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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 - 영혼의 춤, 혹은 식물성의 신화 곽재구(시인)
선운사 동백꽃
일부 동시대 화가들의 미술운동사적인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감응력이란 측면에서 나는 늘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일정량 이상의 자유와 추억의 아름다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의 경멸감 같은 것을 지니지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안개바람
고정관념의 틀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벽면에 걸리고 작업장 구석구석에 쌓인 그의 그림들은 내게 펄럭이는 '춤'의 의미로 다가왔는데 그 '춤'은 영혼을 울리는 시나위 가락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푸른바람
문을 네 개를 통과해야 한다 어두운 계단의 문 복도의 철문 나 혼자만의 방문 그리고 화실문 그림을 그릴 때는 이 모든 문을 닫는다 어떤 때는 여기서 죽어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희원의 <자취일기> 부분
시집 한 권 분량 이상의 원고를 읽는 데 이십 분이 채 안 되었을 듯하다. 그의 시편들은 예외 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웠으며 그 자신 충일해야 할 예술혼의 갈등과 고통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편들에 '식물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었는데 물론 그것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붙이고 싶은 수식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여, 더러는 영등포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거나, 아침 저녁 출퇴근 하는 지하철에서 신물나게 시달림을 받거나, 아니면 한때의 허망한 꿈으로 동해안과 서해안을 가리지 않고 땅 사재기에 나선, 그도 저도 아니면 스물댓평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밥도 국도 영화도 어쩔 수 없이 사양했던 그 무수한 별들이여, 잠시 일손을 놓고 한번 한희원의 그림 보기에 나서지 않겠는가? 거기 그대들의 별이 어떻게 반짝이는지, 가서 여윈 그 별의 볼을 한번 쓰다듬어 주지 않겠는가?
한희원의 첫 개인전에 부친 시인 곽재구의 글. 그의 기행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에서
한희원의 10번 째 개인전 팜플릿
철길에서 본 양림교회에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살다 돌아왔을 때 가슴 속에 담아둔 그리운 모습들이 사라지고 온통 새로운 건물, 거리만을 보게 되었을 때의 공허한 마음은 누구나 한번 쯤 느껴본 심정일 것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부친 김창국 목사가 시무했던 양림교회의 옛모습
'햇빛이 드는 숲'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양림동은 언덕과 교회, 오래된 나무와 낡은 골목길이 있는 마을입니다. ...사직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수없이 서 있었고 양림과 방림동 사이로 지나가는 철길은 끝없이 걷는 우리들의 꿈이었습니다.
곽재구 시인이 90년대 시를 썼던 불로동 적산가옥의 불빛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쌍무지개도 교회가 있는 양림언덕에서였습니다.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의 모델이 되었던 남광주역사도 수많은 애환과 그리움을 남기고 허물어지고 그 철길도 사라졌습니다.
타오르는 강 - 웅보의 상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끝없는 공허감, 도저히 편입할 수 없는 도시의 생활, 다시 찾튼 고향이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댐 속의 마을을 보며 울부짓는 징소리, "장성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저 호수의 물이 수몰민에게는 무덤이다."고 소설가 문순태님은 말합니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새벽이 되면 보성, 벌교에서 오는 시골장꾼들의 삶의 모습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의 흔적들이 남광주역에는 스며들어 있었다. 이 낭만적인 역사는 도심철도 이전계획에 의해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양림과 방림동 사이로 지나는 철길도 사라졌다. 언젠가 이곳을 찾았을 때 이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저녁무렵이면 시인들이 모여 시낭송회를 하고 이름없는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화가들의 작은 전시회라도 열리면 정말 살아있는 문화 공간으로 살릴 수 잇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희원
1955 광주출생 조선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사다리전, 목판화4인 초대전, 임술년전, 오월전, 찾는미술장터전, 광주목판화연구회전, 전라도사람들전, 코리아통일미술전, 오늘의 지역작가전, 시인김남주추모그림전, 수원화성아트페어전, JAALA전, 섬진강연어사랑전, 독도사랑전, 무등회대작전, 바람을따라길을걷다전, 별,바람,나무와시전...
epilogue
한희원샘이 순천여상 미술교사로 있을 때 평교사협의회에 참여하여(문화부장) 창립 날 "불길도 헤치고 물길도 헤엄치고 가시밭길 돌무덤 바위산을 뚫고서~" 노래를 선창하며 지역결성대회의 서두를 열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강남, 매산, 금당, 효천, 여상, 남상, 기계공고의 여러 벗들 많이도 웅성거렸고... 차암 세월이 무심하다. 한희원과 나는 그러나 훨씬 더 긴 인연이 있었다. 그니까 우리 만남의 시작이 열아홉살 근방일 터이니... 그 세월은 또 얼마나 아득한가! 서로 머잖은 거리에서 이리도 섞였다 저리도 빗나갔다, 길에서 만났다 광장에서 헤어졌다, 조리도 그렸다 요리도 그리며 또 이렇듯 우리 카페 벽걸이에서 또다시 그의 그림을 만나게 된 것. 양림동은 나에게도 '손금'인데, 지금의 기독병원(제중병원) 아래 속칭 흙구덩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한희원관 양림 웃교회 아랫교회하며 살았던 셈. 피아노를 잘 치며, 매형이 '밤을 잊은 그대에게'로 유명한 자정 무렵의 인기 라디오 프로의 '서수옥' 님이라 했던가... 또 태권도 유단자인 것 등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여천에서 순천금당고로 올 때 전교협이 뜨고 그는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교육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한 일도 있었다. 난 그길에 전교조로 치달아 해직되었고 다시 복직할 무렵 그는 교직을 그만 두고 또 전업작가로 나섰다. 곽재구는 내게 복직을 버리고 함께 그림도 그리며 계속 '놀자' 꼬였는데 가만 보니 가정형편이 아닌 것 같아 들여보내고, 한희원을 붙들어 이후 둘은 시샘나게 함께 싸돌아다녔다. 숨바꼭질도 같고 장난도 같은 우리들의 '어긋나기'는 광미공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내가 열심을 내면 그는 사라지고 그가 판을 벌이는 데는 내가 없었다. 우리는 몰라도 뭔가 서로가 조금 어려운 사인가 보다. 한희원은, 말 수가 적고 성품이 어질어 장터 민중에서부터 글로벌 백성으로 나가는데 참 근면하고 부지런한 화가이다. 근성은 필경 그를 이끄는 내면의 힘으로 끝없다. 그것이 외로움이든 그리움이든 사랑이든 절망이든 안타까움이든 분노든 깨달음이든 무어든.. 저렇게 촉촉하게 우려내어 우리를 깊은 안개에 젖게하는 재주는 오직 한희원에게서 만 나오는 것이니 어찌 이 인물에 감동하지 않을까. 2007. 3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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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희원님도 감동적이지만 김진수님은 더 감동적입니다. 그림이 글이 찡하네요!!! 두분 모두 아름답습니다.
양림동은 저에게도 친근한 곳이지요 여고시절 양림동에서 언니들과 자취했거든요 안개가,바람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들이며 대합실 그림도 참 좋네요
한의원선생님의 그림도 좋아하지요.....김샘 그림이랑은 다르지만. 착해서 나오는 그림일거야..생각해보며. 두분의 인연을 상상도 해보며. 가을을 지내고 있습니다