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8일에 은혜여고에서 있을 교사연수에서 강의할 내용입닏. 요즘 올리는 글이 엇어 한 건 올립니다
경기남부지역의 도로교통
김해규(한광중학교 교사, 지역사연구가)
1.국가발전과 교통․통신
교통통신은 고대로부터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교통은 중앙과 지방통치에 필요한 요소이며, 사람과 물자 뿐 아니라 지식, 기술, 문화, 생활양식을 이동시키는 경로였고, 자원과 군사력 확보, 외교적 측면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역대 왕조와 국가는 교통로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역은 교통과 통신에 있어 중핵(中核)에 해당하였다. 고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건국한 백제가 가장 먼저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나, 6세기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삼국을 주도한 사례,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이 단기간에 정치, 경제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던 것도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수로교통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한다.
2.조선시대의 육로(陸路)교통
조선왕조는 한양천도 후 수도정비사업과 함께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의 교통망을 정비하였다. 또한 태종, 세종, 성종을 거치면서 도로의 건설과 관리, 도로폭에 대해서까지 규정을 법제화하여 경국대전에 기록하였다. 세종 때의 도로기준에 따르면 도성(都城) 내의 도리(道里)의 기준점은 궐문(闕門-광화문)으로 하고 , 각 지방과의 도리 기준점은 성문으로 하였다. 또 도성의 개념은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기준으로 하였다.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왕실 또는 중앙정부의 변방을 경기(京畿)라고 하였다. 그래서 경기도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대신 향리와 토와의 발호가 적었고, 왕실과 고관대작들의 능묘가 있어 왕과 고관들의 행차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요역, 공물, 진상의 부담이 많았다. 서울지향, 관료지향적 성향의 재지사족들이 많았던 것, 궁방전이나 역둔토, 서울에 근거를 둔 고관대작들의 토지가 많았던 것도 경기도의 특징이었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조선왕조는 경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경기관찰사는 문신관료 중에서도 중신들이 임명되었고, 집권붕당이나 명문가 출신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교통로는 크게는 육로와 수로•해로로 구분되었고, 육로에는 보도(步道), 역로(驛路)가 있었다. 육로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구분하였다. 도로의 폭은 대로(大路)의 경우 3미터 내외였고, 중로나 소로는 대로에 준하였다. 도로는 명나라 척관법(尺貫法)을 기준으로 주척(周尺) 6척을 1보, 360보를 1리(里)로 삼았고, 10리마다 소후(小堠=이정표),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웠으며, 30리를 1식(息)이라고 하여 역참을 두었다. 또 교통로의 안전한 확보와 편의를 위해 도로 곳곳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고, 조선중기 이후에는 주요 길목에 점(店)이 들어섰다. 역(驛)은 중앙의 행정명령을 지방에 전달하는 기능, 진상과 공부(貢賦)의 운송, 사신이나 귀한 손님의 영송(迎送)과 입마(立馬)를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또 군사적으로 기밀이나 정보의 전달과 군사들의 이동과 관련해서도 역은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역로(驛路)의 구간마다 찰방(察訪)을 두어 역로(驛路) 및 역마(驛馬)를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교통로는 흔히 9대로로 나눈다. 대동지지에 수록한 9대로의 구간은 다음과 같다.
제1로는 한양 돈의문에서 홍제원을 거쳐 의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전체 길이 1,086리 로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라고도 불렀다.
제2로는 한양 흥인문에서 함경도 서수라(西水羅)까지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전체 길이 2,459리로 흔히 관북로(關北路)라고 불렀다.
제3로는 한양 흥인문에서 중랑포, 망우리를 넘어 동해안의 평해(平海)까지를 연결하는 교통 로다. 전체 880리로 흔히 관동로라고도 한다.
제4로는 한양 숭례문에서 한강진(한남동)을 건너 판교참, 용인, 죽산을 지나 부산진까지를 연결된 교통로다. 전체 길이 960리로이며, 낙동강, 한강의 내륙수로와 연결되었고, 왜국 사신의 입경로(入京路)로 좌로, 중로 또는 영남대로라고도 불렀다.
제5로는 한양의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판교, 용인, 경상도 유곡까지는 제4로와 함께 가다가 경상도 고성현과 통영으로 빠져나가는 교통로다. 충주가 아닌 청주를 거치는 것이 특징이며, 전체 530리였다.
제6로는 한양 숭례문에서 동작진과 노량진을 건너 과천, 유천(수원), 진위현의 청호역, 갈원을 거쳐 공주, 전주, 남원을 거쳐 통영까지 연결된 교통로였다. 삼남대로라고도 불렀으며, 전체 986리였다.
제7로는 한양 숭례문에서 동작진을 거쳐 제6로와 함께 내려가다가 전라도 삼례에서 갈라져 태인, 정읍, 목포를 지나 제주도까지 연결된 교통로였다. 호남로, 제주로라고도 불렀으며, 전체 1,430리였다.
제8로는 한양 숭례문에서 충남 보령의 충청수영(忠淸水營)까지 연결된 교통로다. 제6로를 따라 과천, 진위현 갈원, 소사원까지는 같이 내려와다가 평택현을 거쳐 아산의 요로원, 온양의 곡교천, 신창을 거쳐 보령 오천의 충청수영까지 연결되었다. 왕의 온천행궁어로였다.
제9로는 한양의 돈의문에서 출발하여 양화진, 김포, 통진을 거쳐 강화부에 이르는 길이었다.
3.조선시대의 수로․해로교통
조선시대의 해로(海路)는 조세 및 소금과 같은 해산물의 운송, 인마(人馬)의 운송, 군사적 방어의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연안 교통로는 크게 3개의 해로가 있었다.
제1로, 한양의 용산강(龍山江)에서 강화 손돌목을 돌아 충청-전라-경상도의 연해안을 거쳐 동래에 이르는 해로(海路)
제2로, 한양의 용산강에서 통진-강화의 북쪽 돈대(墩臺)를 돌아 교동(喬桐)-황해-평안도의 연해안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해로(海路)
제3로, 함경도 서수라를 출발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의 연해를 따라 동래에 이르는 해로다.
이상의 3대 해로는 연안의 나루와 포구와 연결되어 수로교통망을 형성하였다.
해로의 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곡의 운송이었다. 세곡은 연안의 포구에 조창(해운창)을 설치하고 조운선으로 해로를 통하여 운송하였다. 그래서 국가는 수로교통로 확보와 운영을 위해 하천의 조수가 드나드는 곳에 포(浦)를 설치하고, 강변의 요충지에는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하였다. 세곡은 대부분 하삼도(下三道)에서만 징수하였기 때문에 해운창도 연안이나 해양과 연계된 포구에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수운(水運)과 해운(海運)은 인마의 운송 및 상업활동과도 관련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인마(人馬)에 의지해야 했던 육운(陸運)에 비하여 위험부담은 컸지만 운송량이 월등하게 많고 이동시간이 단축되는 장점이 있어 근대이전에 크게 발달했던 교통수단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강(京江)과 서남해안, 강과 하천의 수로를 중심으로 선상(船商)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우리나라의 선박은 밑이 평평한 사각 통 모양의 평저선(平底船)이어서 해안이 길고 수심이 낮은 서남해안에 출입이 자유로웠고 항구가 아니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할 수 있어 하천이 발달한 곳이면 내륙 깊숙한 곳까지도 상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었다.
4.경기남부지역의 도로교통과 평택
조선시대 경기남부지역은 영남대로(제4로), 삼남대로(6대로), 충청대로(8대로)가 지났다. 영남대로는 앞서 말했듯이 한양에서 용인, 충추를 거쳐 부산진까지 연결된 도로로 일본 사신의 입경로였다. 이 도로는 삼국시대 경주에서 계립령을 넘어 충추를 거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도로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새재길이 개척되면서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5개 고을, 충청도 5개 고을, 경상도 58개 고을을 거치는 도로로 정비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새재를 넘는 영남대로, 죽령을 넘는 경상좌로 외에 추풍령을 넘는 경상우로가 개척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추풍령길은 영남대로처럼 험난하지 않고 평탄해서 근대이후 경부선 철도와 3번국도가 가설되어 오늘날의 서울-부산 간 도로망의 기본이 되었다. 다음은 영남대로 경기구간이다.
한양 숭례문 → 용산중고교 → 한강도(한남대교 아래) → 신사동 → 양재역(양재동) → 언남동 → 새원 → 다리내고개 → (판교I.C) → 너더리(판교 낙생역) → 풍덕천리(용인 수지) → 연원 → (용인 구성) → (경찰대학) → 동진원 → 구흥역(어정마을) →능모랭이 → 역조교개(메주고개) →용인 삼가동(궁말) → 역말 → 용인 김량장동(술막골) → 용인 양지 삼박골 → 양지(면사무소) → (17번 국도) → 용구리고개 → 좌찬고개(용인백암 도창마을) → 좌찬역(좌향리 좌전마을) → 행군이마을 →백암장 → 원터마을(백암면사무소 근처) → 숫돌고개(백봉초등학교) → 안성시 일죽면 주천리 → 길마재 → 오방도 → 분행역 → 비석거리 → 태평원(안성시 죽산면) → 죽산면 장암리 → 죽산면 송산리 → 용산동 주막촌(죽산면 금산리) → 충북 음성 생극면사무소 → 모로원 → 용원 → 충주 단월역 → 충북 괴산군 소조령 → 문경 새재 제1관문 → 문경점촌 → 관갑천 잔도 → 덕통역 → 상주 낙원역 → 경북 칠곡 → 대구 → 경북청도 → 밀양 → 경남 양산 → 부산 동래부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수원, 평택, 천안, 공주, 전주, 남원을 거쳐 경상남도 삼랑진, 통영까지 연결된 도로였다. 삼남대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대동지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여러 지도 및 지리지에 소개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춘향전에 수록되면서 유명해졌다. 그래서 평택지역에서는 삼남대로를 흔히 ‘춘향이 길’이라고도 부른다. 대동지지와 춘향전을 토대로 복원한 삼남대로(三南大路) 경기남부 구간은 다음과 같다.
한양 숭례문 → 청파동(청파역) → 용산 → 동재기나루 → 남태령 → 과천 → 인덕원 → 갈뫼(평촌신도시 백운초교 부근) → (효성초교) → (오전초교) → 의왕시(고천초교) → 사근내원(행궁) → 의왕 지지대고개 → 영화역(수원시 영화동) → 화성 장안문 → 팔달문 → 수원중고등학교 → (권선초교) → 대황교(융건릉) → 황계교 → 떡전거리(병점) → 중미현(중미고개)→ 오산(신점) →평택시 진위면 갈곶리(이방원) → 견산리(산직촌) → 봉남리(진위현 읍치) 진위목교 → 샛뚝거리(주막) → 작은 흰치고개(염재) → 백현원(송북동 염재와 동막 사이) →큰 흰치고개 → 도일동 감주거리 → 칠원동(갈원) → 가내(죽백3동) → 재빼기(죽백3동) → 배다리(비전동 배다리방죽) → 소사동(소사원, 소사점) → 유천동(양성유천) → 아교(천안시 성환읍 가룡리) → 홍경원 → 성환역말(성환읍) → 천안 신은역 → 공주 → 삼례 → 전주 → 남원 → 통영
◈숭례문 → 마포나루 → 노들나루 → 광명 → 안양 → 의왕 지지대고개
◈숭례문 → 역삼 → 양재역 → 다리내고개 → 판교원 → 낙생역 → 구성역 → 구갈 → 오산신점
충청대로는 한양에서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있었던 충청수영을 연결하는 대로로 충청수영로 또는 온양행궁어로라고도 불렀다. 이 길은 한양에서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평택시 소사동 소사원에서 갈라져 충청도 평택현(현 평택시 팽성읍)으로 넘어갔다. 충청대로는 조선왕실에서 온양행궁을 갈 때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도로변에는 왕의 행차와 관련된 각종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충청대로의 노정(路程)은 다음과 같다.
한양 → 수원 → 갈원(평택시 칠원동) → 소사원(평택시 소사동) → 둔포(아산시) → 요로원(아산시) → 온양 → 신창 → 신례원 → 충청수영(충남 보령시)
역로(驛路)는 대로와 함께 가기도 하였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경로를 가졌다. 영남대로는 서울 양재역에서 출발하여 낙생역(광주), 구흥역(용인), 김량역(용인), 좌찬역(안성 죽산), 분행역(안성 죽산), 무극역(음성)을 거쳐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삼남대로는 청파역에서 출발하여 영화역을 거쳐 청호역(평택시 진위면 청호리 및 오산시 대원동)으로 연결되었다가, 가천역(안성시 원곡면 내가천리), 성환역(천안시 성환읍)을 거쳐 삼남으로 내려가거나, 성환역에서 화천역(평택시 팽성읍 추팔1리)을 거쳐 충청대로를 따라 내포지방으로 내려갔다.
5.정조의 화성행차와 삼남대로의 변화
삼남대로 경기남부구간은 조선 후기 정조의 화성행궁과 현륭원 행차를 위한 어로(御路)로서 큰 기능을 하였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한 뒤 1790년 2월 8일부터 12차례에 걸쳐 참배를 하였다. 죽을 때까지 1년에 한 번 이상씩 참배한 격이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삼남대로를 따라 이뤄졌다.
본래 삼남대로는 숭례문 → 용산나루 → 동작나루 → 남태령을 넘어 과천 → 인덕원 → 지지대고개 → 영화역을 거쳐 화성 장안문으로 들어 가는 코스였다. 하지만 이 길은 거리가 짧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남태령이라는 험로를 넘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행궁과 현륭원 행차 5년만인 1795년에 시흥로를 개척하였다. 시흥로는 용산이나 마포나루에서 노들나루로 건너 광명 → 안양을 거쳐 의왕 지지대고개에서 합류하는 노정이었다.
왕의 이동은 국가의 중심이 옮겨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대다수의 문무백관과 궁중의 상궁과 나인들, 호위하는 병사들 수 천 명이 함께 움직였다. 규장각에 보관된 ‘원행정례’에는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에는 무려 6,230명이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었다. 1795년의 화성행차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동행하였고, 정조는 수원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이때에 동행한 6,230명 가운데는 문무백관과 관속 1천 1백 명, 장용영의 군인 5천 44명, 병조 차비군 86명이 포함되었으며, 한강에 주교(배다리)를 놓기 위해 38척의 대선과 난간선 240척, 선상들과 선군(船軍) 1천 여 명, 말 1천 4백 17필, 등불 3천 6백 4등, 등불 3개 간격으로 군인 1명씩(1,201명)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위 사료에 기록된 화성행차 노정은 다음과 같다. 돈화문 → 돈령부 앞길 → 통운다리 → 종루 앞길, 대광통다리 → 소광통다리 → 구리개 병문앞길 → 솔고개 → 수각교 → 숭례문 → 수저동 앞길 → 청파교 → 돌모퉁이 → 을원고개 → 나업산앞길 → 용산나루(배다리) → 노량나루 → 용봉정 → 장승고개(상도동) → 번대방천다리(신대방동) → 대방천들 → 마장천다리 → 문성동앞길(가리봉동) → 수성참발소 → 시흥행궁 → 백산앞들 → 염불다리 → 만안교 안양참발소 → 장산모퉁이 → 군포냇다리 → 서원냇다리 → 청천들 → 서면천다리 → 원동네(과천과 광주 경계) → 사근내들 → 사근내참발소 → 지지대고개 → 괴목정다리 → 용두앞길 → 목욕동다리 → 만석교 → 영화정 → 화성 장안문
조선후기 한글소설 춘향전에도 삼남대로의 노정이 나온다.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올라 간 이몽룡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전라도 암행어사에 제수되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다.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로 내려가는 길은 광주로 갈 때는 지금의 1번국도와 같았던 호남로(제주로), 전주와 남원으로 내려갈 때는 삼남대로를 따라가야 했다. 이몽룡도 삼남대로의 출발점인 숭례문 앞에서 암행어사 밀명 교지를 전해받고 남원으로 길을 잡았다. 다음은 그 노정이다.
전라도로 내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지나, 동자개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정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 돌아들어, 팔달문 내달아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 김제역 말 갈아타고, 덕정, 원터, 광정, 활원, 모로원, 새술막, 공주 금강 휘뜩 지나... 여산관 숙소하고, 삼례역졸 분부하고... 전주 들러 한벽루 구경하고... 임실... 남원
남원에 내려가던 이몽룡 여산역에서 마패를 들이대고 역졸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 일대를 염탐하고 보름께 남원으로 모이라는 밀명을 전달한다. 다시 남행하여 남원에 당도한 이몽룡, 암행어사 출두를 소리쳐 남원부사 변학도의 죄상을 밝혀내고 옥에 갇힌 춘향을 구해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정인(情人) 춘향이와 함께 삼남대로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 하였다.
평택지역의 민중들은 이 작은 대목을 놓치지 않았다. 요즘처럼 메스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에서도 중앙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평택지역이 소개되면 화제꺼리가 되는 마당에, 읽을꺼리래야 춘향전, 흥보전 밖에 없던 시절에는 오죽했으랴.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춘향이길’,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아름다운 이름이다.
■참고자료
◈평택에 당도하여[次平澤縣] /정약용
금년에는 연해지방 비가 아니 내려서 / 今年海壩慳雨澤논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었는데 / 水田處處蕎花白먹는 곡식 같지 않고 들풀과 흡사하여 / 不似嘉穀似野草메밀대 붉은 다리 석양에 처량하네 / 凄涼落日群腓赤늦게 심은 모포기 두세 치 가끔 푸른데 / 或種晩秧靑數寸메밀 만약 심었다면 저처럼 자랐으련만 / 悔不種蕎如彼碩메밀 익어 장에 가서 쌀과 서로 바꾼다면 / 蕎成走市換稻米가을 되어 고을 환곡(還穀) 어찌 충당 못할쏘냐 / 秋來豈不充縣糴
◈소사원의 모정에서[素沙院茅亭]
이른 새벽에 진창길을 건너가니 / 凌晨渡泥潦띠집이 평평한 들을 눌러 있는데 / 茅宇壓平原기러기 오리는 하늘 멀리 날고 / 雁鶩兼天遠물쑥들은 땅을 파랗게 덮고 있네 / 蔞蒿蓋地繁분분히 달리는 건 삼도의 역말이요 / 紛紛三道馹띄엄띄엄 있는 건 두어 집 마을일세 / 點點數家村남주의 나그네 머리 돌려 생각하니 / 回首南州客그 회포를 쉽게 논하지 못하겠네 / 情懷未易論 (점필제집 시집 제1권)
◈갈원(葛院) 도중에 짓다
시골 객점 하나가 갈림길에 임해 있고 / 野店臨岐路
집 주위에 푸른 산이 띠처럼 둘렸어라 / 靑山繞屋連
마을 주변엔 세버들이 휘휘 늘어지고 / 村邊垂柳細
언덕 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산뜻해라 / 原上雜花鮮
처처에서 타고 가던 말을 좀 쉬게 하며 / 處處休征馬
집집마다 밥 짓는 저녁연기를 보노매라 / 家家起夕煙
나그넷길에도 흥치가 없진 않은데 / 客行還有興
다만 유감은 술 살 돈이 없는 것 / 沽酒恨無 (포저집 제1권/조익)
◈옥관자정 이야기
칠원1동 원칠원 마을은 삼남대로 갈원(葛院)이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원(院)은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을 위해 두었기 때문에 숙박과 식사, 음료가 필수적이었다. 옥관자정은 갈원에 있었던 우물로 본래 이름은 옥수정이었다. 이 우물을 옥관자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께서 남행을 하던 중 갈원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임금은 몹시 목이 말라 곁에 있는 관원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관원은 주막 옆에 있던 옥수정의 물을 떠다 바쳤다. 신하가 떠온 물을 맛있게 마신 왕은 달고 시원한 물맛에 감탄하며 당상관이 패용할 수 있는 옥관자를 우물에 하사했다. 그 뒤로 옥수정을 옥관자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침담 이야기
세종 때 정승을 지낸 맹사성의 고향은 아산시 배방면 맹씨행단이다. 소탈한 성품에 청백리로 소문났던 맹사성은 고향을 오갈 때에도 혼자 검은소를 타고 다녔다. 어느 날 맹정승이 고향에 갔다가 상경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접한 평택현, 진위현, 양성현 등 인근 고을의 원님들은 서둘러 장호원 인침담에 모여 주변을 청소하고 맞을 준비를 하였다. 사실 변방의 수령직에 제수된 끝발 없는 원님들로서는 이번 기회에 중앙의 실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맹정승은 나타나지 않았고 서산에는 해만 뉘었뉘었 넘어가고 있었다. 그 때 멀찍이서 검은 소에 올라탄 초로의 노인이 어린 동자에게 고삐를 잡힌 채 휘적휘적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화가치민 원님들은 ‘머지않아 맹정승이 가실 길인데 네놈이 함부로 지나간단 말이냐며 소에서 내리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노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보게 내가 맹고불(고불은 맹서성의 호)이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혼비백산한 원님들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가지고 있던 관인(官印)을 그만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 이 연못을 인침담(印沈潭, 또는 인두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인침담은 메워져 흔적이 없어졌다. 1970년대 경지정리 때도 없었다는 것으로 봐서 근대 이후 신리 일대의 간척과정에서 메워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