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꽃동네를 다녀와서
밤비가 내린 아침마당에 안개가 자욱히 드리워져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 왠지 쓸쓸함과 그리움이 밀물처럼 찾아듭니다. 불현듯이 고향에 계신 어머님 생각에 젖어 봅니다.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밀려옵니다.
유난히 자식사랑에 깊은 정을 주셨던 어머니 당신에 대한 사랑을 이만큼 어른이 되서야 알 것 같습니다. 뒤늦게 철드는 것 같아 민망함이 더해 집니다.
철없는 저는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1년에 한 두번 찾아뵙는 정도로 무심히 지나쳐버린 제 자신을 깨닿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음성 꽃동네를 찾게 되면서부터입니다. 꽃동네에 관한 얘기와 제가 직접 경험하고 보고 느꼈던 감정들을 진솔하게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호계동 성당의 도움을 받아 15명의 우량 재소자와 함께 음성 꽃동네 사회견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리 마련된 관광버스로 승차하여 오전 9시 40분경 꽃동네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나는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다 깊은 상념에 잠기었습니다.
항상 폐쇄된 소집단 사회에서의 단조로운 생활과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안목이 결핍되어 있는 터라, 이 사회의 구성원인 저 역시 담 밖의 정경은 활력이 넘치고 있음을 실감하는데 10여년 이상의 수형생활을 하는 재소자들은 더욱 이 사회의 발전상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 적응력을 위해서라도 사회견학은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해봅니다.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 한가로운 전원을 벗하며 음성 꽃동네에 도착 하였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숲 속 사이로 여기저기 흩어져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이 왠지 적막하게 보여 낯선 타국인양 어색함이 느껴졌습니다.
입구 표석에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성경구절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으며 내마음의 잔잔한 호수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꽃동네는 약 30년 전 오웅진 신부가 거지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남으로 해서 출발 되었다고 합니다. 최 할아버지는 힘없고 병든 거지들에게 밥을 얻어다 먹이고 다리 밑에 거적으로 천막을 치고 그 들을 보호하는 최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오신부가 이곳이 내가 헌신 봉사 해야 할 곳이라고 깨닫고서 소명처럼 다하여 꽃동네를 이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처자식이 없는 무의탁자 및 심신지체부자유자등 2,000명이 수용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는 약 20만 명의 행려자가 길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IMF이후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들까지 합친다면 진정으로 보호 받고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런지요.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이고 오고 갈 곳이 없는 노쇠하고 병든 행려자들을 위해 봉사 하시는 수녀님을 비롯하여 꽃동네 관계자들의 진지한 삶의 모습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습니다.
이사회가 물질만능과 이기주의로 점철되었다 하나 아직도 우리사회는 이처럼 헌신적 사랑을 베풀며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선한 사람이 있기에 이 사회는 양심과 정의가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저는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위해 베푼 것 보다 세상이 저한테 베푼 것이 많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어려울 때마다 따뜻하게 내미는 착한 이웃들의 위로와 손길, 어쩌면 제가 세상을 향해 투정하는 동안 저의 착한 이웃들은 자신의 짐 위에 또 저의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들인지요.
처음 꽃동네에 수용된 자들의 성격은 한결같이 지나치리 만큼 이기주의로 병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버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쉽게 동화할 수 없었던 그들이지만 수개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가슴 깊은 곳에서 새싹이 돋아 나듯이 태동하더라고 전해 줍니다.
이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불편한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 마음 한구석엔 이들의 사랑을 깊이 잊혀지지 않게 새기며 가슴앓이를 한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은 병든 육신 밖에 없으므로 마지막 남은 육신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장기와 안구 등을 기꺼이 기증하는 유언이 많다고 합니다. 이 사회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과 은혜를 그들은 이렇게 다시 보답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그곳 관계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사뭇 머리기 숙여졌습니다. 나는 과연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왔던가, 남에게 봉사하며 나눔을 실천해 왔었던가를 새삼 되새기게 했습니다.
꽃동네가 설립된 이래 2,400여명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한결같이 자신들의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평안히 세상과 작별한다고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 떠나는 그들의 눈에 천국이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몇 년 전의 일인데 군부대에서 사회봉사 활동차 나왔던 한 군인 한명이 이곳에서 자기의 친 할머니를 발견한 일이 있습니다. 그 군인은 즉시 고향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할머니를 당장 모시지 않으면 저 역시 부모님을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여 그 젊은이의 지혜로 할머니가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찡하게 울려 퍼졌답니다.
우리는 이경숙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 심신지체부자유자가 있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손발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항상 누워있는 상태로 남이 대소변을 받아 줘야만 하는 인간 배영희씨를 만났습니다.
정말이지 그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해 맑은 웃음을 보이는 모습에서 무척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그의 몸은 가눌 수 없지만 아름다운 소망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따뜻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 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 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라는 이 시는 배영희씨가 쓴 작품인데 시에서 보듯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새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건강한 육신을 갖고서도 무엇이 부족하여 바른길을 걷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가 묻고 싶었습니다.
꽃동네를 찾은 우리들은 아마 이심전심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해본 소중한 시간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소중함,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가치 있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왔을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부모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느끼게도 했고 꽃동네 방문은 인생의 절반이나 더 산 나의 심상에도 큰 느낌과 깨달음을 준듯해서 적이 뿌듯했습니다.
고향의 어머니께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매일. 아니 매일, 몇차례식이라도!
첫댓글 재소자와 함께 꽃동네 견학은 많은 의미를 부여 하게 되는 계기 일 것 입니다.. 저도 꽃동네를 다녀오면서... 이런 희생자가 있기에 세상은 돌아간다...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