42세를 일기로 희생되었다.
1942년 8월, 팔로군 총부와 태항구당위원회에서는 희생된 조선족동지들의 철저한 혁명정신 과 고상한 품성을 따라배울 것을 호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10월 10일에 팔로군 총 부, 중공중앙 화북국, 팔로군 129사,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에서는 련합으로 섭현에 서 추도대회를 열고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과 조선의용군지도자들인 진광화, 석정 등을 추모하였다. 추도대회장에는 주덕총사령과 엽검영총참모장이 족자에 쓴 조사가 정연히 걸 려있었고 류백승 라서경 등 지도자들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좌권의 분묘량켠에 진 광화의 석정의 묘지를 앉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