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 춘길 선생님의 의로운 죽음>>
7월 10일, 전국은 심한 가뭄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특히 경남의 산청군, 밀양군, 하동군, 김해군 등은 가뭄이 극에 달해 논에 있는 벼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균열과 한해를 막고자 군장비가 동원되고 있었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다. 이 선생은 전날 오후부터 몸살 기운과 함께 몹시 피로하여 저녁 특별지도도 못한 채 하숙집으로 돌아가 밤잠을 설쳐서 그런지 영 몸이 좋지 않았다. 4교시 공작수업이 길어져 점심시간도 빼앗기고 말았다. 오후 2시경 이 선생은 학생들을 집으로 보낸 뒤 겨우 하숙집에거 싸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 뒤 소나무 숲을 찾았다. 고향집의 어머니가 해주시던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그리웠다. 발령 받은 지 5개월쯤 되니 체력이 좋은 이선생이었지만 쉴 틈 없이 지내다 보니 피로가 쌓이고, 집 생각을 하니 외로움이 물씬 몰려왔다. 어제 아픈 것도 아마도 그런 결과로 나온 것이리라. 갈수록 부모님과 누님 동생들이 그리워지는 게 몸과 마음이 다 약해진 것 같았다. 꾸역꾸역 밥을 먹은 뒤, 운동장으로 가니 이미 육상부는 집합해 있었다. 학교마다 몇 개의 운동부가 있어야 하지만, 시골에서는 아무래도 비용이 적게 드는 육상부를 만들어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육상부의 연습은 되었을 때였다. 교문 쪽에서 같은 반의 관덕 군과 성태 군을 비롯해 몇몇 아이들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그 반 아이인 최태성(당시 10세)군이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졌다는 것이다. 선생남은 이미 저수지를 알고 있었다. 육상부를 지도하면서 자주 뚜어갔다가 저수지 근처에서 몸을 풀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1964년 7월 10일 이날도 학교를 마치고 멱을 감으러 갔던 아이들이 겁도 없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두 아이가 물에서 헤어 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대책이 없는 아이들은 재빨리 학교로 달려온 것이다. 선생님은 비명과 같은 외침으로 그의 반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달렸다. 떻게 달렸을까? 얼마나 달렸을까? 아마 지금까지 그렇게 전력질주를 한 적은 있었을까? 오로지 연못을 향해 달리는 선생님 뒤를 몇몇 아이들이 뒤따랐다. 그 가뭄이 든 그날의 태양은 왜 그렇게 뜨겁게 대지를 달구고 있었을까? 그 먼길을 정신없이 달려간 선생님은 턱에 차 오르는 숨길을 채 가누지도 전에 애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고 이에 물을 먹고 둥둥 떠 있는 한 아이를 건져 올려 놓고 다시 한 아이를 구하려고 물에 다시 들어 갔다. 그러나 그게 이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선생님과 제자는 물 속으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 선생은 7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전력을 다한 질주로 제자를 구하겠다는 단 하나의 생각에 갑자기 차가운 물에 뛰어들면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의 바람이 완수되지를 못하고 차가운 물속으로 그의 제자와 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이 선생은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가물가물 검어지면서 그동안 살아온 스물 세 해가 시골의 낡은 영화자막처럼 흘렀다. 어린 시절 까맣게 그을린 진영 하천, 마산에서의 고교생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젊음을 어쩌지 못하던 대학시절, 무었보다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새 환갑을 앞둔 주름진 얼굴, 아버지... 교사로서의 이루고자 했던 그 순수와 열정의 꿈도 ..... 연못 주위에 있던 아이들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애들은 사라진 선생과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학교로 마을로 달려가고 몇몇은 연못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원래 그 저수지는 전부터 익사사고가 곧잘 일어나던 곳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수면 위와 수면 밑의 온도차가 크고 물도 꽤 차가운 편이었다. 그래서 수영을 좀 한다는 청년들도 섣불리 들어가지 않는 저수지였다. 특히 범방산(거북산) 동쪽 계곡에서 흘러내려 염못 밑바닥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은 여름에도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수온이 차가운 곳이었다. 이 선생의 사망의 원인은 심장마비였다. 준비운동만 돼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제자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일각 일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몹시 뛰어 온 탓에 피가 한 쪽으로 몰려 있었고, 갑자기 차가운 물에 뛰어들면서 피가 심장으로 가지 못한 채 마비를 일으키면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성생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바로 누군가가 건져 올렸다면 사실 수도 있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두 사제의 시신은 3시 30분 경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에 의해 발견 인양되어 학교 교무실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약 1시간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 온 태성군의 부모와 멀리 진영에서 달려 온 이 선생의 부모들은 가방과 책보를 배게삼아 싸늘히 식어 말없이 누운 주검에 얼굴을 파묻고 몸부림쳤으나 싸늘한 시신은 말없이 평온 할 뿐,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의 흐느낌만 7월의 따가운 햇살아래 온 학교에 메아리쳐갔다. 태성 군은 삼형제의 장남으로 역전에서 식료품상을 하는 아버지 최씨는 수금 나갔다 늦게나 소식을 듣고 달려와 통곡하다 "제 자식 죽은 것은 운명으로 돌리겠지만 독신인 선생님이 죽었으니 그것도 제 자식 때문에... "하며 꿇어앉은 채 말을 잊지못하고 이 선생 아버지를 붙들고 한없이 울기만 했다. "제가 아들 구실을 대신하겠습니다. 제 자식을 건지려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된 선생님이 못 다한 아들 노릇을 제가 하겠습니다." 주검이 안치된 교무실 뒤뜰에는 죽은 태성 군의 아버지 최갑준 씨가 이 선생의 아버지 이영수 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손목을 덥석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2대 독자를 잃어버린 이 선생의 아버지는 너무나 급작스레 밀어닥친 일에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되찾고 나서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흙과 더불어 60평생을 지낸 주릅 잡힌 검은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첫 봉급을 받아 봉투 째로 고스란히 갖고 "아버지 월급 받았습니다."하던 우리 춘길이가...."라는 말만 되내이며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올 가을 쯤 장가를 보낼까 했는데...."하며 땅을 치고 통곡을 하는 이 선생의 어머니는 끝내 실신을 하고 말았다. 이 선생은 그렇게 가셨다. 굶주리며 죽어 가는 어린이 앞에서 문학은 유효한가라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던 쌰르뜨르에 대한 얘기가 시끌벅적한 날, 페스탈로찌 꿈을 안고 교단에 섰던 한 젊은 교사는 이제 사랑하는 제자와 나란히 영원한 벗이요 스승이 되어 따가운 7월의 하늘로 날아갔다. 의로운 사람은 일찍 죽는가. 아니면 죽음으로써 의로와지는가. 고향 진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구포에서, 가뭄으로 말라 버린 이 땅에 몸 무지개로 떠올랐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 가슴 속에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던 바른 뜻과 용기를 일깨워 준 선 굵은 선택이었다. 죽은 아들을 정성스레 닦아내던 노모의 절망을 무엇으로 대신 할까. 다음 날(11일 토요일) 신문과 방송에서는 이 선생의 의로운 죽음을 살신성인의 미담으로 앞다투어 보도했고, 부산 시민들의 애도가 잇따랐으며 조의금도 많이 모아졌다.
<<선생님, 이대로 가십니까>>
장례식은 12일(일요일) 오전 9시, 구포초등학교 교정에서 유가족,학부형,문교부장관 대리, 문영환 장학관을 비롯 부산시장,부산교육대학장,경남도교육감,부산교육감 등의 조객과 전교 어린이 3000여명의 흐느낌 속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연일 비 소식이 없어 농부들이 안타깝게 했고 전날 신문과 방송에서도 일요일은 흐렸다 개인다고 하던 날씨가, 이날 아침부터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전교 어린이를 대신한 이차일(6학년) 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도 다정하던 선생님이 가시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선생님... 선생님... "하는 조사를 잃을 때 식장은 울음바다로 변했으며, 특이 담임을 잃은 3학년 4반 어린이들은 목을 놓아 통곡했다. 10시 30분, 6학년 어린이들의 추도가를 끝으로 식이 끝나고 영구차가 경찰 백차의 호위를 받으며 부슬비 속을 헤쳐 교정을 떠날 때 전교 어린이들은 "선생님 가시면 안돼요"라며 떠나는 차에 매달렸으며, 평소에 이 선생을 극진히 따르던 이모 군 은 땅에 딩굴며 "선생님, 저도 같이 갈 테에요!"하고 울부짖어 되살리지 못할 사제의 정을 더욱 애끓게 했다. 영구차는 낙동강 옆을 지나 당감동 화장터로 향했다. 친지들은 이 선생의 부모님 화장터에 가게 되면 위험한 경우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며 진영으로 모시게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뻔 했다. 부모에게는 아들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정지를 의미 헀다. 시간의 정지란 곧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미래를 차압당하는 부 모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진영으로가다 이 선생의 아버지는 구포대교 에서 뚜어내리려다 주위 사람들이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목숨은 건졋지만, 내리사 랑으로 키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에 대한 환영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하신다. 오전 11시경, 당감동 화장터에는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산 자들의 통곡소리로 가득했다. 이 선생의 영정을 앞세우고 화장터로 들어섰다. 그 곳은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이었고, 함께 살을 부비며 살아온 가족을 데려가고 재로만 남 겨지는 허무한 곳이었다. 생전에 스쳐지나가던 사소한 행동과 말 한마디마저도 고인 의 빈자리를 뼈져리게 느끼게 하는 가슴이 부서지는 공간이었다. 이 선생의 23년 열정과 사랑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23년의 생애를 가슴 아프게 마감해야하는 그 순간이었다. 그 의로운 육신은 한 줌의 재로 돌아왓다. 사람들은 당감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지상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담은 편지처럼 흐리고 고요했다. 어떤 말이나 흐느낌도 용납하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멀리 개구리와 까마귀의 울음소리만 이 이 고요를 깰 뿐이었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 치러지는 송별의식은 구슬픈 통곡보다 더 깊은 슬픔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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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삶, 밀 알 같은 삶>> 이 선생의 죽음은 모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가치다. 그으 죽음을 값지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지금 창 밖 화단에는 동백꽃을 중심으로 여러 봄 꽃들이 피어 있다. 목련은 비련의 여인을 떠오르게 하고, 매화는 지조있는 꼬장꼬장한 선비의 미소가 떠오른다. 모든 생명은 제각기 자기의 얼굴을 갖고 태어나고 소멸하는가 보다. 어쩌면 어떻게 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는가 인지도 모른다. 삶은 아름답지만 죽음은 고귀한 것이다. 꽃다운 삶을 밀 알처럼 살다간 젊은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리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의 죽음은 이제 풍성한 열매를 남길 것이다. 지금 구포초등학교의 소공원에는 순직비가 있다. 오늘도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저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순직비는 서 있다. 잊을 수 없는 멍들로 세워진 까만 돌이지만, 고 이춘길 교사의 순직비에서는 향기가 난다. 꽃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을 키울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의 진실된 사랑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칠 수 있다. 이 선생의 삶은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었고, 죽음으로써 참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이춘길, 그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여린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한 사람들에 대한 애달픔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할 정도다. 그래서 이 선생이 더 그리운 것일까. 자신을 낮추고 끝내는 자신을 버리는 제자에 대한 끊없는 애정과 더 없는 실천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사람,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리라 믿고 싶다. |
<<고 이춘길 선생님이 살아온 길>>
1941년1월20일 경남 김해군 진영읍 서부리 371번지에서 태어나다
1955년 2월 25일 진영읍의 대흥초등학교 졸업하다
1958년 2월 25일 진영중학교를 졸업하다
1960년 4월 19일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산에서 4.19혁명을 온몸으로 겪다.
1961년 2월 25일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다.
1964년 2월 28일 부산교육대학 2기로 졸업하다
1964년 3월 1일 구포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3학년 4반 담임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다
1964년 7월 10일 여름방학을 앞두고 거북산 동쪽 산밑에 위치한 연못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진 반 아이 최태성(10살 )군을 구하려다 심장마비로 순직하다.
1964년 10월 31일 구포초등학교 소공원에 " 이춘길교사 순직비 "를 세우다.
2006년 7월 10일 42주기 추모제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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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길 교사 순직비 ( 비문 )
불러도 대답 없는 이춘길 선생의 넋이 여기 어려 있다. 1964년 7월 10일 오후 3시 물에 빠진 제자를 건지려다 자신의 생명마저 바쳤다.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에서 농부의 이대 독자로 태어나 부산교육대학을 마치고 본교에 근무한지 다섯 달, 학생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한 청년 교사였다. 선생의 거룩한 죽음은 이 나라 교육자의 거울이 되었으며 몸은 비록 가셨으되 불멸의 정신만은 길이길이 우리의 가슴속에 생동하리라
1964년 10월 31일
부산구포국민학교 순직비 건립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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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길 선생님의 의로운 죽음에 대하여 발췌한 글이야.
1964년도 여름 우리가 구포초등학교 입학하기 한해 전이지.
그 당시 3학년 이었던 누나에게 들었어. 이 춘길선생님이 저수지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학교에서 저수지까지 달려가서 급한 나머지 단추도 풀겨늘없이 막바로 물에 뛰어
심장마비로 사망하셨다고 들었어. 그 당시 우리는 어려서 상세하게는 모르고 젊은선생님이
이 돌아가셨고 정말 안됐구나 생각했고, 그 뒤 학교 뒤편 연못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고 생각했지.
연못 뒤 편에 가서 많이 놀았고 특히 가을에는 예쁜 낙엽들이 많이 떨어져 가을을 느끼기에는
좋았어. 우리학교의 소공원이었고 우리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는 곳이었지.
중학교때까지 저수지에 가서 먹을 감았지만 저수지에 가면 구포사람들은 이춘길선생님을
항상 그리고 있었을거야.
지금도 구포초등 학교에는 추모비가 남아있지만 예전보다 그 주변 좋던 경치가 사라져버려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잊고 있었지만 추모제 행사는 매년마다 열렸고 지금도 우리 고사리같은
후배들은 이 춘길 선생님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기에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메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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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7기 추모제 기사 내용에는
2001년 7월10일 구포초등학교 소공원에서 37기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추모제 전부터 학생들은 고 이춘길 교사를 추모하는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 행사가 있었고
그 중 우수한 작품들이 소공원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들은 만국기처럼 실에 꿰어 공중에 달아 놓았다.
참석한 분중에는 이 선생님의 누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참석했고 당시 3학년 4반이었던
50회졸업생들이 매년 어김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부산교대총장과 선생님 친구분들도
참석을 하셨단다.
이미 환갑을 앞두고 있는 이 선생님의 누님과 여동생들에겐 아직도 눈물의 시간 일 뿐이다.
이날 모인 사람들의 눈엔 다들 " 젊은 피를 수혈하러 온 사람들 " 같았다. 배터리가
떨어졌을 때 충전하듯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지친 심신을 이끌고 와서는 아름답고 의로운
죽음을 통해서 다시 힘을 얻기 위해 모여 든 사람들 같아 보였다.
2006년 7월10일에도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42주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구포초등학교에는 입학하는 어린이들 우리들의 가슴에 선생님은 등불이 되어 우리들을
지켜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53회 졸업생도 추모제 행사에 꽃한송이 들고 찾아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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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당시의 아픔이 현재에 살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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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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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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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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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눈을 감아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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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린 콧물을 훔쳐 주시고, 신발을 찾아주기위해 내 손을 잡고 온 학교를 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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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었고, 물 만 들이키며 배고픔을 달래던 나에게 내 밀어진 빵 한 개, 그리고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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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슬픔에도, 거것에도 당신의 일처럼 눈시울이 붉어지셨던 선생님, 잔잔한 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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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으로 가슴에 여울져 오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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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을까. 당시 친구가 물에 빠졌다고 이 선생에게 알려 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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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인지 번호가 1964임을 알고 놀랬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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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영원히 잊지 말라는 무슨 암시가 아닌가. 올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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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구포초등학교 41회 졸업생인 서병배씨가 아들과 함께 참배하고 갔단다.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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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참 스승의 높은 뜻을 알려주기 위해 매년 참석을 했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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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배씨가 1991년 8월 30일 낙동강 신문에 실은 글을 실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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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한번 이춘길선생님을생각할수있는 소중한글잘읽었습니다 명식아정말로잘읽었다
부다손 덕분에 막연히만 알고있던 이춘길 선생님의 추모비에대해 자세히 알게되었네,그런데 친구니는 어떻게 그런거까지 알고있노? 한수의 기억력이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만 니 또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있네 다시한번 놀라울뿐이다
명식아 고맙다 다시한번 그분이 존경스럽구나 명복을 빌며
삭제된 댓글 입니다.
찐순아 내는 알지도 못하는 샘! 니는 등에 업히는 영광이 그런 만남이 있었다 말이제 니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