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달 오월에
황 금 찬
어디서 날아왔을까
이 찬란한 아침에
새 한마리
누가 말했는가
신록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오월 사람아
꽃잎으로 밀어 올린
영롱한 파도를 밟고
하늘 말은 달린다.
그가 돌아오는 뱃길인데
강마을에 마중인들 없으랴
어찌 노을이 손을 들어
인정의 바람을
막고자 하겠는가.
오월은 소리 없는 웃음
그 발길을 따라
산과 들엔 조용히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라.
이제 유월이 오기 전에
구름 같은
나의 연인아
문을 닫지 말라.
구 름
황금찬
구름아
네 이름의 의미는
자유롭다는 뜻이다.
모든 속박을 떠나면
너도 구름이 되리라.
오늘 같은 날은
최은하
가까울수록 안타깝고 조이며
머얼수록 가까워지기만 하는
나의 명암(明暗)은
해와 달의 비롯됨으로부터
끝마무리 거기까질까.
오늘 같은 날은
곱게도 사라지면서
끝끝내 스러지지 않는 종소리자락
그윽이 다시금 되잡듯이
지금도 울려퍼져 가고 있을
당신의 목소리
낭랑하기만한 목소리,
꿈결에서라도 실컷 취하여
칭칭 휘감고 싶다.
펼쳐 동인 자락 그 안에서
영 눈 감아 보고 싶다.
내 마지막 당신
처음인 당신이여.
꽃타령
최은하
꽃은 아름다워라.
누구라도 아름다워라.
빛 가운데서나 어둠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꽃은 눈부셔 어지러움 속
뉘라도 좋기만 해라.
꽃 중에 피 머금은 꽃
피 흘리는 꽃도 보아라
울다가 웃다가 시드는 꽃도 보아라.
꽃이야 내 꽃이 꽃이지
네 꽃이사 내게 무슨 형상이냐.
꽃밭에서도 먼저 핀 꽃은
누군가가 다투어 차지하고
그렇지 않은 꽃이면
저 혼자서 져버린다.
주위의 온갖 꽃잎 피는 소리 가득하고
내 안에선 꽃 지는 소리
꽃잎 지는 소리
내 눈은 꽃을 바라보다가
꽃숭어리만 들여다보다가
안질(眼疾)로 지내는 지 오래다.
그제사 은밀히 삭여 뵈는
나만의 꽃은 아름다워라, 역시나
누구라도 아름답기만 해라.
샘 물
황송문
내 가슴 속에는
발싸심하는 샘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모래알을 들썩이며
치솟아 오르는 샘물이
가슴 절절 흘러 넘쳐
수채도랑을 돌아가고 있다.
풀잎은 하늘에 떠가고
구름은 물밑에 흘러도
티끌 하나 없는
빈 마음……
샘물이 한여름을 흘러가고 있다.
사중주(四重奏)
황송문
참새들은 훈민정음으로 지저귀고
제비들은 알파벳으로 지줄댄다.
물새들은 사성(四聲)으로 오르내리고
앵무새는 히라가나를 흉내낸다.
훈민정음과 알파벳과
사성과 히라가나
지저귀고 지줄대고
오르내리고 흉내내고
참새들과 제비들과
물새들과 앵무새
그들의 악보는 전선줄
일본 남산대학 강의실
칠판에 오선(五線)이 있었다.
부 모
김년균
몸으로 만났으니
이 보다 더한 일 있으랴.
험한 길 놓지 않고
지극히 살아갈 일이다.
죽어서도 불빛 서린
그윽한 가슴으로
사 랑
김년균
온종일 곁에 두고
향기를 맡다가도
가지까지 꺾어다가
시렁에 걸었다가도
소슬한 바람에도
가엾이 돌아선다.
환절기 여행
이세연
언제부턴가 시려오는
뼈마디햇 살 밝은 집으로 이사를 해도
어느 봄에 스며든 바람이
관절마다 서릿발 돋는다.
거울에 낀 먼지 닦으며 지켜온 방
새 가구로 단장해 보지만
그대, 비워진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어둑어둑한 날이면
무표정으로 서성이는 시간 길어지고
혼자만의 길로
준비 없는 여행을 나선다.
오랜 동안 접었던 날개
한꺼번에 풀어져 바람 일으키고
위태로이 비탈에 섰던 나무도
혹독한 겨울 버텨내더니
부러진 가지에 새잎이 돋는다.
이른 새벽에 나선 걸음
하루 내 드넓은 초원을 거닐다가
강줄기 따라 바다에 이르러
활활 타오르다 꺼져가는 노을 보며
다시금 떠날 일정을 구상한다.
목련꽃 지는 날에
이세연
너를 처음 만난 건
지름길 찾아 헤메던 이른 봄날
막다른 골목에서였지.
제 그림자에 쫓겨 마구 달리다가
낯선 돌담에 기대어 가쁜 숨 몰아쉬었지.
담장 너머 기척에
둘러보니 너는 등 뒤에서
눈부시게 웃고 섰었어.
그 날 담아 온 노래
하루에도 몇 차례씩 따라 부르며
남모르게 웃는 연습을 했지.
어디에 서 있어도
네 환한 얼굴 자꾸만 떠올라
거리를 걷다가 뒤돌아 보게 되고
어둠 속에서도 두리번거리곤 했어.
겹겹이 껴입었던 스웨터를 벗던 날
가차이 다가서려다
세찬 봄비에 그만 돌아서고 말았지.
잎새에 빗물 마른 뒤
마냥 높아지기만 하는 하늘
혼자서 휘젓고 있었지.
돼지 머리
김기덕
숫돌에 물을 끼얹어 칼을 갈던 저승사자 시퍼렇게 선 칼날 동녘에 비춰보다 회심의 미소 짓고 다가와선 능숙한 솜씨로 목에 칼을 꽂는다. 외마디 비명 속에 함지박 가득 선지피 쏟으며 구멍 뚫린 목구멍 헛바람 새던 고통도 잠깐 우리에 갇혀 식탐만 한 짐승의 목숨 달빛에 내려놓고 가마솥 펄펄 끓는 물에 이승의 검은 때를 벗는다. 피둥피둥 살이 찐 허연 몸뚱이, 먹성 좋던 배를 갈라 냄새나는 창자들 순대 국으로 내어 주고 빈둥빈둥 놀고먹은 죄 값에 간도 쓸개도 다 빼어 주고 밥 한 톨이라도 더 차지하려 피 터지게 싸워 영양을 채운 살과 뼈 남김없이 배고픈 이웃들에게 보시한 후 머리만 남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상에 올라 웃는다. 웃고 죽은 돼지는 복도 많다고 콧구멍에 푸른 지폐 꽂으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배 터지게 먹고사는 일 동티나지 않게 하소서 머리 숙여 절하는 사람들 향해 다 버려야 얻느니라 부처의 미소로 웃는다.
샘 물
김기덕
하늘 모시고 사는 우물에
밤새 꽃가루별들 쏟아져
은하수 남실남실 뜨면
물 항아리 넘치게 여 날라
세상 반짝이며 우려진 은별들
가슴 환하게 쏟아 붇고
물동이 넉넉함으로
빛을 나누며 살게 하신 어머니
꿀같이 달던 물맛에
하늘 다 껴안고도 남을
당신 품이 그리워
오늘도 이 샘가에 와
물병 가득 꿈을 채워 갑니다.
사랑의 끈
최창일
두개의 감정을 묶는다
묶여 있는 동안 감정은
허리에 오색 구슬을
두른 것처럼 아름답다
어둡던 골짜기가 밝아지고
바다 속이 환희 뒤집히기도 한다
아주 깊고 편안하다.
네 말에 진실이 담겨 있으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
요동을 친다
늘 살갗이 패이도록
서로를 묶는데 노력 한다.
잠든 늪에서
태양을 향한 기지개를 켠다
네 손에 장미의 아름다움은
언어가, 숨소리가 들려 있고
내 가슴엔 흰 백합이 피어난다.
우주적 감각과 연민(憐憫)에서
한 쌍의 춤추는 나비가 되고
서로의 깊은 데를 응시하면서
봄날의 깨달음
최창일
젖은 벚꽃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날
심장의 고독도 달라붙습니다
물소리 숨죽이는 강변에 나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 떠밀며
늙은 역무원이 흔든 붉고 푸른 깃발의 열차에
나의 고독 보냅니다.
흩뿌리는 봄비, 마음을 씻어 내리며
지난 시간의 우울과 고독을,
훌훌 벗어나고파 새로운 깨우침과
빛나는 얼굴 떠 올립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이 고독인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고독도 사랑한다면
네 발자국 소리가 얼마나
소중스럽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봄의 햇빛 들이 호수위에 몸을 던지듯
당신의 마음을 나의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
지고지순(至高至純)인줄 알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누구를 가두는 것도, 갇히는 것도
아님을 이 봄, 알 것 같습니다.
내 안의 빈 의자로 남겨 놓는 것은
외로움도 고독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찾아 올 이를 위해
기다림은 여유로움 이었습니다.
불가마 사우나
지창영
사람도 때로는 녹아야 하는가 보다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처럼
일상의 누더기 훌훌 벗어 던지고
가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곳
태초의 바다처럼 떠도는
자욱한 안개 속에
고개 숙이고 반성하는 이
때로는 우러러 다짐하는 이
토굴 속에서 면벽 수행하는 이
피와 땀과 눈물 녹아내리면
덕지덕지 붙었던 녹은 떨어져 나가고
붉게 달궈진 새 몸들이 빛난다
맨몸으로 부둥켜안을 그 날
다시 옷 입지 않을 그 날을 꿈꾼다.
개심사(開心寺)에 올라
이오장
문을 열어라
여기는 사방으로 열린 땅
구름 한 조각 머물지 않고
연못에 내린 하늘 더 깊이 잠겨
내려다 뵈는 들녘엔 초록이 넘친다.
수선화에 물든 바람 종루를 돌아 나와
매화꽃잎 휘날리는 언덕에서
너의 빗장 언제 열리는가
산벚나무 그늘 아래
이름 모를 꽃송이와 작은 풀잎
울긋불긋 솟아나 나풀거리고
골 따라 흘러가는 개울물
맑은 소리 내지 않느냐.
머리 들어 크게 웃어라.
꽃 진 자리마다
움트는 새잎이 허공을 수놓아
말문 트는 봄날
너는 어떤 소리 듣는가.
어둠 지워내고 밝아오는 산정
종소리는 산 너머 멀리멀리 퍼져가고
피어오른 가지마다 눈이 부신다.
※개심사 :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 있는 절, 백제시대에 창건됨.
폐선을 위한 노래
이오장
파도가 그립구나.
밤새내 바라보던 별 찾아
아침을 잊어버린 나에게
곡주*의 모야줄* 풀어주고
얼어붙은 발등 녹여다오.
엊저녘 어둠 속에서 걸음 내딛다가
한 발짝 가기 전에 묶여버려
날으는 새 한마리 부르지 못하네.
깃발 나부끼며 물살 가르던 기억 역력하고
뱃전은 갈라진 채 녹슬어
파고든 바람결에 부스러기 날리네.
찾아든 발길 어지러운 포구에
만선의 풍악소리 들리지 않고
목쉰 갈매기 닻줄에 앉아
저녁노을 맞는 겨울 날
나를 밀어다오 밀어내다오.
훤히 보이는 바닷물에 나설 수 있다면
수평선에 닿지 않아도
오색 깃발 휘날리리.
징소리 내어 막힌 귀 열어놓으리.
* 곡주 : 부두에서 배를 묶는 기둥이나 말뚝.
*모야줄 : 배를 포구에 정박시키는 줄.
부 부
유회숙
장미라고 해두자
장미가 아니면 또 어떠랴
서로가 모르는 사이라
가까이 다정하다
한 지붕 아래
피고 지는 꽃으로 문패를 단다.
바람 많은 날
서로에게 스미어 꺼지지 않는 등불
장미 가시 무디어지는
그 뿐이면
장미라고 해두자
장미가 아니면 또 어떠랴.
피고 지는 꽃으로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을 다스리는 일
바람 바라보는 일
삼월의 문자 메세지
유회숙
작고 가벼운 소리
봄이 눈을 뜬다
꽃샘바람 나란히 앉은 의자
나이테에서 강물 소리 들리고
강물 넘치는 소리
속이 울렁거리는 날은
한그루 나무가 될까.
가지를 뻗고 잎이 나는
푸른 물이 들도록
읽고 싶은 책 지치도록 읽을까.
탁구공처럼 튀어 오르는
작고 가벼운 소리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
두부 장수 방울 소리
아이들 울음소리
안과 밖이 소통하는
새의 부리 같은 손끝으로
톡 톡 토도독 톡톡톡
꽃씨 터지 듯
개나리 꽃 무덤 아래 별이 돋는 소리
작고 가벼운 산란을 꿈꾸는
봄은 하냥 수다스럽다.
거울을 보며
김혜경
집안 대사를 연달아 치루고 난 뒤
모처럼 한가로이 거울 앞에 앉으니
미간에 실금이 눈에 띄었다.
모르는새 흠집이 생겼나 하여
황급히 문질러 보았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실금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갔고
자고나면 다른데도 늘어갔다.
인적 없던 곳에 차츰 길이 나듯이
지내온 날, 부스러기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얼굴에 드러난 길
후미진 골짜기와 바람맞이 언덕
그늘진 구석에서
이제야 발 뻗고 쉬는 허깨비를 본다.
발이 편한 적 없던 나는
오랫동안 가둬 놓았던 이들
이제야 빗장을 열고
발자취만으로 생겨난 길 따라 함께 걸어가야 겠다.
체 내리던 날
김혜경
새파란 댁이 무슨 일로 이리 단단히 막혔누,
'체 내리는 집' 할매가 등을 쓸어주며
중얼중얼 거린다.
막힌 고랑창 속 훑어 내리는 품세가
대물린 약손이다.
팔자치레 못하여 분해서 그렇지요
활명수와 소다 한 봉지 받아들고
휘청이며 돌아오는 길
서쪽 하늘이 성난 들불처럼 타오른다.
나라에서 폐광령 내린지가 십여 년인데
노다지 찾아 떠난 지아비 돌아오지 않고
미루나무 같이 자란 아이들과
선잠으로 기다리던 문에
닳아빠진 돌쩌귀만 남았다.
옆집 살던 어리보기 양순네가
용한 촛불무당이 되었다던데
오늘은 달려가 징 두드리며
나도 어우러 푸닥거리 한판 벌리고 싶다.
안개밭에 달빛 내리면
오정수
불볕더위 속 새까만 얼굴들
경운기마저 지쳐 틀틀 거린다.
산그늘이 논두렁 덮으면
진흙 묻은 장화를 끌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어느새 창문에 하나 둘 불빛이 비추고
개구리 울음소리 더욱 자지러진다.
밤안개 둘러싸인 동구 밖
삼거리 주막 문턱에 주저앉아
골프가방 맨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재작년 골프장 공사 때
일당 오 만원과 맞바꾼 철이네 목숨
그 가족이 마을을 떠난 후
산자락 무덤 속에 함께 묻어버린 기억들
안개밭에 달빛 내리자
주막주인 재촉을 받고서 한참만에야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사람들
옛 봄이 아닌 봄
오정수
입춘이 지났는데 찌푸린 하늘
봄이 오다 멈췄는지
포크레인 걸쳐있는 산등성이
온통 붉은 토사 흘러내리고
개나리 진달래도 흙더미에 묻혀버렸나.
동구 밖 개천에 머뭇거리는 봄
송사리 떼 떠난 지 오랜 물가엔
지난 장마에 쓸려온 쓰레기 뒤엉켜 있고
늙은 두꺼비 한 마리 수문을 지킨다.
주막거리 한켠
탁배기 잔 앞에 시름 젖은 촌노들
거름기 가신 논밭 바라보며
다가올 모내기에 깊은 한숨 뿐
이젠 봄도 옛 봄이 아닌지
언제 적인가 제비가 넘나들었다던 강남
빌딩 숲 사이 화단엔 벌 나비 날아다니고
봄옷 차린 여인네
분주하게 거리를 매운다.
잎 새
송선애
마지막 잎새가 말한다
거미줄에 매달린 채
소슬바람에도
한 가닥 희망 놓치지 않으려
어지러이 돌고 있다고
부질없이
이승과 저승 사이로
인연의 끈들이
마지막 춤을 춘다고
몇 가닥의 바람과
몇 번의 태풍을 맞으며
몇 줄기의 햇빛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던가.
이제는 거울 앞에서
세마포 단장하고
회한을 바람에 실어
회항(回航)하는
마지막 잎새라고
책갈피에서
송선애
2500만 년 전
미루나무 잎 화석이
책갈피에서 웃고 있다.
시간을 정지시킨 화석은
침묵의 자물쇠를 풀고
미색으로 가슴을 뜨겁게 한다.
아득한 기억을 더듬고
우주의 언어를 낙하시키듯
천상의 별똥별 떨어진다.
못
이병훈
무수히 두들겨 맞고도
야무지게 벽을 붙들고 있는
그의 목에 액자를 걸었다.
힘든 목덜미를 숨기고
평생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신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빗맞은 망치에
시퍼렇게 멍든 손톱이
단단한 벽과 못 때문이라며
투덜거리던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액자 뒤에는
아버지의 근엄한 침묵...
모진 세파에 시달려도
평생 보여주지 않던 속앓이
못이 빠지면 허무한 공간
당신의 빈 자리가 허전하다.
멸 치
이병훈
끓는 물속에서도
유영(游泳)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바다를 못잊어 함인가.
진한 간장에, 매운 고추장에
마른 몸 버무려질 때 거친 숨소리
들끓는 프라이팬 속에서도
미동하지 않고 열반에 든다.
갈증으로 말라가던 오후 햇살에
생의 비린내마저
채반에 사로잡히다가
은빛 비늘로 온전하게 떠나간다.
긁어낼 필요 없는
시커멓게 타버린 내장
허황된 속세를 끓이고 볶으면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맛
시린 관절은
틀림없던 어머니의 일기예보
골다공증 걸린 뼛속으로
무제한 통행하던 바람이 멎는다.
산길에서
김명숙
이슬 맺힌 숲길을 걸었어
연둣빛 나무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햇살이
포근히 감싸주었지.
그대 그리워
호젓한 산길 찾아 걷는 거야
찬란한 의식으로
뵈이는 건 네 모습 뿐이야.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
사방을 둘러봐도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어.
꽃들이 환히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어.
대꾸할 말을 잃어 고개만 끄덕였지.
바람에 휘젓는 꽃잎
귓가엔 갈채소리 가득했어.
5월의 들녘에서
김명숙
5월의 햇살 아래
허릿살 드러낸 보릿대가
푸르게 남실거린다.
풀 비린내 풍기는 언덕에 오르니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난다.
물기 오른 나무는
여린 싹을 키워내고
바람은 아카시아 꽃잎을 날린다.
푸르름의 들녘
한가로이 풀 뜯는 황소의 등 너머로
온갖 들꽃 환하게 웃어대고
어디선가
보리피리 소리 들려온다.
초토(焦土)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내 안에 영원이
구 상
내 안의 울 속에서
밤낮없이 으렁대는
저 사나운 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먹이라도 보았는가?
오늘은 길길이 뛰고 있다.
Ⅱ
내 안의 바다 위를
정처없이 표류하는
저 닻없는 쪽배의
기항지(奇港地)는 어딜까?
파도가 거센가 보다.
오늘은 몹시도 흔들린다.
Ⅲ
내 안의 허공 속을
끝없이 나래 펴는
저 파랑새의 꿈은
언제 어디서 이뤄질까?
불멸의 그 동산을 그려본다.
영원이 오늘은 내 안에 있다.
봄 빨래
구 상
보리밭 옆구리
수양버드나무가
강에다 머리를 감는다.
햇발이 물밑에서
금모래로 아른거리며
머뭇거리고 흐른다.
땅속에서 갓 나온
청개구리들모양 엎드려
마을 새댁과 처녀들이
봄 빨래가 한창이다.
철석 철석
딱딱, 쭈룩, 쭈룩,
마칭 흰 떡을 치고
주무르듯 하며
짹 짹, 종알 종알,
캬들 캬들, 캑 캑,
힝힝, 해해들이다.
말띠 딸을 낳고 시아버지에게
눈치가 뵈던 얘기,
극성맞은 시어머니 얘기,
시큰둥스러운 학생 올케의 얘기,
휴가 왔다 간 남편 얘기,
○○당(黨) 망나니 얘기,
아롱진 저 정경 속엔
청상과수의 수틀처럼
아직도 서러운 사정들이
얼룩져 있다.
달밤 2경(景)
구상
1
달이 으슥한 우물 안에서
철렁 철렁 목욕을 하다
두레박을 타고 올라와
질옹배기로 흘러 들어간다.
이번엔 햇바가지에 담겨
새댁의 검은 머리채 위서부터
보얀 등허리와 볼록한 앞가슴을
미끄러져 내려
빨랫돌 위에 산산이 부서진다.
달로 씻은 육신은 달처럼 희다...
노란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추들이
얼굴을 더욱 붉힌다.
어느새 중천(中天)에 다시 올라간
달을 쳐다보고
박덩이가 쩔쩔매며
넝쿨 뒤로 숨는다.
꽃밭에서 이를 바라보던 봉선화가
너무나 재밌어 꽃잎을 떨구며
눈에 이슬이 단다.
2
강에 달이 둥실.
강낭밭에 그림자가 바삭 버석.
마당의 모스모스가 너울 너울.
뒤란에 장독대가 빙.
지붕 위에 박넝쿨이 살살.
기 도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 구상(具常) 약력
본명 : 구상준(具常浚)
1919년 함경남도 문천 출생 (2005년 몰)
1941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종교과 졸업
1946년 동인지 『응향』에 시 <길>, <여명도>, <밤>을 발표하여 등단
1947년 『응향』에 게재된 작품으로 소위 반동 작가로 낙인되어 월남
1957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86년 『구상 시전집』 간행
시집 :『구상 시집』(1951),『초토의 시』(1956),『까마귀』(1981),『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1982),『드레퓌스의 벤취에서』(1984),『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984),『구상 연작시집』(1985),『구상 시전집』(1986),『삶의 보람과 기쁨』(1986),『개똥밭』(1987), 『유치찬란』(1989)
■ 다시 찾아 읽는 글(수필)
오해(誤 解)
법정(法頂)
세상에서 대인관계(對人關係)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誤解)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理解)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不變)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자유(言論自由)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他人).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事物)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작용(伸縮作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하니까 우리는 하나의 색맹(色盲)에 불과한 존재. 그런데 세상에는 예(例)의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종단(宗團)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事務僧)이 내 안면 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實相)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眞理)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中央日報, 197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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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발표작품
제235회 시낭송 작품모음{2005. 5. 7 (토) 대학로 [상상]연극 극장}
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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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1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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