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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Tyre)는 세계 최초의 도시국가연합인 지중해 동안의 페니키아(베니게, 포에니, 가나안)의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구약 에스겔서(27:12~25)는 두로와 교역하는 수많은 나라들과 그 통상품을 일일이 열거하며 두로가 해상무역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경제적 부를 누리는지를 밝히고 있다.
B.C. 586년 유대왕국의 멸망으로, 두로는 무역의 경쟁국이 멸망하였으니 교역량이 자국에 집중되리라는 기대로 크게 기뻐하자, 에스겔 선지자는 타인의 불행을 딛고 부를 더 쌓기를 원한 두로의 교만한 태도를 지적하며 두로의 영화가 극에 달하였을 때 이렇게 예언한다.(에스겔26장)
4그들(바벨론)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여호와)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5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12네(=두로)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가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 13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를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14너를 맨 바위가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예언이 기록된 수 년 후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두로성은 13년 동안이나 포위공격을 견디다 함락되고 목숨을 건진 수천 명이 해안에서 8백 미터 떨어진 섬으로 도망하여 거기에 새로운 두로를 건설했다.
이로서 에스겔의 예언은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다시 250년이 지날 때까지도 두로의 성벽은 대부분이 그대로 솟아 있고, 수백만 톤의 돌들, 자갈들, 목재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어 그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는 듯 했으나, 위대한 지략가 알렉산더 대제가 당시 패권을 쥔 바사(Persia)의 강력한 해군력을 분쇄하고자 지중해 동안의 모든 항구들을 하나 하나 점령, B.C. 332년 드디어 해안에서 8백미터 떨어진 섬 위의 난공불락의 성채로 요새화된 새 항구도시 두로에 이르렀다.
대왕은 해안에서 새 두로성까지 바닷길 8백 미터에 둑을 쌓아 길을 내고자 그의 공병참모장 다이어디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옛 두로의 모든 성벽들을 무너뜨려 그 돌들과 재목과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지라.’
이는 에스겔 예언을 정확히 성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Charles Mercer의 저서 ‘Alexander the Great’에서 두로에 관한 기록을 옮긴다.
‘본토에 세워졌던 두로성은 무너져 평지가 되었고 그 흙 섞인 잡석들은 공사현장으로 옮겨졌다. 한편 레바논(두로는 레바논에 위치한다)의 숲에서 목재들을 끌어 오고, 또 여러 산 허리에 채석장을 만들어 다이어디스의 전설적인 대로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돌들을 떠 왔다... 알렉산더 자신도 손수 자기 등으로 돌들을 져 날랐다.’
흙 섞인 잡석들과 목재들과 돌들! 이것들은 예언에 나온 그 자재들로서 새 두로성을 파괴하는 데에 필요한 대로를 내기 위해 옛 두로성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다 긁어내어 운반, 바다에 메워졌고, 이리하여 새 두로성도 포위되어 파괴되고 결국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보면 예언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성을 무너뜨려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자리를 그물 말리는 곳이 되게 하시겠다 하셨으니...
그런데, 디 제임스 케네디는 그의 저서 ‘내가 믿는 이유’에서 이렇게 썼다.
자기 교회 성도가 두로 성터를 방문하고 새 두로성이 있었던 자리의 사진을 찍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사진에는 평평한 반석 위에 그물이 널려 있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두로는 한 때 북아프리카에 식민지 카르타고를 개척할 만큼 힘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교만함으로 말씀대로 고난을 겪고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카르타고는 세력이 커지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 B.C. 146년 멸망하였다)
이와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예언되고 기록된 후, 수 십, 수 백년이 지나 그대로 성취된 예가 적어도 2천 가지가 되는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예수가 유다에 의해 은 삼십에 팔려 십자가 형을 당하는 과정에도 많은 예언들이 그대로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복선이 깔려 있다(이하는 조철수 저 ‘예수평전’을 참고함)
예비지식으로 ‘은 삼십’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구약 스가랴의 예화(11:7~13, 기원전 6세기 초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상황에서 잡혀 죽을 운명에 처한 양떼/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돌보겠다고 하며 그들에게 그 목자로서의 품삯으로 얼마를 주겠느냐고 묻자 은 삼십으로 정했다는 예화)에서 ‘죄지은 이스라엘 자식들을 돌보는 품삯(몸값)이 은 삼십’이라는 숙어적 표현이 생겼다.
모세의 법규에서는 소가 종을 받아 그가 죽었을 경우, 소가 들이 받아 죽게 된 종의 값이 은 삼십이다.(출애굽기 21: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 죽이라)’
여기서 극적 상상(theatrial imagination)을 발휘하여, 단막극이라면, 등장인물이 넷이다. 종, 종의 상전, 소, 소 임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었다.(마태복음26:15)
유다가 예수께 다가와 그에게 입을 맞추니(마26:49-입맞춤 행위는 선동자로 지목했다는 뜻이라고 함, 설명은 생략) 군병들이 예수를 붙잡아가 대제사장들이 소집한 산헤드린(공회)에 끌고가 심문하였으나 산헤드린에서는 판결을 못내리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 결국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은 삼십을 받은 유다는 종의 상전인 셈이고, 예수는 소에 받혀 죽은 종이다. 종의 상전에게 손해배상을 한 소 임자는 유다에게 예수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지불한 대제사장들이다.
정리하면,
종/예수
종의 상전/유다
소/?
소 임자/대제사장들
그렇다면, 종을 죽인 소는?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종을 죽게 만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빌라도는 7년 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자 유대 지방 총독권을 빼앗기고 로마로 불려갔다. 빌라도가 유대 땅에서 없어진 것을 소가 돌에 맞아 죽는 것에 빗 댈 수 있다.
정리하면,
종/예수
종의 상전/유다
소/빌라도
소 임자/로마 황제
종의 상전/유다는 소가 종/예수를 들이받아 죽게 하여도 된다고 하며 종의 상전 역을 가상해서 대제사장들로부터 종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받았다. 그런데, 산헤드린에서 예수의 사형 판결이 나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실상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에서 판결이 날 것으로 확신하여 유다에게 은 삼십을 주었고, 유다도 그렇게 되리라 믿고 받은 것이다. 즉, 그들 대제사장들이나 유다가 예상한 소는 산헤드린이었다.
그런데, 예상대로 되지 않고, 산헤드린은 종을 죽게 만들 소 노릇을 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을 죽게 만들 소가 바뀌게 되었다. 종의 상전/유다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다른 소에게 종이 죽게 되는 소식을 접하자(빌라도는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왜냐면,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를 선동자로 몰았기 때문이다. 민중을 선동한 사람은 로마에 반란을 음모하는 반역자로 취급했다)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처음 약속과는 다르다며 종의 상전 노릇을 하지 못하겠다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마27:1~3) 종의 상전/유다는 자기 종/예수를 들이 받을 소 임자가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자기가 받은 돈을 지불한 사람에게 돌려 준 것이다. 만일 돌려 주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다면 법을 어긴 사람이 된다. 왜냐면 그는 다른 소 임자로부터 다시 한 번 손해배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도둑질한 셈이 된다. 즉, 십계명(제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을 어기는 중죄를 짓게 된다.
그런데, 그 다른 소 임자/빌라도는 종의 상전/유다에게 종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줄 리가 없다. 왜냐면 그 소/빌라도의 상전은 이방인(로마 황제)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모세의 법규를 따를 필요가 없다. 한편, 소는 이미 종을 죽이기로 되었기 때문에(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릴 것은 자명하다) 종의 상전은 종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받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종의 상전/유다는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대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무죄한 피’는 예수를 가리킨다. 초기 유대교 현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을 짓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켰는데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람을 뜻한다.
제사장 스가랴는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신상주의자들에게 반대하자 성전 안뜰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말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원한을 갚아주십시오)’(역대하24:17~22)
예수도 ‘무죄한 피’에 대해 언급한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의 대가)를 이 세대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누가복음11:50) 곧 아벨의 피로부터 스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에 요구될 것이다.’(눅11:51)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스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23:35)
예수는 선지자들의 무죄한 피, 의로운 피를 보고 이 세대에 그들의 피를 갚아 주겠다는 말이다. 그 피의 대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유다는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상기하여 예수가 자기의 입맞춤으로 인해 ‘의로운 무죄한 피’를 흘리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산헤드린 재판에서 예수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다(마26:62~63)
의로운 사람의 침묵으로 흘린 무죄한 피는 이 세대에 갚아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는 의로운 침묵으로 항변한 것이다.
유다도 예수의 무죄한 피의 대가를 대제사장들이 갚아야 한다고 여겼는데 지금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말한 것이다. 즉, ‘무죄한 피/종’의 몸값을 누가 갚아야 하느냐는 항변이다. 종(‘무죄한 피’)을 들이받아 죽게 만들 소(빌라도) 임자가 너희(대제사장들)가 아니라면 누구냐는 질문이다. 그러자, 대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27:4)
고 반문한다. 자기들 대제사장들이야 로마 황제에게 가서 그 몸값 은 삼십을 요구할 수 없음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면서 네 스스로 알아서 해보라는 말이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마27:5)
어느 누구에게도 은 삼십을 받지 못할 것이고 또한 종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되는 헛된 운명에 대한 죄책감에 내 몰린 것이다.
한편, 30은 또 왕권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그 기원은 한 달을 항상 30일로 정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세계에서 달 신의 숫자가 30이고 왕이 달 신에게서 왕권을 받았다고 선포하는 경우를 자주 읽을 수 있으며 기원전 7세기 말부터 100여년 동안 지속된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달 신은 바빌로니아의 최고 신이었다.
기원전 75년 로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저는 웅변술을 더 배우기 위해 키케로의 선생이었던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로도스 섬으로 떠났다. 에게 해를 지나가던 중 해적에 붙잡혔는데 해적이 몸값으로 20달란트를 요구하자 시저는 자신의 몸값을 50달란트로 올려 요구하라고 주장한다. 고대로부터 50은 주권을 상징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최고신 마르둑이나 엔릴의 숫자가 50이다. 장차 제국의 주권을 쥐게 될 시저의 몸값과 한 작은 지방의 왕권, 예수의 몸값 30과 비교되는 일화다)
유다에게 대제사장들이 정한 은 삼십도 이런 왕권의 상징성에서 찾아보면 유다의 언행을 이해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예수의 몸값으로 은 삼십을 정한 것은 예수공동체의 주인/왕권을 유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유다가 앞으로 예수공동체의 주인 행세를 해도 된다는 대제사장들의 암묵이다. 유다는 예수공동체의 주인 자리를 엿본 것이다. 유다는 은 삼십을 공동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은 삼십(왕권)을 주었다고 설득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잘못된 것을 파악한 유다가 대제사장들이나 로마 황제로부터 은 삼십(왕권)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 삼십을 성전에 돌려주겠다는 그의 생각은 예수공동체의 왕권을 예루살렘 성전에 주겠다는 말이다. 성전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예수/종의 몸값(왕권)을 성전에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대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거두며 ‘이것은 피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피 묻은 것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성전고에 둘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 공동체의 은 삼십(왕권)을 받지 못하겠다고 거부한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메시아)이 아니라는 뜻이다. 왕권으로 받은 은 삼십이 피 묻은 부정한 몸값이 된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 그래서 그 밭을 그 후 ‘피밭’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선지자 예레미야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마27:7~10)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스가랴서의 은 삼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백성을 돌봤다는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한다.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춤으로 그를 선동자로 몰아 산헤드린의 재판에 서게 만들었다. 그 대가로 받은 은 삼십은 피밭이 되었으며 선동자의 주권을 탐낸 헛된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에 피를 흘리며 죽은 예수의 몸값은 십자가 위에 붙여놓은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명기함으로써(마27:37) 은 삼십의 값어치를 한 것이다. 소/빌라도는 소 임자(로마황제)의 이름으로 종의 상전에게 은 삼십을 갚은 셈이다. 종의 새 상전은 누구일까? 예수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22)라고 성령이 예수를 대신해 그들의 상전 노릇(종의 새로운 상전)을 할 것을 말했다.
바울도 말한다. ‘여러분 사도들이여 양떼를 잘 보살피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떼 가운데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사도행전 21:29) 성령이 예수공동체 즉, 초대교회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유다가 노린 자리는 성령이 차지한 셈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예수에 대해 무리들이 조롱하며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하시겠구나!’(마27:43)라고 시편 문구를 인용하였는데,(22:8)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다.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으로 바로 시편 22편의 시작 문구이다. 시편 22편을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정황과 비교해 보며 음미해 보자.
시편 22편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무리들이 조롱하며 하는 말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하시겠구나!’와 정확히 같은 말이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예수는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마1:18)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산헤드린 재판관들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 처럼 떠들어대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힘을 묘사한다)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각자 차지할 몫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는 누가복음 23:34 구절과 상응한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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